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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문학의 옹달샘

4.3과 나의 문학

강용준 2021. 4. 1. 19:54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하는 화두

강준(극작가/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창작과 비평에 실려 4·3이 처음 공론화되던 해에 나는 제주에서 극단이어도를 창단했다.

당시는 유신정권 치하였고 이어서 전두환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이 아주 엄중하던 때였으니 현기영 선생이 당한 고초는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시대 정신을 천착하는 제주 출신 문인이라면 4·3은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하는 화두다.

평생 글을 쓰더라도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은 두세 편 정도인데 내 희곡에서의 출세작폭풍의 바다좀녜는 모두 4·3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돌이켜 보니 발표한 작품 중 열댓 편 정도가 4·3을 소재 또는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그 아픔의 질곡 속에서 나도 30여 년을 허우적거린 셈이다

제주는 예로부터 외세로부터의 침탈과 저항, 파도와 바람, 돌밭 등 척박한 환경을 일구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탐라 선인들에게서 물려받은 땅으로 작가로서 제주에 태어난 것은 복 받은 일이다.

그 선인들이 남긴 문화, 이를테면 신화와 전설, 민요 등의 구전 설화, 그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냈던 역사와 저항의 사연들, 죽음으로서 지켜냈던 개인의 아픈 서사들이 다 내 문학의 자양분이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어린 시절 할머니와 숙부님들께 들으며 자랐고 무의식 속에 각인된 편린들을 작품 속에 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제주에서 태어나고 생활한 덕이다.

20세기 초중반에 제주에서 태어난 누군들 4·3의 아픔이 없으랴만, 일제 강점기에 권투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내 작은 할아버지는 4·3 때문에 일본으로 피신했다. 숙조부가 조총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연좌제가 있던 당시에는 내 공무 생활에 불이익이 되기도 했다.

4·3은 오늘날에도 진행형이다. 그것이 쉽게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는 한 가족 내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혼재해 있고, 복수가 복수를 낳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해야 했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인척과 이웃 간에도 밀고를 했다. 그렇게 얽힌 실타래를 하나씩 풀면서 해법을 마련해야 하는 게 문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쓴 희곡 7편과 단편 1편을 골라 4·3이 작품 속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 살펴보겠다.

 

좀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해녀의 억척스런 삶과 끈끈한 인간애

 

 이 작품은 1991년 삼성미술문화재단에서 제정한 도의문화저작상(삼성문학상 전신) 희곡부문 당선 작품으로 제주 해녀를 처음으로 연극화하여 중앙에 알린 작품이다.

 해녀는 일본식 표현이고 예로부터 문헌상에는 잠녀(潛女), 좀수(潛嫂), 좀녜라고 했다. 이들은 한때 제주를 벗어나 육지로 바깥 물질을 떠났는데,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을 거쳐 중국, 일본,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진출하여 물질을 했다.

해안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물질을 하다가 현지인과 결혼하여 눌러살기도 했지만, 육지 물질 나갔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해녀들도 있었다. 그런 출도 해녀들의 억척스런 삶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혈육에 대한 끈끈한 인간애를 그리고자 했다.

 

주인공인 남 씨가 4·3 사건에 연루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육지 바닷가를 전전하다가 제주에서 온 해녀들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남해의 어느 해변 마을에 제주 해녀들이 바깥 물질을 온다. 그들은 마을의 민간 집을 빌려 공동생활을 하는데, 거기엔 제주 출신의 남 씨가 딸 청애와 함께 살고 있다. 제주 해녀들은 반가움에 남 씨에게 접근하지만 남 씨는 그들의 행동이 영 마뜩잖아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바깥 물질은 현지인의 텃세와 바다 날씨 사정 등으로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조선에서 기름이 새어 바다가 기름에 덮이는 사고가 일어나자, 그들을 고용한 전주는 난바르를 강요한다. 난바르는 배를 타고 멀리 나가 배 위에서 생활하며 물질을 해야 하는 힘든 노역이다. 난바르를 떠났던 일행이 급작스럽게 돌아오는데 함께 갔던 청애는 사고를 당해 시신도 찾지 못한다. 체념한 남 씨가 고향을 떠나게 된 사연이 밝혀지고, 하나 남은 딸을 찾아 제주로 향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폭풍의 바다

숨겨졌던 진실 속 자아 찾기

 

이 작품은 1993년 한국연극협회가 주관한 창작극걔발 3개년 프로젝트 사업 1차 년도 당선작이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창작지원금으로 서울 문예회관대극장에서 공연을 했고,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아 희곡집을 냈으며, 한국희곡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4·3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정통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제주의 4·3 사건 당시에 군경의 검거를 피해 산으로 올랐던 젊은 지식인들, 그리고 이북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한으로 피신 왔던 서북청년단원들.

