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희곡 열매 맛보기

좀녜

강용준 2017. 12. 3. 11:15


좀녜(潛女)

■ 등장인물
     남씨: 40대 중반의 잠녀
     청애: 남씨의 딸
     길녀: 20대의 초영 온 잠녀
     봉순 어미: 30대의 과부
     명덕네: 20대의 잠녀
     현구부: 덕천리 어촌계장
     진천댁: 언촌계장의 처
     현우: 어촌계장의 아들
     김씨: 어업지도원
     고씨: 인솔자
     정순: 30대의 잠녀
     덕자: 20대의 잠녀

■ 곳
    남해안의 마을(덕천리)


무대
   무대 왼쪽에 두 단쯤 올린 곳에 불턱이 있는데,

  이 불턱은 잠수(해녀)들이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장작을 때어 불을 쬐는 곳으로 바다를 연한 갯가에

큰돌을 둘러 모아 바람을 막게 되어 있고, 탈의실을 겸한다.
  오른쪽은 어촌계장의 집 바깥채인데 집이라고는 하나, 슬레이트 건물로 창고를 개조해 방을 꾸민 곳이다.  

조그만 창문이 윗쪽으로 달랑 붙어 있고 출입구는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의 구조는 밖에서 보이지 않으나 너댓 명이 공동 생활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집앞 왼쪽 구석으로 수돗가가 있고 무대 앞 오른쪽으로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나무를 의지하여 빨래줄이 걸린다.  

집의 왼쪽을 돌아서면 동네로 통하는 길이 있고,

오른쪽 자그만 통로는 측간과 뒷동산 숲으로 가는 길이며 길옆 흙담 위로 기와집 처마가 삐죽이 나와 있다.  

마당에는 나무로 만든 기다란 간이 의자가 적당히 자리잡고 있으며, 멀리 바다가 보인다.


제1막


제1장


   파도가 잔잔히 부수어진다.  황혼녘이다.
  남씨, 태왁과 망사리 등 어구들이 들어 있는 물구덕(물질할 때 쓰는 바구니)을 들고 들어온다.  

매우 피곤한 것처럼 휘파람 소리로 숨을 내쉰다.  진천댁, 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진천댁 :  (들어오며) 워따매 이제 한동안 청애 어멈도 살판 나겠구면유?
남  씨 :  죽지 못해 사는 인생보고 뭔 말이우?
진천댁 :  제주도에서 사람들이 왔단 말이유.  남씨 고향에서.
남  씨 :  사람이야 똑같은 사람인데, 제주사람들이라고 육지 오지 말란 법 있수?
진천댁 :  과부라고 앞뒤로 꽉꽉 막아 버렸나?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해녀들이 우리 마을에서 작업을 한다고 무더기로 왔단 말이유.
남  씨 :  (놀라며, 그러나 표정을 감추고 시큰둥해서) 바깥 물질 나왔단 말이군.  흥, 고생을
        빌어서 하는 거지.  얼마나 벌겠다고.
진천댁 :  어째 시큰둥 해쌌소?  오라.  청애 어멈 혼자서 차지할 바다를 나눠 쓰게 되었은께
         기분이 쬐깨 안 좋겠구만유?
남  씨 :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우?  바다가 어디 내 혼자 밭인가요?  벗들이 생겨 잘됐
         구만요.  몇 사람이나 되우?
진천댁 :  우리가 세 명을 맡기로 했소.  비좁을 테지만 같이 지내면서 좀 잘  지도해 줘요.
          뭐 다 자식벌 아님 막내 동생벌일텐데 뭐.  헤헤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준비 말아유.
          축하할 겸해서 장도 볼 거구만유.  우리집에서 한 턱 낼 테니.  알았지유?
남  씨 :  우리 걱정은 말고 손님들이나 잘 대접하세요.
진천댁 :  차려 놓은 음식에 숟가락 둘 보태는 건데 뭘.  처음이고 어색할 테니 청애도 데리고
          와서 고향 얘기나 좀 해 줘유?
남  씨 :  알았어요.
진천댁 :  자 그럼 나 갔다올께유.  (하수로 퇴장)
남  씨 :  (혼자소리로) 미친년들.


    따온 해초들을 마당 한구석에 펴서 말린다.


남  씨 :  (앉아서 허리를 두들기며) 아이구 허리야.  (사이, 집안을 향하여 큰소리로) 에미가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을 거여?

         (사이) 세상에  될 일을 가지고 고집을 피워야지?  성한 사람 두 눈 번쩍 뜨고도 살기 어려운 곳이 서울이라는데,
         다 큰 계집애가 병신 몸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여?  지 분수를 알아야지.  바다가 우리 집이고 재산인데 그걸 두고 어딜 간단 말이냐?  

        시집가기 전엔 에미 곁을 벗어날  생각은 아예 말어.


   물구덕에서 천으로 된 잠수복을 꺼내 수돗가로 가서 물에 헹궈 짜서 빨래줄에 넌다.

잠수복을 헹궈서 일어설 때 허리가 삐긋 해서 고통을 참는 것 이외에는 모든 동작은 일상의 일인 양 표정 없이 기계적으로 행해진다.
청애, 약간 발을 절면서 밖으로 나온다.


청  애 :  어머니, 제발 부탁하것시오.  예?  아무리 생각해도 전 물질해서는 못 살겠어요.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단 말이예요.  

           예?  어머니.  제발 보내주세요.
남  씨 :  생각은 무슨 생각?  니가 현우 꼬임에 빠져 그런 모양인데, 현우 그놈은 안된다.  

           괜히 단물 빼먹으려는 수작이니 절대 넘어 가선  안돼.  알았어?  그놈은 바람둥이여.  

           저번에 서울 색시를 달고 온 것 봤지?  넌 죽도록 에미하고 살 팔잔께 마음에 바람이 들어선 못 쓴단 말이다.
청  애 :  현우오빤 상관없는 일이예요.  그리고 말끝마다 병신병신 하는데, 지가 어디  배냇병신인가요?  

            진작 나 하자는 대로 내버려뒀으면 이렇게는 안 됐을 거 아녜요?
남  씨 :  이년아 죄 받아서 그리 된 걸 누구 탓이여?  세상이 부모 말 어기고 잘돼는 사람 본 일 있어?  

            좀녜가 되기 싫어 도망가면 그냥 놔 둘 줄 알았어?  바다를 욕되게 하는  싸가지없는 소릴 계속 나불대면 용왕님이 더 큰 벌 내릴 거여.  

            물질이 좀 힘들긴 하지만 아직 숙달이 덜 되서 그렇지 수입이야 밭농사에 비기겠냐?  너 나이에 난 애기상군 소릴 들었어.
청  애 :  힘들어서 그런게 아니구, 물에 들면 자꾸 송애 생각이 나서 그렇다니까?
남  씨 :  미친년.  송애가 어쨌단 말이여?  송애는 돌아온다.  너희 아버질 찾아 돌아올 테니 두고 봐.
청  애 :  어머니.  정말 미쳤어요?  송애는 숨다이 먹었잖아?  찾아올 아버진 또 누구 말이예요?  물귀신이 된 아버지?  

            아님 우릴 두고 도망쳐버린 양아버지 말씀이예요? 어머니 꿈 깨세요.
남  씨 :  (고집스럽게) 송애는 죽지 않았어.  에미만큼 물질을 잘하는 년이 어떻게 물에서 죽는단 말여?  

