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숲에 이는 바람

시대의 파수꾼처럼 늘 깨어 있기를

강용준 2021. 2. 23. 09:00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시대의 파수꾼처럼 늘 깨어 있기를

강준(극작가/ 소설가)

 

어느 시인이 인생은 태양에서 나와 태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 했다.

영생불멸의 시간 속에서 영혼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이란 거죽을 쓰고 잠시 머물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육신을 벗어나서 다시 다른 우주로 떠난다는 말이다.

문학개론 시간에 들었던 이 말은 내 인생의 나침판이 되었다.

인생은 아름다운 여행이다. 찰나의 순간을 바람처럼 살다가 떠나는 것이기에 아쉽지만 아름답다.

나는 여행에서 만난 문학이라는 섬에 정착하여 인간의 삶을 궁구하고 있다.

 

부모가 사업에 바빠서 내 유년 시절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일본의 신식교육을 받은 이야기꾼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게 애기를 많이 해주었는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고전소설이며 전설 등 옛날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꾼 유전자가 핏속에 흘러 난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내 청춘 시절은 유복했으나 나의 인생을 바꾼 것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였다.

부친의 과욕은 재산을 탕진하고 빚더미만 남겼고, 대학 진학을 앞둔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았다.

한의사가 되려던 나의 꿈은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방황하던 나를 붙잡은 것은 문학과 연극이었다.

당시 제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연극 공연이 서울 대학가를 중심으로 붐이 조성되던 때였다.

대학 국문과에 진학하면서 황순원, 조병화 같은 기라성 같은 은사를 만났지만 난 극작가의 꿈을 키웠다. 대학 써클에 가입하여 연극 활동을 하면서 내가 쓴 작품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유신헌법 철페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이 길러졌다.

 

그러다 서울 모 극단에서 시행한 연극 워크샵에 견습 단원으로 참가하게 됐다.

동계 방학 3개월 간 허름한 극단의 숙소에서 먹고 자며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체력 훈련도 힘들었지만, 하루 라면 한 끼 먹는 극단 생활은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병을 얻어 낙향을 해야 했다.

그런데 병원을 찾아다녀도 의사마다 병명이 다 달랐다. 어떤 이는 맹장이 터져 굳었다고 했고 어떤 이는 암이라고 했다. 개학날이 되어도 한쪽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휴학했는데, 6개월의 투병 생활 동안 생사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기간은 문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귀중한 휴식과 충전의 시간이었다.

셰익스피어 전집과 그리스 로마 신화를 구하여 독파했다. 그리고 당시 트랜드였던 부조리 계열 작가들의 작품과 핸릭 입센, 안톤 체홉, 유진 오닐, 아더 밀러 등 고전 명작들을 섭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에서 교편을 잡다기 고향에 돌아와 제주의 첫 극단을 창단했다.

갓 결혼한 아내를 시집살이 시키면서 난 낮에는 교단에 서고, 저녁에는 극단의 연습에 참가하느라 집안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우울증에 걸려 입원도 하고, 갓난아기를 남겨 놓고 가출하는 등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극단을 내팽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불화는 멈추지 않았고 가정이 깨지기 직전까지 갔지만 아내를 설득하며 지혜롭게 극복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이 애들 셋은 낳던 시절인데 내게는 아들 하나뿐인 이유다.

 

고향에서의 연극 활동은 그야말로 독립운동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당시는 시국이 어지러운 상황이라 예술 활동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공연할 때마다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그것만이 아니라 곳곳에 방해물이 도사리고 있었고 훼방꾼들이 많았다. 그 당시 제주에는 극단이라는 게 없었다. 모 시민단체 소속의 연극동호회가 있었는데, 그 단체를 지도하는 사람이 우리 극단이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았다. 좁쌀 몽리다.

1980년대 민주화 정국에서 행정당국은 예술단체를 옥죄기 시작했다. 공연 대본 검열은 기본이었고 포스터에 실린 글자까지 검열하며 간섭했다. 3개월여의 연습을 끝내고 포스터까지 찍은 상황에서 공연 불가 판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주인공 배우가 식당에서 취중에 하는 시국에 대한 불만을 사복 형사가 몰래 듣고는 정부에 대한 비난을 했다는 죄,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구속시켜 연습이 중단되기도 했다.

