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화해 방법을 찾는 다양한 화법
강용준(극작가)
1. 들어가며
현기영의 「순이삼촌」으로부터 촉발된 4․3에 대한 제주 연극계의 본격적인 예술적 담론은 1989년 4․3추모제 때 올려 졌던 마당극 <사월굿 한라산>(공동창작/ 김수열 연출)에서 시발점을 갖는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서 4․3을 소재로 한 공연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제주 출신 작가 장일홍의 <붉은 섬>, <당신의 눈물을 보여 주세요>, 강용준의 <폭풍의 바다>와 외지 출신 작가들도 4․3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을 쓰고 공연했다. 2000년대 이후에 와서는 「놀이패 한라산」이 꾸준히 4․3의 사례별 각론을 연극으로 제작하여 진상 규명과 치유와 상생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한편 2007년부터는 4․3문화예술제의 일환으로 ‘4․3평화 마당극제’가 창설되어 4․3에 대한 담론과 역사적 의미를 전국적으로 확장시키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
2. 「놀이패 한라산」의 마당극
1989년에 공연된 <사월굿 한라산>은 제주도민들이 1948년 4․3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이 당한 고통과 수난을 표출함으로써 40여 년 금기로 남아있던 제주4․3항쟁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불을 당겼다. 이 작품은 제2회 민족극한마당에 참가하여 서울예술극장 한마당에서도 올려졌다. 한편 1998년 4․3 50주년을 맞아 10년 만에 다시 제작하여 제주에서는 물론 일본 교토, 오사카에서 초청 공연되었고, 그해 과천에서 열린 ‘98세계마당극큰잔치에 참가 했으며, 부산, 목포에서도 공연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백조일손>은 1950년 예비검속에 의해 4․3항쟁 당시 피난입산자 혹은 1947년 총파업관련자, 심지어는 우익단체 간부 등이 대거 예비검속 당해 집단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를 고발한 작품이다.
1992년에는 <꽃놀림>을 제5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 올려 정공철이 ‘최우수 광대상’을 수상했는데, 제주4․3항쟁 당시 한 날 한 시 400여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북촌리사건’을 고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03년에 재공연 되었다. 1993년에는 <살짜기 옵서예>(김경훈 작/ 한경임 연출)로 제6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 참가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드리워진 제주4․3항쟁 당시 학살의 흔적을 짚어본 작품이다.
1995년에는 제8회 원주대회에서<목마른 신들>(현기영 원작/ 장윤식 각색/ 김수열 연출)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심방의 생애사를 통해 제주4․3항쟁 당시 희생자의 혼이 깃든 가해자 자손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4․3의 상흔을 드러낸 작품이다. 1996년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지목해야만 살 수 있었던 4․3당시의 상황을 그린<4․3의 기초>(장윤식 작/ 김수열 연출)를 공연했고, 제주 무속 중 ‘양씨아미본풀이’를 기본 토대로, 제주여인의 현재적 삶을 그린 <동이풀이>(문무병 작/ 연출)로 ‘과천 세계마당극 큰잔치’에 참가했다.
그밖에 서북청년단의 입장에서 4․3 당시 서청의 횡포를 고발한 작품 <서청별곡>(장윤식 작/ 김수열 연출), 4․3항쟁의 마지막 빨치산의 모습을 그린 <사월굿 사팔생오칠졸>(김경훈 작/ 한경임 연출), 4․3항쟁 당시 엄청난 살육이 결국 광기의 역사임을 증언하는 <사월굿 광기>(김경훈 작/ 김수열 연출)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놀이패 한라산」은 전국민족극한마당과 제주4․3평화마당극제에 꾸준하게 참여하면서 매년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여 공연함으로써 화해와 상생의 방법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3. 다양한 시도의 무대극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 내외 작가들에 의해 4·3을 소재로 한 연극이 무대화되기 시작 했다.