            물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뿐이지 바다에 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고기가 되어 넓은 바다에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헤엄쳐 다니고 있단 말이다.
청  애 :  그래요.  어머니, 나도 서울 다녀오고 나면 열심히 물질할께 응?  
            어머니.  바람만 쏘이고 금방 돌아온다니까?
남  씨 :  철딱서니 없는 것.  뒤부슨 암말 모냥 날뛰지 말고 얌전히 있어.  
         태왁이 왜 물 위에 뜨는지 알기나 해?  속에 바람이 들어서 그런 거다.  
         현우가 서울을 나댕기면서부터 뱃일을 안 하려는 넋도 다 그런 이치여.  
         애초에 눈감고 살어.  분수껏 살잔 말이다.  서울이 당장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이담에 돈 잘 버는 서방 만나서 구경시켜 달래도 늦지 않어.
청  애 :  피이, 누가 시집은 간데?  어머니가 정 안 보내 주면 못 갈줄 알고?
남  씨 :  뭐여?  이년이 잘 먹이고 키워 놓은께 에미 밥숟갈 놓게 만들려네?  
         너 정말 이 에미 속 뒤집혀 죽는 꼴 볼 테여?  나도 송애처럼 바다 속에서 나오지 말랴?
청  애 :  아니예요.  어머니, 하지만….
남  씨 :  뭐가 하지만이여?  저 물구덕이나 치워.


 청애, 뾰롱통한 얼굴로 들어간다.
남씨, 수돗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남은 물은 마당에 뿌리고는 집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어촌계장이 잠녀 세명을 데리고 들어온다.  

잠녀들은 가방이나 보따리와 물구덕을 들었고 들어와서는 신기한 듯 좌우를 살피고 저희들끼리 얘기를 주고받으며 웃기도 한다.


현구부 :  싸게들 오시랑깨.  자 여그가 여러분들 숙소요.  누추하고 비좁겠지만 이 마을에선 이만한 시설도 없구만요.  

             우리 집이래서가 아니라 나중에 들어보면 알겠지만 다른 분들이 든곳은 헛간을 개조해서 방을 꾸민 곳이랑께.  

             여러분이 살던 곳은 어쩔랑가  모르겄소만 객지에 나오면 다 고생이지요 잉?  

             허지만 여러분들이 우리 동네 발전을 위하여 왔은께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나가 이 덕천리 어촌계장으로서 즉각 사시정할텐깨

             어려워 마시고 말만 하쇼이?
봉순어미 : (흉내내며) 워따 뭔 연설이 요롬코롬 길당가?  우린 피곤해 죽겄구 만은.


   명덕네와 길녀, 깔깔대며 웃는다.


현구부 :  참 배 타고 빠스 타고 먼 길 오시느라 욕 봤는디 피곤하시겠네요?  
         쬐깨만 여기서 기다리쇼.  소개할 사람이 있은깨.  (문이 있는 데에 가서) 남씨 있소?  (집안으로 들어간다)
명덕네 :  언니는 어디서 사투릴 배웠우?
봉순어미 : 한양 가면 한양 물을 먹어야 하고 미국 가면 꼬브랑말을 해야지라. 일터가 안 그렇소?
길  녀 :  그래도 너무 잘한다.
봉순어미 : 느그들도 쬐만 있으면 다하게 될 끼다.  난 여기 오기 전에 이 고장 사람에게  쬐깨 줏어 들어 불었제.


   명덕네와 길녀, 깔깔대고 웃는데 집안에서 현구 부친과 남씨, 청애가 나온다.


남  씨 :  촌년들이 남새스럽게 뭔 짓들이여?  여자가 웃음이 헤프면 남정네들이 얕보는 법이여.
봉순어미 : 제발 눈 까진 남자라도 달라붙었음 좋겠으라우.
남  씨 :  (노려보며) 망할 것!  서방질하러 여기까지 왔냐?
봉순어미 : 과부가 재미 좀 보기로서니 누가 뭐랄 사람 있겄소?  안 그라요?  어촌계장 아지배요?
현구부 :  (대답하기 난처한 듯 헛기침을 하고 나서) 자 이분으로 말하자믄 이곳 방장이요.  

             여러분하고 동향인깨 많은 도움이 될것이로구만?
봉순어미 : 오매 객지서 성님 만나부렀네이.  안녕하신깨라?  나 봉순이 어멍이랑깨요.
남  씨 :  육지물 먹다가 혓바닥에 풍이 걸렸나?  말투가 왜 그 모양이여.  
         촌년은 촌년같이 행실을 해야지.  여기서 그 따위로 잔재주 부리다간 코가 깨질 테니까,
         알아서들 기여.
봉순어미 : (입을 삐쭉인다)
현구부 :  청애도 인사허그라.  이 아주머니 딸이요.
청  애 :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앱니다.
현구부 :  자 난 이만 실례할라요.  (가리키며) 요 집이 나 사는 덴깨, 뭔 일이 있으믄 싸게 말하소이.  

            자 그럼 짐들 정리허고 우리 집으로 오소.  (나간다)
명덕네 :  안녕하시우꽈.  김정임이우다.
남  씨 :  초영이여?
명덕네 :  초영이 뭐우꽈?
봉순어미 : 바깥 물질 처음 왔냔 말이여?
명덕네 :  예.  (봉순어미를 가리키며) 저 성님은 두 번짼디, 여기 길녀하고 난 처음이우다.
남  씨 :  여기선 사투릴 쓰면 놀림받으니까, 불편하드래도 혀를 꼬부려.  (길녀에게) 넌 어디서 왔냐?
길  녀 :  모두 성산포에서 와수다.
남  씨 :  또?  아무리 배우지 못했기로 한 번 말하면 알아들어야지.  여기선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돈 벌기는 고사하고

           일생 망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
봉순어미 : 아이고 뒷간은 어디 있수?
남  씨 :  왜 내 말이 듣기 거북한가?
봉순어미 : 그런 게 아니라 급해서 그렇다니까요.
남  씨 :  (오른쪽 구석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돌아가봐.
명덕네 :  어쩐지 차안에서 배고프다고 들구 주워 먹더라.

    

봉순 어미, 짐을 내려놓고 허리춤을 잡고 쪼르르 달려간다.  그 꼴이 우스운지 명덕네와 길여 또 깔깔거린다.  

 청애, 같이 따라 웃다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한다.
그리고 수돗가로 달려가서 몇 번 건토악질을 계속한다  길녀, 달려가서 등을 두들겨 준다.


남  씨 :  아니 쟤가 멀미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웬 일이랴?
길  녀 :  (바가지에 물을 떠서 주며) 자 물 마셔.
청  애 :  (물을 받아 마신다)
길  녀 :  이젠 괜찮아?
청  애 :  (끄덕이다가 다시 건구역질을 한다)
남  씨 :  그것 봐라.  에미 말 안 듣고 심통 부리다 밥통이 고장났지.  굶으면 지 손해여.

    

길녀와 명덕네 걱정스럽게 서 있는데, 봉순 어미, 옷을 추스리고 나오며 비명을 지른다.


봉순어미 : 측간에 귀신이 있어.
길  녀 :  귀신요?
봉순어미 : 그렇다니까요.  치마를 걷고 앉았는데… 저 저기 봐.

  

 측간 쪽에서 현우, 나타나 말없이 사람들을 살핀다.


남  씨 :  아니 저 녀석이.  잠수들 처음 보냐?  왜 물질하는 여자들은 비늘이라도 돋힌 줄 알어?  저놈 눈 좀 봐.


    현우, 말없이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남  씨 :  응큼한 놈.  형제가 꼭 닮았어.  저 현우 녀석을 조심해.  저 놈은  바다 굴속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야.
봉순어미 : 어휴.  난 또.  (배를 움켜잡으며) 아이고 배야.  휴지 들고 빨리 좀 따라와.  (어기적거리며 다시 뒷간으로 간다)
남  씨 :  자 어서들 들어가.


    사람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어두워진다.

