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숲에 이는 바람

탐라국부터 관광개발까지...‘제주다움’은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졌나

강용준 2024. 9. 28. 10:20

 

 

[문화예술 콘텐츠, 꿰어야 보배] ③강용준 작가에 듣는 ‘제주 문화 콘텐츠 개발의 조건’

바야흐로 ‘콘텐츠’의 시대다. 온라인에 최적화된 국산 만화를 세계 곳곳에서 즐겨보고, 골목길에서 하던 놀이가 드라마에 쓰이며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다. 섬 안에서 평범하게 여기던 제주해녀도 공연·음식을 접목시키자 주목받는 콘텐츠로 떠올랐다. 네트워크와 모바일이 지구를 뒤덮은 오늘 날, 우리가 미처 모르던 ‘우리 것’이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시대가 됐다. 제주 문화·예술이 콘텐츠화 되는 과정 속에서 어떤 토대가 필요한지 [제주의소리]가 연속 기획으로 짚어본다. [편집자 주]


제주 문화를 소재로 한 예술·콘텐츠 창작에 있어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창작은 제한이 없더라도,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양질의 결과물을 위해서는 제주다움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지난 7일 제주극작가협회(회장 강용준)가 개최한 첫 번째 극작세미나에서는 ‘제주 문화 콘텐츠 개발의 조건’ 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강용준 회장은 극작가 겸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제주 역사와 전통문화를 꾸준히 작품에 녹여냈다. 2020년 발간한 희곡집에 수록된 희곡 ‘돗추렴’은 관혼상제 때마다 제주에서 돼지를 잡아 공유하던 전통을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4.3과 산업화시기 등 현대사의 아픔을 더하면서 한 가족의 뿌리 깊은 갈등과 회복을 그렸다. 이 작품은 2022년 제주소재 창작연극으로도 무대에 오른 바 있다. 

강용준 작가는 이날 주제 발표에서 지역 문화를 소재로 한 콘텐츠화를 위한 조건부터, 오늘 날 제주 사회·문화를 이루는 역사까지 살피면서 후배 극작가들의 이해를 도왔다. 특히 근래 제주 안팎에서 창작된 예술작품을 예로 들면서, 제주의 문화적 자산을 변질 혹은 왜곡시킨 사례를 꼽았다.

 

표면적으로는 ‘홍윤애와 조정철’의 사랑 이야기를 들고 왔지만 내용은 제주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는 오페라, 일반인은 얼씬도 못했던 귀한 진상품이었던 귤을 가공해 귤차를 팔겠다는 내용이 담긴 뮤지컬, 종6품 현감 벼슬은 임금이 내리는 직책인데 제주목사가 배비장을 대정현 현감으로 임명하는 오류를 범한 종합예술극, 정의현을 구의현으로 표기한 소설 등이다.

강용준 작가는 “지역의 문화 소재를 작품화할 때는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 문화의 고유성은 ▲독립주의적 의식 ▲저항(반 이데올로기) 의식 ▲중앙 지향 의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독립주의적인 의식은 섬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태도로 읽힌다. 천지왕 본풀이, 설문대할망신화는 본토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설화이다. 제주의 인재를 지키기 위한 내용인 고종달형 전설 역시 여기에 속한다.

육지에서 버림받거나 쫓긴 신들이 제주에 당신(堂神)으로 좌정하고, 또 관리들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 등은 저항 의식으로 묶을 수 있다. 삼승할망, 백주또 등은 육지에서 온 신들이다. 이형상 목사와 관련한 ‘광정당 전설’, 서련 판관의 ‘김녕사굴 전설’ 등에는 지역민들의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이와 별개로 역사적으로 보면 독립국가로서의 과거성과 중앙정부를 향한 종속성이 공존하는 양상도 보인다. 제주에서 등장한 고대 국가 ‘탐라국’은 기원전 5세기경에 건국된다. 고려시대 때는 주종관계를 유지하다가 몽골제국의 직접 지배도 받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주·왕자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본토에 예속된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의 영향으로 제주는 ‘외래문화’가 복잡하게 수용되는 양상을 보였다.

먼저 설화를 보면, 삼성신화 속 벽랑국 공주의 입도는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가 유입되는 변화를 상징한다. 벽랑국 공주는 커다란 목함에 가축과 곡식을 싣고 섬으로 온다.

백주또 신화에서는 사냥을 하던 소천국에게 백주또가 찾아와 농사를 권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는데, 이는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으로 유추된다. 자청비 신화에서는 농사와 목마의 유래가 드러난다.

역사를 봐도 외래문화는 제주로 꾸준히 유입된다. 

