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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옹달샘

제주의 유배인, 그들이 남긴 문학

강용준 2016. 7. 5. 17:38

 

 

 

제주문학관 건립을 위한 세미나 주제발제

2016. 7. 5. 제주문화예술재단 6

주최 제주문인협회

 

제주 유배인, 그들이 남긴 문학

강용준(작가, 전 한국문인협회제주도지회 회장)

 

들어가며

 

유배란 조정에 죄를 지은 중죄인을 당장 사약을 내리기 전에 먼 곳으로 안치시키는 오형 중의 하나다. 죄의 경중을 따져서 본인의 고향에서만 생활하게 하는 본향안치(本鄕安置), 멀리 떨어진 제주 같은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것을 절도안치(絶島安置)라 하고 그 중에서도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둘러치는 위리안치(圍籬安置), 더 중한 죄인은 집 주변을 탱자나무 등 가시덤불로 쌓아 외인들의 출입을 금지 시켰던 가극안치(加棘安置) 등이 있었다. 제주는 수륙천리에 교통 또한 불편하고,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유배지로는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조선 왕조 약 500년 동안에 200여 명의 사람들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들 중에는 1722(경종 2)에 유배된 신임과 같이 84세의 최고령자가 있었는가 하면, 소현세자의 3남 석견(石堅)4세로 최연소자였다.

유배자의 신분도 광해군을 비롯하여 왕족과 외척·문무양반·학자·승려·환관 및 서울의 도적과 북방 국경지방을 넘나 든 죄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정조 때 유배되었던 조정철은 무려 29(1777~1805)이나 제주목 · 대정현을 오가며 귀양살이했다.

유배인의 신분은 왕족이거나 학자, 고위 관직의 정치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나 학식이 유배지의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었다. 그리고 최익현의 유한라산기, 김춘택의 별사미인곡등은 고등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실리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출제되는 등 주목을 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 유배인들 중에서 김정, 이건, 김춘택, 김윤식이 남긴 문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유배 문학의 범주

 

유배 문학이라 할 때 그 범주가 보는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제주에 유배 왔던 사람의 전 생애 작품을 포함시키는가 하면, 어떤 이는 제주에서 쓴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 즉 유배인 문학과 유배 문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암 송시열은 제주에서 100일 동안 유배를 살다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한다. 그는 공자, 맹자에 비길 만큼 성인이라는 유학자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라 송자라는 칭호를 받았고 사후 그가 쓴 글을 모은 송자대전이 왕조 주도로 간행되었다. 헌데 이를 유배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또한 조선 시대에 제주도에 목민관으로 파견된 사람이 280명이나 되는데 이들은 유배인이 아니면서 문학적 자료들을 많이 남겼다. 가령 제주 목사로 좌천 발령을 받았으나 치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가 경남 사천으로 유배 간 규암 송인수(송시열의 종증조부)는 오현(五賢)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이를 어느 범주에 넣을 것인지, 또한 이형상의 제주도에 대한 지방지 남환박물, 탐라순력도1601년 역모 사건 때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된 청음 김상헌은 일기체 형태의 기행문 남사록(南槎錄)을 남겼는데 이를 양반 문학이라 하여 따로 장르를 설정하여야 할 것인지 제주문학관이 건립되게 된다면 유배문학의 성격 규정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유배인이 남긴 문화

 

제주도로 유배되는 경우는 거의 종신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유배형에 있어서 일정한 기한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정세 변화에 따라 사면되어 석방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배되기도 했다. 때문에 제주도에서 10여 년의 유형생활을 보낸 사람도 많았다. 그들 중에는 중종 때의 김정처럼 사사되는 경우도 있었고, 광해군이나 보우처럼 유배지에서 종명을 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사면된 뒤 벼슬길이 열려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경우도 있었고, 혹은 1807(순조 7)의 조정철처럼 유배지였던 제주도에 목민관으로 부임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 시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왕족이거나 그 당시 상류사회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주 주민들에게 언어와 행동, 일상생활을 통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의식주의 개선, 언어와 예절, 습속 등을 유교식으로 순화시키기도 했다.

왕족 이건과 김정, 송시열, 최익현 등의 석학과 김정희, 김춘택 등 문화예술인들의 유배는 제주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송시열은 유배 기간 동안 제주에는 없었던 생강 농사를 지었고 제주 향교에서 책을 가져다 읽으면서 독서에 매진했다.