 

제 2 장


   며칠 후, 잠녀 몇 명이 물옷(해녀복)을 입은 채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함께 멀리서 숨비소리(잠녀들이 숨을 고를 때 내는 휘파람소리) 들린다.  

봉순 어미, 젖은 몸으로 태왁과 미역망사리를 들고 들어온다.


봉순어미 : 어휴 추워.  (숨을 내쉰다) 건방지게 상군덕에서 가랭일 쩍 벌린 게 누구여?

            상군이 왔으면 일어서야지.  저리 좀 비켜.  (넘어간다)
정  순 :  얘는 남의 물구덕 가달 넘기면서 왜 이래.  재수없게스리.
봉순어미 : (천연덕스럽게) 니 물구덕이 왜 하필 거기 있었냐?
덕  자 :  상군덕은 남씨 아줌마 자린데 어째 봉순 엄마가 호령이요?
봉순어미 : (비집고 앉으며) 성님이 없으면 그래도 내가 최고 아니가?  어이 따뜻해.
명덕네 :  근데, 성님은 미역망사리만 있고 헛물망사린 어쨌어요?
봉순어미 : (당황한 빛을 감추고 태연하게) 집에서 올 때 깜박 했지 뭐여? 그런데다 머들팟(돌무더기)에 들었는지 전복새끼

             한 마리 안 보이고 고냉이방석(불가사리)만 잔뜩이더라.
정  순 :  제딴에 상군이라면서 민둥구쟁기(큰 소라) 하나 못 잡았단 말이가?
봉순어미 : 왜?  못 잡았다면 보태 줄 테야?  남은 속상해서 죽겠는데 누굴 약올리는 거여?  뭐여?
명덕네 :  (일어서며) 그만들 둬요.  자리 때문에 싸움 나겄네.
봉순어미 : 명덕네야, 너 어디 가려고 그러냐?
명덕네 :  세 번밖에 못 들었어요.  하루 다섯 번은 들어야 하는데.
봉순어미 : 얘가 물질을 미용체조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  아무리 젊은 몸이라지만 객지에 나와선 힘을 아껴야 하는 법이여.
명덕네 :  그래도 난 명덕 씨 장사 밑천 때문에 언니네보다 전도금을 많이 빌렸잖우?
정  순 :  아무리 전도금이 그렇지만 하루 다섯 탕은 무리여.
봉순어미 : 암!  한 번 물질이 이불 속 요분질보다 힘든 것인데 다섯탕이 보통 일이여?


    한바탕 웃음소리.


덕  자 :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아이 우스워 눈물이 다 나네.
명덕네 :  봉순이 엄마만 사람을 잘 웃기나 했더니 정순 언니도 보통은 넘네요?
정  순 :  어찌 말을 그렇게 섭하게 하는가?  양기가 입으로 모이면 자식을 못 낳는다고 하는데 내가 어디 한쪽 입이

            쓸모없는 과부하고야 비길 수 있남?
덕  자 :  한쪽 입이라니요?
정  순 :  답답도.  잘 생각해 봐 여자는 입이 둘 아니가?
일  동   (다시 박장대소한다)
봉순어미 : 날 놀리려구 그러지마 과부 재미를 너희들이 어찌 알겠냐?
정  순 :  평생 혼자 살 생각 없으면 서둘러야지 그렇게 바람만 필거여?
봉순어미 : 서러워서 그런다.  정순이 넌 객지에 나오면 서방 생각도 안 나냐?  
         시방 난 홀몸이 된 지 삼년째 아니가?  니들은 아직 그 맛을 모르니께 내 마음 어찌 알겠냐?  

         젖은 짚신도 며칠 볕을 안 쐬면 곰팡이가 피는데, 이내 몸이 서럽지 않을 수 있냐?
정  순 :  에그 저년은 가나오나, 걸신들린 것처럼 밤낮 그 소리지, 그렇게 그리우면 내가 남잘 소개해 줄까?
봉순어미 : 왜니 서방이라도 빌려주려고?
정  순 :  아니 이년이 뭐여?  (때리려고 덤빈다)
봉순어미 : (피하며) 그려 남자 맛 못 봐서 환장해서 그런다.  왜?  네 남편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냐?
정  순 :  아니 저년이.
봉순어미 : 어디 씨앗 싸움 한 번 해볼 테냐?  자신 있으면 따라오라구.
정  순 :  (따라가며) 너 거기 섰지 못해?


    일동, 파안대소하는데 남씨와 길녀, 청애가 들어온다.  

    청애는 머리가 아픈 듯 힘없이 주저앉는다.


남  씨 :  이년아.  잘하면서 뭘 못한다는 거여?
청  애 :  무서워요.  누군가 머리채를 나꿔채는 것만 같아 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남  씨 :  이녀석아.  그건 다리를 다쳐서 그런 거야.  하지만 이 에미가 팔 다리 한쪽을 움직이지 않고도 헤엄치는 것 봤지?  

           넌 얼마든지 상군이 될 수 있단 말이다.  넌 이 상좀녜의 딸이야.
청  애 :  하지만 자꾸 송애 생각이 나는 걸 어떻게 해.
남  씨 :  (역정을 내며) 자꾸 그런 소릴 나불댈 거야?
청  애 :  (울먹이며) 어머니.
남  씨 :  (사이) 용왕님이 마음에 드니까 가까이 두는 게지.  얼마나 영광스럽냐?  하지만 송애는 꼭 온다.  

           에밀 찾아 한 번쯤은 나타날 거야.
청  애 :  (울먹이다 헛구역질을 하며 뛰쳐나간다)
덕  자 :  아니, 청애가 왜 저래요?  (따라나간다)
명덕네 :  병원에 한 번 데려가 보세요.  밥 한 술 못 넘기는데 물질까지 힘들게 하니 몸이 오죽 하겠어요?
남  씨 :  곰새기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거야.  짠물을 많이 먹었어.  길녀를 봐.  얼굴이 새하얗지?
명덕네 :  (길녀에게)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길  녀 :  두통약 있어?
명덕네 :  가만 있어 봐.  어디 한 첩 남았을 거야.
남  씨 :  놔둬.  약보다 이 감태가 최고여.  (감태 한 줄기를 내밀며) 이걸  불에 파랗게 구워서 젖은 소중기에 감싸 김을 쏘이면

           금새 괜찮아 질 거야.  원!  어린년이 무슨 욕심은 그리 많아서.  몸을 그렇게 쓰다간 상군 소리 듣기 전에 허리가 고장나고 말 거다.
명덕네 :  감태를 구울 테니 어서 소중기나 벗어.
길  녀 :  (무대에서 보이지 않는 쪽을 가리키며) 저기 누가 있어요.
명덕네 :  (살피고 나서) 저건 어촌계장 아드님 아녜요?
남  씨 :  현우 저녀석이 왜 또 궁상맞게 저 모양이여.  (큰소리로) 저리 가지 못해.  저리 가란 말여.  

           남잔 불턱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잖어?
명덕네 :  (재미있는 듯) 후후 응큼하기는.  (감태를 굽는다)


    길녀는 돌아 앉아 옷을 갈아 입고 남씨는 불을 쬔다.


남  씨 :  남자는 겉보기론 모르는 법이여.  저렇게 멀건히 생긴 놈이 마음속엔 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법이니까.  

          우리 청애는 싫다는데도 뒤꽁무닐 졸졸 따라다니지만 택도 없어야.
명덕네 :  왜요?  군대도 마치고 건강하겠다.  저만하면 사윗감으론 최고 아녜요?
남  씨 :  사내가 배포가 있어야지.  저런 녀석에겐 각시가 고생이여.  내 사위는 바다를 다룰 줄 아는 놈이라야 해.  

