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연극나무 가지치기

35년 연극인생 연극인 부부 이야기

강용준 2015. 9. 16. 09:23

 

35년 연극인생 연극인 부부 이야기

- <늙은 부부 이야기> 공연에 부침

 

1. 「극단이어도」에서의 만남

 

1981년 가을이었던가 초로의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모 고등학교 교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분은 필자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아들이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이 없어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막막하니 연극을 통하여 성격을 개조시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본인의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했더니 아들을 잘 좀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아들은 이미 극단에 입단해 연습을 하고 있던 강상훈이었다. 대학교 1학년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당시는 「극단이어도」가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체 연습실이 없어 무용학원의 일과가 끝나면 빌려서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연습을 하던 때였다. 그때 극단에는 동갑내기 영문과 여학생이 이미 입단해 있었는데 아주 명석하고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하던 정민자였다.

남자처럼 호방한 성격의 정민자와 내성적인 강상훈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둘이서 연인사이가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정민자와 강상훈은 한 방을 쓰게 되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인해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정민자가 임신을 하고 배가 점점 불어가자 더 이상 갈라놓을 수 없음을 알고 늦은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그해가 1987년이었는데 하객들은 대부분 연극인들이었다. 결혼은 했지만 둘은 수입이 없었다. 그나마 정민자가 애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집세와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출산으로 인해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면서 애기 분유 값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연극을 하면서 얻는 수입이란 보잘 것 없었다. 강상훈은 직장에도 다녀보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오래 견디지 못했다. 가장으로서 산불감시원과 막노동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지만 연극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다. 필자가 극단 대표직을 내려놓으면서 강상훈이 대표를 맡았다. 그는 의욕적으로 팔을 걷어부치며 망치질과 페인트칠을 손수하며 소극장을 만들었다.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사설 소극장이 만들어졌고, 소극장을 통하여 극단 이어도의 활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소극장이 생기면 한 작품을 장기간 공연이 가능하고, 연기자의 연기력도 높아지면서 관극회원도 생기게 되었다. 당시 중앙로 빌딩 4층 꼭대기에 마련된 연극전용소극장은 20여 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작은 공연장이었지만 연극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제주에 연극 붐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예술을 사랑하는 제주의 젊은 지성들에게는 낭만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소극장 운영의 어려움, 계속되는 공연의 적자, 단원들과의 불협화음 등으로 그들은 12년 동안의 「극단이어도」생활을 접고 독립의 길을 택했다.

 

2. 「극단세이레극장」과 「세이레 아트센터」

 

1992년 제주에서 제10회 전국연극제가 열리고, 이 대회를 기화로 제주에 연극 붐이 일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연극단체들이 대여섯 개가 창립을 하며 활발한 연극 공연이 전개되었다.

「극단이어도」를 나온 강상훈은 1992년 10월 예술기획 「세이레」를 발족하여 그 산하에 「극단세이레극장」을 창단했다. 세이레라는 명칭은 3․7일 즉 웅녀가 인간이 되기를 원하면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캄캄한 동굴에서 기다린 통과의례 인고의 시간을 의미한다. 「극단세이레극장」은 1993년 <위기의 여자>로 동문로 「자유무대」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다.

한편 이때에 창단을 축하하는 공연도 이루어졌는데, 경남 창원 「극단 미소」의 <장돌뱅이>, 전북 익산 「극단 토지」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서울 「사물놀이」의 <뜬쇠>, 그리고 제주 「『자유무대」의  <저수지>가 참가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제1회 소극장축제를 개최했는데 경남 창원 「극단 미소」, 제주 「극단 무」, 「자유무대」, 「다솜」, 「세이레」등이 참가했다.

