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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세상이야기

권재효 시인, 자네의 아재 개그가 그립네

강용준 2018. 9. 7. 14:06




권재효 시인, 자네의 아재 개그가 그립네.

강 준(극작가/소설가)

 

권 시인, 그 하늘에도 계절이 흐르는가?

지금 지구는 뜨겁고 무더워 하루하루가 힘겹네. 앞으로도 매년 이런 무더위가 계속된다니 더위를 이겨내며 살아갈 일이 막막하네.

생각해보니 자네와 이별한 지도 일 년이 되었군,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지금까지 자네에 대한 글 한 줄 쓰지 못했군, 미안하이.

하지만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안했다는 표현이 맞는 말일세.

자네의 소천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충격적이었어. 그 충격이 오랜 기간 내 정신을 혼미하게 했고 때로는 아주 화가 나더라고,

왜 그렇게 아픈 몸을 혹사시키면서 하늘나라 가기를 재촉했는지.

2010년인가 자네가 부회장을 맡아 함께 제주문인협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지.

그때도 자네는 지속가능한 제주도환경교육센터 사무처장을 맡아 제주환경단체와 관계된 사람들과 중국여행을 가는

실무 책임을 맡아 노심초사 했었어.

오전에 전화를 했더니 자네는 출근도 않고 누워 있다고 했어.

그런데 자네 말투가 평상시와 달리 매우 어눌하더라고.

그때 난 당장 병원에 가야한다고 했는데 자네는 한의원으로 가 침을 맞으면서 지체를 한 거야.

그때 바로 병원에 갔었다면 후유증이 덜 했을 거라고 후회하는 말을 했을 때 재발이 위험하다고 조언했던 기억이 나네.


말로는 그러면서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두 번의 제주문인협회 집행부 일을 맡긴 내게도 잘못은 있네.

하지만 자네는 그냥 집에서 빈둥거릴 운명을 타고 난 건 아닌 것 같네.

자네는 여행을 좋아했고 남들과 어울리면서 썰렁한 아재개그를 즐겼으니까.

그런 낙천적인 성격이 시인을 만들었고,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 못하는 일꾼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는 늘 무언가 하지 않으면 못 베기는 성격이었으니까.

등단을 하고서도 대금을 배우러 다니고, 중창단을 조직하여 노래를 부르고, 시 동호회에 가담하여 정기적으로 시를 공부했지.

그래서 대금산조,나는 우울을 즐긴다,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세권의 시집을 세상에 남겼네.

 

자네는 우울을 즐긴다고 했지만 그건 해직기자로 느끼는 암울한 시대상과 불편한 현실에 침잠하지 않으려는

구도적인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하네. 자네와 술자리를 할 때마다 의협심이 강한 모습을 보면서 외로움을 많이 타고 있다는 걸 알았네.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교육대학을 나와서 제주MBCPD로 입사를 했을 때만해도 우린 안면이 없었지.

자네는 1980년대 군부독재의 언론통폐합 시절 단지 젊다는 이유만으로 구조조정에 희생양이 되어 해직이 되었고

그때부터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어.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흥사단 등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했고

1995섬 아낙이란 시로 시인으로 등단했지.

그때야 우린 만났어. 이전에 등단한 시인 나기철,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정군칠, 수필가 문승종 등 나이가 동갑인 문인들과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우리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 했지.

2004년에는 그해 여름이라는 작품으로 소설가로도 등단했고

2005년에는 귀천문학상을 받았노라고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감격해 하던 자네 모습이 선하네.

 

자네의 불타는 학구열은 제주대 산업대학원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했고,

2014년에는 내 마음 속 너도밤나무란 시집으로 제주문학상을 수상해서 또 한 번 지인들을 기쁘게 했네.

그리고 인기자수 최성수가 자네의 시 술먹게 하는 봄밤에 곡을 붙이겠다고 직접 전화 연락 왔었다고 자랑하던 일,

그래서 , 시가미다방(詩歌美茶房)’이라는 앨범에 수록이 되었다고 문우들에게 한턱내었던 일도 생각나네.