            바다 속 무궁무진한 보물을 놔두고 사업은 무슨 사업이여?
명덕네 :  우리 명덕이 말이 사업이 잘만 되면 큰 돈 만질 수 있어 좋다대요.
남  씨 :  돈이 있으면 뭘 하나 마음이 편해야지.  자본은 오죽 들어가?  여기저기 꾸어대랴
         여자가 고생이라구.  나도 청애 애비 고깃배 마련 할 땐 배를 움켜 쥐기도 했었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다 물거품이여.
명덕네 :  다 타버리겠어.
길  녀 :  (돌아서며 소중기를 내밀며) 다 됐어.  여기다 얹어 놔.
명덕네 :  (조심스럽게 옮겨 놓으며) 뜨거울 테니 조심해.
남  씨 :  소중기가 젖어서 괜찮아.  코로 들이마시고 이마에도 대봐.
길  녀 :  (물엇에 싸자 김이 나온다.  그걸 코에 갖다 댄다) 아이 냄새.
남  씨 :  저년은 뭘하는 거여?  이리 와서 감태냄새 맡아.
덕  자 :  (소리) 예 잠깐만요.  옷 갈아 입히구요.
남  씨 :  가만.  저년이 배가…. 청애야 이리 좀 오거라.

청  애 :  (들어서며) 왜 그래요?
남  씨 :  (배를 만져 보며) 아이구 이년이?  (붙들고서) 이년아.  누구여?    
         망할년아 죽고 싶어 환장했냐?  어느 놈에게 가랑일 벌린 거여?  이 병신년아.
청  애 :  아니예요.  어머니.  난 아무 잘못도 없어요.
남  씨 :  이년아.  에밀 속이진 못혀.  누구여?  현우지?  그놈이 널 꼬였
         지?  얼른 말을 해.  (때리며) 이년아.  누구여?
청  애 :  아니예요.  아니예요.
남  씨 :  그럼 누구여?  현민이여?  그놈이 그랬어?  어서 말 못해.  (때리며) 누구냔 말여?
청  애 :  다 내 잘못이예요.
남  씨 :  왜 말 못해?  니가 화냥년이냐?  (다시 쥐어 박으며) 어서 대 이년아.  누구여?
청  애 :  아이고,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께요.
길  녀 :  (말리며) 아줌마 참으세요.  이러다 다치겠어요.
남  씨 :  너희들은 상관 마.  (때리며) 죽어라.  죽어.  너같은 년 없어도 살아.  죽어라 화냥년아.  죽어 버려 병신년아.  

          (팔을 붙들고) 이리 와.  한데 물에 빠져 숨을 쉬지 말자.  어서 이년아.
청  애 :  어머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명덕네 :  (말리며) 아줌마, 이러지 마세요.
길  녀 :  (사이를 갈라 놓으며) 아줌마.  청애가 불쌍하잖아요.
남  씨 :  저리 비켜.  내 오늘 절단 내고 말 거여.  몽둥이 어딨어.


    남씨가 모둥이를 찾는 사이 청애는 빠져나와 절뚝이며 도망간다.


남  씨 :  거기 서.  도망가면 어디까지 갈 거여?
명덕네 :  (막아서며) 안 돼요.  아줌마가 참아야 해요.  이런다고 일이 풀리는 건 아니잖아요.
남  씨 :  필요 없어.  저 따위 년은 없어도 살아.  망령이 든 년.  서울 귀신이 붙은 년은 내 새끼가 아니란 말여.  

           내 딸은 화냥년이 아니란 말여.
길  녀 :  말도 못하고 끙끙 앓는 청애 마음은 오죽 했겠어요?
남  씨 :  (퍼질러 앉으며) 아이고 이 노릇을 어떻게 할거여.  저년이 어쩌자고 지 앞길을 콱 막아 버렸나.  

           아이고 원통해.  어떻게 기른 자식인데. (일어서서) 내 이놈.  애비 없이 크는 자식이라고 막 대하는
         놈 가만 안 놔둘 거여.  이 현우놈의 새끼가 조개 까먹듯….


   남씨, 씩씩거리며 퇴장하면 암전 된다.



제 2 막


제1장


   전 막으로부터 한 달 후, 어둠 속에서 갈매기소리와 함께 통통배의 기관소리 한가롭게 들린다.  

이윽고 현구 부친과 현우의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린다.


현구부 :  (소리) 머새다 쓸 건지 말을 허란 말이여.
현  우 :  (소리) 급히 쓸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그만큼도 못 빌려 주요?


   무대 밝아지면, 남씨와 봉순 어미가 무슨 일인가 하고 문 밖으로 나와 내다본다.


현구부 :  (소리) 니 그것 가지고 뭣 헐라는지 나가 다 안다.
현  우 :  (소리) 서울 가려는 것이 아니요.  그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요.
현구부 :  (소리) 그럼 뭣이여?  일이 시끄럽게 되니까 잠시 피했다 오겠단 말이여?
현  우 :  (소리) 나가 헌 일은 나가 책임집니다.  절 그런 놈으로 보지 마시요.
진천댁 :  (소리) 책임을 어떻게 진단 말이냐?  남씨 아줌마가 청애를 안 둔 다는디?
현구부 :  (소리) 이 녀석이 군대를 헛댕겨왔구만.  세상물정을 그렇게도 모르까잉.  애비 맘을 그렇게도 모르냔 말이여?  

            내 다 물려준다고  안 그러냐?  잠자코 뱃일을 허기 전에는 한 푼도 어림없어.
진천댁 :  (소리) 현우야, 아버지 말 들어.  싫어도 현민이 제대할 때까지만 돕거라.  너까지 떠나믄 집에 누가 있겄냐?  응?
현  우 :  (소리) 안 헐라요.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인디, 어떻게 삼 년이나 바다에서 썩힌단 말이요.
현구부 :  (소리) 그런 소리 헐라믄 다신 나타나지도 말고 썩 꺼져부러.  니 같이 계집질이나 허는 못된 놈은 필요없응께.


   현우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나가자, 진천댁, 따라나온다.


진척댁   현우야.  현우야.
현구부 :  (소리) 내비둬… 어디 가서 뒈져 버리게.
진천댁 :  (돌아서서) 하이고, 뒈져 버리면 좋기도 하겠수?  애비가 오죽 못 났으면 자식 새끼 설득은 못하고 윽박지르기만 해유?
현구부 :  (나오며) 저놈의 자식이 대처물 좀 쳐먹드만 간땡이가 부슨 거여.  
         동력선 물려준다 해도 싫다 허고, 있는 밭떼기 농사도 마다 금시로 장사가 다 뭐여?  

         젠장 맞을.  돈은 물 속에서 솟아나는 줄 아나?
진천댁 :  (주위를 살피며) 에그, 동네가 챙피해서 죽겠구먼유.  현우 마음도  이해해야지유.  오죽 속이 깊은 애여유?
현구부 :  (남씨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한다) 속 깊은 놈이 뭣 땀새 넘의 집 처녀는 건드리고 지랄한다냐?  

           애비가 허자는 대로 고기나 잡다가 정해주는  색시헌티 장가나 들믄 될 거를.  어쩔라꼬 저러까 참말로 젠장.  쯧쯧.
남  씨 :  책임지라고 않을 테니 염려 말아요.
현구부 :  (안타까운 듯) 허이구!  현우 놈이 죽일 놈이요.  쯧쯧.  (돌아선다)
진천댁 :  참.  내일은 조금이깨 바다에 안 나가지유?  진작에 모를 내야 하는데 일손을 구할 수 있어야지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일 모를 심는데 이 집 사람들 모두가 동원돼 줘야 되겄어유.
봉순어미 : 뭐를 심어요?
진천댁 :  (잘못 듣고) 그래유.
남  씨 :  모내기 말이여.  말도 못 들어 봤어?
봉순어미 : 모내기요?  해본 일도 없는데?
남  씨 :  배우면 다 할 수 있어.
봉순어미 : 근데, 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해요?
진천댁 :  대신 집세는 안 받을 거구만유.  공짜라고 해도 그렇지, 남의 바다에 와서 돈을 벌면서 그만한 일도 못해 준대유?
봉순어미 : 우리가 언제 공짜로 물질을 합니까?  어촌계에 세를 바치고 있지 않아요.  

