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론

유배문화의 활용, 중국 해남성의 경우

강용준 2016. 6. 23. 12:18



해남성은 중국에서 대만을 제외하고 가장 큰 섬으로 대한민국의 3분의 일의 크기다.

해남성이 제주도와의 유사성은 국토의 남쪽에 달린 제일 큰 섬이라는 것과 그로 인해 나라의 중죄인들을 가둔 유배의 땅이라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제주는 조선 시대 2백여 명이나 되는 귀양객들이 유배를 살던 곳이었고

그들로 인해 문화적으로나 지역발전 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해남성도 송대의 걸출한 시인인 소동파가 여러 곳의 적거지를 거치다 최후로 유배된 곳이다.

이런 연유로 제주도는 해남성과 일찍이 자매 결연을 맺었고,

2015년 제주도는 해남성과 자매결연 20주년을 맞이해서 한중간 인문유대 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소동파와 추사의 인생과 예술이란 주제로 세미나도 열었었다.


필자는 문학을 통한 제주의 세계화라는 주제로 제주PEN과 해남성 작가협회와의 교류를 위해 지난 5월 하순 해남성을 다녀왔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인민단체는 성에 소속되며 해남성작가협회의 정부 주석은 성의 행정 또는 편집하는 일을 겸임하게 된다.

이들의 조직은 자격심사위원회, 소설창작위원회, 산문창작위원회, 이론비평위원회, 시가창작위원회,

소수민족창작위원회, 네트워크창작위원회 등 7개의 전문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어 장르별로 되어 있는 우리와 달랐다.

이들은 천애라는 문학지를 내고 있었다.

소동파는 해남을 천애해각(天涯海角)이라고 했다.

하늘 물가 바다 뿔, 즉 하늘 끝 바다 끝 더 이상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는 해남도의 별칭이 되었고 해남도의 문인들은 천애라는 단어를 애호하여 문학잡지나 단체 명에 즐겨 쓴다고 했다.

그들은 인사말에서 제주와의 문학교류의 의의를 내륙이 아닌 국제로 나가는 첫문을 열었다는 말로 압축했다.

그 문을 열 기회를 주신데 감사하다고 했다. 개회식과 낭송회의 과정은 해남성방속국에서 녹화를 했다.


중국 해남성이 관광지가 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1988년 중국에 개방화 바람이 불면서 광동성에서 독립하여 해남성이 되면서 관광 특구가 되었으니

제주도와 비교하면 관광지의 역사는 일천하다.

해외 화교 자본과 중국 권력자들의 자본이 투입되어 아직도 화려한 호텔과 고층빌딩이 건축되고 있는 미완의 관광지다.

야자, 코코아, 바나나 등 열대의 식물과 원숭이 섬 등 남국의 자연환경과 기다란 해변,

36개 소수민족 원주민의 독특한 전설과 문화를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그러나 해남성이 한국인에게 각광을 받는 것은 소동파의 최후의 유배지라는 것 때문이다.

그가 남긴 일화, 문장, 문화에 끼친 영향 등이 스토리텔링화 되어 관광객들을 매혹하고 있다.

그는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농사법, 우물관정, 요리법을 알려주었으며 서원을 설립해 제자들을 육성했다.

소동파는 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원시부족인 여족과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해남에 있는 3년 동안 127편의 시와 논문, 서신, 잡지 등 182편의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 사망했으니 생의 완숙기에 남긴 최후의 작품들인 셈이다.

그가 남긴 문화가 온전히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현지의 생활에 스며들어 아직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제주에 유배된 추사가 소동파의 유배생활을 전해 듣고 자신과 동일 시 하면서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해남성은 소동파를 적극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전남 신안군은 흑산도유배문화공원을 만들고, 경남 남해군이 남해유배문학관을 개관했는데

아직 제주에는 문학관조차 없다.

제주 유배인들이 남긴 문화적 자산은 또 하나의 제주의 유산이다. 이를 발굴 자원화 하는 일이 시급하다.


제주시론(제주신보, 2016. 6.23.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