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희곡 열매 맛보기

게스트하우스 꿈

강용준 2020. 6. 7. 09:12

 

게스트하우스 꿈

 

등장인물

 

한풍운 : 찰스 리. 영화배우

이윤주 : 형사

모친 : 풍운의 어머니

망부 : 망령

: 게스트하우스 꿈 주인

 

무대

 

게스트하우스의 내부 휴게실.

테이블 위엔 꽃병이 놓여 있고 주변에 소파 또는 의자 몇 개.

무대 뒤편 중앙에 커튼이 달린 커다란 유리창.

왼쪽은 남자 룸. 그 앞은 현관으로 가는 통로.

오른쪽은 여자 룸. 그 앞은 내실로 들어가는 통로.

 

 

무대에 잔잔하게 안개가 스며들고, 장중한 구음과 함께 하나둘씩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혼들.

문을 열며 나타나는 풍운. 그는 텁수룩한 수염과 산발을 하고 허름한 복장이다.

풍운은 그들을 붙잡으러 쫓아다니지만, 영혼들은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한스

런 구음을 내뱉는다.

 

풍 운 : (공중에 매달린 영혼들을 보며) 오시오. 잠들지 못하는 그대들이여, 갈 곳 몰라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여.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셨구려. 말 하시오. 당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털어놓으시오. 무덤 속에 묻힌 진실을 끄집어내시오. 어둠 속에서도 살아있는 것들은 숨을 쉬며 새벽을 기다리지만. 당신들에겐 희망이라는 게 없소. 고통스럽고 괴로운 병자들도 쾌차의 기대로 그 고통을 견디지만, 희망이 없는 삶이란 죽음보다 더 끔찍하오. 당신들도 잠들지 못하지만 나도 원통함에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소. 어디 말 좀 해 보시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소.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주시오. 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그렇게 말없이 바라보는 당신들이 두렵소. 구원해 줄 수 없다면 나타나지 마시오. 날 괴롭히지 말고 제발 가시오. 사라지란 말이야. 꺼져. 꺼지라고.

 

풍운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진다.

구음 소리 높아지면 풍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른다.

암전.

 

무대 밝아지면 막대 걸레를 들고 휴게실을 청소하는 짱.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데 초인종이 경쾌하게 울린다.

 

: (보며) 들어오세요. 문이 열려 있어요.

 

도어 벨이 울리면서 윤주 캐리어를 끌고 주변을 살피면서 들어온다.

 

: 어서 오세요. 이윤주 씨? 저는 짱이라고 합니다. (손을 내민다)

윤 주 : (악수하며) 안녕하세요?

: 일주일 예약하셨죠?

윤 주 : . 상황 봐 가면서 더 묵을 수도 있어요.

: 뭐 하시는 분이세요?

윤 주 : 왜요. 신분을 꼭 밝혀야 하나요?

: 그렇게 여러 날 묵는 분이 없어요. 주말 낚시꾼이거나 2박이 보통이거든요. 가끔

실연당한 분들이 오실 땐 긴장이 되기도 하죠.

윤 주 : 걱정 말아요. 전 소설 쓰러 왔어요.

: 아 작가시군요.

윤 주 : 소설가가 내 꿈이죠. 주변이 조용하고 운치가 있어서 작품이 잘 써질 것 같

아요. ‘게스트하우스 꿈이라는 이름도 좋구요.

: 경치 좋은 이곳에서 좋은 계획들 세우시라는 뜻이죠. , 이 섬엔 주의할 곳이

있어요.

윤 주 : (말을 막으며) 바람의 언덕 말씀이죠?

: 아시는군요. 거긴 위험한 절벽이에요. 바람이 휘감기며 돌아서 작년에도 사고가

났어요.

윤 주 : 알아요. 그만한 건 조사하고 왔죠. 피곤해요. 파도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배가

뒤집혀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 너울이 센 걸 보니 태풍이 올라오나 봐요.

윤 주 : 손님은 저 혼잔가요?

: 아뇨. 한 분 계세요. 평일이라서 그렇지 주말엔 예약이 넘쳐요.

윤 주 : 여자분?

: 남자분인데요.

윤 주 :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 어디로 가면 되죠?

: 여성 전용 룸은 (가리키며) 그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들어가는 뒤에다 대고) 짐 풀고 얼른 나오세요.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낙조가 끝내줍니다.