구한말의 개화사상을 깨우친 김윤식은 유배 생활동안 제주 출신 유림 10여 명과 귤원시회를 만들어 활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는 유배되어 있는 동안 제주도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를 설립하고 근대 여성학교인 신성여학교 개교 등을 이끌어 개화의 씨앗을 뿌렸다. 또한 일본에서 특수 작물의 씨앗을 들여와 제주 원예농업 발전에 기여하였다. 사후에도 그들이 남긴 사상, 문학, 예술 등은 제주의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안기어 귤림서원이 생기고 문하생들이 중앙 관계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제주의 민란들, 방성칠 난이나 이재수 난 등에 유배인 본인이나 후손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가장 혹독한 유배 지역이었던 대정 지역이 민란의 중심지 였다. 또한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었던 것이 현지인들이었으므로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다. 실제 제주의 3읍에 유배인들이 많이 몰리자 도적이 성행하고 그로 인해 말을 기르기가 힘들 정도라서 죄인들을 육지로 보내달라고 상소하는 일도 있었다.

 

 

주요 유배인의 제주관련 작품

 

김정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충암 김정(1486~1520)은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조광조와 함께 미신타파·향약시행 등에 힘썼다. 그러나 기묘사화(1519) 에 연루되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왔다.

그의 적거지는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였는데, 결국 그는 신사무옥(1521)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중죄에 처해져 1521(중종 16)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최후를 마쳤다.

제주풍토록은 김정이 1519(중종 14) 11월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하여 진도에서 제주도로 이배되었던 15208월부터 사사(賜死)되던 152110월까지의 생생한 체험기록이다. 충암집 권4에 실려 있다.

제주풍토록은 김정이 36세 되던 1521년 외조카로부터 제주도의 풍토와 물산에 대해 질문을 받고 답장으로 써 보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어숙권의 패관잡기를 인용하며 외질에게 답장을 하면서 제주도의 풍토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다는 표현과 책 내용에 외질을 지칭하는 군이라는 표현으로써 알 수 있다.

 

제주풍토록은 제주도의 기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적거지인 금강사 옛 절터의 생활과 심회를 적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구성은 크게 기후 및 지리적 환경, 풍물과 습속, 언어와 사회상, 토산물과 특산물, 유배지의 환경과 정신적 상황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주의 기후에 대해서는 겨울에도 덥다. 바람이 세어 병들기 쉽다. 비오는 날이 많아 물기가 많다. 가옥들은 기와집이 거의 없어 정의현과 대정현의 관사도 띠로 지붕을 덮었고 세력 있는 품관인 집 외에는 온돌도 없으며 집이 깊고 침침하다.고 적고 있다.

제주의 풍속에 대해서는 이들은 사신(祠神)을 숭상하여 내력이 올바르지 못한 신당(淫祠)300여 개가 있었고 무당이 많다. 또한 뱀을 신으로 받들고 있어, 뱀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들은 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또한 세력이 있는 자들은 진무(鎭撫), 여수(旅帥), 서원이었고 약자에 대한 강탈과 관리들의 탐학이 심했으며 처를 데리고 사는 승려가 많았다. 척박한 땅에 지형은 분간하기 어려웠고, 샘과 우물이 적었는데 짠물이 나오는 샘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말소리가 본토와 다르다는 것을 밝히며 알아듣기 어렵다고 했다.

들짐승 가운데 여우, 호랑이, 토끼, 곰 등이 없고 산물로는 노루·사슴··참새·전복·오징어가 많으며, 산나물로는 삼백초와 고사리가 가장 많고, 해조류로는 미역, 가사리, 청각 등이 있으며 사기그릇과 유기는 없다고 하였다. 토산물로는 표고와 오미자가 가장 많이 난다고 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서 소금이 부족하여 진도나 해남 등지에서 무역해다 쓰고 있는 점이 이상하다고 했다. 당시 귤과 유자는 9종류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김정은 청귤을 제일로 쳤다.

김정의 눈에 비친 16세기 초 당시 제주의 사회상은 문명의 암흑지대였다. 학문 하는 이가 거의 없었고,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여 정의가 외면당했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생리가 판을 치며, 무당들이 사회적 비리에 편승하는 등의 반문명의 양산지로 보인 것이다.

김정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유배지 주변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생의 의욕을 포기하지 않고 과실수를 심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남몰래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고 밝혔다.

대부분 지방의 풍토기 편찬의 의도는 백성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자의 편의성에서 출발하였으며 이는 정치적 목적에 제공되었다.

