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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옹달샘

혐오의 집단화와 '비판적 개인'의 공감의식

강용준 2021. 6. 25. 11:41

 

제16회 제주포럼 문학세션 장면- 왼쪽부터 은희경, 고명철, 장이지

2021년 6월 24일 제주해비치호텔 앤드 리조트에서 열린 제16회 제주포럼 문학세션

'경계를 넘어, 지속 가능한 미래로'라는 주제로 고명철(문학평론가, 좌장), 은희경(소설가), 장이지(시인)가 현장 발제를, 루민(중국, 소설가), 가토 아쓰코(일본, 문학평론가)가 화상으로 발제를 했다.

다음 글은 은희경 소설가의 발제 전문이다.

 

 

지속 가능한 평화, 포용적 번영

혐오의 집단화와 비판적 개인의 공감의식

은희경

 

1

 

팬데믹 이후 세계 곳곳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 난민 수용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배타적 태도라든가 전 세계적인 극우 지도자들의 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세계는 점점 보수화되고 편견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거기에다 코로나라는 재난이 닥쳐오자, 레이시즘이 지성이나 윤리의 여과 없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조건이 힘들어지면 관용이나 관대는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 자리를 혐오와 이기심이 파고든다.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는 젠더와 세대간, 그리고 정치 성향, 지역과 계급간 갈등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공동체적 사회 인식과 공공윤리에 앞서서 그릇된 편견과 편협한 이기심이 사회 전반에 걸쳐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어떤 사회적 이슈가 발생하든 시민사회의 공동선보다는 각자 개인의 손익만을 내세우는 게 현실이다. 또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타자를 혐오한다. 더욱 위험한 것은 그 갈등과 반목을 정치적 혹은 상업적 의도를 가진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가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균형 잡힌 논의가 필요한 페미니즘은 개인 플렛폼과 SNS의 클릭 수를 높이는 자극적 소재로써 편 가르기에 열을 올리고, 기득권 세력의 배타적인 이기심이 공정으로 포장되어 계급을 더욱 공고화 하고 있다.

 

나는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인문적 사유의 결핍과 정체성 찾기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 세계적인 보수화, 신자유주의로의 재편 이후 인간의 존엄과 자유, 다양성과 고유성에 대한 질문은 방법을 잃은 듯하다. 자유 체계의 중심을 돈과 효율에만 두기 일쑤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탐문하지 않고 그 대신 성별, 나이, 학맥과 인맥. 경제 공동체 등으로 단순 분류하며, 적극적으로 세력화된 집단에 자신의 사유를 의탁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과 다르거나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에 점점 배타적이 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주도하지 못한 결핍과 불안감은 폭력성마저 띠게 된다. 혐오의 오류에 갇히는 것이다.

 

2

 

문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공부하는 일이다. 우리가 행복을 바란다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해 탐문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타자에 대한 공부라고도 할 수 있다. 모르는 것, 즉 무지야 말로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2020년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BLM 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는 로맹 가리가 그의 소설 <흰 개>에서 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 말을 잘 들어봐, 친구, 흑인을 물지 말라고는 하지 않갰어. ‘흑인만물지는 말라는 거야그 말은 흑인만 공격하도록 훈련된 흰 개에게 하는 말이다. 그 개는 레이시즘만을 함축하는 게 아니다. 무언가 공격하도록 훈련됐다는 점에서 인간의 타자에 대한 배척과 증오를 상징하기도 한다. 폭력의 역사는 혐오적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혐오는 인간에 대한 공부의 부족, 즉 타자에 대한 공감의 부재에서 온다.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인용하자면, 우리의 심장은 결코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타자를 수용해야 할까. 어느 쪽 지점에 공감의 지렛대를 받칠 것인가.

 

태생적인 소수자이자 단독자인 로맹 가리에게 그것은 개인의 개별성이다. 그의 신랄한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흑인 개자식은 흑인이기 때문에 개자식이 아니라. 개자식이기 때문에 개자식인 거야.” 그는 상대를 흑인 혹은 백인으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으로 본다. 그럼으로써 백인의 죄의식과 위선뿐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거나 폭력으로 되갚으려는 흑인들의 복수심까지를 또 하나의 인종주의로 통찰하고 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 이전에 편을 나누는 것 자체가 편견의 시작이므로, 전체주의를 벗어나 개인의 정체성으로 타인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적 전체주의에 맞섰던 조지 오웰의 비판적 개인이라는 개념과도 궤를 같이 한다. 1930년대 대공항기 영국 탄광노동자의 실업 문제를 취재한 르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조지 오웰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내세우는 한편 비판적 개인들의 연대를 주장했다. 그는 이념을 떠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 파시즘과 산업화를 전체주의라는 하나의 맥락으로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를 믿든 안 믿든, 육체노동자든 사무직 노동자든,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든 상관 없다. 서로 연대해서 맞서야 할 대상은 인간을 계급화하여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개인의 존엄성을 빼앗는 파시즘, 즉 분열과 혐오의 분류법이다. 조지 오웰이 내세운 인간다움상식적인 양식이라는 다소 나이브 하게 들리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신자유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

 

나는 세력화한 이기주의비판적 개인의 개념을 마틴 스콜세지의 다큐멘터리 <도시인처럼>에서 프랜 리보위츠가 말한 거울의 비유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리보위츠는 요즘 독자들은 책이 거울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작가의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공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작가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만이 아니라, 열고 나가서 다른 세계와 마주치게 만드는 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타자를 고유성을 가진 개인으로 바라보고, 나와 타자의 다름을 알고 또 포용하는 공감의 세계이다. 타자를 고유성을 가진 개인으로 바라보고 나와 같아서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달라서 공감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며 진정한 휴머니즘일 것이다. 문학 또한 나와 다른 인간을 만나게 하고 이해하게 만들며, 결국은 나와 달랐다고 생각했던 그 인간에게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공감의 여정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차이는 인종 차이도 지역 차이도 남녀 차이도 문화 차이도 신분 차이도 세대 차이도 종교 차이도 아니고, 바로 개인차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각자 어떤 고유성을 가진 개인인가에 상관없이 곧바로 그런 틀 속에 구겨넣어진다.” 이것은 내가 <소년을 위로해 줘>라는 장편소설에 쓴 구절이다. 나는 문학이란 인간에게 고유성을 되돌려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 많은 기존의 사회 시스템과 대중 매체, 뉴미디어가 쏟아내는 무책임한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를 억압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프레임은 자극적인 편 가르기에 의해 점점 강화되고 그 구성원으로만 취급받는 동안 인간은 로맹 가리의 흰 개처럼 그 프레임에 의해 자기라고 주입된 사람으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학 속의 사건과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자신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의심하고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그야말로, 얼어붙은 내면이 문학이라는 도끼에 의해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불편함을 삶에 대한 통각이라고 표현한다. 문학은 그 통각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치유도 시작된다. 삶에 대한 통각은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며 그 대상에는 당연히 자기 자신이 우선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문학은 소수자와 약자, 그리고 악인까지를 포함해 인간의 모순된 내면과 비극을 이해하려는 일이다. 우리는 타자를 고유성을 가진 개인으로 대하기 위해 인간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업테이트 해야 한다. 물론 공감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신형철을 인용해보자면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이다.”

 

너무 당연해서 간과하기 쉬운 말이지만 문학의 출발은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어떤 고유한 의미를 품고 이 우주에 도착한 라는 개인의 존재 증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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