 

, 뒤편으로 가 커튼을 젖히자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다.

기분이 좋은 듯 휘파람 불며 청소하는데 어두워진다.

 

실내 밝아지면 뒤편 유리창으로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데,

도어 벨이 울리면서 윤주 사색이 되어 안으로 들어온다.

 

윤 주 : (내실 쪽으로 향하여) ! ? 좀 나와 봐요. 어서요.

: (앞치마를 입고 나오며) 무슨 일이시죠?

윤 주 : ... 귀신이 있어요.

: 귀신?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윤 주 : 정말 귀신을 봤다니까요? 저기 대나무 숲 있잖아요. 거기서 갑자기 하얀 물

체가 나타났어요.

: (웃으며) 전 매일 새벽 운동을 하면서 그 앞을 수도 없이 다녔는데, 아직 그런

걸 본 적 없거든요? 기운이 허하신 모양입니다.

윤 주 : 분명 내 눈으로 봤다니까요. (몸서리를 치며) 아이고 무서워. 혹시 바람의 언

덕에서 죽은 영혼이 산책을 하고 있던 것 아닐까요?

: 그런 말씀 삼가해 주세요. 헛소문이 나면 누가 여길 오겠어요?

윤 주 : 진짜라니까요. 정 믿기 어려우면 나랑 같이 확인하러 가요.

 

도어 벨이 울리면서 가면을 쓴 풍운이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윤 주 : (놀라서 짱의 뒤에 숨으며) ... 저것 봐요.

: , 우리 집 손님이에요. (풍운에게) 그것 보세요. 다들 놀라잖아요?

풍 운 : (윤주를 노려보다가 말없이 남자 룸으로 들어간다)

윤 주 : 손님이라구요? 소름이 돋아요. 왜 저러고 다녀요? 난 무서워서 여기 못 있겠

어요.

: (안심시키며) 무슨 사연이 있는지 도통 말을 안 해요. 마음 놓으세요. 오늘 밤만

지나면 떠나도록 권유할게요.

윤 주 : 저런 사람이랑 한 지붕 아래 잠을 자라구요? 당장 내보내세요. 안 그러면 내

가 나가겠어요.

: (난처해하며) 손님, 이 섬에서는 더 이상 숙박할 곳이 없습니다. 연락선도 이미

끊겼고요. 접근 않도록 잘 말씀드릴게요.

윤 주 : (킁킁거리며) 헌데 이거 무슨 냄새죠?

: (생각난 듯) 아차, ... (뛰쳐 들어간다)

윤 주 : 아유 끔찍해. 밤중에 가면은 또 뭐야? 헌데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윤주, 살금살금 남자 룸으로 가서 소리를 엿듣는데,

벌컥 문이 열리면서 풍운이 나온다. 손에는 야전삽이 들렸다.

윤주 놀라서 넘어진다.

 

풍 운 : 왜 내가 그렇게 무섭소? (삽자루 중간의 조임새를 돌려 길게 만든 후 고정시

킨다.)

윤 주 : (위기를 느끼며) 그 삽.

풍 운 : 당신한테 뭘 어쩌자는 것 아니니 참견 말아요. (현관 쪽으로 움직인다)

윤 주 : (일어서서) 잠깐 이 목소리. 당신을 알 것 같아요. 혹시...?

풍 운 : (발걸음을 멈춘다) ......

윤 주 : 찰스 리 맞죠? 영화배우 찰스 리. 한풍운 씨.

풍 운 : (당황하며) 사람 잘못 보셨소.

윤 주 : 틀림없어요. 난 당신의 팬이에요. 가면을 썼다고 목소리를 모르겠어요? 살아

계셨군요. 그래요.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풍 운 : (위협적으로 다가서며) 당신 누구요? 정체가 뭐야? 기자야?

윤 주 : 아니에요. 전 당신을 좋아하는 열혈 팬이라구요.

풍 운 : (삽을 들고) 여긴 왜 온 거야? 당신 스토커지?

윤 주 : (물러서며) 이러지 마세요. 전 소설 쓰러 왔어요. 헌데, 이런 곳에서 당신을

만나다니 로또 맞은 기분이에요. 정말 찰스 리를 지금도 존경하고 흠모하고

있어요.

풍 운 : (한풀 꺾이며) 한풍운은 죽었어. 그런 쓰레기 같은 자식은 죽어서 마땅하지.