             정 우리 돈 버는 게 시답지 않으면 아줌마네도 물질을 하면 되잖아요?
진천댁 :  아니 이 무슨 망발이여?  양반보고 상투 자르란 소리보다 더 하네?
봉순어미 : 뭐예요?  그럼 우린 쌍놈이란 소리요?
진천댁 :  아닌 말로, 할 수 없으니까.  벗은 몸으로 짠물에 뒹구는 거지.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한들 어찌 여자가 그런 일을 하겄어유?
현구부 :  그만둬.  이 사람이 말을 너무 심허게 하는구만.
진천댁 :  심하기는?  마을사람들에게 다 들어 봐유.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그런 소리 안 들으려면 덕천리를 떠나면 될 것 아니겄어유?  어차피 뜨내기 인생인데,

           진작 그랬으면 송애도 안 죽었을 테고 청애도 아무 일 없었을 거구만유?
남  씨 :  도둑놈이 몽둥일 든다더니 송애는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그리곤 군대로 내빼면 단가?  이 녀석 나타나기만 해봐라.
진천댁 :  말이 지나치구만유.  우리 현민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욕해 쌌이유?  

            현우도 하늘에 맹세코 자기는 청애를 안 건드렸다고 하는데 어째 툭하면 우리 집을 걸고 넘어지냔 말이유?
남  씨 :  청애가 불면 다 틀통날 텐깨 숨겨 놓은 것 아녀?  구린데가 없으면 현우녀석이 왜 내 앞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느냔 말야.  

           내가 한사코 반대하니까 그 어린것을 꼬셔 내어 몸을 망쳐놓은 거 아니오. 하지만 어림없다구.
진천댁 :  꼬시다니?  내 지금껏 남씨 처지가 불쌍해서 집까지 빌려 주고 아무 소리 안 했지만 피는 못 속이는 법이여유.  

            청애가 남자를 후리는 건 타고났단 말이지유.
남  씨 :  아니 뭐여?  내가 그럼 갈보란 말여?
현구부 :  이 애편네가 못허는 소리가 없구만.
진천댁 :  동네 사람들 수근거리는 소리도 못 들었소?  남씨는 각시있는 남자만 둘씩이나 꿰어찼다고 나보고도 서방 조심하란다구유.
남  씨 :  하이고야.  별 말을 다 듣겠네?  당신들이 뭘 안다구 씨부렁 거리는 소리여?  

            팔자가 더러워서 혼례 한 번 못 치르고 서방을 둘씩이나 얻은 건 사실이지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본 적은 없단 말여.  

            여자 마흔에 남잘 알면 남자 없인 못산다고 하지만 난 안 그려. 바다가 내 집이고 서방인깨 다 필요없단 말여.
진천댁 :  지금 와서 그런 소리 말어유.  남씨도 좋으니까 그냥 살았잖어유?  
         바다가 어디 여기뿐이여유?
남  씨 :  (그 말에 휘청거린다)
현구부 :  그만두랑께!  (진천댁에게) 이 여편네가 미쳤나?  넘이사 결혼을 두 번 허든 혈 번 허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여?  

            어서 들어가!  청애 어머니가 우리 집일을 얼매나 도와 주는디 그 따위 소리여?
진천댁 :  어따.  그렇게 좋으면 들어와 살림하라고 그러시지유?
현구부 :  (큰소리로) 어서 들어가지 못해!
진천댁 :  (뒷걸음치며) 난 죽어도 그 꼴을 못 봐유.  남씨하고 좋아지낸다고 소문이 쫙 퍼졌단 말이에유.  

             여하튼 내 눈에 걸리면 살인날 테니  알아서들 해! (도망치듯 들어간다)
현구부 :  저년이?  (사이, 남씨에게 다가가서) 현구 에미가 쪼감 무식해서  그런깨 용서허시오.
남  씨 :  (쳐다보지도 않고) 내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내일 모두 데리고 밭에 나갈 테니까요.
현구부 :  그럼 나 들어갈라요이?  내 이 무식한 년을….  (팔을 걷어올리며 들어간다)


   사이, 남씨는 수돗가에 가서 물을 떠 마시고 긴 한숨을 내쉰다.  파도소리가 잔잔히 들려 온다.


봉순어미 : (울화가 치미는 듯) 어휴!  바다 구경도 못하고 자란 것들이 우릴 깔보다니.
남  씨 :  저들은 물질을 할 줄 모르니까 괜히 샘이 나서 그런 거야.  진천댁만 그런 게 아니고 육지 사람들 대다수가 우릴 업신여기고 있다는   
         걸 몰라?  우린 먹고살기 위해 이 짓을 하지만 육지사람들은 원숭이 구경하듯 한단 말이여.  

          남의 바다에 와서 물질을 하려면 시집살이하듯 귀머거리, 반벙어리가 돼야 해.


   명덕네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온다.


봉순어미 : 어이구 며칠간 비나 쫙쫙 쏟아져라.
남  씨 :  마음을 곱게 써.  아무려면 언제고 우리가 할 일인데.
명덕네 :  길녀가 울고만 있어요.  괜히 나까지 눈물이 나오지 뭐예요.  
남  씨 :  이리 데리고 나와.  집 떠나 오래 되면 다 울보가 되는 거여.  부모가 그립고 어릴 적부터 뒹굴던 고향 바다가 그리워지는 법이지.
         어서 데리고 나와.
명덕네 :  예.  (들어간다)
봉순어미 : 길녀는 부모가 없어요.
남  씨 :  아니 어쩌다가.
봉순어미 : 어렸을 적에 모두 돌아가서 할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할머니도 안
         계신지 오래되었대요.
남  씨 :  저런?  부모 나이가 얼마 안 됐을 것 같은데.
봉순어미 : 그 후로 명덕네하고 같이 살았어요.  이웃에서들 도와주고, 또 물질을 잘하지 않아요?
남  씨 :  그려.  보통 솜씨는 넘어서 머지않아 상군 소릴 듣겠더구만.


   길녀와 명덕네 나온다.


봉순어미 : (길녀를 보다가) 에그 괜히 나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네.  나 잠깐 바람 쐬고 오겠어요.  (나간다)
명덕네 :  (의자에 앉으며) 자 여기 좀 앉자.
남  씨 :  (다가서서) 허어 녀석.  바깥 물질이 그리 쉬운 줄 알았어?
길  녀 :  ….
남  씨 :  나도 처음엔 많이 울었다.  열아홉 나던 해 돈 벌러 육지로 초영 나왔다가 전쟁통에 청애 애비를 만났지만 살 만해지니

            배타고 나갔다가 물귀신이 돼버리더라.  속초, 양양으로해서 동해안 바다는 다 헤엄쳤고,

            목포에서 선주의 꾀임에 빠져 첩살일 하게 되었지만 그도 얼마 못 가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빚만 떠넘긴 채 도망가 버
            렸어.  청애년이 기차에서 뛰어내리지만 않았어도 이곳 덕천리에 눌러 앉진 않았을 거야.  

           (웃음을 흘리며) 후후후 용왕님은 날 좋아하시는 가봐.  바다를 떠날까봐 항상 발을 묶어 놓거든.  