 

내가 쓴 작품은 직접 연출을 하며 다듬고 완성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0여 년만에 제주 여행을 온 희곡작가 홍승주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홍승주 작가는 대학 선배이면서 경희중학교에서 교생 실습할 때 지도교사였다.

내게 아직도 희곡을 쓰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했더니 그 정도 기간에 지속적으로 작품을 썼다면 많이 숙성했겠다며 작품을 보자고 했다. 그 작품이 데뷔작인 방울소리.

군부 독재 시절 그 위압에 눌려 속절없는 불안감을 견뎌야 했던 두 노인네를 통하여 당대를 우화화한 내용이다. 실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지 15년 습작 생활을 거친 이후 등단했다.

 

1998년 제주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연극 연출경력이 좀 있다고 해서 개·폐회식 식전행사 예술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의 전국적인 행사였다.

그 당시 나라는 부도가 나서 IMF의 규제를 받는 상황이었다. 기업들이 쓰러지고 자영업자들마저 줄 도산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가정이 파괴되면서 거리에 노숙자들이 생겨나던 때였다.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개회식을 준비하기로 목표를 정하고 개회식 준비에 들어갔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게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에 의한 성화 점화였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ABR(Air Bounce Robot, 로봇 기능이 장착된 풍선에 공기를 주입하여 부풀어 오르게 하는 기법) 기법을 사용하여 형체가 없던 바다로 설정된 바닥에서 서서히 거대한 형상의 설문대 할망이 나타나고 그 손가락 위에 성화봉을 든 초등학교 여자 탁구 선수가 올라서자 설문대 할망 팔이 상승하면서 성화대에 접근하여 점화를 하도록 했다.

당시 그 계획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람의 영향,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기법에 많은 우려와 제동이 있었지만 기술자들의 연구와 시행착오의 연습 끝에 감동적인 성화 점화를 이루어 냈다.

그때까지 전국체전 성화 장면이 중앙 일간지 1면 톱 사진으로 쓰인 적은 없었다. 전국 신문과 방송이 그 장면을 극찬했고 여러 번 재방송 되기도 했다. 당시 개회식을 참관했던 일본 IOC 위원은 올림픽에 버금가는 성화 점화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그 공을 인정받아 체육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아내와 약속했던 10년을 넘어 20여 년의 연극 활동을 접고 극단을 제자에게 넘겼다.

난 여유로움 속에서 창작활동에 매진 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는데 내 문학적 영감에 불을 지펴주신 연극평론가 유민영 선생님이다. 그 분은 전국연극제에 참가할 때 가끔 보았는데 그때의 가르침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이 문학 청년 시절 파리에서 같은 나라 출신인 예이츠를 만났다. 그 때 예이츠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시인 겸 극작가였다.

싱이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예이츠는 당장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싱은 그 말을 듣고 고향 아란 섬으로 돌아가 섬사람들을 연구하여 작품을 발표하며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극작가가 되었다.

유 선생님은 내게 그 말씀을 전해 주면서 제주 사람이 만들어낸 신화, 바다, 역사 이야기에 천착하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 말씀대로 제주에 대해 다시 공부 했고, 해녀들의 고달픈 삶을 그린 좀녜라는 작품으로 도의문화저작상(삼성문학상)을 받으며 중앙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소설의 첫 작품은 1992년 제주예술에 발표한 어르신 행차. 그 후 몇 편 청탁을 받아 쓰기는 했으나 본격적으로 소설에 뛰어든 것은 교단을 명퇴한 이후다.

문학이라는 섬 속 희곡 동네에 살면서 소설 동네에 집필실을 얻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희곡과 소설은 서사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넘나듦에 별 어려움이 없다.

두 번째 장편 소설집 사우다드를 냈는데 운이 좋게도 한국소설작가상을 받게 되었다.

작가에게 상이란 걸어온 길에 대한 위로이자 자기 확인이고 문학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삶과 시대 정신을 외면하거나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어려울수록 성전(聖殿)의 성화를 지키는 전사처럼 희망을 보여 줘야 한다.

 

나는 유랑인의 핏줄을 받고 태어난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을 여행처럼 살면서 전국 창작 집필실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쓴 게 10년이 넘었다.

나이 들어서도 현업 작가인 게 다행스럽다.

이제 내 지구에서의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의 붓이 시대의 파수꾼처럼 늘 깨어 있기를 소망한다.

 

 

한국문인협회 <문단실록1> (2021년 2월 10일 발행)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