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치명적 농담
깨달음이란 본래 없는 것인가
- 붓다의 치명적 농담
나는 가톨릭 신자지만 요 몇 년은 불교에 관한 책을 주로 읽었다.
조선 시대 어느 스님에 관한 작품을 쓰려고 하니 사상적 배경이 되는 불교를 이해하지 않고는 쓸 수 없기에
불교 공부를 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입문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유교 경전, 불교 소설, 수상록 등 불교에 관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가운데 최근에 읽은 책이 「붓다의 치명적 농담」」이다.
불교 신도들에게 불교를 가장 잘 이해하려면 어떤 책을 보는 게 좋겠냐고 했더니 두어 명이 금강경을 추천했다.
처음에 금강경을 접하고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천 년을 이어온 하나의 사상 또는 철학을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금강경은 원래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금강석(다이아몬드)이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단단하고 완벽한 지혜(반야)로 번뇌를 끊어 피안(彼岸:바라밀)에
이를 수 있다는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금강은 단단한 번뇌의 비유다.
세계라는 객관적 실제(法)는 주관적 세계(相)에 의해 인식 된다.
인간이 보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면 볼 수 없고,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자기욕구라는 환상 속에 있는 것 때문이다.
이 인간의 욕망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이라고 말한다.
그 첨병이 언어다.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며, 비추기보다 왜곡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어에 대한 불신을 선명히 드러낸다.
이 책에서도 언어를 혁신해야 불교가 열린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말과 글을 따라 얻어지는 지혜가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마음을 깨우쳐야만 얻어지는 지혜다.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라, 책의 소제목처럼 금강경 별기, 즉 저자의 별다른 기록이다.
처음에 불교를 접할 때 공(空)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色: 물질적 존재)은 연속적인 인연에 의해서 임시로 만들어진 상대적 존재이니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색즉시공은 금강경의 핵심 키워드다. 이 책에선 공(空)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공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의 탈각을 뜻합니다.
공은 세계에 개입하는 주관적 태도, 바로 그것을 문제 삼고 있을 뿐입니다.
공은 무아와 동의어란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색과 공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방해받지 않으면서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공인 색의 세계란 번역하자면, 자아에 의해 오염되거나 굴절되지 않은, 나아가 인류의 집단적 환상과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진정한 세계(법계. 法界),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여, 眞如)입니다.’
흔히 불교를 현세의 종교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불성을 지녔고, 인간의 마음 속에 이미 열반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참나와 에고(ego)가 있는데,
우리는 늘 에고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 에고와 에고 사이에 문득 참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오감도 느낄 수 없는 세계. 그게 진정한 열반의 세계라고 한다.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바로 이 참나를 찾는 시간이다.
사실 종교나 샤마니즘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다.
인간은 예로부터 완전체가 아니기 때문 개인은 늘 불안해서 구원을 받고자 절대자를 찾는다.
그런데 혼자서는 절대자(하느님, 예수님, 부처님)를 만날 수 없다.
그래서 메신저(무당, 신부, 목사, 스님)에 의탁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번뇌라 하고 이 번뇌를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다.
헌데 붓다의 치명적 농담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는 깨달아야 해탈을 얻을 수 있고, 피안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라 했다.
‘사리자야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인간의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세속적 특질도 운위할 수 없다.
자아의 개입이 근원적으로 차단된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 또한 분리될 수 없고,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 잡히는 풍경도 둘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에게는 원초적 무지가 있다는 것도 생뚱맞고, 그것을 제거해야한다는 권유도 쓸데없다.
늙고 죽음의 개념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초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초월과 해방의 방법으로 가르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기억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
농담치고는 정말 황당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난 아직도 많이 부족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