그러나 제주풍토록은 이러한 성격에서 벗어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풍토지이다. 한편, 다른 기행문에서는 볼 수 없는 문장의 비장함을 맛볼 수 있어,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수필로 평가된다.

이외에 그는 제주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 수필로 도근천 수정사 중수권문, 한라산 기우 제문등이 있다.

 

 

이건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제양일록(濟襄日錄)

 

이건은 선조의 손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강(子强), 호는 규창(葵窓)이다. 1628(인조 6) 아버지인 인성군이 진도로 귀양 가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이건의 형제들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8년 만에 강원 양양으로 이배되었고 1637년 복직되며 풀려 나왔다. ··화에 모두 뛰어 나서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다.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는 이건이 1628년부터 1835년까지 8년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주도의 기후와 토지상태·풍습·생활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유배지인 제주도를 배경으로 창작한 유배한문수필이다. 작자의 문집인 규창집(葵窓集)은 이건의 막내아들인 화릉군(花陵君이조(李洮)에 의해 1712년 초간본, 1729년 중간본이 목활자로 간행되었으며 권5 잡저(雜著)제양일록(濟襄日錄)제주풍토기가 수록되어 있다.

제주풍토기는 탐라(耽羅)의 위치와 조류를 이용해 찾아오는 뱃길(1)로 시작해서 신당, 뱀 신앙 등 민간신앙(2), 기후와 관의 민폐(3), 목축상황과 목자의 어려움(4),농경상황과 농사법(5,6), 짐녀와 제주여인의 풍속(7), 귤의 종류와 진상상황(8), 해산물과 잠녀(潛女)의 풍속 및 관원들의 갖가지 횡포(9, 10), 민간 신앙의 일면(11), 동식물 현황 (12), 탐라개국신화인 삼성신화(13), 헌마로 부총관에 오른 김만일과 둔마에 관한 이야기(14) 등을 망라하여 견디기 힘들었던 유배지 제주의 생활을 정리(15)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건이 기록한 제주의 모습은 구렁이와 뱀을 조상의 신령(府君神靈)으로 여겨 죽이지 않고, 화복을 빌고 길흉(吉凶)을 점치는 신당(神堂)에 대한 기록과 삶의 어려움의 일면을 보여준다.

 

가장 괴로운 것은 좁쌀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 도성에서 날아오는 소식으로는 고향소식을 꿈속의 넋으로나 부쳐보는 수밖에 들어볼 길이 없다. 질병이 닥쳐도 다만 어쩔 수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침이나 약을 시행해 볼 방도가 없다.

 

그는 왕족으로서 호의호식했었는데 쌀이 나지 않은 제주도의 생활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고, 병이 나도 그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제주 섬이 온 나라 유형지 중에서 중죄인들을 묶어두는 가장 적당한 곳으로 표현했다.
또 제주민에 대한 관가의 침탈은 여름에 한라산 정상에서 얼음을 채취케 하고, 견디기 힘든 목자와 잠녀에 대한 기술에서 보인다. 대정현에 간혹 논이 있다고 하지만 토지가 매우 척박하여 쌀이 귀하고, 이를 대신하여 밭벼(山稻)를 심어도 경작에 어려움이 많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귤의 종류와 진헌(進獻)의 실상, 물통을 등에 지고 나르고 여럿이 모여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방아를 찧는 섬 여인의 모습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12단은 제주도의 동식물 현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제주도에는 곰·호랑이·승냥이·이리 등의 악수(惡獸)가 없고, 토끼·여우·까치 등의 동물이 없다. 식물 중에는 생강(새앙)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건은 김만일이 제공한 백마를 타고 온 섬을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겪은 내용을 제주풍토기로 남겼다. 그가 유배를 끝내고 돌아갈 때에 백마를 배에 실어 육지로 보내면서 자신의 처량함을 빗대어 백마를 보내며란 한시를 지었다. 그리고 제주도와 양양(襄陽)에 유배되었던 전말을 기록한 제양일록(濟襄日錄17세기 서귀포시 지역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제양일록에는 1633년에는 존자사(尊者寺)에 올랐지만 한라산 정상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적고 있다. 같은 해 8월에는 산방(山房)을 들러 구경하고, 불교의 신앙심이 깊은 좌수 김진(金珍)을 만나기도 했다. 유배를 사는 동안 제주 섬에 천연두가 돌아 누이와 함께 많은 사람이 죽은 사실을 제양일록(濟襄日錄에 기록하고 누이를 곡하며란 한시를 남겼다.

