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은교에 은교는 없다.
박범신의 최초의 장편 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을 읽은 건 1980년대 였다.
읽은 지 하도 오래 된 작품이라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화려한 문체와 감각적 묘사가 마음을 끌어서 『풀잎처럼 눕다』, 『돌아눕는 혼』까지 구해 읽었었다.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를 대표하는 작가였고, 그의 작품들은 신문연재로, 영화화로 흥행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독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잘 아는 작가다.
『은교』는「살인당나귀」라는 이름으로 네이버에 연재된 소설이라 하는데,
이런 소식은 영화 『은교』를 보고 나서 처음 알았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작품의 원작가가 박범신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제서야 소설을 구해 읽었다.
영화 마지막 부분이 너무 싱겁게 끝났기 때문에 확인을 하고 싶어서다.
소설 『은교』는 작가가 밝힌대로 존재의 내밀한 욕망을 다룬 작품이다.
나이 듦에 대한 슬픔이랄까, 외로움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서라 할 수도 있고,
늙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젊은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항변하는 말처럼 들린다.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사랑을 추하다거나 혐오스럽게 보는 시선 자체가 잘못 되고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주입식 교육을 탓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적요, 이름부터가 쓸쓸하고 고요함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이 바로 쓸쓸함과 고요함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남녀관계(섹스)라는 건 욕망의 분출이라기보다 외로움과 슬픔을 채우는 행위로 파악한다.
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암 투병 중인 시점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과음으로 죽음을 재촉하는 막다른 골목에 접한 노인이
17살 난 고등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생에 대한 애착때문일까?
아니면 우연하게 되살아난 인간으로서의 욕정 때문일까?
그 대답은 마지막 은교한테 남긴 편지에서 알 수 있었다.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는 나를 알았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보면
‘인생은 덧없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면서 한권의 노트를 남기고 그것을 자신의 사후 1년 뒤 공개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그것은 자신이 허위적인 삶과 질투의 화신으로 살인자라는 것을 밝혀 사후 자신을 영웅화 우상화하는 것을 반대한다.
자신이 쓴 시가 인생의 진실한 의미를 담지 못한 허위이며,
자신의 위선적인 삶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고해성사 했다.
이적요는 고고한 시인이지만, 갈망하면서도 결코 취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탐한 가장 가까운 제자를 살인할 수밖에 없는 그는,
더 이상 신비로운 존재도 아니고 위선자였다는 걸 고백함으로써 자기해탈을 얻은 것이다.
『은교』에 은교는 없다.
거기엔 이적요라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 인간으로써의 욕망에 대한 갈등과
본능에 대한 성찰, 그리고 존재에 대한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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