시를 읽는 벤치

'나는 아무것도'의 이야기

강용준 2013. 6. 15. 19:56

 

 

 

          ‘나는 아무 것도’의 이야기

                                                             

                                                             오정국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머리 위로 구름이

흘러왔다.

책갈피를 펼치면

왜 여기에 밑줄을 쳤을까 싶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깜깜한 밤이 오고

불붙은 기차가 벌판 끝으로 사라졌다

 

한사코 철망을 넘어와서 흔들리는

장미들

 

장미의 이름을 부르면 장미꽃이 피어났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희고 붉은 꽃잎이 피었다 지곤 했다

 

나는 아무 것도 그리워 하지 않았지만, 덩굴장미가 담장

저쪽으로

넘어갔다 담장 밖의 땡볕을 견디는

장미 줄기처럼

나는

 

마당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발밑의 수맥들이 빠르

게 흘러갔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철길이 철길을 끌고 오고

구름이 구름을 불러오고,

장미 덩굴이 장미 덩굴을 밟고 오는, ‘나는 아무 것도’라

는 이야기.

불타는 기차 바퀴와 오래 참고 견딘 돌맹이와 덩굴장미

에게 빌려온 이야기의 잎사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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