「극단세이레」도 창단한 후 지방 연극의 살길은 소극장운동임을 깨달았지만 소극장을 만들고 문 닫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가 처음 문을 연 소극장은 1993년 제주시 동문로 제주동초등학교 건너편 뒷골목 지하였는데, 그 당시 「극단자유무대」와 통합하면서 자유무대소극장을 인수하여 <세이레소극장>으로 개명했다. 초기에는 육지의 극단을 초청하여 전국소극장 축제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운영난에 시달리다 5년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됐다. 그들은 전문 연극인으로 살기 위하여 작은 봉고차에 무대, 소품, 의상 등을 싣고 도내는 물론 육지 순회공연까지 다녀올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이후 제주시 용담동 제주사대부고 들머리로 거처를 옮겼으나 경제적인 한파와 전국적인 연극 활동의 침체로 인하여 암울한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셋집 한편에 살림집을 꾸미고 한편엔 학원을 꾸리며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 나갔다. 지하에는 소극장도 만들었다. 낮에는 웅변, 영어, 미술을 가르치고 저녁엔 연극연습을 했지만 여기서는 이렇다고 할 만한 공연의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그러다 신제주로 자리를 옮기고 다시 소극장을 만들었는데, 잘 나가던 백화점에 둥지를 틀었다가 백화점이 부도나는 바람에 손을 털고 나오기도 했다. 

2007년 신제주 코스모스 사거리 지하로 극단을 옮기고 네 번 째로 소극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 소극장 공간을 예술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세이레아트센터」를 창설했다. 이후 「세이레아트센터」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주부연극교실, 인형극 교실, 토요연극교실을 열면서 여성을 주제로 한 연극 창작 등의 사업을 기획하면서 활동했다.

그 사이에 자식도 3명으로 늘어났다. 형편은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관에서 지원하는 갖가지 공모 사업에 선정이 되고 자체프로그램 운영도 지원을 받았고 학교의 방과 후 활동사업에도 참여하였기에 아이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세이레아트센터」는 지하의 넓은 공간을 여러 부분으로 나눠 다각적으로 활용했는데,  ‘소극장’은 각 60석 규모를 갖춘 1관과 2관으로 나누어 운영했다. 1관은 어린이극장의 공연장이며 단원들의 연습실과 예술교육장소로 활용했다. 2관은 정기공연장으로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면 한 달 이상 장기공연하기 때문에 상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로비에는 북카페와 갤러리를 만들어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고, 사무실, 세트 및 소품 보관실, 의상보관소, 간이 숙소와 주방이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들은 자체 공연만 겹치지 않으면 타 단체에게 대관을 했다. 그렇게 7년 동안 운영되던 소극장은 2013년 태풍‘나리’에 직격탄을 맞고 많은 것들을 잃게 되었다. 물에 잠긴 지하 극장을 복구하기엔 엄두를 낼 수 없는 정도였다.

그들 부부는 결국 큰 결단을 내렸다. 현재의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오라파출소 뒤편 교회 건물 지하 넓은 공간으로 소극장을 옮기기로 했다. 중기자금도 빌리고 조금씩 부어오던 적금도 깨서 소극장 공사에 투자했다. 단원 몇 명과 육지에서 온 공연장 건축 전문가와 함께 한 겨울 추위 속에서 자체 공사를 하면서 「세이레아트센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4년 개관공연을 가졌다.

현재의 아트센터는 120석의 객석을 갖춘 소극장에 북 카페와 휴게실, 분장실과 의상실, 소품실, 자그마한 주방과 사무실까지 갖춘 문화복합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두 부부는 어린이극장, 주부연극교실, 직장인 연극교실, 청소년 연극교실 등 기획교육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꿈다락토요문화학교’ 사업으로 신화를 활용한 어린이예술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3. 「극단세이레극장」의 성과

 

극단세이레는 소극장운동을 펼치면서 레퍼터리 형식의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소극장 레퍼터리 작품으로 <위기의 여자>, <콜렉터>, <굿나잇,마더>, <북어대가리>, <배비장전>, <늙은 부부이야기>,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등이 있고, 소극장축제 참가작품으로 <사랑을 찾아서>, <타피스트>, <출구>, <밥>, <방울소리>, <하늘에 핀 등불>,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를 공연했다. 2009년부터는 세계명작산책시리즈를 제작 공연하고 있는데 <백조의 노래>, <아일랜드>, <수업>, <잘 자요 엄마>, <하녀들> 등이 그 성과물이다.

