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숲에 이는 바람

암울한 시대와 몽매한 인간들에 대한 비애

강용준 2020. 2. 22. 12:09

 

 

 

 

암울한 시대와 몽매한 인간들에 대한 비애

강준(극작가/소설가)

 

내가 처음 연극에 뛰어들었던 1970년대 말의 연극 환경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다.

그저 연극이 좋아서 열정 하나로 서로 주머니를 털어 무대를 세우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두운 진창길을 해쳐나온 것 같다

억울한 것은 군부 독재의 암울한 시대를 만났다는 것과 몽매한 인간들을 만나 수모를 당했던 일이다.

 

당시는 예술 행위 하는 것 자체를 백안시 했었고 문화예술을 모르는 공무원과 공안기관이 연극 공연을 장악했던 시절이였으니,

더구나 지방에서의 그들의 횡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극장도 많아지고 정부에서 보조금도 주지만 당시엔 보조금은 고사하고 일제 강점기처럼 연극 공연을 관에서 장악하려고

대본 검열이라는 게 있었다.

대본 검열은 안기부(지금의 국정원)에서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심사를 했던 사람은 연극에는 관련이 없고

제주에서는 잘 알려진 시인인 대학교수였다.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 내용이 들어가면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다는 명목으로 공연 불가 판정을 내기 일쑤였고,

그래도 공연을 강행하면 극단을 강제 폐쇄시키고 대표는 경찰서에 불려가서 혹독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한번은 봉세관의 횡포에 대항하여 일어선 제주의 민란을 다룬 연극을 준비할 때였다.

도청 문화예술과에 공연 신청서를 넣으니 며칠 후 출두하라는 연락이 왔다.

공연 제목이 골마파람’(고을 마파람)이었는데 제목이 선동적이고 혐오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다. 관련 기관에서 이미 불가 판정이 났다는 것이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극장과 광고 스폰서도 구하고 포스터까지 찍어 놓은 상태였으나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또 한번은 부조리 연극인 이오네스코의대머리 여가수공연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시청에 포스터 부착 신고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불가 판정이 났다.

우리는 딴에 부조리극에 맞게 포스터를 가로로 붙이거나 세로로 붙이거나 제목을 볼 수 있게 왼쪽과 아래쪽 두 군데 써넣었다,

헌데 보는 사람에게 혼동을 주게 되므로, 어느 한쪽으로만 쓰고 다시 찍어오라는 것이다.

제작비가 귀한 형편이라 사정을 해서 할 수 없이 한쪽은 청테이프로 막는 조건으로 심사필 도장을 받고 포스터를 붙였다.

 

연극 연습이 끝나면 자연스레 뒤풀이가 이어졌고, 술을 마시다 보면 자연 시국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연기자가 연습에 나오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것이다.

시국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어필하던 친구였는데 전날 울분 토하던 얘기를 옆자리에 있던 형사가 듣고 귀가하던 그를 잡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니던 회사에 압력을 넣었는지 연극을 지속하면 해고하겠다는 협박에 주인공 역을 맡고 연습하던 그는 연극을

그만두게 되어 공연이 좌절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더 심한 것은 같은 동업자끼리의 질시와 배척이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면서 연극반에서 연극을 시작했고,

방학을 이용하여 기성 극단 견습생으로 들어가 합숙 훈련을 하며 연극의 기초과정을 습득했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자 고향에 내려와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하고자 제주에 최초의 극단 이어도를 만들 때였다.

당시 제주에는 극단이라는 게 없었고 모 종교사회단체에 극회가 있었다.

그때 창단 멤버들은 고향 여러 대학의 학생회 간부 출신이거나 문인들로 의식이 있는 엘리트들이었다.

연습은 대학생들이 많이 드나들던 다방(지금의 까페)의 한 모퉁이를 빌어 했었는데,

어느 날은 한창 연습 중인데 연세가 있는 사람이 나를 보자고 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약주를 걸쳤는지 불콰한 얼굴로 자신은 모 극회 지도위원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연극을 뭘로 아느냐. 연극 하려면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 배우라고 꼰대짓을 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연극이라고는 학예회와 마을 예술제 때 주인공을 했다는 것이 전부였을 뿐 연극을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경험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제주의 연극판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극단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아서 때로 불법 공연이라며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극단 창립 5주년을 맞아 서울의 극단 76을 초청 공연할 때였다.

당대의 최고 연기자로 각광을 받던 송승환과 기주봉이 앙상블을 맞춘 일어나라 알버트라는 작품이었다.

연기자의 이름값 덕에 예매가 활발했는데 어느 날 한 예매처에서 연락이 왔다.

포스터를 떼고 티켓 판매를 중지하라고 연극협회에서 통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연극 공연이 사기라는 이유였다.

예매처마다 전화를 걸어 협회 차원에서 티켓 판매 중지를 요청해서 포스터가 전부 철거되어 있었다.

사무국장이라는 예의 극회 지도위원을 찾아가 따졌더니 송승환이 이미 미국 갔는데 제주에 어찌 오느냐며 되려 야단을 치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예매처를 찾아다니며 설득해서 다시 티켓 판매를 했는데, 당시 제주의 유일한 현대식 극장인 제주학생회관이 매회 만석을

이룰 정도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송승환은 제주 공연을 끝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그 이후에도 극단이어도가 하는 공연에 훼방을 놓았다.

10주년 기념공연을 하는데 협회에서 화환을 보내온 것을 정중히 거절하고 돌려보냈다.

헌데 그것은 협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사업을 방해했으므로 회원단체에서 제명시키겠다고 난리를 쳤다.

우리 극단을 제외한 다른 극단 회원들이 징계에 묵시적으로 동의를 하는 바람에 굴욕을 무릅쓰고 각서를 써야 했다.

당시엔 협회에 등록되지 않으면 지원은 물론 공적인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한국연극협회 제주도 지회장이 되자 회장 당선 무효라는 사신을 중앙협회로 보냈다.

불참자 위임을 받아 성원이 되었는데도 이를 묵살하고 훼방을 놓은 것이다.

그런데 더 분통이 터지는 건 그와 한통속이던 당시 한국연극협회 J모 이사장의 행태다.

그는 사건의 전말도 따져보지 않고, 내게 연락 한번 없이 그의 말만 믿고 제주지회를 사고지회로 처리하여 한동안 인준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20년 극단을 이끌다가 후배에게 넘기고 지금은 글만 쓰고 있지만, 지금도 그는 선배라는 이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젊은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

희곡이 갈등의 예술이지만 연극 공연 외적인 상황과 몽매한 인간들에 갈등을 느낄 때가 많았다.

한때는 그들을 미워하고 분노를 느꼈지만 어쩌면 그런 어두운 진창길을 걸은 덕에 내가 더 강해지고 단련되어

집필활동을 지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거리에서 젊은 시절 내 앞길을 가로막았던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추하게 늙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비애와 함께 나의 우울을 발견한다.

그리고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느냐?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느냐?

 

 

 

한국희곡 2020년 봄호 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