윤 주 : (의자에 앉으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발 그런 소리 마세요. 찰스 리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왜 이렇게 변했나요.

풍 운 : (시니컬하게 웃음을 흘리며) 흐흐흐 그런 놈은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

.

윤 주 : 아니요. 찰스 리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어요. 당신이 부르는 노래.

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했고, 당신이 출연한 영화는 피곤한 서민들에겐 피

로 회복제가 됐어요. 늘 정의를 노래했고 삶의 진실을 찾는 메신저였어요.

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려요.

풍 운 : (흥분하여) 다 거짓이고 위선이야. 당신이 그 자식에 대해 뭘 알아. 그 자식

진짜 모습을 알아? 그놈은 자기 연민에 빠져서 존재를 기망하려고 허수아비

춤을 춘 것뿐이야.

윤 주 : 아니에요.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풍 운 : (뭔가 생각난 듯) 당신 휴대폰 있지? 이리 내봐요.

윤 주 : (멈칫하다가) 이건 사생활 침해.

풍 운 : 당신은 이미 내 인생의 울타리를 침범했잖아.

윤 주 : (주머니에서 꺼내며) 여기 있어요. 하지만 사용 못해요 패턴으로 잠겼으니까

.

풍 운 :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잠시 내가 보관하겠소. 그리고 당신이 내 정체를 안

이상 여기서 내보낼 수 없어. 이름이 뭐요?

윤 주 : 이윤주요.

풍 운 : 이윤주 씨. 나에 대한 기억은 전부 지워버려. 당신은 찰스 리를 만난 적도 없

, 한풍운이라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적어도 내가 이 섬을 떠날

때까지, 그리고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내 시야를 벗어나선 안 돼. 알겠소?

윤 주 : (고개를 끄덕이며) 시키는 대로 할 게요. 헌데, 당신의 눈빛은 너무 불안해요.

제발 분노를 거두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줘요.

풍 운 : 내 일에 참견 말고 얌전히 있어요. 이 섬을 나갈 때까지 여기 주인장이라는

놈한테도 절대 발설 안 한다고 약속할 수 있죠?

윤 주 : 약속할게요.

풍 운 : 약속 어기면 나도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윤 주 : 당신을 믿을게요.

풍 운 : (삽을 거머쥐고 밖으로 나간다)

윤 주 : (뒷모습을 보다 울먹이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셨어요. 풍운님.

 

암전.

 

푸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밤이다.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하얀 옷을 입은 망부가 등장하여 풍운을 부른다.

 

망 부 : 풍운아. (사이) 한풍운. 이리 나오너라.

풍 운 : (방에서 나오다 놀라며) 누구요?

망 부 : 이놈. 벌써 아비를 잊었냐?

풍 운 : 아버지?

망 부 : 아비를 이런 누추한 곳에 눕혀 놓고. 도대체 뭐 하자는 게야?

풍 운 : (무릎을 꿇고 앉아) 꼭 일 년 만이 군요. 돌아가신지...

망 부 : . 네 놈이 내 제사라도 지내겠다는 거냐? 당장 나를 형들에게 돌려 줘.

풍 운 : 그리 할 수 없습니다.

망 부 : 네가 나를 모실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눈을 쳐다보며 얘기해

.

풍 운 : (고개를 숙이며) 아버지.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망 부 : 고개를 들라고 했다.

풍 운 : (눈을 감은 채) 전 마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망 부 : 아비의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풍 운 : 제 의지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망 부 : (가까이 다가가서 흉측한 얼굴을 들어서 보고) 얼굴은 이게 뭐야? 이 개새끼.

풍 운 : (뿌리치며) 이러지 마세요.

망 부 : 부모한테 받은 것을 이렇게. 아직도 철들지 못하고 반항이냐?

풍 운 : 전 얼굴이 없습니다.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망 부 :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근본은 부정할 수 없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

더냐?

풍 운 : 그래서 괴롭습니다. 거부할 수 없어서. 내 몸속을 흐르는 그 더러운 피를 어

쩔 수 없어서.

망 부 : 한심스러운 놈. 한풍운이란 좋은 이름자 버리고 찰스 리는 또 뭐야?

풍 운 : 벗어나고 싶습니다.

망 부 : 귀여워하면 수염을 잡아다닌다더니. 호강에 겨워 실성을 한 게로구나.