서청의 입장에서는 빨갱이라면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시퍼란 서슬에 가족을 살리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변란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숨겨졌던 비화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를 폭풍우 치는 바다에 비유해서 한 여인이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관광 가이드를 하는 딸 윤선이 이 고장 출신인 재일교포 모국방문단의 손성민과 그의 아들 진규을 데리고 온다. 제주의 시골 해안가에서 해녀식당을 운영하는 김경자는 손성민을 보고 과거의 상황을 떠올리며 갈등한다.

한편 김경자와 이혼한 서청 출신인 최순탁은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여 해녀식당에 들렀다가 손성민을 만나게 된다. 과거 김경자는 손성민과 혼인을 약속한 사이지만, 약혼자와 자신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최순탁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되었고...

큰 딸인 최윤정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면서, 손성민의 아들인 진규와 윤선이의 사랑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가정은 일시에 폭풍 속에 휘말리게 되는데 주인공 김경자는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바다를 떠난다는 내용이다.

 

우리의 관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부친의 전비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

 

제주도의 4·3 사건은 당대만이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불신과 반목의 형태로 남아 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안에서 곪은 상처는 쉬이 아물기 어렵다.

당시 토벌대나 무장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행위는 정당했다는 것이고 그걸 사안별로 판단할 기준이 없다.

다행히 노무현 대통령이 공권력에 의한 희생임을 인정하면서 사과했고 이후 사건 진상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그 당시 사욕을 위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던 부친과 그런 부친의 전비에 대해 괴로워하는 자식을 대비시키면서 정의와 양심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었다.

 

뱀굴의 전설을 갖고 있는 왕사리 마을에 이곳 출신 실업인의 막내인 성진이 신혼여행을 온다. 성진은 아버지의 사업체를 마다하고 신문 기자 생활을 하는 인물로 4·3사건을 시리즈로 취재해 소개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향인 왕사리 사건이 신문에 소개되자 편향적 시각으로 본 잘못된 기사라는 항의를 받게 된다. 그래서 그 사건의 실체를 다시 취재하기 위해 신혼여행을 핑계로 왕사리로 왔지만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한편 부친 권태수는 고향에서 선거 출마를 계획하고 있어서 성진의 취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 권태수 소유의 임야에서 유골 세 구가 나온다.

성진을 돕는 인희는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붉은 노트의 존재를 밝히는데...

 

해경 무렵

- 화해, 인간애의 아름다운 하모니

 

 화해는 참회와 용서가 교차해야 가능한 인간애의 아름다운 하모니다.

해안 마을마다 기간을 정해 미역 채취를 금하다가 대개 음력 3월 초가 되면 채취를 허가하는데 이를 해경(解警, 허채, 자)이라 한다. 해경은 마을 잔칫날이다.

 해경은 가족, 인척끼리의 공동 작업이었다. 해경 때 채취한 미역은 전부 개인의 수익이 되기 때문에, 해경 철이 되면 멀리 나간 가족들을 불러 도움을 요청한다. 이들은 해녀가 채취한 미역을 뭍으로 끌어올리는 일을 하는데 이를 마줌꾼이라 했다마줌꾼은 매우 힘든 일이었으나, 일가친척이 얼굴을 마주할 수있는 기회여서 흔쾌히 모여들었다.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바다는 몸살을 앓고 있다. 바다는 해녀의 일터이자 생명줄인데, 바다를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끊임없는 투쟁은 인간의 역사 그 자체다. ‘작지왓이라는 땅을 매개로 인간들의 욕심과 갈등이 피를 섞은 친척 간에 이루어지면서 비극은 해결될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 혼자면 이 세상이 무슨 소용인가? 해경을 통해 바다는 어울리며 살라고 가르치는데....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인데, 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누구 하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없다. 준열한 참회가 없으면 비극의 역사는 되풀이된다. 집착은 욕심을 잉태하고, 욕심은 죄악을 낳지만, 참회에 대한 진정성이 용서의 선결 조건이다.

 제주 사람에게 43이란 치유되지 않은 아픔의 역사다. 가해자건 피해자의 가족이건 그 앙금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다. 한마을에 살고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도 누구도 꺼내기 두려워하는 얘기를 바다의 끈질긴 생명력과 해경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통해 화해를 시도해 보고자 했다. 이기적 사고가 팽배한 사회에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막순이라는 인물의 인생 역정을 통해 험난한 세파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인생을 그려보고 싶었다.

