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7일
제주 아젠토피오레컨밴션센터에서 열린 <헌마공신 김만일과 시대정신>
주제발표문
헌마공신 김만일과 시대정신
강용준(극작가/소설가)
1. 제주는 왜 말의 섬인가
가. 천사방성과 몽골
1273년 고려의 적통을 주장하는 삼별초가 제주에서 항몽 항쟁을 벌이다 여몽연합군에 의해 패퇴하였을 때, 몽골은 제주도를 고려의 통치권에서 제외하며 관리를 파견하여 1백년 동안 직접 통치했다. 왜 그랬을까? 일반적으로 일본을 정벌하려는 야심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몽골은 제주가 말의 섬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하늘의 별들을 28개 구역으로 구분하고 대표적인 별들을 수(宿)라고 했다. 그들을 7개씩 묶어 동서남북 4개 방향으로 나누었는데, 이들 중 맨 처음 등장하는 동방 7수의 별자리를 연결하면 용 모양이 되므로 이를 청룡 7수라 했다. 이 청룡 7수 가운데 네 번째 별자리가 방성인데, 방성은 네 필의 말이 하늘의 수레를 이끈다 해서 천사방성(天駟房星)이라 불렀다.
이 천사방성이 비추는 곳이 제주라는 것을 일찍부터 몽골 사람들은 믿었다. 그래서 1273년 여몽연합군이 삼별초의 난 평정 후, 몽골은 다루가치를 파견하고 제주를 직접 통치하면서. 1276년 몽고마 160필을 이끌고 말을 기르는 하치들이 제주에 입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기른 말이 적국인 명나라로 반출되는 것을 거부하며 1374년 난을 일으켰는데, 이 목호(牧胡)의 난이 평정되기까지 1백 년 동안 제주의 문화를 지배했다.
하치의 수는 한때 1,700명이나 됐으며, 난이 평정된 후 이들은 중산간에 모여 살면서 테우리의 원조가 됐다. 이들이 남긴 문화는 아직도 제주의 언어나 정신문화 속에 흔적이 남아있다.
그들이 가지고 온 당달마, 대완마가 제주 토종의 말과 교배되면서 우수한 종마가 탄생되었다. 김만일은 이들의 특성을 파악하며 섬이라는 환경 속에서 명마를 생산하여 조선 최고의 마 산업 경영자(CEO)가 됐다.
나. 호종단과 마혈
전설에 의하면 진나라 시황제는 어느 날 하늘을 보다가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발견한다. 그래서 점성가에게 물은 즉 방성이라 했다. 방성은 말의 별이므로 이곳에서 말의 주인인 세상을 호령할 영웅이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관인 호종단(고종달)을 제주에 보내어 수맥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그는 종달로 들어와서 수맥이 흐르는 혈자리에 쇠못을 박아 맥을 끊으려고 했다. 그래서 동쪽으로 돌면서 반드기왓에 마혈을 발견하고 쇠침을 박았다.
그곳에 박힌 쇠침을 뽑아내고 만일의 증조부의 산소를 만들었고, 그 혈 속에서 나온 새가 날아가 앉은 자리에 집을 지어 이사했으며, 그래서 김만일이 발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종달은 제주에 입도하여 많은 설화를 남겼다. ‘토산 거슨샘이’, ‘홍로 지장샘’ ‘화북 행기물 이야기’, ‘용머리 전설’. ‘차귀도 유래’ 등이다.
다. 장수 섬의 환경
조선시대 전국에 172개(유목장 114, 폐목장 58)의 국마장이 있었다. 대부분 섬 지역이었고, 제주에만 15개의 유목장이 있었다. 산악지역인 강원도에는 국마장이 없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섬이 지닌 특수성 때문이다.
김만일은 일찍이 제주가 말을 기르기에 최적지라는 것을 간파한 선지자다.
섬에는 우선 맹수가 없다. 말은 겁쟁이어서 맹수가 있다면 사육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된 환경 때문에 말이 도망치거나 도적으로부터의 방어가 용이하다. 또한 비가 많이 내려 풀과 산림이 무성하며 우엉, 더덕 같은 약초가 자생하니 말들이 그것을 먹어서 튼튼했다.
