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군칠 시인이여
생각해 보면, 이제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네와의 만남은 늘 미완성이었어.
자네와 함께 했던 고등학교 시절. 자네는 문학에 뜻을 두고 ‘호심’이라는 동인활동을 할 무렵
난 한의사가 될까 건축가가 될까 꿈마저 희미하던 자연계 학생이었지.
그땐 우리 서로 잘 알지도 못했고, 틈틈이 찾아간 시화전과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자네의 시를 접하며 부러움과 존경심만 마음 속으로 키웠네.
그러다 우리가 사회에서 만난 건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이었지.
우여곡절 끝에 난 국문과에서 희곡을 전공하고,
고향에 내려와 극단을 만들고 한 동안 연극에 심취하여 젊음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부을 때였지.
그 때만 해도 얼핏 지나가는 소식에 난 자네가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네.
그러고도 한 참 지난 후. 그림 그리는 요배도 귀향하고 때늦게 자네도 등단하고
그래서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고교 동창들끼리 모임을 만든 게 ‘예우’였지.
예술가 한 명도 없는 회기가 많은데 유독 우리 19회는 예술인들이 많았어.
미술계에선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강요배와 고영훈, 백광익과 이성만, 문학인으로 나기철, 정군칠,
음악인으로 문병식과 김병협 그리고 연극인으로 나까지.
헌데 모두가 개성이 강해서 모이면 늘 목소리가 커졌지.
자네와 난 항상 묵묵히 듣는 편이었고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했어.
그러다 자네 첫 시집 『수목한계선』이 출간되고, 백 화백 개인전에 들러서 저녁을 먹던 날
자네의 시를 이야기하다 다툰 일이 생각나네.
나기철 시인 시와 비교하면 자네 시는 너무 어렵다.
자기만 좋아하고 자기만 알 수 있는 시를 쓰는 것은 자위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난 취중 폭언을 했었고 우린 한 동안 소원했어.
아마 자넨 크게 상처받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땐
문학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자부하는 내가 자네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대한 자괴감을 분노로 대체시킨 거였어.
시는 시인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고 세계에 대한 자기 발언인데
난 자네를 모르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 경향도 이해 못하면서 자네만을 탓했던 거였어.
자네는 자신의 시가 모욕당하고 있다는데 대한 불쾌감으로 얼굴만 찡그릴 뿐 아무 말도 않았지.
그 이후에야 자네가 뒤늦게 방송통신대에서 문학을 전공했다는 걸 알았고
문학이론도 배우고 시를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하지 못했어.
옹졸한 날 용서하이.
자네가 건설회사를 접고 문화관광해설사를 하고 있다고 했을 때,
부인이 초등학교 교감이라는데 용돈을 타서 쓰지?
정말 그 처럼 생활이 어렵나?
그 시간이면 책 읽고 공부나 하지.
친구들의 저마다의 소리에
‘놀면 뭐해,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자네의 심정을 그 누가 이해 했겠나?
물론 그게 생활이 곤궁해서가 아니라 가장으로서 떳떳하고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네.
반바지, 런닝셔츠 차림으로 쓰레기 버리려도 못나온다는 자존심 센 자네가 아니던가?
그리고 자넨 시 강의를 참 깐깐하게 한다더군.
그러면서도 강의를 잘해 도서관마다 강사로 모시고 싶어한다는 말에 참 자네가 대견스럽게 느껴졌어.
난 그런 인기 있는 강의도 못하니까 말일세.
자네의 시가 좋다는 세간의 말을 듣고 두 번째 시집『물집』을 꺼내 들어 봤더니
그제야 자네가 보이더군.
40대 중반 늦깎이로 등단하여 시혼을 불태웠던 자네의 세상 나온 보람은
제자들에 의해 빛을 볼 것이라 믿네.
자네는 늘 안으로 삭히는 스타일이었어.
시도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가봐.
생활을 마음 속에서 삭힐대로 삭혀서 자네만의 방식대로 시를 만들기 때문.
헌데 자네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불치의 병을 얻게 된 것도 삭히지 못한 생활의 앙금 때문이 아닌가?
삭히지 못한 스트레스는 몸속에서 물집이 되고 단단한 암 덩어리로 변해
끝내 자네의 목숨줄을 끊어 놓고야 말았네.
자네는 의리도 없고 참 나쁜 사람이야.
사전에 귀뜸이라도 해주지.
가끔 만나면서도 자넨 투병 사실을 숨겼어.
동정을 받고 싶지 않은 자네의 자존심 때문이었겠지.
투병 사실을 안 것은 자네가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어 산소 호흡기마저 뗀 이후였어.
안색은 이미 황달로 누렇게 변해 있었고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는 모습만 마지막으로 보았네.
한 마디 말도 못 건네고...
가족들은 숨죽이고 자네 동태만을 살피고 있었고...,
병실을 나온 친구들은 그날 오래 살아야지,
아프지 말아야 돼 하면서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로 슬픔을 달랬네.
그리고 이틀 후 자네는 황천강 건너 먼 길을 기어코 떠나고야 말았어.
자네 마지막 가는 자리에 술 한잔 못 올린 것 미안하네.
직장 때문에 자네 발인제만 보고 돌아서야 했으니까... 이해하게.
돌아와 직장에서 자네에 대한 아쉬움과 참회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네.
자네가 잘 부르던 윤현석의 ‘LOVE’란 노래,
‘날 잊지 마, 기억해’란 가사가 생각나는 군.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문학의 끈, 생명이 끈을 놓지 않은 이상 영원히 자네를 기억할 걸세.
그러니 편히 쉬게. 친구여.
산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이승에서 맺힌 설움, 섭섭함, 분노의 마음 다 놓고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만 갖고 가게.
정군칠 시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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