 

더 복서

- 정의란 이름의 폭력 그리고 인간애

 

1980년 국보위가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전국의 불량배 4만여 명을 붙잡아 순화교육 시킨다는 명목 하에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삼청교육대에는 어린 학생들을 포함하여 무고에 의한 시민들도 다수 잡혀갔다. 교육 과정에서 사상자들도 생겼고 맞아서 병신이 된 자도 생겼다.

이러한 잘못된 공권력의 발동은 19484월 제주에서도 자행됐다. 당시 조병옥 경찰국장은 제주도 사람을 모두 빨갱이로 치부하여 공중에서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버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들에겐 그것이 정의였다.

난리를 피하여 산으로 오른 사람들은 모두 폭도 취급을 했고 토벌대는 그들과 마을 사람들을 분리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하고 군경가족을 제외한 모두를 학살한 경우도 있었다. 회복될 수 없는 폭력이었다.

그 와중에 51일 제주시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불붙는 마을과 무장대 추격 장면을 공중 촬영까지 했다. 각본에 의한 사건이라는 자명한 증거를 스스로 제공한 셈이다.

이 작품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소재로 했으나 인물이나 사건 자체가 작가의 추리와 상상에 의한 완전한 창작물이다. 사건의 전모를 고발하려는 의도보다는 잘못된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과 그 당시 가해자들이 40년 후 만나 화해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때의 아픔은 당사자들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면서 현재 진행형이다. 화해는 가해자의 진정한 자기 고백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의였다고 믿는다. 평행선의 확인이지만 그 자식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싶었다.

언제나 폭력은 힘 있는 자의 만용과 과욕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링에서의 복싱을 폭력이라 하는 사람은 없다. 복서 출신 권창렬의 인생역정을 통하여 가족과 인간애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랭보, 바람구두를 벗다

시대 정신에 대처하는 두 젊은 지성인의 태도

 

어느 시대 건 지식인들은 시대 정신이나 시국에 대한 관점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거나 행동으로 앞장선다. 그것이 지성인의 역할이며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문인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붓으로 저항을 한 시인이 있는가 하면, 자연 도피하며 외면하는 부류가 있었고, 앞장서서 선동하며 부역을 한 부류들, 아예 붓을 꺾은 자들도 있었지만, 남의 일인 양 무심한 부류들도 있었다.

역사의 흐름은 늘 반복된다.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거대 서사는 이미 승부가 났지만, 주류세력과 반동세력,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부자와 빈자, 가해자와 피해자, 갑과 을 등 다원적 복합구도의 갈등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제주의 4·3을 배경으로 상반된 가치관을 가진 두 젊은이의 행동을 통하여시대 정신에 대처하는 지성인의 역할과 책무를 생각하며 구상했다.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는 현실 세계의 종교나 도덕관, 인간을 속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저항했다. 그리고 시인은 천리안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돌았다.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베를레느는 랭보를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내라고 했다.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시인이라는 의미다.

현실에서 늘상 도피해 온 랭보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과 현실에 맞닥뜨리면서 자신의 꿈을 향하여 무모하게 돌진한 정국이라는 인물을 대비시키면서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꽃피었던 사랑의 완성과 화해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

 

돗추렴

- 육식본능에 의한 폭력의 양태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을 죽여서 음식을 얻기에 거기엔 생명 살상의 폭력이 필수적이다. 고기를 먹는 인간은 태생적으로 폭력적 DNA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근현대에 와서 강대국의 패권주의나 공권력을 이용한 정권 탈취에 의해 전쟁과 인명 살상의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인권이나 생명존중이란 어휘 자체는 의미가 없다.

돗추렴은 필요한 사람끼리 돈을 염출하여 공동으로 돼지 잡는 일을 말한다.

지금은 양돈업체가 많아서 돼지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과거 제주의 시골집에서는 집안의 경조사나 살림살이를 위하여 돼지를 길렀다.

돗추렴하는 날은 마을 잔칫날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살육의 공개 현장이다.

해체된 고기의 필요한 부분들을 나누어 가지는 일은 원시사회에서 이어오는 전통적 공동체 행사였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건들이 또한 이런 약육강식의 폭력적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사건과 관련된 이웃들은 서로 인척이라는 끈으로 얽혀 있고, 숨겨졌던 애증의 관계가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드러나게 되면서 해결점을 찾기가 무망해졌다. 사건 당사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의 상처는 후세들에게 유산처럼 남는다.

폭력이 남긴 후유증으로 황폐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나누어 가지는 대동 행위를 통하여 화해와 상생의 희망을 그려보고자 했다.