특히 제주도는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약수와 해풍에 실린 무기질의 영향으로 목초가 왕성하게 발육하기에 우량한 말을 육성할 수 있었다. 산에 내린 빗물은 암반수 밑에서 정제되어 다시 샘솟아 오르는데 수질과 영양분이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독일 함브르크에서는 해풍과 해양 광선을 이용한 건강클리닉으로 현대인의 스트레스 해소나 혈액 순환을 촉진하는 탈라소테라피(Thalassotherapy)가 인기 있다고 한다. 해풍은 기관지에 미세한 소금 입자를 침투시켜 섬모운동을 촉진하고, 기관지 염증이나 분비물 제거에 효과가 있어 인체를 건강하게 가꾸고 질병을 예방하는 치유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물과 바람의 자연환경은 마소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쳐 제주가 장수의 섬이라는 것을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02년 당시 ‘제주양로’의 그림에 보면 장수한 노인들을 모셔 기로연을 하는데 여기에 참석한 제주읍 노인들을 보면 100세 이상 3명, 90세 이상 23명, 80세 이상 183명이 초청되었다. 병들어 참석 못한 노인 37명을 합하면 246명이나 됐다. 이는 당시의 제주읍 인구(약 2만여 명 추산)나 전국 평균 수명으로 볼 때 장수 인구가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런 장수의 이미지는 제주에서만 보인다는 남극노인성의 설화와도 연결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1701년 제주 목사로 온 이형상은 방성노인성제를 창설하고 제를 지냄.
2. 미래를 내다본 예지
가. 벼슬길에 오르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식년(3년)마다 초시, 복시, 전시 3단계로 행해졌다. 무과의 시험은 1차 초시에서 무예만으로 선발하는데, 한양에서 70명을 선발하는 훈련원시가 있었고, 각 지방에서 120명을 선발하는 향시가 있었다.
초시에 합격한 자는 서울에 모여 2차 복시(覆試)를 치르는데, 무예와 강서(병서와 유교 경전 강독)를 통하여 28명을 선발했다. 여기에 급제한 사람은 국왕이 참석하는 전시(殿試)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이 전시는 무예만을 보아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을 뽑는 순위 경쟁으로 갑과는 중앙부처, 을과는 지방 만호나 첨사, 병과는 지방 장수로 임명을 받았다. 무예 과목은 240보에서 활을 쏘는 목전(木箭), 80보에서 활을 쏘는 철전(鐵箭), 130보에서 활을 쏘는 편전(片箭), 말을 달리다가 활을 쏘는 기사(騎射), 창던지기, 격구 등 6가지 과목이었다.
김만일은 오랜 기간 여러 번의 실패를 거쳐 전시에 나아가게 되는데, 1582년 을과로 급제하여 전라좌수영순천부방답진첨절제사의 교지를 받아 환로에 나선다. 이곳은 전라좌수영의 첫 포구인 여수 돌산도다. 이곳에는 당시의 굴항, 선소, 방답진성, 군관청, 봉수대 등이 남아있다.
나. 이이의 시무육조와 김만일의 귀향
김만일이 방답진첨사로 부임할 당시 국방을 책임지던 병조판서는 율곡 이이였다.
선조 때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이 한창이었다. 이이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 득세하던 동인들에 의해 서인의 우두머리로 불렸다.
1583년 하루는 율곡이 경연(經筵)에서 시무육조를 올렸다. 첫째, 동과 서로 갈리면 인재를 얻기가 어렵다.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라면 동서를 가리지 말고 뽑아 써야 한다고 했는데 서인들은 동인 편을 든다고 아우성이었고, 동인들은 그가 서인의 우두머리라고 헐뜯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둘째, 일반 백성으로서 병사를 양성하여 왜적의 침범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는 곧 십만 양병설이다. ‘국가의 기세가 부진한 것이 극에 달했으니 10년 이내에 마땅히 땅이 붕괴하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 십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을 두어야 한다. 군사들에게는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고, 6개월에 나누어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대비를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루아침에 사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몰아내어 싸우게 해야 할 것이니 큰일이 실패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동인의 영수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류성룡은 ‘무사한 때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이다.’라고 해서 불가하다 했고, 경연의 신하들도 모두 율곡의 말을 지나친 염려라고 여겨 반대했다.
이 밖에도 전쟁에 대비하여 국가 재정을 충분히 비축하도록 하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을 견고하게 방비할 것, 전쟁에 쓸 군마를 준비할 것, 백성을 가르쳐 나아갈 방향을 밝힐 것 등 대부분 국방에 관한 내용을 제안했다.