또한 양양으로 이배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출륙금지령 때문에 함께 떠나지 못하는 제수와 아이들을 위하여 지은 시 동생의 아이와 헤어지며 시에 차운하여가 남아서 안타까운 이별 장면을 전하고 있고, 형과 동생이 부인인 제주 여인을 만나는 애처로운 장면을 아들과 어미의 만남이란 시로 읊고 있다. 그들의 형제들은 제주 여인을 만나 혼인을 했지만 그는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가 유배지가 바뀌어 제주를 떠나는 날, 화북포구까지 따라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별을 슬퍼하는 여인에게 써준 송별연에서 기녀에게 줌이라는 한시는 일품으로 남아 있다.

제주풍토기17세기 초반 서귀포 지역의 풍속과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며, 제주도 민속을 연구하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조선 중기의 개인적인 한문수필로서 수필의 형식을 잘 갖춘 작품으로, 16세기에 쓰여진 김정(金淨)제주풍토록과 비교하여 17세기 당시 제주도의 풍토와 상황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한편 18963월 이건의 초고 전부를 편집하여 규창유고(葵窓遺稿)가 발간되었는데 여기에는 제주에서 지은 시 오언절구 5, 칠언절구 29, 오언율시 18, 칠언율시 26수가 들어있다.

 

 

김춘택의 별사미인곡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은 조선 후기 문인이다.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이다. 김춘택은 부친인 김진구가 1689(숙종 15)1694(숙종 20)까지 제주 동천에 적거하는 동안 부친을 따라와 모시며 체류했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제거되자 집안이 크게 화를 입어 여러 차례 투옥 또는 유배되었다가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풀려났으나, 서인이 다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져 노론이 탄핵되자 유배되었다. 1706(숙종 32) 세자(世子경종)를 모해(謀害)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어 동천, 산지, 남문 청풍대 등지에서 살았다.
이 체류와 적거 기간 동안 많은 시문을 지었는데, 그는 제주에 12년간 살았다. 그의 유배기간이 길어지자 기록에 남길 글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글을 썼다.

그는 당대에 문장으로써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런 평을 받았다. 그의 스승이자 작은할아버지인 서포 김만중이 한글로 지은 구운몽(九雲夢)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또한 송강 정철의 속미인곡을 모방해 한글로 별사미인곡을 지었다.저서로는 북헌집(北軒集)207책과 만필(漫筆) 1책이 있다.

특히 북헌집(北軒集)12~16수해록문(囚海錄文)30편이 있는데 제주도의 풍물과 자신의 귀양살이의 쓰라린 정경을 묘사한 자위와 체념, 회고로 점철된 시문집이다. 이밖에 초년록, 취산록, 은귀록에도 유배기간 중에 쓴 시가 있다.

별사미인곡은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 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만하다. 작자의 문집인 북헌집 北軒集4 논시문(論詩文)에 의하면 작자가 제주도 마지막 거처인 제주성 남쪽의 집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거기에 남성 안에 집을 옮기고란 시에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 여인을 김춘택은 지기라고 하며 자주 어울렸으며 그 여인의 모습을 별사미인곡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보소 져 각시님 셜운말ᄉᆞᆷ 그만하오