그리고 소극장운동 작품으로 <외할머니>, <북어대가리>,  <다시 부르는 사모곡>, <심청구출작전>등을 공연했으며, 최근에 와서 정민자 연출에 의한 여성연극시리즈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길 위에 서다>,<두 번 한 일, 세 번이라고 못해>, <가희의 외출>, <여자의 방>,<엄마의 여행> 등을 창작 공연했다. 그리고 제주신화를 연극화하는 작업도 펼치고 있는데 <천년의 사랑 백주또>, <농사와 사랑의 여신 자청비>등을 무대화 했다.

한편 극단세이레는 전국연극제와는 인연이 없는 듯하다.

그것은 여느 지역에서처럼 지역예선대회 집행부의 텃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몇 번 참가한 본선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타 지역 극단과의 지속적인 교류, 주부연극교실 운영을 통한 연극 교육과 연극 인구의 확산은 기억해야 할 업적이다, 2010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전문예술단체로 지정을 받아 공연장 상주공연단체의 자격을 가지면서, 상주단체 지원사업의 공연뿐만 아니라 예술전용공간 지원사업, 문화예술육성사업 등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제주의 대표 극단으로서의 스펙을 쌓고 있다.

 

4. 연극인생 35주년 기념 공연 <늙은 부부 이야기>

두 부부가 같은 무대에 연기자로 선 경우는 연극 초창기를 빼고는 거의 없다. 한 사람이 연출을 맡으면 한 사람은 연기자로 무대에 섰다. 그간에 주변에서 같은 무대에 서라는 권유가 여러 번 있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그래서 35년이 되는 해 큰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이 <늙은 부부 이야기>는 2010년인가 세이레에서 무대화 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생의 황혼에 찾아온 노인들의 마지막 사랑이야기다.

‘젊은이들의 첫사랑이 주는 풋풋함은 없지만 ‘죽음’의 언저리에서 시작된 사랑은 그래서 더욱 애달프고 가슴시리다. 젊은이들처럼 화려한 이벤트나 열정적인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두 노인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과 새로운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프로그램에 실린 연출의도에서 그들의 연극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연극을 시작한 지 올해가 35년째이다. 그동안 힘든 일도 많고 보람 있었던 일도 어찌 없었겠는가마는 무엇보다도 벌써 35년인가 하는 회한이 든다. 소극장운동을 꿈꾸며 소극장을 문 열고 닫고를 다섯 번이나 했으니 그만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세이레아트센터를 열고 남은 인생을 여기다 묻자고 다짐도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연극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이번에 자기점검을 하려한다.

지역에서 연극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35년이나 꾸준하게 해 왔냐며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35년 동안 한 우물을 파면서 이만큼 밖에 이루지 못했냐는 자책을 먼저 하게 된다. 고생도 많이 했는데, 해마다 집세걱정에 단원들 출연료 걱정에 아등바등하며 살았는데, 이만큼밖에 못 이루었다.

주위에서는 둘만의 연극도 기획해보라는 권유가 많아왔다. 30, 33주년 하면서 미루다보니 35주년이나 됐는데 한편으로는 보여드리고 싶다. 35년 같은 연극작업을 하면서도 처음 같이 무대에 오른 건 단 한 작품이다. 그 후로는 연출과 출연으로 참여했지, 그래서 용기를 내어 같이 연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작품 고르다보니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인들 이야기만 고르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나이가 벌써 55세나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좋은 작품으로 잃어버린 관객들을 무대로 돌아오게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작품을 준비한다.‘

한편 정민자는 kBS제주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설문대할망’으로 정기 출연하고 있으며, 강상훈은 KBS1TV 주간 프로그램 ‘보물섬’에 고정출연하고 있다. 오늘도 그들은 무대에 선다.

이들 부부가 연극인생 50년이 되는 해에 자기들 이야기를 작품으로 쓰고 무대화 하어 「늙은 연극인 부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공연하여도 충분히 감동이 있을 것이다. 기대해 본다.

 

삶과 문화(제주문화예술재단, 2015년 9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