            청애가  병신이 되었지만 물질을 할 수 있는 것만도 용왕님의 보살핌이야.
         그년도 바다를 못 떠날 팔자라구.  (웃음을 날리며) 후후후 에미가 무서워 도망갔지만 금세 돌아오고 말걸.
길  녀 :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
남  씨 :  걱정은 무슨.  지깐 놈이 나 허락 없이 서울은 안 갔을 거야.  팔자는 타고나는 거니까.  

   에미 분이 풀릴 만하면 돌아올 테니 두고 봐.
길  녀 :  아줌마 고향은 어디세요?
남  씨 :  애월.
길  녀 :  애월이면 서촌인가요?
남  씨 :  그래, 왜?
길  녀 :  우리 부모님 고향도 서촌이라 했거든요.  어딘진 모르지만.
남  씨 :  그래?
명덕네 :  근데 어떻게 해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셨어요?
남  씨 :  안 간 게 아니라 못 간 거야.
명덕네 :  청애 아버지 때문에 말인가요?
남  씨 :  (고개를 저으며) 실을 내가 모신 서방은 둘이 아니라 셋이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4·3사건 때 마을 감찰부장을 했지.  

            헌데 토벌대들이 들어와서는 동네 처녀들을 괴롭혔단 말야.  그때 친구 남편인 그분에게 부탁을 했던 거야.  

            토벌대원들이 자꾸 날 유혹하니 가짜라도 날 작은부인으로 취급해 달라고 말야.  

            친구 허락 받고선 한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결국은 애까지 낳게 되고 쫓겨난 거야.
명덕네 :  제주에 자식이 있으시단 말이예요?
남  씨 :  (쓸쓸하게 끄덕이며) 자식이라곤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몰라.  낳자마자 데리고 가버렸으니.  

           처음엔 그 애 때문에도 많이 울었다. 살아 있으면 너희만 했겠지.  하지만 도리를 못 했으니 어찌 에미
         라고 찾아 나서겠냐?
길  녀 :  그럼 그분들은 아직 고향에 계시겠네요?
남  씨 :  사건 직후 온 식구가 고향을 떠났다고 하던데 그 후론 소식을 알 수가 없어.  나처럼 당하지 말고 조심해.  

            여자는 한번 잘못되면 깨진 태왁 꼴이야.  함부로 정을 주지 말고 남을 믿지도 말란 말이야.  

            아무리 여자지만 고집도 있어야 하고 냉정할 땐 찬바람이 일게 해야 해.
길  녀 :  그럼 아줌만 고향을 아주 버릴 거예요?
남  씨 :  (아픈 곳을 찔린 듯 길녀를 바라보다가) 녀석.  고향이 별건가 마음붙이고 살면 되는 거지.  

             여기 온 지 삼 년이지만 송애를 두고  떠날 수 없어.
         (돌아서 먼 곳을 응시하며) 가 봐야 반겨 줄 사람도 없고.  (웃음을 흘리며) 참으로 내가 어리석었지.
         그때에 맞아 죽더라도 그냥 눌러 있어야 하는 건데.  참 성산포에서 왔다구 했지?
길  녀 :  예.  아줌마 고향 애월하고는 많이 떨어진 곳이죠?
남  씨 :  (쓸쓸하게) 그래.  고향에선 지금도 겨울에 물질하지?
명덕네 :  그럼요.  오히려 물 속이 따뜻한 걸요?
남  씨 :  물 속이야 언제나 어머님 뱃속처럼 따뜻하고 포근하지.  걱정도 수심도 말끔히 사라지는 곳이 바가 속이야.  

           지금도 보리를 벨 무렵엔 자리횟국이 생각나.  멸젓에 조팝 먹던 시절이었지만 그때가 좋았어.  

            헌데 어떻게 해서 부모를 잃었냐?
길  녀 :  난리통에 돌아가셨대요.
남  씨 :  저런, 그 사건에 상처 입은 집이 한둘 아니지.
명덕네 :  (길녀에게) 어때, 마음이 좀 나아졌어?
길  녀 :  아줌마가 참 안됐어요.
남  씨 :  안되긴.  팔자에 서방복이 없는 년인걸.  너희들도 이 다음에 시집 가면 애들 많이 낳아.  

           자식 중에서도 아들은 필요 없고 딸이 집안 재산이야. 난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애를 낳고 싶어.
명덕네 :  어머 아줌마도.
남  씨 :  참말이야.  첩살일 마다 않은 것도 다 딸자식 하나 더 주으려는 심사였지.  하지만 실패했어.  나도 나이가 들었나 봐.
길  녀 :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요.  바닷가에 다녀올래요.
명덕네 :  같이 갈까?
길  녀 :  고맙지만 혼자 있는 게 편해.  미안해.  (나간다)
명덕네 :  겉으론 저래도 물질할 때 보면 얼마나 악착같다구요.
남  씨 :  그래.  니 다음에 잘 살거야.  헌데 이년은 도대체 어디서 뭘하고 있길래 안 돌아오는 거야.  망할년.


남씨, 멀리 하늘을 응시한다.  

명덕네,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씨를 바라보는데 무대 어두워진다.  

멀리서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제 2 장


  잠시 후, 파도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무대 밝아지면 불턱에 현우가 서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데 길녀가 등장한다.


길  녀 :  (소리) 거기 누구예요?
현  우 :  (돌아다본다) 길녀?
길  녀 :  현우… 씨?
현  우 :  그래, 헌데 길녀도 물질을 헐라고 왔나?
길  녀 :  어머 밤에 물질하는 사람도 있나요?
현  우 :  (봉순어미의 옷을 들고) 봐 이게 누구 옷인지 알겄어?
길  녀 :  어머, 이건 봉순엄마 것 아녜요?
현  우 :  저기 봐.  오늘만이 아냐.  알몸으로 헤엄쳐 가갖고 낮에 숨겨 논 해산물들을 몰래 꺼내 가는 거여.  

            그래선 검근하는 김씨와 뒷거래 허고 있다고.
길  녀 :  왜 이런 일을 하지요?
현  우 :  낮에는 사람들 눈도 있고, 이렇게 허믄 선주나 어촌계에 뜯기는 게 없응께.  직접 팔면 이문도 많이 남거든.
길  녀 :  어쩐지, 매일 헛물망사리를 두 개씩 가지고 다닌다 했더니, 헌데 현우씬 어떻게 할 셈이죠?
현  우 :  상관허지 말어.  아무 소리 없게 처리헐 거여.
길  녀 :  제발 말숙 언니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줘요.  오죽 돈이 궁하면 저렇게 하겠어요?  내가 잘 설득할 테니 모른 척 해줘요.  예?  부탁할께요.
현  우 :  걱정마랑께
길  녀 :  고마워요.  그리고 청애 문제 말씀인데요?


    현우와 길녀.  한 편으로 퇴장한다.  

 파도소리만 빈 무대를 채우다가 잠시 후 봉순 어미 나타나 옷을 입고 사라진다.  

 사이.  현우와 길녀 나타난다.


길  녀 :  나쁜 사람.
현  우 :  봉순 엄마만 욕헐 순 없어.
길  녀 :  현우 씨 말이예요.  응큼하게 숨어서 여자 알몸이나 훔쳐보고, 왜 청애 하나로 부족한가요?
현  우 :  뭘 안다고 그 따위 소리여?  길녀가 뭔디 남의 일에 끼여드냐고?
길  녀 :  아줌마가 안타까워서 그래요.  우리가 내쫓은 것처럼 대하기가 민망해서 그렇다니까요.
현  우 :  아줌마는 고통을 당해 싸.  아줌만 바다에 미쳤어.  자식이 종인가?  