말ᄉᆞᆷ을 드러ᄒᆞ니 셜운줄 다 모를쇠

인년인들 ᄒᆞᆫ가지며 니별인들 갓탈손가

광ᄒᆞᆫ젼 ᄇᆞᅟᅵᆨ옥경의 님을 뫼셔 즐기더니

니ᄅᆞᄅᆞᆯ ᄒᆞ였거니 ᄌᆞ앙인들 업ᄉᆞᆯ손가

ᄒᆞ다 저문날의 가ᄂᆞᆫ 줄 설워마소

엇더타 니 ᄂᆞ몸이 견흘ᄃᆞ전혀없ᄂᆞ

광ᄒᆞᆫ전 어ᄃᆞ머오 ᄇᆞᅟᅵᆨ옥경 내 아던가

원앙침 비취금의 뫼셔본적 ᄇᆞ히없ᄂᆞ

내 얼골 이 거동이 무엇로 님길고

질ᄉᆞᆷ을 모ᄅᆞ거니 가무야 더 니ᄅᆞᆯ가

엇언지 님향ᄒᆞᆫ ᄒᆞᆫ 조각이 이 ᄆᆞᄋᆞᆷ을

하ᄅᆞ리 심기시고 셩현이 가라치서

뎡학이 알펴잇고 부월이 두ᄒᆞ이셔

일ᄇᆞᅟᅵᆨ번 죽고죽어 뼈가 길니된 후ᄌᆞ도

님 향ᄒᆞᆫ 이 ᄆᆞᄋᆞᆷ이 변ᄒᆞᆯ손가

나도 일을 가저 ᄂᆞᆷ의 업ᄉᆞᆫ 것만 어더

부용화 오ᄉᆞᆯ 짓고 목난으로 ᄂᆞᄆᆞᆺ사마

한ᄅᆞᆯ긔 맹셰ᄒᆞ여 님 섬기랴 원이러니

조물 싀긔ᄒᆞᆫ가 귀신이 희즈온가

내 팔ᄌᆞ 그만ᄒᆞ니 사ᄅᆞᆷ을 원망ᄒᆞᆯ가

내 몸의 지은 죄를 모ᄅᆞ니 긔더 죄라

나도 모ᄅᆞ거니 ᄂᆞᆷ이 어이 아도던고

한ᄅᆞ하 살ᄆᆞ인가 이 몸의 되녀이셔

(이하 생략)

 

이보소 저 각시님 서러운 말씀 그만 하오

말씀을 들어보니 서러운 것이 끝이 없소

인연인들 한가지며 이별인들 같을 것인가

광한전 백옥경에 님을 모셔 즐기다가

이별을 하였거니 재앙인들 없을 것인가

해 다 저무는 날이 가는 것을 서러워마소

정녕코 이 몸을 견줄 데가 전혀 없네

광한전이 어디 있던가 백옥경을 내가 알던가

원앙침과 비취금을 모셔본 적이 없네

내 초췌한 얼굴과 거동으로 어찌 임을 사랑할꼬

길쌈을 모르거니 춤과 노래 더 이를가

무엇이 어떻던지 님 향한 일편단심

한 조각 마음은 하늘이 주시고

세상 이치 통달한 성인이 가르치시어

끝없는 지옥은 눈앞에 시퍼런 도끼는 뒤에 있다하더라도

일백번 죽고죽어 뼈가 가루가 될 지언정

님을 향한 이 마음이 변할리야 있을 것인가

나도 일을 가져서 남이 없는 것만 얻어서

연꽃으로 옷을 짓고 목련으로 꽃신을 신어서

하늘에 맹세하여 남 섬기는 것이 소원이건만

조물주의 시기인가 귀신이 훼방을 놓는 것인가

내 팔자가 이러니 어찌 사람을 원망할 수 있으랴

내 몸의 지은 죄를 몰라서 더 큰 죄인가

나도 모르는데 남이 어이 다 알리요

하늘이 이 몸을 그리되게 하셨는가

(이하 생략)

 

 

별사미인곡4음보 1행으로 계산하여 모두 79행이며, 율조는 3·4조가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다. 가사의 분량은 송강의 양미인곡을 모방하여 창작하였으나 구성은 속미인곡과 같이 대화체로 되어 있다.

대화체 구성이라는 점에서 속미인곡에 가까우나 내용에 있어서는 사미인곡의 영향도 보인다. 군주에 대한 원망은 거의 보이지 아니하고 간절한 충성을 읊었다는 점에서 연군가사의 면모가 두드러지며, 유배가사로서도 가사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스스로 이 가사를 지어놓고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옛날에 임금에게 사랑받던 여자들이 애오라지 버림받은 내용을 이야기 하는데, 그 대사가 송강 것에 비하여 더욱 완곡하고, 그 가락은 더욱 쓰라리다

 

그러나 언어의 구성은 능란하다 하여도 양미인곡에 비하여 정제되지 못한 점이 있다. 국문학사상 미인곡계 가사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는 가사로서 의의를 지니며,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조 역사의 반영으로서도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

 

김윤식은 1887(고종 24) 529일부터 별세하기 20일 전인 19211231일까지 35년간의 자신이 체험한 사건들을 한문 일기로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이 음청사(陰晴史)속음청사(續陰晴史)이다. 김윤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고 창간사를 쓴 언론인이어서 그런지 일상의 소소한 것까지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김윤식은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폐위 조칙에 서명한 일로 189712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제주에 왔다. 귀양 왔다가 1901년 신축년에 이재수의 난이 발생하면서 7월 전라도 무안의 지도(智島)로 이배되었다.
속음청사중 권8, 9와 권10의 상 부분은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된 18971221일부터 전라도 지도로 이배된 1901716일까지의 4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의 일기이다.

