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있는 아들을 장가들였다.
원래 단출하게 세 식구였는데, 아들이 대학 공부한다고 서울로 간 이후 13년간을 내외간만 지냈으니 허전한 맘도 없다.
오히려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기쁨이 생활에 활력소가 됨을 느낀다.
칠 년 전 아들이 대학 다닐 때 하숙하는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때 참 친구 하나는 잘 골랐다고 생각했었고 예쁘고 너무 맘에 들어 며느리 했으면 좋겠다는 잠시 허황된 기대를 했었다.
내 경우도 그랬지만 대학 시절의 여자 친구야 장래를 담보할 만큼 깊은 사이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맘에 두지 않았다.
헌데 7년을 사귀었다니, 현대에 이런 순애보를 가진 한 쌍이라면 어느 부모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내 아들 성격으로 봐선 사랑하다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런 우여곡절을 수십 번도 더 거쳤을 것인데,
그런 사이에 서로의 장단점을 다 알았을 것이고 그런 과정을 다 겪은 만큼 앞으로 닥칠지 모를 어떤 세파도 둘이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이 결혼하겠다는 여자애를 데리고 왔을 때, 칠 년 전 그 여자애라는 말에 난 흔쾌히 우리 가족이 됨을 환영한다고 했다.
안 사람은 제주 여자가 아니라고 못내 아쉬워 했지만 주변에선 육지 여자애들이 부모를 더 잘 모신다고 다독였고
며느리의 애교와 싹싹한 행동에 안 사람도 이내 가족으로 받아 들였다.
안 사람이 며느리 감에게 한 첫 마디가 우린 연금 타고 생활할 테니 너희들에게 기댈 일 없고 너희들이나 잘 살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린 부모의 의무를 다했으니 더 이상 부모에게 기댈 생각 말라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다.
허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 사람은 앞으로를 더 걱정한다.
임신하면 축하금, 해산하면 산후 조리비에 백일, 돐 잔치 때마다 거금을 며느리 손에 쥐어줘야 하고,
집 마련하면 집세에 보태야 한다고 앞으로 들어갈 돈 걱정부터 한다.
난 쓸 데 없는 소리 말라고 큰소리로 말을 막았지만 그게 시부모의 노릇이고 도리란다.
부모는 늙어죽을 때 까지 자식들의 노예구나.
손자 나면 맞벌이 하는 애들을 대신해서 양육해 줘야 하고...
자식을 결혼시키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결혼식과 피로연에 천 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와 주거나 축하를 해주었다.
참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것은 과분한 축복이다.
정치가도 아니면서 이 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것을 누구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부러워 했다.
그처럼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한 귀결이라는 설명이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연락도 기별도 없이 외면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나에겐 한 번 뿐인 대사인데 그들에겐 그냥 소홀해도 되는 그런 관계였구나.
물론 개인마다 사정은 있었겠지만 내가 그들에게 소원했었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걸린다.
내가 축하하지 못한 사람들도 이런 심경이겠구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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