장일홍의 <붉은 섬>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일대에서 1947년 3월부터 1949년 6월 이덕구 사살에 이르기까지의 사건을 거의 다 포괄한 연대기적 서사극이다. 한라산 빨치산의 무장 봉기가 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임을 밝히면서, 미군정의 폭압과 군경 토벌대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다. 기존의 4ㆍ3문학이 개인이나 가족의 수난사를 다름으로써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 4ㆍ3을 현재진형형의 사건으로 설정하였다. 4ㆍ3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하며 개개 사건을 나열하여 봉기와 학살사태의 선명한 구도를 대비시켰다. 이 작품은 1992년 제주에서 열린 제10회 전국연극제에 제주대표 작품으로 공연되어 장려상을 받았다.
장일홍의 <당신의 눈물을 보여 주세요>는 4ㆍ3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통해, 4ㆍ3의 비극성이 살아남은 인간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ㆍ3의 후유증이 심각하고 이는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거꾸로 역설하고 있지만 4ㆍ3 문제 해결이 어려운 과제임을 극을 통해 표출했다. 이 작품은 1992년 서울 성좌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강용준의 <폭풍의 바다>는 4ㆍ3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태된 아픔을 인간다운 삶을 찾는 한 여인과 가족들의 삶을 통하여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잔상을 투영하고 있다. 4ㆍ3으로 인한 인물들 사이의 갈등과 가족공동체 해체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갈등은 이념뿐만 아니라 그 뒤에 감춰진 사욕으로 인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4ㆍ3의 아픈 상처들과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만, 궁극적으로는 통합의 지향점을 제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3년 한국연극협회가 주관한 창작극개발 3개년 프로그램 작품으로 선정되어 1994년 「극단 전망」(심재찬 연출)에 의해 서울 문예회관과 제주문예회관에서 공연되었다.
1995년 서울 소재의 「극단 로템」은 <느영나영 풀멍살게>(하상길 작/연출)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4ㆍ3의 상처를 안고 반세기를 모질게 살아온 제주 여인의 인생 역정을 그린 연극이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원동마을 사건, 1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모슬포 섯알오름 사건 등 4ㆍ3의 비극적인 사태를 드러냄으로써 4ㆍ3의 진상규명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혼은 제주민이 풀어야 할 과제임을 되새기게 했는데 전반적으로 사건의 정곡을 파헤치기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안이하게 화합을 도모했다는 인상을 줬다.
2003년 「극단 목화」의 <오금아 밀어라 앞산아 당겨라>는 원로 연극인 오태석이 쓰고 연출 했다. 4ㆍ3과 6ㆍ25를 거치면서 소박한 제주의 양민들이 겪는 고통을 다루었는데, 이 연극은 4ㆍ3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거나 상상하려는 노력보다 연극적 허구성에 치중한 작품이다. 4ㆍ3은 연극적 언어를 풀어나가는 단순한 소재로 사용했고, 쇠를 녹여서 도구를 만드는 ‘디딤불미’ 연희를 통해 화해의 분위기를 유도하지만, 실체적 진실을 담은 4ㆍ3의 역사적 기억과는 동떨어지게 느껴졌다.*
한편 2013년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제주출신 김봉건의 연출로 서울 충무아트홀과 제주아트센터에서 공연되어 4.3의 진실을 알리는데 한 몫을 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박찬식 『기억 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 강창일 외, 역사비평사 2004
4ㆍ3과 평화 21호(제주4.3평화재단, 2015년 10월 25일) 게재
'연극나무 가지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화를 모색하는 제주 연극축제 (0) | 2017.12.15 |
---|---|
2015년 제주의 연극 (0) | 2016.07.16 |
35년 연극인생 연극인 부부 이야기 (0) | 2015.09.16 |
신인 연기자의 등장과 연출력이 돋보인 무대 (0) | 2015.05.03 |
2013년 제주연극의 현황과 과제 (0) | 2014.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