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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글을 낳는 집에서

강용준 2024. 1. 1. 09:02

2023년12월 글을 낳는집 설경

 

작가의 산실

 

담양, 글을 낳는 집에서

 

강용준(극작가/ 소설가)

 

왜 조용한 집을 놔두고, 낮선 곳에서 글을 쓰는가?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작가마다 취향과 습관이 다 다르다. 어떤 작가는 자기 집 안방에서 글을 쓰는 서재로 갈 때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외출복 차림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집을 떠나야 글이 된다. 노마드 처럼 새로운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색다른 정보를 얻고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는 즐거움이 내겐 자극이 된다. 이것이 집을 떠나는 이유다, 사슬처럼 얽힌 인간관계와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일들에 얽매어서는 작품에 집중할 수도 없다.

 

십여 년을 전국에 있는 문학 레지던시를 찾아다녔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인제의 만해마을과 증평의 21세기 문학관은 각자 나름의 운치와 특장을 지닌 창작실이었다. 세 번 이상 다녔던 원주의 토지문화관과 이천의 부악문원도 환경의 기운을 받아 글 샘이 솟구치는 곳이다.

레지던시 창작집필실이 좋은 이유는 무상으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글 쓰는 일에 전념을 할 수 있어서 특히 엉덩이로 글을 써야 하는 소설가나 극작가들에게는 안성맞춤의 공간이다. 이런 곳에 머무르면서 베스트셀러 작품을 생산해 내는 작가들도 많고. 그런 작가들과의 교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창작실 이용의 장점이다. 내 대부분의 작품도 이런 레지던시를 찾아다니며 창작한 결과물이다.

 

전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문학 레지던시가 있지만 전남 담양에 있는 글을 낳는 집’(이하 글집)은 금년 처음으로 찾았다. 물론 모든 작가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공간을 얻는 것은 아니다. 수요자가 많으니 심사 과정을 거쳐야 입주가 허락된다. 다행히 필자는 10월부터 3개월의 입주를 허락받았다.

레지던시마다 고유하고 매력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도시와 가까운,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편의 시설이 있는 여타 문학 레지던시와는 다르게 글을 낳는 집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 인가도 많지 않고 편의점도 없는 곳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시내버스도 하루 다섯 차례만 글집 앞을 지나간다. 사실 인적 네트워크를 절연하고 자신을 자발적으로 유배시키는 곳을 찾는다면 담양의 글을 낳는 집이 적격이다.

담양군에 속한 곳이면서도 담양읍과는 40분 거리에 있어 오히려 광주가 더 가깝다. 화순, 순창, 고창, 나주, 곡성, 구례가 한 시간 거리에 있어 유명한 사찰, 경관과 운치 좋은 곳이 많아 심신을 수련하기에도 적합한 곳이다. 글집이 있는 대덕면을 지나 고서면을 돌아서면 소쇄원과 식영정, 가사문학관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선현들의 글 향기가 화수분처럼 피어올라 떠다니는 곳이다.

 

담양은 예로부터 가사문학의 출발지이며 중심지였다. 가사문학의 효시라는 정극인의 상춘곡이 담양에서 만들어졌고, 면암정을 지어 놓고 이황을 비롯한 많은 유림 제현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냈던 송순의 고향이기도 하다. 송강 정철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산별곡을 지었던 곳도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는 담양의 식영정이다. 송순이 잠시 벼슬길에서 물러났을 때 조성했다는 죽녹원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고 했던가. 문사들이 남긴 자취를 찾아다니다 보면 그 정경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런 곳에 글집을 만든 분이 남도에서 나고 자란 김규성 시인이다. 현직 시인이기에 입주 문인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그래서 입주 작가만이 아니라 입주 이력이 있는 작가들을 초청하여 인간적 정감을 교류하고 창조적 상상력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문학 기행을 주도한다. 자연스럽게 지역 작가들과의 정보교류가 이뤄지고 심신을 연마하는 도량이 된다. 약선요리 전문가인 사모님의 손맛은 이곳을 다녀간 문인들에게 정평이 나 있다. 직접 채소를 가꾸고 조리하여 매일 갖가지 맛있는 반찬으로 입주 작가의 건강을 염려한다.

 

입주 기간이 서로 달라 교차하는 그 사이에도 전국 각지에서 온 시인과 극작가, 동화작가, 소설가, 평론가를 만났다. 입주해 있는 동안에 책을 발간한 작가의 출판기념회를 열어 축하도 하고 가끔 문학적 이슈에 대한 담론도 펼친다. 남녀노소 없이 문학으로 하나 된 다양한 삶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도 글집만이 가진 특장이다.

 

계절의 전령사들이 창문을 두들기며 문안 인사를 하고 창을 열면 산 능선이 한걸음에 달려온다. 만덕산은 작가들이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길면 긴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자신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한다. 산책을 하다 보면 막혔던 생각들이 저절로 풀릴 때가 많다. 레지던시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작가에게 특이하게 글 기운을 주는 곳이 있다. 적어도 내게 글집은 글빨이 터지는 궁합이 맞는 곳이다.

최근 글집에서 생산한 작품이 대박이 났다거나 글집을 거쳐간 시인이 큰 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요행이 아니라 꾸준히 연마한 작가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으리라.

 

산중에 있으면 계절도 시간도 속절없이 흘러간다. 단풍이 한창일 때 왔는데 간밤엔 소리없이 폭설이 내렸다. 개안을 위하여 면벽 수도하는 스님처럼 글눈이 떠지길 기다리며 오늘도 작가들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자판을 두들긴다. 어두운 세상을 두드려 깨우는 목탁처럼 지혜의 한 구절을 얻기 위하여.

 

 

한국연극 2024년1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