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소설 나무 동산 8

명품 가방 피렌쪼

명품 가방 피렌쪼 강 준 나는 가짜입니다. 지금은 가방박물관 유리 상자 속 빨간 카펫 위에 앉아 따스한 핀 조명을 받으며 관람객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사실은 안내문 속 원조가 아닙니다. 원래 여기 있어야 할 가방은 진짜 황금으로 치장된 우리 가문의 비조입니다. 이탈리아의 가죽공예 명장인 피렌쪼가 만들어 일본의 유력 정치인에 선물했는데 어떻게 해서 한국으로 건너오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난 이탈리아 태생이 맞습니다. 피렌쪼는 인기 있는 브랜드로 고가의 가죽제품입니다. 뼈대는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사각을 유지하고 모서리마다 금도금이 된 보호 장치가 박혀 있고 붉은색이 도는 소가죽 옷을 입었습니다. 피렌쪼란 이름표는 이마에서 빛납니다. 속을 들여다보려면 갈색 혁대를 풀고 굵은 이빨의 지퍼를 ..

후안

베트남 꽝아이 한국군증오비 후 안 강 준 촤라락. 커튼을 젖히자 봉 위를 구르는 고리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유리창 너머로 파란 하늘 흰 구름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잠을 설친 탓에 화장이 먹지 않는데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눈썹 손질을 마치고 립스틱을 집어 들었을 때 내 꿈의 열매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지연이는 혼혈이어서 더 예쁘다고 한다. 하얀 피부와 또렷한 얼굴의 윤곽, 검은 눈썹 아래 커다란 눈동자는 나를 닮아 유난히 맑다. “엄마, 아침부터 무슨 꽃단장이야? 애인이라도 생겼어?” 초등학생인데 못 하는 소리 없이 맹랑하다. “응. 엄마 오늘 아주 찐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거든?” 호기심 많은 지연은 거울 속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 정말 바람났어?” “아이구 내 딸 그런 말도 알어?” “엄..

모모는 어디로 갔을까

스마트 소설 모모는 어디로 갔을까 강 준 - 야아옹 한밤중에 모모가 온 줄 알고 깜짝 놀라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 모모? 모모. 부산스런 행동에 놀랐는지, 고양이는 잽싸게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모모가 아닐 것이다. 내 목소리를 아는데 도망칠 리 없다. 나는 잠시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련한 기억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른다. 모모를 만난 것은 작년 여름, 경기도에 있는 문학마을에 입주해 있을 때였다. 건물 이름이 문학마을이고 이 층 여덟 개의 방에서 문인들이 한시적으로 기거하며 글을 썼다. 시원하게 소나기 내리고 무지개 떴던 날, 산보를 나갔던 동화 쓰는 김 작가가 고양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웃 마을에서 네쌍둥이 중 하나를 무상으로 분양받아 왔다고 했다. 그..

야수와의 산책

강 준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윤 국장이 아무런 감정 없이 툭하고 던진 말은 돌팔매가 되어 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마창석이 죽었다니? 작년 문학관에서 함께 하는 동안 희한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는 생존에 강한 애착을 보였는데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3월이면 문을 열던 문학관이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4월 중순이 되어서야 입주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한 시간 반쯤 자동차를 몰고 문학관에 도착했을 때 마창석은 이미 한쪽 구석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미투 사건으로 구속되며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 후 그는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출감 후 떠돌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A 문학관에 은둔하고 있었다. 사무국장의 말로는 2월 초에 오갈 데 없다며 막무..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사멸의 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제 갓 오십에 들어선 난 너무 억울하다. 인간의 장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첨병이 눈이다. 시각을 통해서 인식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것만 볼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된 후 인간에겐 에덴동산에 대한 회귀본능이 원죄처럼 남았다. 그래서 늘 좋았던 과거를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예술이 다 그렇지만 사진에 관심과 열정을 갖는 것도 회귀본능에 대한 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사진을 가까이하게 됐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생 때, 급전이 필요한 선배에게서 헐값으로 인수한 카메라 때문에 ..

자서전 써주는 여자

자서전 써주는 여자 존경하는 재판장님! 전 너무 억울합니다. 저는 장충삼 씨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미결수입니다만 결코 살인자가 아닙니다. 장 회장님을 죽인 것은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때로는 악마의 발톱을 드러내어 장애물을 제거한 야만적인 사람들입니다. 장충삼 회장님은 시대의 폭풍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를 옥조인 광포한 세력들에 의해 자멸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제가 장충삼 회장님을 만나게 된 건 운명이란 말 말고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작년 가을 유난히 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뒤흔들어 밤잠까지 설치게 만든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바람이 인연의 전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밤 내내 요란을 떨던 바람은 잔흔들만 이리저리 흩어놓은 채 사라지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잔잔히 퍼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