풍 운 : 차라리 무지랭이 범부의 자식이었다면. 순박한 주정뱅이 촌부의 아들이었다면

오히려 자랑스러웠을 겁니다.

망 부 : (혀를 차며) 쯧쯧. 못난 놈이 조상 탓한다더니. 이놈아. 우리 집안이 어때서?

너를 낳은 니 어미를 원망해라.

풍 운 : 어머니가 무슨 잘못입니까. 불쌍하신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

망 부 : 쯧쯧. 그렇게 말려도 안 듣더니. 넌 어려서부터 천덕꾸러기였어.

풍 운 : . 그래서 매도 많이 맞았지요.

망 부 : 네 형들을 보아라. 태생은 못 속이는 거야. 천한 섬 년 보듬어주었더니. 은혜

를 원수로 갚는 게지.

풍 운 : 가정부를 건드린 게 단초 아닙니까? 첩의 자식이라고 미운털이 막혀서 구박

도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망 부 : 어려서부터 못된 놈들과 몰려다니며 싸움질이나 하고.

풍 운 : 술 마시고 찾아오는 날은 매가 무서워서 집 밖으로 도망치기 일쑤였지요.

망 부 : 사람 되라고 공부시켰더니 풍각쟁이가 돼? 내 얼굴에 똥칠하고 가문 망신 시

키려고 작정한 게지.

풍 운 : 시대가 변했습니다.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 사랑 받았습니다.

망 부 : 썩을 놈. 봉분도 비석도 없이 이런 섬에 나를 눕히다니. 이놈아. 패륜은 하늘

도 용서치 않을 거야.

풍 운 : 전 이미 벌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전비 때문에 어둠의 터널에 갇혀 헤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망 부 : 이놈. 살아있을 땐 말 한마디 못 하던 놈이 애비 죽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구나. 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어. 그 많은 상장과 훈장을 못 봤느냐?

풍 운 : 많은 사람 목숨을 담보로 얻은 죄악의 증거일 뿐이지요.

망 부 : 난 사람 죽인 적 없다.

풍 운 : 뻔뻔스럽군요. 죄 없는 사람 고문하다 죽이고, 모욕해서 자살하게 만들고,

작해서 감방 보내고, 불리하면 청부해서 죽이고. 그렇게 억울한 죽음이 얼만

. 그게 사람이 할 짓이었습니까?

망 부 : 난 조직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풍 운 : 착한 어머니 병신 만드신 것도 나라를 위해서였습니까?

망 부 : 이런...... 그건 우연한 사고였다.

풍 운 : 당신의 폭력으로 그리 된 게 우연이란 말입니까? 손바닥으로 해가 가려집니

? 가증스럽습니다.

망 부 : 너 지금 애비한테 따지는 거냐? 사람 되라고 매 좀 들었더니 그게 그렇게 억

울하고 분하단 말이지?

풍 운 : 어머닌 그걸 사랑의 매라 생각하라고 했지요. 그렇게 믿었습니다. 당신이 살

해되기 전까지는. 아니 추악한 과거를 알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망 부 : 불효막심한 놈. 비명횡사한 애비 잘 죽었다고 박수 치는 거지?

풍 운 : 업보이옵니다. 당신 눈에는 마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습니까?

망 부 : 썩을 놈. 애비가 설령 대역 죄인이어도 옹호는 못 하고.

풍 운 : 그래서 괴롭습니다. 제가 떳떳할 수 없어서. 당신의 죄값을 대신할 수 없어

.

망 부 : 미친놈. 그렇게 괴로우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던지. 차라리 죽어서 나랑 말

동무하자.

풍 운 : 그게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망 부 : 정신 차려 이놈아. 난 죽었어. 언제까지 구천을 헤매게 놔둘 거냐? 천륜을

저버린 놈. 저승에서도 날 볼 생각 마라. (사라진다)

 

암전.

 

무대 밝으면 미명의 새벽.

운동복 차림의 윤주 나오다 소파에 기대어 자고 있는 풍운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간

.

가면을 벗은 흉측스런 모습을 보고 놀라 눈물을 흘리는데 풍운 벌떡 일어난다.

 

풍 운 : 누구야?

윤 주 : (눈물 닦으며 얼떨결에) 안녕하세요?

풍 운 : (얼굴을 만져보고 고개를 돌리며 일어선다) 아 이런!

윤 주 : (태연하게 다가서며) 괜찮아요. 숨길 것 없어요.