           싫다는 대도 억지로 물질을 시키다 송애는 물귀신을 만들고 청애는 병신이 돼불었어.
길  녀 :  그래서 피신시켰나요?
현  우 :  (길녀를 바라보다) 동정심 뿐이여.  난 모르는 일이라구.
길  녀 :  (어처구니없어서) 그래서 불쌍하니까 결혼이라도 해 주겠다는 거예요?
현  우 :  아줌마가 그런 소리했어?  이것 봐.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척 허지 말어.  

            그 일은 길녀가 나설 일도 아니고 청애는 돌아오지 않아.  나하고는 상관도 없는 일이란 말이여.
길  녀 :  상관이 없다구요?
현  우 :  그래, 상관이 없어.  아줌마도 청애도 나헌틴 마음이 없다고.  알았어?  이젠 속시원해?
길  녀 :  현우 씨, 한 달이나 지났어요.  청앤 홀몸도 아니잖아요?  현우씬 청애가 있는 곳을 알죠?  불쌍하지도 않아요?

현  우 :  나쁜 자식.
길  녀 :  …?
현  우 :  현민이 말야.  그놈 짓이야.
길  녀 :  군대간 동생 말이예요?
현  우 :  그래.  그녀석이 마음에도 없음시로 청애를 농락한 거여.
길  녀 :  …?  (반지를 만지작 거린다)
현  우 :  현민인 동생처럼 아낄 뿐인디 송애는 현민일 무척 좋아한 갑드라. 

           자연스레 읍내에도 같이 나가고 허다 보니 송애는 물질을 게을리 했던 거고.
           그런 사실을 안 아줌마가 가만 있었겄어?  화냥년이라고 내어 쫓으려 했지.

           송애는 어머니 마음에 들려고 물질을 열심히 허다가 무리를 해서 그만….
            현민인 상심해서 자원 입대하게 되었고 입영 전날 술이 취한채 청애를 데리고 나가선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어.  

           그때도 청애는 이틀이나 집에 돌아오지 않었지. 결국 나가 찾아내긴 했는디 가출 이유를 말허진 않드만.  

           단지, 바다가 싫다는 것뿐이었어.
길  녀 :  그럼 청애는?
현  우 :  현민이가 있는 훈련소 근처에 있어.
길  녀 :  그게 어디죠?
현  우 :  왜?  알먼 찾아갈 테여?  용돈이라도 줄 거여?  내비 둬.  나가 다 알아서 헐랑께.
길  녀 :  (반지를 떨어뜨린다) 어머나, 이걸 어쩌지?
현  우 :  어째?
길  녀 :  (찾으며) 반지가 떨어졌어요.
현  우 :  뭔 반진디?
길  녀 :  우리 어머니가 직접 캐신 흑진주예요.

현  우 :  (라이터를 켜 찾으며) 그런 중한 걸 왜 끼고 다녀?
길  녀 :  (반지를 발견하고) 여기 있네.  찾았어요.  고마워요.
현  우 :  고맙긴.  저기 봐.  저그 수평선 가에 희미한 불빛들이 보이재?  그중에 우리 배도 있을 거여.  

            아버진 날 뱃놈을 만들려고 발동선을 준다고 꼬셨지만 난 농삿군도 뱃놈도 싫어.  쉽게 돈 버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디 왜 사서 고생을 해?
            떼돈 버는 법을 난 알고 있는디.
길  녀 :  부정한 방법으로 말이죠?
현  우 :  흥!  돈이란 원래가 더러운 거지.  돈 때문에 길녀도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하는 것 아니여?  

            정직해서는 큰 돈을 벌수가 없다고. 군대에서 돈 버는 얘길 들었는디 눈깔이 뒤집힐 수밖에.  

            뭐 땜시 목숨 걸고 바닷일을 허냔 말여. 목돈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건디.  빌어먹을!  허지만 두고봐.
            그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라고.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친다) 박현우는 떠난다.  박현우는 뱃놈이 될 수 없단 말이여?  

            알았어?  이 바다구신들아!


    이때, 멀리 배에서 비상 사이렌같은 뱃고동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길  녀 :  무슨 일이예요?
현  우 :  글세?
길  녀 :  추워요.  그만 들어갈래요.
현  우 :  (막아 서며) 길녀, 나 좀 도와 줘.  우리 같이 서울 가자 응.  길녀, 나가 책임질게.
길  녀 :  현우 씨.
현  우 :  (껴안으며) 아뭇 소리 말고 나만 믿어 이?


    암전.  사이렌 소리 길게 울린다.


소리 1   (멀리서) 기름이다.  기름이 떴다.  기름이 싹 퍼졌다.
소리 2   하이고 이 무슨 날벼락이야?
소리 3   양식장이 다 망가지게 생겼네.
소리 4   오메 이 일을 어쩐다요?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상 사이렌 길게 울린다.

 


제 3 장


    매미소리가 시끄럽게 한참 울어댄다.  

 무대 밝아지면 길녀,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남씨와 명덕네, 어촌계장이 한길에서 들어온다.


명덕네 :  (소리) 무슨 수를 써주셔야지.  아까운 쌀 축내면서 빈둥거릴 수만은 없잖아요?  물질을 못한 지 보름도 더 됐잖아요.
남  씨 :  (들어오며) 참 큰일이구먼.
현구부 :  기름배가 파선된 것이 어째 우리 탓인가?  시방 기름이 싹 퍼져 부렀는디 어촌계에서 머슬 어쩌겄소?  

             우리도 괴기도 못 잡고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오.
남  씨 :  읍이나 군에서는 무슨 소식이 없습니까?
현구부 :  조사반이 다녀갔은깨 기대려 봐야제 읍이라고 별다른 수가 있겄소?
남  씨 :  어제 우리 잠수들이 기름을 헤치며 따낸 해물들이 죄다 냄새가 배여 먹지 못하게 된 걸 현구 아버지도 보셨지요?  

            바다가 썩고 있단 말입니다.
현구부 :  답답한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요.  그게 우리 마을만 그런 것이 아닝께 쪼깜 기대려 보드라고.  

            작업 못하는 해녀들 손실도 크겄지만 우리 어촌계도 밥줄이 달린 문젠깨.  

            나가 읍사무소에다 다시 전화를 댕겨 볼라요.
남  씨 :  우린 현우 아버지만 믿겠습니다.
현구부 :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소.  (돌아서며) 에이 날씬 워째 이리 징하게 더워 쌀까?  (들어간다)
길  녀 :  기름이 걷힐라면 얼마나 걸릴까요?
남  씨 :  몇 달이 걸릴는지 누가 알겠나?
명덕네 :  이러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남  씨 :  글세 말이다.  비바람 때문에 공치는 것도 아까운데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일찍 고향에 돌아가야 할런지도 모르겠구먼.
길  녀 :  그럴 순 없어요.  돈 벌러 왔지 유람 온 건 아니잖아요?
남  씨 :  그렇다고 기름 뜬 바다에 들 거여?
길  녀 :  깊은 물 속엔 괜찮지 않을까요?
남  씨 :  물 속이 깨끗하면 뭘 해?  기름 위를 거치지 않고 건져 낼수 있 어?  참으로 이상도 한 일이지.  

            전에는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용왕님이 노하셨구만.
명덕네 :  태풍이라도 불어서 확 씻어 가버렸으면 좋겠어요.
남  씨 :  (들어가며) 인간 마음대로만 되면야 오죽 좋겠나.  에그 난 좀 쉬어야겠다.  

            물질을 못하니 몸이 영 심상치 않구먼.  (허리를 두드리며 퇴장)
명덕네 :  (빨래줄을 살피다) 어어?  길녀야.  저기 널어 논 소중이(물옷) 봤어?
길  녀 :  아니.  누가 들여 놓은 거 아녀?  안에 가서 찾아봐.
명덕네 :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  아까 나갈 때도 있었는데?  (들어간다)


    잠시 후, 봉순 어미가 오른쪽 숲으로 난 길에서 나오다가 집모퉁이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피다가

    길녀를 발견하고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헛기침을 하면서 나온다.


