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꽝아이의 한국군 증오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전쟁을 구경거리로 삼는다. 전쟁에 직접 뛰어든 사람에게는 참화다.
살아남은 자에겐 고통이 있고 시간이 상처를 덮도록 도와주었다. 잊을 수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월맹군으로 참전한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의 말이다.
제주문학의 집 주관으로 제주-꽝아이성 예술문학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한 제주문인협회와 제주작가회의 작가 30명은 1월 3일부터 일주일간 베트남을 방문하여 시낭송 교류를 하고 공동 시집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꽝아이성 반호아는 주월 한국군이 1968년 1월 5개 마을에서 민간인 430명 학살한 곳으로 한국군을 저주하는 증오비가 세워진 곳이다.
이러한 사실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반호아에 머물던 영국 작가에 의해선데,
그는 ‘반호아’란 소설을 쓰고 그 수익금으로 422명의 희생자 명단을 새긴 위령비를 세웠다.
한국에선 1999년 당시 호치민 시에서 공부하던 구수정 씨에 의해 언론에 알려졌다.
이에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에서 지원 의사를 밝혔으나
반호아 마을 사람들은 한국인의 마을 접근은 물론 온정을 거부했다고 한다.
차라리 미군에게 당했으면 보상이라도 받을 텐데 한국군의 만행이 저주스럽다고 해서 그들은 증오비를 세웠다.
거기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란 비명이 쓰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자손들에게 ‘아가야 이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우리를 포탄구덩이에 몰아놓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말을 기억하거라.’란 자장가를 불렀다.
처음 반호아를 방문한 한국 젊은이들은 인구 2만인 마을에 학교가 없어 한국 정부에 학교 설치를 요청했으나 회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 후 미국에서 병원과 학교를 건설했는데 의사가 없어 한국의 의사, 한의사, 치과 의사 들로
베트남 의료봉사단을 결성하여 2년을 봉사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여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뜻 있는 한국 젊은이들이 ‘나와 우리’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하여 반호아 초등학교에
장학사업부터 시작하여 가족과 친지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했다.
지금은 김만덕 재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했고 제주의 각종 단체와 학교에서 자매 결연을 맺어
정기적으로 반호아를 방문하여 주민들을 지원 하고 있으며,
두산 그룹 계열 공장이 들어서 반호아 젊은이들이 취업을 도우면서 한국인에 대한 증오심이 많이 풀린 상태지만
아직도 한국인이 마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제한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포탄 구덩이에 민간인을 몰아놓고 학살했다는 현장을 방문하여 향을 사르고,
그 옆에 세워진 증오비 앞에도 꽃을 올렸다.
그 민간인 학살이 제주의 북촌리 사건을 연상하게 하였고, 그래서 제주 문인들이 몇 년 전부터
그곳 문인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사실도 이번에야 알았다.
이번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서 바오닌 작가, 『말라이 아이들』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종군 기자 출신의 탄타오 시인을 만났다.
그리고 말라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말라이 박물관장과 반호아 출신으로 한 살 나이에 포탄 구덩이에 묻혀서
빗물에 쓰며든 화약에 두 눈이 먼 생존자를 만나 그들의 가슴 먹먹한 사연을 들었다.
집단적 광기의 충격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여행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꽝아이성 문학예술위원회에선 우리 문인 일행을 민간 사절처럼 대우하면서
증오비는 있지만 증오는 없다는 말로 오히려 우리를 위로 하려 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 증오비가 철거될 때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제주 문인들은 문학으로 화해가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교류를 계속할 것이다.
제주논단(제주일보, 2015년 1월 14일 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