그런데 임금은 이이의 시무 육조를 현실에 맞지 않은 공허한 말로 듣고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가운데 양군민(養軍民)과 비전마(備戰馬) 부분이 정치 쟁점화되면서 동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9년 뒤인 임진년(1592년)에 왜적의 참화를 맞았다.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였던 류성룡은 그때서야 후회하며 이이의 혜안을 칭송했다. 율곡이 병사한 한참 뒤였다.
당시에 관리들은 30개월의 임기가 있었다. 김만일은 이이의 시무육조를 전해 듣고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말을 기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벼슬길을 버리고 귀향한다.
다. 말을 나면 제주로 보내라
조선 태조 때 보군(步軍)의 수가 2만 3천 명인데 비해 마군(馬軍)의 수는 4만여 명으로 전쟁에 있어서 기마군이 주력 부대의 역할을 했다. 이런 전마의 중요성을 아는 김만일은 전마만 아니라 이를 타고 전쟁에 나설 기마병을 목사와 협의하여 육성했다.
김만일은 말을 전략적으로 키웠다. 당시에는 조정에 바치는 공마, 양반사대부 층이 타고다니는 기승마, 전쟁에 내보낼 전마, 지방 관청의 교통수단인 역마, 정보전달을 위한 파발마, 수레를 끌거나 짐을 실어나를 태마 등 용도에 맞게 말과 나귀를 교배시키고 상품을 생산해 냈다.
연구와 실험 등으로 우수한 씨수마를 육성하여 한양 사대부와 조정 관리들이 김만일의 말을 선호했다. 김만일은 한때 4천여 두의 말을 소유했다.
이에 전국의 마장과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에서는 제주 말의 우수성을 알고 제주 암말 2마리 씩을 전국의 국마장에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김만일은 반대한다. 제주의 유감(밀감)이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제주의 우수한 암말을 육지에 보내면 멀지 않아 잡마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차라리 육지에서 말을 나면 제주로 보내라. 조선의 명마는 내 손에 있다고 항변한다. 그래서 ‘말을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생겼다. 이에 1604년 제주의 암말 육지 반출을 엄격히 금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3. 우국충절의 정신
가. 사복시와 진상마
제주에서 한양으로 진상하는 공마의 종류는 다양했다. 새해가 되면 세공마(歲貢馬) 200필, 임금 생일, 정월 초하루, 동짓날 등 삼명일에 바치는 진상마 60필, 특별한 용도의 차비마 80필, 과거시험이 있는 해에 바치는 별어승마(別御乘馬, 식년공마) 20필. 수송 중 병들거나 죽은 말을 대체하는 흉구마(凶咎馬) 32필, 짐 싣는 노태마 34필 등 400필이 넘었다.
한양에는 가마와 수레, 말, 목장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侍)라는 관청이 있었다. 이들이 전국에서 올라오는 공마를 관리해서 임금의 친인척이나 공신들, 과거시험에 급제한 인재들, 왕을 호위하는 어영청, 궁궐을 방비하는 무위소, 수도 방위대인 금위영, 전마를 담당하는 병조 등에 할당했다. 또한 지방 관청의 역마, 파발마 등도 사복시에서 조달했다
명나라에 조공품을 바쳐야 할 때는 더 많은 공마가 차출되기도 했다. 그들도 제주마의 우수성을 알고 제주마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국마장 외에 개인도 목장을 만들어 말을 키웠는데 이를 사둔장이라 했다. 향읍에 할당된 공마의 수를 국마장에서 키우는 말로 채우기가 버거워서 사둔장의 말로 충당했는데 더러는 세금으로 받고 부족하면 사들이기도 했다.
나. 점마와 공마선 탑선 절차
조정 병조에서 우마적(牛馬籍)에 기초해 징발 대상의 말을 선정해 사복시에 하달하면,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제주목사에게 전달된다. 제주목사는 이를 세 읍 감목관에게 지시하고, 세 읍 감목관은 각 목장에서 진상마 징발을 위해 결책군(結柵軍)과 구마군(驅馬軍)을 동원하여 임무를 수행했다. 진상마는 구마군과 결책군 및 목자들의 도움을 받아 각 영문(營門, 縣)에 소속된 습마(習馬, 수의사)가 선정했다. 구마군들이 각 목장에 할당된 말을 몰아오면, 습마들이 목자(테우리)들과 함께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을 이용하여 진상마를 선정한 후 해당 목장을 관할하는 현감의 책임 하에 제주목 관아로 운송했다.