자네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늘 여행을 기획했고 인솔하며 가이드 역할까지 했지.

그것이 직업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업무라고는 하지만 어떤 때는 여행 인솔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는

옷만 갈아입고 다시 순천만으로 여행단체를 이끌고 떠났던 적도 있었어.

그렇게 몇 개월에 걸쳐 수많은 단체들의 여행을 인솔했던 과로가 서서히 자네를 무너뜨리고 있었다는 걸 자네는 정녕 몰랐었는가?

여행은 회비내고 즐기는 사람은 좋지.

하지만 기획하고 사람들을 모아 관리하고 항공편과 숙식처를 예약하는 것 등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라는 걸 해본 사람만이 아네.

자넨 일을 즐겼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무리였어.

누군가의 봉사와 희생으로 여행은 편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는 걸 이제와 새삼 느끼네.

 

제주문인협회엔 사무국장과 세 번의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협회의 궂은일을 앞장서서 해결하고 봉사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네.

자네는 임기가 끝나고도 여행 동호회와 아직까지도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영화동호인 모임 을 이끌면서

인간관계와 인연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했지.

자네가 있음으로 해서 당시 집행부가 많은 업적을 세울 수 있었음에 감사하네.


연기자가 빛나려면 조명기의 열을 받으며 누군가 빛을 비추어야만 한다는 걸 연극을 하면서 알게 되었네.

배우는 열심히 연기해서 박수를 받지만 조명기사는 어둠 속에서 열을 받는 사실을 몇 사람이나 알까?

남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갖게 만들고 편한 여정을 만들어주면서도 한 마디 불평을 하지 않았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타인의 인생, 세상을 비추는 훌륭한 조명가였어.


자네는 천상병 시인을 무척 좋아했지. 귀천문학상을 받았고 천상병시문학축제위원장을 맡아 육지를 오가며 행사를 지휘하기도 했어.

그런데 정작 천상병 시인처럼 자네의 이 세상에서의 여행은 아름다운 소풍이었을까?

자네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거야.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또한

자네가 느끼는 행복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믿네.


한창 나이에 자네의 그 부지런함에 질투를 한 하느님이 쉴 때가 되었다고 불러간 것이 정말 안타깝네.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자네는 제주도가 주최하는 회의에 참가해서 중국여행에 대해 논의를 했다고 들었네.

처음 쓰러진 것도 중국 여행 준비 탓이었고 마지막 의식을 잃은 것도 중국여행 기획 때문이었으니 이 무슨 곡절인가?

자네는 소동파에 심취했었고 그에 대한 글도 썼고 우리 문인들을 그의 고향으로 안내까지 했었던 기억이 나네.

그렇게 중국을 좋아했던 자네인데 한이 맺힌 영혼이 그 넓은 중국을 떠도는 건 아니겠지?

언젠가 다시 중국에 가게 되면 자네를 위해 허공에 술 한 잔 뿌릴 걸세.

 

어떤 일이든 자네와 함께 하면 벽처럼 의지가 됐던 일상인데 이젠 자네를 생각하면 허물어진 성채를 바라보는 느낌이 드네.

한동안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빈 하늘만 쳐다보곤 했지.

누군가 자네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면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네,

자네가 즐겼던 우울이 내 마음을 휘젖고 다녔으니까. 그럴 때마다 난 술을 마셨고 마지막 잔은 자네를 위해 남겨 두었었네.

 

자네가 개그라고 하는 이야기는 한물 간 우스갯소리였네.

그렇게 분위기를 썰렁하게 해놓고는 그 넓은 얼굴을 하회탈처럼 만들고 혼자 허허허 웃는 모습을 보고 우린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했지.

웃을 일이 잦아들고 웃음이 인색해지는 세상 자네의 아재 개그가 그립네.

 

무심하게도 자네는 못 돌아올 길을 갔지만

자네가 남긴 대금산조소리는 오랜 시간 많은 지인들의 마음 속 너도밤나무로 풍성하게 피어날 걸세.

내 인생여정 어느 부분이 자네와 함께했음으로 해서 환히 빛났음에도 감사하네.

부디 편히 쉬게나.


2018년 9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