 

자서전 써주는 여자

-에로스적 욕망과 죽음

(*소설집 오이디푸스의 독백에 실린 문학평론가 이덕화 님의 글을 옮겼다)

 

강준 같은 제주도 출신 작가는 4.3 사건을 소재로 한 번쯤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지척에서 경험한 혹은 실제 겪은 부모들와 형제들이 친척들이 생존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제주도 출신 작가가 4.3 사건을 객관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또 쉽지 않을 것이다. 4.3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도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일상 밖, 허구의 세계 속에서 만나는 대표적 평범한 인물, 장충삼 회장의 이야기이다.

자서전 써주는 여자인 화자를 통해서 장 회장의 삶이 조명된다. 해방이 된 후 북한에서 공산당에 의해 모든 재산을 탈취당하고 남하한 부르조아 출신의 청년, 장충삼은 빨갱이 잡는다는 말에 경찰이 되고 제주도까지 와서 저지른 서하리 제삿집 사건의 가해자이다. 또 서하리 사건의 피해자의 당사자가 화자의 시아버지이다. 그 사건으로 남편은 아버지도 못보고 유복자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기막히게 얽힌 두 사람! 남편은 간암으로 장 회장은 췌장암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남편의 간 이식 수술비 때문에 시작된 회장의 간병과 자서전 집필!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장충삼과 집안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자서전 쓰기를 포기할까 갈등했지만 그건 남편의 죽음을 불사해야하는 아픔이다. 간 이식 비용을 마련해 남편을 살리겠다는 강한 의지로 포기하지 못한다. 또 수필가면서 주로 간병을 해서 생계를 이어간 화자에게 자서전 쓰는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이다. 명목상의 수필가로서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일이며 살맛나게 하는 일이다.

욕망은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모든 동물을 매 순간 살아있게 해주는 능동적인 힘이다. 심리적 허함을 채워주는 자서전 써주는 일은 화자에게 활력을 주는 일이다. 장 회장이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반성한다는 선의의 뜻을 꺾고 싶지 않다. 자서전 집필로 남편의 간 이식 수술은 성공했지만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생사를 달리한 남편, 남편의 죽음 이후 더 자서전 쓰는 일에 매진, 자서전의 완성은 두 사람에게 성취감을 주고 여한이 없는 행복감에 도취된다. 인간은 가장 행복할 때 죽음을 생각한다.

 

회장님께 간식과 와인 한 잔을 가져다가 드리고 나서 전 욕실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습니다. 거기서 샤워를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희열이 피어오름을 느꼈습니다. 해냈다는 성취감, 두둑하게 받은 원고료, 그리고 책이 출간되고 나서 나타날 반응 등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엷은 흥분까지 느꼈습니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고, 적당히 따스한 물줄기가 살갗에 부딪히는 쾌감을 즐기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샤워 꼭지를 잠그고 입구 쪽을 보니 열려있는 문 앞에 잠옷 차림의 회장님이 휠체어에 앉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회장님하고 소리쳤지요.

그런데 회장님은 피하기는커녕 애절하게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난 이승에서 할 일을 다 한 것 같소. 이제 곧 죽어도 여한이 없소.”

([자서전 써주는 여자], 97)

 

위의 인용문에서 회장은 화자가 일을 성취한 행복감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한껏 들떠 샤워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 도취 몰입한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을 보면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소유를 통해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욕망하는 것은 에로스이다. 죽음을 앞 둔 남자는 순간적인 쾌락을 통하여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심장 경색 증세까지 있는 회장에게 격한 감정은 금기였음에도 회장은 화자를 욕망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통하여 죽음에 이른다.

화자는 글 쓰는 수필가로서의 최고의 보람을 자서전 집필을 통해서 이루어내었고, 장 회장은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반성하는 자서전 집필을 통해서 삶을 완결하고 싶은 열망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창조와 생산을 이루어내게 된 것이다. 화자는 원수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 장 회장의 자서전을 집필함으로써 장 회장의 생을 이해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동안 생계 문제가 시급해 명목상의 수필가로서 능동적 글쓰기를 하지 못했던 화자는 자서전 집필을 통해 가장 창조적인 시간을 보내었으며, 장회장은 죽음의 목전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반성하는 참 를 만나는 기쁨의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 서로를 욕망하고 탐닉의 시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장회장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하고 화자는 장회장을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감옥행을 한다.

이 작품의 장회장이나 화자는 일상 속에서 흔히 만나는 인물이지만 허구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평범한 인물이다. 일상에서는 원수 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집필하지 않을 것이며 일관되게 원수일 뿐이다. 두 인물이 자서전 집필 후 성취감을 얻었다고 정사로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실제 죽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제주문학 제86호(2021년 봄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