제주목 관아에서는 제주목사의 입회 하에 우마적 내용과 낙인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다. 세 읍 현감 중 해당자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하여 분속(分屬)시킨 후 그들에게 최종 점락(點烙)에서 통과된 진상마를 공마선이 대기 중인 별도포 또는 조천포로 운송시켰다. 공마선은 선격군(船格軍)이 담당했다. 해로로 전라남도 해남 또는 강진 해안에 도착한 후, 육로를 이용해 한양까지 운송하였는데 기간은 약 2개월이 소요되었다. 공마선은 10척 정도가 왕래하였으며, 호조에서 파견된 영선천호(領船千戶) 1인, 병조에서 파견된 압령천호(押領千戶) 1인, 선장(船長) 1인, 사관(射官) 4인이 탔다. 그리고 격군(格軍)은 대선(大船)이면 43인, 중선(中船)이면 37인, 소선(小船)이면 34인이 타서 노 젓는 일을 맡았다.
한편 공마선에는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전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주의 돌로 평형석을 채웠는데, 아직도 해남 이진에 가면 이때 쓰인 평형석이 집 울타리나 경계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 거악에 대한 저항, 종마를 지켜라
선조 34년(1601) 6월에 기축옥사로 유배왔던 길운절ㆍ소덕유가 제주목사 성윤문, 판관 안극효의 착취와 폐단이 심해 민심을 잃은 틈을 타 문충기ㆍ홍경원 등의 제주 토호 세력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한 사건이 발생한다. 제주인들에게는 소위 '문충기의 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성윤문이 꾸민 자작극임이 발각되어 파직 당하고, 김상헌을 제주 안무어사로 파견하여 진상을 파악하고 도민을 위로하게 한다.
청음 김상헌은 1601년 9월 제주에 와서 이듬해 1월 말까지 6개월을 머무르는 동안의 견문과 감회를 적어 『남사록(南槎錄)』을 남겼다. 이 시기는 김만일이 종마 육성에 왕성한 활동을 보일 때이다. 청음은 향교 교생과의 대화에서 제주민이 겪고 있는 폐단을 듣고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밝히고 있다. 그중 마정과 관련된 내용이 두 가지다. 삼읍 수령이 민가의 양마를 장부에 올려 전마 또는 공마의 명목으로 함부로 징발하는 폐단. 또 하나는 서울서 점마관이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말을 점검하는데 동원하여 실농하게 하는 폐단임을 밝히고 있다.
1618년 명나라는 말 2천필 요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점마관 양시헌을 제주에 파견하는데 중림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행패를 가하여 봉변을 당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제주목사 양호(梁濩)는 종마나 암말을 가리지 않고 착취가 심했는데, 이에 중림은 종마를 지키기 위해 종마의 신체를 훼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학정을 직접 고발하기 위해 1620년 일흔한 살의 나이에 오백필의 말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한양으로 가 헌마했다.
4. 김만일 가계와 연보
가. 김만일 가계
경주 김씨 입도조는 검용(검용)이며 그의 부친 인찬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개국일등공신으로 추대되었다. 김만일은 김검용의 7세 손이다. 입도 후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만일의 부친 이홍(利弘)은 수망리 사람으로 을묘년에 남쪽으로 3리쯤 (1,2km) 떨어진 곳(현 의귀리)에 마을을 세우고 이주했다.
만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마 2백여 두를 나라에 바쳐 난이 끝나자 헌마공신의 직위를 받으며, 선조 33년(1600년)에는 산마감목관은 김만일의 후손 중에서 추천하도록 했다. 그러나 삼남 대길이 첫 산마감목관으로 임명(1659년) 된 것은 60년 후만일 사후 27년 만의 일이었다. 이후 고종32년(1895년) 을미개혁으로 제도가 페지 될 때까지 236년 동안 김만일 후손 83명이 산마감목관의 일을 맡았다.
만일이 헌마공신이 되자 부친도 작위를 받았는데 어해장군(禦海將軍)을 지내고, 용양위부사(龍驤衛副司)를 거쳐 사후(1620년)에는 자헌대부 공조판서겸 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만일의 자(字)는 중림(重臨)으로 남평 문 씨(대명, 대성, 딸), 창녕 성 씨(대길, 대진), 또 다른 창녕 성 씨(대종, 대원), 밀양 박 씨(의동) 등 4명의 부인을 두었고, 7명의 아들과 여러 명의 딸을 두었다. 딸 중 한 사람이 제주에 귀양 왔던 간옹 이익과 혼인했다.