8~121896(건양 1) 아관파천 이후 제주도와 지도(智島)에서 귀양살이할 때의 제주민란과 러·일 관계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관해 기록하였다. 101901619일까지는 제주도에 유배 중일 때의 일기이다. 두 차례에 걸친 제주도의 민란(民亂)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며, 그 다음부터 제121907626일까지는 지도로 옮긴 시기의 일기로 특히 각종 신문을 토대로 하여 국내외의 정세에 관해 기록하였다.

여기에 나타난 제주에서의 삶은 모순에 차 있고, 자조적이며 향락적이었다. 당시 제주 사회의 분위기는 중앙 정객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했다. 비록 유배인의 신분이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중앙의 권력자였으며 그런 착각 속에 살았다.

그는 제주에 유배와 투옥된 지 40일 만에 풀려나 성안에 있는 교동(현 관덕로 옛 박종실 집안)에 있는 김응빈의 집에 적소를 마련해 옮긴다. 당시 제주 판관을 지낸 김응빈은 감옥으로 그를 찾아가 친분을 쌓았다. 수시로 면회를 하며 제주 관아의 상황을 알려주고 제주 유지들과도 친분을 맺도록 주선했다. 김응빈의 집에 머물고는 도저히 유배인이라고 볼 수 없는 중앙정계의 고관대작으로서 누렸던 서울에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누렸다. 1898220일 당일 속음청사에 기록된 일기를 보자. 이때는 방성칠난이 일어나는 등 제주사회가 어지러운 때였다.

 

집채가 높고 널따랗고 높아 시원하며, 화려하고 좋아 책상탁자도 정결했다. 화원에 산보할 곳도 있었고 주인의 접대도 아주 후하였으며 내놓는 음식도 풍미가 입에 맞아 서울 맛이 안 나는 게 없다. 적객의 신분으로는 더욱 분에 넘친다.(이하 생략)

 

앞에서 본 유배인들과는 전혀 다른 적거지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윤식은 자연스럽게 유배인 모임을 만들어 좌장 역할을 했다. 제주의 상류층 유지들과 어울려 귤림시회를 만들어 시회 후에는 퇴기들을 불러 유흥을 즐기었다. 시회는 화분에 매화꽃이 피었다는 이유로, ‘마당에 핀 국화가 아름답다는 구실로 아침부터 모여 밤도 모자라 새벽닭이 울 때까지 술을 마셔대는 모임이었다. 이들의 모임에는 기녀들이 동석했다. 이 시회는 1898422일 첫 모임을 가진 후 이재수난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귤림시회가 제주도 한문학 발달과 중앙과 지방의 문화교류에 이바지한 했다는 이도 있다.

속음청사의 내용 중 제주 적거 부분에서는 당시의 국내외 정세, 제주도 유배인의 생활, 부패한 관료의 행태, 과다한 부세, 제주도의 농업과 어업, 제주의 풍속과 인심, 그리고 김윤식과 교류했던 제주인 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김윤식이 유배 와 있는 동안 제주도에서 일어난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민란이 유배인과 연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속음청사는 김윤식의 사생활을 기록한 일기이기는 하지만 시대 상황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객관적인 판단력과 기술 태도는 이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준다. 이 책은 김윤식의 일생이 말해주듯이 한말의 파란만장한 격변의 역사를 조명해 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제주유배 중 지은 시만을 모아 영도고를 펴냈는데 문학적, 정서적으로 가장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가 펴낸 시문집 운양집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책 중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아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나오며

 

유배인들이 남긴 문학 작품에는 가사, 수필, 한시, 시조, 서간문 등이 있다. 위에서 기술된 것 외에 대표적인 가사 작품으로 이진유의 속사미인곡, 안조언의 만언사가 있고, 수필의 대표적 작품으로 홍유손의 정의관사 중수기, 존자암개구유인문, 정온의 대정현관안 서, 대정현 동문안에 위리된 내력을 적은 기문, 덕변록의 서문등의 작품과 최익현의 유한라산기등이 있디. 김정희의 한글과 한문 서간문과 한시, 송시열, 유혁연, 조관빈의 시조와 정온, 이익, 광해군, 송시열, 신임, 임관주, 조정철의 한시 작품들도 있다. 이들 작품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장르로서의 제주 유배문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규창집김익수 역. 제주문화원, 2010

북헌집김익수 역. 전국문화원총연합회제주도지회. 2005

국역 속음청사제주문화원, 1996

제주유배인과 여인들, 김순이 표성준, 여름언덕.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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