풍 운 : (방으로 움직이며) 내 가면.

윤 주 : 있는 그대로가 좋아요. 존경과 사랑의 힘은 허물을 덮고도 남으니까요.

풍 운 : (그제야 윤주의 차림새를 보고) 어디 가려고? 혹시 배 도착할 시간이 되었소?

윤 주 : 운동하려고요. 잠자리가 낯설어선지 악몽만 꾸고. 몸이 찌뿌둥하네요.

풍 운 : 허락 없이 이 섬을 나갈 생각은 말아요.

윤 주 :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좋았는데. 그런 당신과 함께 있는 행운을 왜 내팽개치

겠어요.

풍 운 : 첫배 타고 나를 잡으러 사람들이 올 거요.

윤 주 : 어머. 무슨 사정 있나요?

풍 운 :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는 거지. (낄낄거린다) 내가 미쳤다고. 으흐흐흐

윤 주 : (안쓰러워서) 잘 나가던 찰스 리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된 거죠? 영화제작을 펑

크 내더니, 마약사범으로 구속되고. 그 이후 종적을 감췄어요. 소문만 무성했

. 외국으로 도피했느니 마약하다 죽었느니. 하지만 난 당신이 어딘가 살아

있을 거라 믿었어요.

풍 운 : 어떻게 날 찾아냈소?

윤 주 : 작가적 상상력이죠. 당신이 피살된 한태석 씨 아들인 것에 놀랐어요. 모든 게

부친의 죽음에서 시작된 걸 알았지요. 헌데 한태석 씨 시신이 병원 안치실에

서 사라졌어요.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말이죠. 무엇 때문에 왜 어디로 사라 졌을까? 추리를 했죠. 가계를 조사하다 당신의 출생 비밀도 알게 됐고, 소설 의 주인공은 충분히 되겠다 생각했어요.

풍 운 : (씁쓸하게 웃으며) 그런 3류 소설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소. 한 인간의 진실

을 그렇게 값싸게 매도할 생각 아예 집어치워요.

윤 주 : 한풍운 씨.

풍 운 : (버럭) 그런 이름으로 날 경멸하지 마시오.

윤 주 : 찰스 리. 이 섬은 당신 모친의 고향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복

형제들보다 착하니까, 부친 제사는 지낼 거라는 확신이 섰죠.

풍 운 : 그런 건 경찰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이 나설 일 아니잖소?

윤 주 : (당황하며) 왜 나서냐구요? 한태석 때문에 우리 부모가 억울하게 죽었으니까 요. 그리고 한태석을 죽이고 감옥 가 있는 이범구가 제 오빠예요.

풍 운 : 이런 감사라도 드려야 하나? 명예와 권위의 가면 뒤에 숨겨진 더러운 야수의

얼굴을 보게 해주었으니. 부끄럽소. 결코 대중 앞에 설 수도 없고 서서도 안

된다고 결심했지.

윤 주 : 아니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해요. 이겨내고 당신은 다시 돌아와야 해요.

풍 운 : 바람의 언덕에서 고심하는 걸 봤소. 그래 날 어떻게 할 생각이요?

윤 주 : 모르겠어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다

허물어졌어요. 당신은 모든 걸 버렸으니까요. 배우에게 얼굴은 생명줄인데...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나요?

풍 운 : 얼굴이야 수술하면 되지만 뼛속까지 전이된 된 분노는 어쩌란 말이요? 내가

부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들한테 용서를 구하겠소.

윤 주 : 시신을 돌려드려요. 그래야 당신이 벗어날 수 있어요.

풍 운 : 절대 그렇게 못 해. 당신이 뭔데 그 따위 소리야?

 

멀리서 뱃고동 소리 들린다. 풍운 긴장하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삽을 들고 나와 밖

으로 나간다.

윤주 걱정스런 얼굴로 풍운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바람 소리 거세다.

암전.

 

밝아지면 휴게실 소파에 모친이 앉아 있다.

그녀는 뚱뚱한 몸을 온갖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했다.

그녀는 다리를 전다.

짱이 커피를 타 가지고 들어온다.

 

모 친 : 아이고 머리야. 배가 어찌나 요동을 치던지. 이렇게 배멀미 할 줄 알았으면

헬기를 띄우는 건데. 아이고 죽겠다.

: 폭풍주의보가 내렸어요. 이거 드시면 좀 나으실 겁니다.