1620년 손수 5백 두의 말을 이끌고 한양에 가자, 임금(광해군)은 만일에게 종2품 오위도총부도총관 지중추부부사 교지를 내렸고. 아들 김대명(전라 보성군수), 김대성(당상관), 대성의 아들 려(제주의 장수)도 각각 관직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사헌부, 사간원에서 섬 출신이라고 멸시를 하고 관직 제수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조정이 아니라 말과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제주 섬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81일 만에 금의환향했다.
나. 남평 문씨 가계
남평 문씨 남제공파 세보에 따르면 김만일의 처조부는 제주읍 출신 문윤창(胤昌)으로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을묘왜변 때 치마돌격대 4명의 장군 중 한 사람인 문시봉(時鳳)이고, 만일의 장인인 서봉(瑞鳳)은 넷째 아들이다. 당대 시봉이 을묘왜변 치마돌격대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중림의 처가는 제주읍 외곽에서 마목장을 경영하던 말 부자 집안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 당대의 주요 사건과 김만일 가계 연보
1273년 여몽연합군 삼별초의 난 평정, 몽골 제주 직접통치.
1276년 몽골의 말 160수 수산평에 방목
1374년 목호의 난 평정, 하치(테우리) 중산간 마을 거주
1550년 김만일 출생(정의현 수망)
1552년 임자년 천미포로 왜구 침범
1555년 을묘왜변. 문시봉(만일 처 백부) 치마돌격대 활약.
이홍, 조부의 묘를 반드기왓에 쓰고 집을 수망에서 의귀로 옮김
1574년 남평 문씨와 결혼(서봉의 딸)
1575년 장자 대명(大鳴) 생
1578년 차남 대성(大聲) 생
1582년 임오년 만일 무과 합격. 전라좌수영 순천부 방답진첨절제사 부임
1583년 율곡 이이 십만양병설. 시무 6조 발표
1584년 임무 마치고 귀도. 말 육성 시작
1592년 5월 임진왜란 발발
7월 128대 이경록 제주목사 부임.
1593년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고자 하명을 기다렸으나 만류 당함
1594년 대명 혼인(20세)
나라에 말을 바침. 진상마 100여 필 중 전마 30필
1595년 4월 전마를 바침/ 7월 진상마 100필을 바침
장손(대명 자) 린(磷) 생/ 대성 혼인
1596년 11월. 기근이 들어 쌀 몇 섬으로 소 여러 마리를 바꿀 것을 정원에
서 아룀.
장녀 생(남평 문 씨 소생)/ 장손 려(礪)(대성의 아들) 생
1598년 2월 명나라 2천 필의 제주 말 요구.
이경록 목사 병사, 임진왜란이 끝남
1600년 (선조33년) 산마감목관은 헌마인 김만일 지손 중에서 추천하도록 함.
1601년 목사 성윤문의 착취 발각. 문충기(文忠基)의 난(길운절,소덕유의 역모 사건)/ 8월 안무어사 청음 김상헌의 제주 파견, 『남사록』
1603년 풍재, 수재로 흉년 산죽실을 먹음
1604년 12월 구황어사 조성립. 국둔마의 점열과 군관의 폐단에 관해 보고
암말 육지 반출 엄격히 금함
1605년 대명 (31세) 무과급제
1608년 3남 대길(大吉) 생(창녕 성 씨1 소생)
1609년 제주3읍 군사 1700명
1610년 안남국(베트남) 왕자 일행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뒤 왜구를 척살했 다고 조정에 거짓 보고. 들통나 목사 파직, 유배됨.
대풍수로 흉년, 백성이 많이 굶어 죽음
1611년 4남 대진(大振) 생(창녕 성 씨1)
1612년 광해군 4년 김만일의 말 구입
1615년 5남 대종(大鐘) 생(창녕 성 씨2 소생) / 증손(려의 자) 사종 생.
1617년 6남 대원(大遠) 생(창녕 성 씨2)
1618년 명나라 말 2천필 요구/점마관 양시헌에게 봉변(68세)
7남 의동(義同) 생(밀양 박 씨 소생)
11월 간옹 이익 위리안치/ 목사 이괄의 후대
1619년 제140대 제주목사 양호(梁濩) 착취, 김만일 종마를 훼손함.