몽골의 100년 지배는 말 문화, 어휘, 음식 문화에 많은 영향을 줬다. 조선시대에는 유배의 땅으로 반골 기질, 남성 우월의식이 한층 짙어졌다. 일제강점기 때는 군사요충지로서, 제주도민 전체가 30만 명이었지만 일본군은 최대 6만명이 주둔할 정도였다. 

해방 공간에서는 신식 교육을 받은 일본 유학파가 돌아오면서 일부는 4.3에 휘말렸다. 4.3 여파로 일본으로 밀항하는 사람도 많았다. 6.25전쟁 때는 많은 예술인들이 제주로 피난을 오면서 근대 예술의 싹을 틔웠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1970년대부터는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산업이 개발 중심으로 확대됐고, 문제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용준 작가는 제주사회가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이중적이라고 봤다. 지배층은 추종적이나, 서민들은 합리적이라는 것.

지배층의 특징은 삼성신화 속 벽랑국 공주와의 혼인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신분 상승의 강한 욕구에 덧붙여 유교 문화 추종까지 나아가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이에 반해 서민들은 자연에 순응하며 샤머니즘에 가깝다. 불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유교와 혼재된 형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잘못된 정치 행태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저항한다.

호칭어와 지칭어의 구별이 뚜렷한 언어생활, 포제와 당굿이 공존하는 종교 생활 역시 이중구조에 속한다.

제주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특징은 ‘여성 중심’이다. 해녀의 바다 노동이라는 경제적인 이유를 포함해, 제주는 오랜 시간 모계 중심의 문화를 유지했다.

신화 속 신들도, 역사 속 인물도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다. 제주 섬을 만든 설문대할망, 농사의 신 자청비, 정조를 지킨 산방덕이, 효성 깊은 가믄장아기, 무당이 조상인 백주또, 바다농사의 신 영등할망, 생명을 주는 삼승할망 모두 여성이다. 이어도는 해녀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섬으로 알려졌다. 민요 역시 여성의 노동요가 대부분이다. 김만덕, 홍윤애 등 대표적인 인물도 여성이다.

제주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괸당 문화와 배타적 의식이다.

제주는 역사적으로 잦은 외세의 침투를 받았다. 동시에 탐관오리에 의한 수탈, 진상품 부담도 심했다. 해방 이후에는 외지인들에게 많은 피해도 입었다. 이런 역사는 ‘믿을 사람은 친·인척 밖에 없다’는 배타적인 의식을 만들었고, 괸당문화로 발현됐다. 

노동력과 경제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수눌음 문화, 친족 중심의 관혼상제 등은 괸당문화의 특성으로 꼽힌다. 지역과 가문을 중시하며 학연, 지연, 혈연의 유대관계가 돈독한 특징은 오늘 날에도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괸당문화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끼리끼리’, ‘시기질투’ 등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이 따로 사는 안거리·밖거리 풍습은 제각각을 뜻하는 제주어 ‘질로지썩’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것은 궁핍한 생활을 이겨내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하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절해고도’ 자연 환경은 고유한 문화를 만든 핵심이다. 제주를 거쳐간 유배인은 조선시대에만 200여명으로 알려졌다. 광해군, 김정희, 송시열, 조정철, 보우 등 당대 유명인사들이다. 제주에 온 목민관도 280명에 달한다. 이형상의 ‘남환박물’, 김상헌의 ‘남사록’, 임제의 ‘남명소승’ 등 목민관들이 남긴 기록에서 당시 제주문화를 엿볼 수 있다. 난파, 물질, 해녀들의 이야기 같은 해양문학의 근간도 섬이라는 환경에 근간을 둔다.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을 그린 예술 창작물은 ▲아아 삼별초(오성찬 작가) ▲삼별초(유현종) ▲변방에 우짖는 새(현기영) ▲한라산의 노을(한림화) 등이 있다.

4.3을 소재로 한 작품은 1960년 전후로는 ▲후일담(오영수) ▲집행인(곽학송) ▲까마귀의 죽음(김석범)이 있다. 1970년대 작품은 ▲하얀 달빛(오성찬) ▲순이삼촌(현기영) 등이 꼽힌다. 1980년대에는 ▲우리들의 조부님(현길언) ▲사포에서(오성찬) ▲아스팔트(현기영) ▲화산도(김석범) ▲도마칼(고시홍) ▲불턱(한림화) ▲땅울림(김석희) 등이 있다. 

강림차사 설화는 영화 ‘신과 함께’에서, 본풀이는 소설 ‘목마른 신들’에서 원용됐다. 이 밖에 역사적 사건, 인물, 자연, 민요, 해녀, 탐라순력도까지 제주의 다양한 문화들이 콘텐츠로 해석돼 선보였으며, 앞으로도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