모 친 : (커피를 받아들고 향을 음미하고 찡그린 후) 이 싸구려 커피를 나보고 마시라

는 거야?

: 그거 브라질 산 최고급 원두커핍니다. 사모님.

모 친 : 그래? (한 모금 마신 후 탁자에 놓으며 주변을 살펴본다.) 이런 누추한 곳에

서 우리 운이가 지냈단 말이야? 그런데 얘는 뭐해? 엄마가 왔는데 내다보지

도 않고.

: (남자 룸 앞에 서서 노크를 한다. 아무 기척이 없자 문을 열어 안을 살피고 나서

문을 닫으며) 외출하셨나 봐요.

모 친 : 오라. 산소에 간 모양이구나. 오늘이 걔 아버지 기일이거든. 제물을 이것저것

준비해 오느라 애썼는데.

윤 주 : (나오며) 안녕하세요? 찰스 리 엄마시죠?

모 친 : 누구...?

: (아는 척) 아 우리 집 투숙객인 작가예요.

윤 주 : 저 찰스 리 팬이에요.

: (놀라며) 그 사람이 영화배우 찰스 리였어요?

윤 주 : 그럼요. 유명한 가수이기도 하죠.

: ! 나도 좋아하는데. 아드님이 참 자랑스럽겠어요.

모 친 : . 나라의 보물이지.

: 헌데 며칠 묵으실 거죠?

모 친 : 제사만 지내면 바로 떠날 거요.

: 주의보 내려서 배 안 뜨는데요? 아마도 며칠 걸릴걸요?

모 친 : 그럼 나보고 이런 마굿간 같은 데서 지내라는 거야?

: 마굿간요?

모 친 : 이런 불결한 곳에선 잠을 못자요. 119에 전화해서 당장 헬기 보내라고 해요.

: 글쎄. 이런 날씨엔 헬기도 뜨지 못 한다구요.

모 친 : 당신이 소방서장이야? 위급한 환자 생겼다고 당장 연락해요.

: 정 그러시다면 전화는 해 보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간다)

윤 주 : 잠깐 앉아도 될까요?

모 친 : 여긴 어떻게 왔지?

윤 주 : (앉으며) 전 찰스 리 흠모하는 팬이에요. 찰스 리를 알고 싶어요.

모 친 : 알아서 뭐하게. (윤주를 살피며) 보아하니 우리 찰스 리 스타일도 아니고,

리 집안하고는 어림도 없어.

윤 주 : (자존심이 상하나) 저 그런 생각 없어요.

모 친 : 이제 우리 운이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을 거야. 병이 나으면 나랑 같이 사

업 할 거야.

윤 주 : 저도 한풍운 씨 도와드리려는 거예요.

모 친 : 우리 운이 자극하지 말고 좀 내버려 둬. 그 앤 좀 쉬어야 해. 그간 너무 피곤

하게 일했어.

윤 주 : 그랬지요. 영화 촬영에, 음반 취입에, 공연 일로 쉴 틈이 없었죠. 게다가 부친 돌아가신 충격이 너무 컸겠지요?

모 친 : 컸지. 그렇게 존경했던 부친인데. 제정신인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현관 도어 벨이 울리면서 풍운 들어온다,

그의 전신은 흙이 잔뜩 묻었고 유골함을 들었다.

일행 놀란다.

바람이 거세다.

 

풍 운 : 어머니 오셨어요?

모 친 : (일어서며) 운아, 꼴이 그게 뭐야?

풍 운 : (주변을 살피며) 그 자식들은 어디 있어?

모 친 : 엄마만 먼저 왔다.

풍 운 : 어떻게 눈치 챘지? 어머니 그놈들이 오기 전에 어서 이 섬을 빠져 나가요.

모 친 : 운아. 이젠 형들한테 돌려주고 좀 쉬자.

풍 운 : 허공을 헤매는 저 영혼들에게 아버지는 용서를 빌고 구원을 받아야 해.

모 친 : 운아,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니? 의사 형이 말하는데 그거 고칠 수 있대.

풍 운 : 어머니. 난 미치지 않았어. 괴로워서 그래. 견딜 수가 없어서.

모 친 : (절뚝이며 다가간다) 이젠 다 끝난 일이야. 그거 이리 다오.