장녀(20세), 간옹 이익(43세)과 혼인
1620년 (71세) 만일 5백 두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가 광해를 만남
종2품 오위도총부도총관, 지중추부부사, 대명(전라 보성군수),
대성(당상관), 손자 려(제주의 장수) 교지 받음
사헌부, 사간원에서 관직 제수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함. 신하들의 멸 시, 81일 만에 금의환향
1622년 9월 4필의 말을 바친 김대명에게 수령을 제수함
1623년 인조반정. 광해군 폐위됨
1625년 대명 손 (인의 자) 헌 생
1627년 정묘호란. 많은 말을 바침
1628년 김만일 종1품 품계 숭정대부로 상승
1629년 대명 졸/ 대성을 종사 섭행자로 지명
1630년 김대길 무과 급제.
1632년 김만일 별세(당 83세)
1637년 광해군 제주 유배
1659년 김대길 첫 산마감목관 부임
5. 소설 「말은 욕망하지 않는다」의 개요
가. 작품 제작 의도
조선시대의 말은 현대의 자동차처럼 그 용도가 다양했다. 임진왜란 당시 보군의 수보다 마군의 수가 많을 정도로 전마의 역할은 상당했다. 제주 사람 김만일은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전마 육성의 귀중함을 깨닫고 벼슬길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당시 그가 기른 말은 전마로서 위용을 떨쳤을 뿐 아니라 사대부의 고급 애장품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조선의 명마는 내 손에서 만들어질 것이다’는 자부심으로 품종 혁신을 위해 애를 썼고, ‘말을 나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을 만들어 낼 정도로 말을 전략적으로 일구어 성공했다.
임진왜란 때에 그는 전마 이백 필을 바쳐 헌마공신으로 종2품의 벼슬을 제수받았고, 광해군 때는 탐관의 착취와 학정에 맞서며 종마 보호를 위해 500필의 말을 직접 한양으로 몰고 가 헌마했다.
제주가 왜 말의 섬인가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김만일에 대한 기록을 찾았으나 단편적이었고, 그의 삶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음도 알았다. 그의 제주인으로서의 기개와 호국정신, 철학과 시대정신을 16-17세기 독특한 제주 문화 전통 속에서 찾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입체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중림 김만일의 인생 역정을 통해 오늘날 정치 행태와 기업가 정신,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나. 작가의 말- 욕망과 분투가 세상을 바꾼다
이 소설의 화두는 욕망이다. 인간의 욕망은 때로 심장을 뛰게 하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지만, 타인의 욕망과 부딪칠 때 갈등의 불꽃을 일으킨다. 욕망은 사욕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를 이롭게 할 때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중림 김만일은 제주 섬이 말 기르기에 천혜적인 환경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은 예지자디.
당시의 말은 오늘날 자동차처럼 인간 생활에 필수재였다. 중림은 기승용, 전투용, 통신용, 짐 운반용 등 쓰임에 따라 말을 전략적으로 육성했고, 우수한 품종을 얻기 위해 꾸준히 시험하고 연구하여 성공한 조선 최고의 경영자(CEO)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탐관을 만나 강탈당하고 고통을 받지만 끝내 이겨내고 헌마공신이 됐다.
음해 세력과 싸워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념, 종마를 지키고 우량 품종을 만들어 내려는 욕망에 있었다. 그의 욕망과 분투에 의해서 세상은 좀 더 유용하게 진화했다.
중림은 업적에 비해 남아 있는 기록은 단편적이고,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도 거의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가명을 썼고, 생략되거나 멸실한 부분은 픽션으로 되살려보고자 했다.
다. 작품의 차례
1. 을묘년 그해/ 2. 흥국사에서 만난 귀인/ 3. 여든여덟 마리의 말/
4. 노새와 버새 / 5. 조선의 명마는 내 손에 / 6. 대창마장 사람들 /
7. 통졸은 말 구하기 / 8. 애마 돌사니/ 9. 경마대회 /10. 설한 속에서도 꽃은 피고/ 11. 명월관, 밝은 달밤에 /12. 말을 나면 제주로 /13. 하늘이여, 종마를 구하소서 /14. 욕망은 파도를 넘고
□ 주요 참고문헌과 자료
김상헌, 홍기표 역, 『남사록』. 제주도문화원, 2008년
(사)헌마공신기념사업회, 『헌마공신 김만일 평전』, 2015년
의귀리지편찬위원회, 『의귀』, 의귀리, 2016년
장덕지, 『제주도목축역사문화』, 신우, 2020년
그 외 인터넷 검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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