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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지울 수 없는 악마의 문신

강용준 2015. 6. 22. 13:27

 

책을 읽다보면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좋은 글귀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자신이 드문드문 떠오른 생각들을 적는 창작노트에 메모해 둔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게 자신이 생각해 낸 글귀로 착각하고 작품에 활용해 쓴다.

그게 호기 있는 등단 초기 시절에야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지만 유명세를 타게 되면

과거의 작품들이 재조명을 받고 표절이라는 게 밝혀진다.

그게 지울 수 없는 악마의 문신처럼 남게 된다는 걸 당시에는 모른다.

그래서 작가들에게는 끝없는 자기검열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표절은 양심의 문제를 넘어 죄악이다.

작가는 한 줄의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수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세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짜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헌데 그런 결과물들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건 영혼을 도둑질하는 일이다.

표절은공명심 뒤에 언젠가 자기를 파멸시킬 지도 모르는 악마의 발톱을 숨기는 일이다.

요즘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분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이 문제는 15년 전에도 제기가 되었지만 그때는 공단출신의 전도가 유망한 신인,

돈벌이가 될 만한 작가라는 것 때문에 출판사가 앞장서 그걸 막았고 양식 있는 평론가들도 침묵했다.

헌데 이제 세상은 사회관계망(SNS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이 촘촘히 구축된 백주의 세상 아닌가.

 몇몇이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세상에서 그 과거의 사건은 문학인 영역을 떠나 사회의 이슈가 되었다.

작가 본인은 표절 사실을 부인한다. 그걸 인정하면 작가 생명이 끝남은 물론 후폭풍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책을 사준 독자들에게만 믿음을 호소해서 끝날 일도 아니다.

작품이 인쇄되어 나오면 이미 그건 상품이며 사회의 공적 자산이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걷는 문인으로서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표절의 경험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유명인들의 논문, 양식 있는 학자들마저도 논문 표절이 일상화 되어 있는 사회다.

유명 문인이라서 이렇게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지만 주변 문인들 작품에도 이런 표절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외국의 작품 중에서 좋은 글귀를 도용하는 사례가 많고, 동료 문인의 것을 모방하거나 글자 몇 개를 슬쩍 바꿔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미 문인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그들이 저질러놓은 분탕질은 기성문인들에게 오욕으로 남는다.

희곡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희곡을 읽지 않고 공연을 통하여 관객과 만난다는 점에서 남의 작품에 제목을 바꾸고

작가 이름을 바꿔 통째로 표절하여 공연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필자의 경우다.

몇 년 전 서울에서 활동하는 희곡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기도 어느 극단의공연을 봤는데 희곡집에서 읽은 내 작품과 내용이 꼭 같더라는 거다.

공연을 소개하는 인쇄물에서 줄거리와 작중 인물을 봤는데 내 작품이 틀림없었다.

주변 동료 작가들이 더 난리였다.

이런 작가와 희곡을 우습게 아는 풍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법에 호소하라고 했지만

지방의 열악한 연극 환경을 잘 아는 필자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희곡작가협회 저작권담당자가 중재하여 작품사용료를 일부 받긴 했지만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느꼈던 일이다.

남의 것을 사용하더라도 인용 출전을 밝히면 되는데 제 혼자 눈감아 버림으로써

지울 수 없는 악마의 문신을 남기는 인간의 어리석움이란.

 

제주논단(제주일보, 2015.6.22.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