풍 운 : (유골함을 건네며) 어머니, 죽었다고 다 끝난 게 아니잖아. 어머니가 당한 수

모 벌써 잊은 거야? 그 몸에 난 상처들은 어쩌고. 매 맞으며 보낸 젊은 세월

이 억울하지도 않아?

모 친 :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운이야, 난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그만하면 됐다.

배 들어오면 형들이랑 병원에서 사람들이 올 거다. 순순히 말 들어. 널 위해

서 내가 다 얘기했다.

윤 주 : 찰스 리. 어머니 말이 맞아요. 먼저 용서해야 마음이 편해져요.

풍 운 : 당신이 뭘 안다고 나서는 거야?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폭력에 시달

렸어. 임신했다고 때리고, 지우지 않는다고 배를 걷어차고 출산하는 날 어머 닐 감금하고 집에 불을 지른 놈이야. 해산 도우러 외할머니가 오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때리다 부러뜨린 몽둥이가 몇 개나 되는지 알아? 팔다리가 나가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터지고, 병원에서 지샌 날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구? 숨어 살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두들겨 팼지. 우린 살려고 이 악물었어. 군대 갔다 와 보니 어머닌 얼마나 맞았으면... 다리 병신이 되어 있었어.

모 친 : (눈물을 흘리며) 어쩌란 말이냐. 죽어 없어졌는데.

풍 운 : 그는 악마야. 그는 죽지 않았어. 가슴속에 들어와 날 마구 흔들고 있다고.

윤 주 : 당신에겐 약속된 미래가 있잖아요. 당신의 삶을 살아요. 예전처럼 힘든 사람

들에게 희망을 말해 주세요. 그게 당신 존재 이유고 진정한 복수 아닌가요?

풍 운 : 진즉에 없앴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그랬잖아요. 일 년만 두었다가 제사나 지

내고 없애자고.

모 친 : 모두 내 탓이다. 널 낳은 것도 잘못이고. 진즉 죽지 못한 것도 한이다.

풍 운 : 어머니, 바람의 언덕에 낙조가 일품이에요. 큰바람이 불고나면 노을이 더 찬

란하게 퍼져요. 난 새처럼 날면서 저 가루를 뿌릴 거예요.

: (들어오며) 헬기가 출발했대요. 누군가 예약을 해 놓았더라구요. (사이) 분위기가

왜 이래요?

모 친 : 형들이 오나 보다. 이걸 어쩌지?

풍 운 : 어머니 그들 손에 저걸 넘겨줄 순 없어.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 멀리서 들린다.

 

: 오나 봐요. (밖으로 나간다)

풍 운 : 어머니, 뒷문으로 나가요. 대나무 숲을 가로지르면 바람의 언덕이 나와요.

서 가요. (바삐 움직이는데)

윤 주 : (갑자기 총을 꺼내 겨누며) 다들 꼼짝 말아요.

풍 운 : 당신이...?

윤 주 : 한풍운 씨. 당신을 시신 탈취범으로 체포합니다. (다가가 풍운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풍 운 : (체념한 듯) 휴대폰이 울리고 반장님이라는 이름이 뜨더군.

윤 주 : 속인 거 미안해요. 저도 고민 많이 했어요. 하지만 공무 수행상 어쩔 수 없

어요. 내 휴대폰 어딨어요?

풍 운 : 주머니에.

윤 주 : 손 올려요.

 

윤주, 풍운의 주머니를 뒤지는 사이,

모친과 풍운 눈이 마주친다.

모친 유골함을 들고 나가려 한다.

 

윤 주 : (알아채고) 거기서요. (총을 꺼내려 한다)

풍 운 : (수갑 찬 두 팔을 내려 윤주를 껴안는다.) 제발 모른 해줘요.

윤 주 : 이거 공무집행방해죄라는 거 아시죠? (몸부림치며) 이거 놔요. 비켜 서라구

.

풍 운 : 당신을 놓으면 악마가 살아나요. 제발.

윤 주 : (포기한 듯) 이러면 나는 ....

모 친 : 난 살 만큼 살았다. 이 짐승한텐 한 뼘의 땅도 아까워. 내가 안고 갈 테니 운

, 넌 다 잊고 다시 일어서거라. 찰스 리, 한풍운 파이팅. (절뚝거리며 이동

한다)

풍 운 :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

윤 주 : (풍운에 기대며)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 점점 크게 들린다.

풍운과 윤주는 껴안은 상태로 미동도 않는다.

유리창 밖으로 노을이 아름답게 빛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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