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시를 읽는 벤치 39

설계

설계 設計 강영은 나는 내가 빈집일 때가 좋습니다. 침묵이 괴물처럼 들어앉아 어두운 방을 보여줄 때 고독한 영혼이 시간과 만나 기둥이 되는 집, 증거 없는 희망이 슬픔 과 만나 서까래가 되는 집. 우주의 법칙을 속삭이는 별빛과 그 별빛을 이해하는 창가 와 그 창가에 찾아든 귀뚜라미처럼 우리는 하나의 우주 속 에 들어 있는 벌레라고 우는 집. 희고 깨끗한 미농지를 바른 벽이 도면에 있어 닥나무 껍 질에 둘러싸인 물질의 영혼처럼 영혼의 물질처럼 나는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은 내 안에 있어 충만한 집. 내가 알고 있는 숲은 결코 그런 집을 지은 적 없어 새장 같은 집을 그릴 때마다 영혼을 설계하는 목수처럼 종달새가 날아와 얼키설키 엮은 노래로 담장 쌓는 집.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지탱하는 그 담장에 걸터앉아 ..

사라오름

사라오름 남길순 사라는 눈부신 소복. 사라는 여자 이름. 사라는 무덤. 사라 를 만나러 가자. 눈길. 눈:길. 눈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 는 길. 아무 곳도 보이지 않는 길. 눈이 부시게 하늘만이 트 여 있다. 푸르다 하늘. 흰옷 입은 여자. 사라. 까마귀를 부리 는 여자. 사라. 너에게로 가는 길. 먼저 간 발자국들. 까마귀 가 운다. 오라 오라. 앞서 나는 까마귀. 그를 따라서 간다. 까 마귀는 눈이 부셔 까악, 까악, 우는데. 누가 마귀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나. 까악, 마귀야 친구하자. 막막해서 까악. 억울해 서 까악. 친구는 울음소리를 들어주는 사람. 봉우리에 까마 귀를 풀어놓은 사라. 온통 하얀 세상. 사라에게로 오르다 내 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을 만났다. 혹시 사라를 아시..

편의점의 달

편의점의 달 유정남 편의점에 달이 뜬다 밤의 뚜껑을 따고 나온 번데기들이 간이테이블에 앉어 별을 마신다 컵라면에 뜨거운 국물을 부어주면 굳은 혀들이 깨어나 풀어놓는 매콤한 언어들 풀어진 넥타이 하나 보름달로 행운의 즉석복권을 긁는다 구름으로 채워진 함량 미달의 과자 봉지들은 팽팽히 헛바람으로 부풀어 있다 차갑게 식은 유리병들의 마개를 따거나 삼각형을 베어 먹으면 동그라미가 될 거라 했지만 조각난 아이들은 달빛 우유나 몇 갑의 담배를 훔쳐 달아 났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 찍힌 바코드를 지울 수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는 천직이 되었다 김밥들은 자정을 기다려 어제라는 유통기한을 지우고 폐기된 하루를 위장에 채워 주곤 했다 어느 날 사막으로 걸어간 아버지는 불 꺼진 도시의 별을 지키려는 편의점이 되었지 가시뿐인 손목..

서정이여, 흥하라

서정이여, 흥하라 류 흔 생생히 기억하는데 소백산 아래 영주동부초등학교 오 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서정주 씨의 시를 읽고 나도 서정주의 시인이 돼야겠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폭설 맞으며 결심했었다 서정에 꼴려서 화사한 꽃뱀인 줄 모르고 혹 했었다 내 애비는 종이 아니었지만 내 애비는 종보다 못한 철도원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기적(汽笛)이고 중앙선 비둘기호가 물어 온 구구단이 틀리는 즉시 입술이 터졌다 손톱이 붉은 에미의 자화상이 바로 나였으니 휴천동(休川洞) 집 뜰에는 망할 봉숭아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지고 지고 육군 오장(伍長) 마쓰이 오데이가 지고 아득히 파도 소리에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져버린 국화꽃 한 송이를 놓는다 어려서 죽은 내 누이에게도 주지 못한 꽃을 바쳤다 숭고이 죽은 시인을 위해 ..

뱀파이어의 봄

뱀파이어의 봄 우남정 우중충한 참나무 숲이 순간, 일렁인다 검은 망토를 들추는 바람 보굿이 꿈틀거린다 짓무른 땅에서 누군가 주검을 밀고 깨어난다 까칠하던 나뭇가지가 반지레해졌다 화살나무 허리춤에 푸른 촉이 장전되었다 물오른 꽃봉오리들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숨죽이고 있다 봄은 뱀파이어처럼 온다 저 산벚나무 피가 낭자하다 Let me in* 불면으로 누렇게 튼 산수유 입술에서 노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의 사랑은 늙지 않아요 꽃나무 아래 나의 목덜미가 창백하다 *뱀파이어 영화 제목 * 2024년 3월 해남 토문재에서 우남정 시인을 만나 시집을 받았다..

고삐

고삐 김영순 세상에 함부로 놓아선 안 되는 게 있다 아버지는 그것을 가족에 대한 예의라 하셨다 서늘한 고삐의 행간 일기장에 고여 있다 말이 보는 세상이 네가 보는 세상이다 너무 꽉 잡지도 말고 느슨하게도 말고 언제든 잡아챌 수 있게 손안에 쥐고 있어라 사람이 만만해 뵈면 제 등에 태우지 않는다 몇 걸음 걷다가 내동댕이치더라도 고삐는 절대 놓지 마라 방향타가 될 터이니

사위질빵

사위질빵 홍성운 정류장 담벼락에 무덕진 풀을 보고 아내를 툭 치며 이름을 물었더니 글쎄요 들풀이겠죠 시큰둥한 대답이다 아니 우리 장모님 지금 백 세 아닌가 맞는데요 뜬금없이 나이는 왜 물어요 이 풀이 사위질빵인데 사위 사랑은 장모님 아냐 뭔 소리요 마디마디 그냥 끊기는데요 그게 힘쓰지 말라는 깊은 뜻 아니겠소 이 화상 낮술을 했나 마당쇠가 웃겠소 짖궂게 농담하다 장모님을 뵙는다 한 세기 건너온 몸이 사위질빵 같지만 미소를 놓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신다

눈물로 돌을 만든다

이재훈 2023년 11월30일 발간 시집 눈물로 돌을 만든다 이재훈 태양은 사막을 만들고 구름은 비를 만들고 눈물은 사람을 만든다. 시를 쓰는 사람. 눈물의 사제여. 돌은 복수를 모르고 변신을 모른다. 온몸을 섭리에 맡긴다. 평생 구르는 노동과 몸을 벼리는 일만 안다.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켰다. 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 썩지 않은 형벌을 가졌다. 침묵을 지키는 몸. 공중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땅속에서도 몸을 부딪칠 수 있는 용기. 사람 이전부터 지구 이전부터 우주를 떠돌았을 천형의 몸.

부의

조성국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부의 조성국 지나가는 말투로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더니 진짜로 나를 불러들여 약속을 지켰다 흰 비닐 상보 깔고 일회용 접시에다 마른안주와 돼지고기 수육과 새우젓과 코다리찜과 홍어와 게맛살 낀 산적과 새 김치 도라지무침을 내오고 막 덥힌 육개장에 공깃밥 말아 먹이며 반주 한잔도 곁들어 주었다. 약소하게나마 밥값은 내가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