길  녀 :  어디 갔다 이제 와요?
봉순어미 : (둘러대듯) 으응 뒷간에.
길  녀 :  뒷간에 가서 거름을 낸 것도 아닌데 한 시간씩이나 산단 말여요?
봉순어미 : 아녀.  아까는 요 어촌계장님 댁에 놀러 갔었단 말여.
길  녀 :  그래요?  언니 빨래감마저 죄다 내놓고 빨았으니까 이걸 가져다 래줄에 널어요.
봉순어미 : 아이고 고맙구만.  이거 번번히 미안해서 어쩌지?
길  녀 :  공짜가 아녜요.  용돈 타면 맛있는 거나 사줘요.
봉순어미 : 알았어.  요 깍정아.  자기 용돈은 쓸려고도 않지.
길  녀 :  부지런히 모아야 시집갈 밑천도 할 거 아녜요?
봉순어미 : 어휴 지독해.  돈이 있으면 짜장면도 사먹고 옷도 사입고 해.  그러다 시집가면 돈이 더 아까워서

              평생 구닥다리 옷 입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어 보는 거야.
길  녀 :  신랑이 다 해줄 텐데요 뭐.
봉순어미 : 신랑도 연애할 때가 신랑이여.  잡안 놓은 고기에 미끼주는 것 봤어?
길  녀 :  어매, 그러면 밥을 안 해주지 뭐?
봉순어미 : 그러단 매일 눈탱이에 먹물 화장하고 다닐 텐데.  그러니 시집갈 때는 사람의 요모조모 잘 따져 봐야 하는 거여.  

           사람은 겉모양만 보고선 모른다니까?  더구나 첫눈에 반해 버리면 귀 한 쪽 없는 것도….
길  녀 :  무슨 얘기하려는지 다 아니까 그만둬요.
봉순어미 : (대야를 들고 가며) 그려, 하지만 여긴 객지라는 걸 명심해.


    봉순 어미, 빨래를 너는데 숲으로 난, 길에서 현우가 내려온다.  

   봉순 어미, 손짓으로 가라는 신호를 하는데 현우는 그걸 빨리 오라는 신호로 알고 뛰어온다.  

   봉순 어미는 어쩧 줄 몰라 길녀의 눈치를 살핀다.


현  우 :  (영문을 모르고) 왜 그…?  (하다가 길녀를 발견하고 재빨리 집으로 사라진다)
길  녀 :  (인기척을 느끼고) 누구예요?
봉순어미 : (시침 떼며) 뭐가?
길  녀 :  방금 누가 저리로 들어갔잖아요?
봉순어미 : 글세 난 못 봤는걸?
길  녀 :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빨래를 계속 문지른다)


    봉순 어미,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남씨와 명덕네가 나온다.


명덕네 :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참 이상하다.
길  녀 :  안에도 없어?
남  씨 :  누가 장난친 거 아녀?
명덕네 :  (봉순 어미에게) 빨래줄에 널린 소중이 못 봤어요?
봉순어미 :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그글쎄?  난 몰라.  에그 그거 몇푼 가나?
명덕네 :  물옷이야 또 있지만 그걸 잊어버리면 재수가 없으니까 말이지.
남  씨 :  글쎄, 나도 며칠 전부터 목걸이를 찾고 있는데….  혹시 현우놈이?  내 이놈을.  (현우네 집으로 향한다)
봉순어미 : 현우는 아니예요.
남  씨 :  (돌아서며) 아니라니?  현우한테 물어 봤어?
봉순어미 : (괜히 말했다 싶어) 아니, 그냥.  그런 유치한 장난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요.  정 의심스러우면 직접 물어 보세요.
명덕네 :  남자가 소중일 가져다 뭘 해요?
남  씨 :  노름하는 사람들 그걸 입거나 깔고 앉으면 돈을 딴덴다.  현우가 노름까지 손댄 게 틀림없구만.
길  녀 :  현우 씬 노름 안 해요.
남  씨 :  어따.  왜들 이래?  오라 소문이 틀림없었구만?
길  녀 :  소문요?
남  씨 :  현우가 돈 빌리려고 별 수작을 다 하면서 제주에서 온 잠수들을 노린다고 하더군.  

            편 드는 걸 보니 혹시 자네들이 그 꾀임에 말려든 것 아녀?
봉순어미 : (당황하며) 말려들다니요?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혹 길녀라면 모를까.
길  녀 :  아니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들먹이고 그래요?
봉순어미 : 길녀가 현우하고 좋아지내는 사이란 건 동네가 다 아는 사실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뭔 일을 못하겠느냔 말이여?
길  녀 :  젊은 남녀끼리 좋아지내는 게 뭐가 잘못됐어요?  그렇다고 언니한테 돈을 꿔다 빌려 준 것도 아닌데

           뭐가 흉이 된다고 날 끄집어 들여요?
봉순어미 : 어머 얘가 왜이래?  난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두 눈에 쌍심지 켜고 난리네?
남  씨 :  현우를 조심하랬잖어?  그놈은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녀석이야.
길  녀 :  일이란 게 도대체 뭐예요?  왜 난 육지로 시집오면 안 됩니까?  
           바다에서만 살라는 징역이라도 내렸어요?
남  씨 :  바다를 욕하지 말어.  바다가 싫으면 조용히 떠나면 그만이여.  지금까지 누구 때문에 먹고살아 왔는데?  

            네가 육지로 시집가든지 양코배기를 만나든 간섭할 바가 못 되지만 내 신세를 몰라서 그래?  

           사내를 고를라면 제대로 고르란 말여.
길  녀 :  내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말하기 좋다고 이렇다 저렇다 간섭하지 마세요.
남  씨 :  (외면하며 혼자소리처럼) 못되먹은 것.
봉순어미 : 이봐 길녀.  고향 언니로서 그깐 말도 못해?  나도 경험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지.  

            객지에 와서 소문 안 나게 바람 좀 피우는 거야 누가 뭐라 그러겠어?
            하지만 시집도 안 간 처녀가 그렇게 소문만 무성했다가 결혼이라도 못하면 구만리같은 앞길을 망치게 되니 하는 소리여.
길  녀 :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요, 날 놀리려는 심사가 아니면 앞으론 현우 씨와 내가 어떻다는 얘긴 말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남  씨 :  얘길 말라니?  제 혼자 사는 세상인가?  그걸 간섭이라고 고깝게 듣는 모양이지만 공동생활을 할 때는

            남에게 피해가 안 되게끔 몸가짐을 바로 해야지.
            젊은 사람들이 좋아지내는 걸 누가 어쩌진 못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요란을 떠는 것도

            정숙한 여자가 취할 태도는 아니란 소리여.
길  녀 :  아줌마가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어요?
남  씨 :  뭐여? 자격?  그럼 내가 막 돼먹었단 말이여?
명덕네 :  아줌마.  참으세요.  그런 뜻이 아니예요.
남  씨 :  나 원 참, 귀여워하면 수염을 잡아다닌다더니.
길  녀 :  내 일에 참견 말란 소리예요.
봉순어미 : 니가 하두 요란을 떠니까 그렇지.
길  녀 :  유별나게 요란 떤 적도 없어요.  괜히 언니들한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예요.
봉순어미 : 길녀, 그럼 우리가 나발을 불고 다녔단 말이여?
길  녀 :  언니, 난 언니가 밤에 무슨 일 하는지 난 다 안다구요.
봉순어미 : (깜짝 놀라서 당황하며) 얘가 별소릴 다하는구나.  내가 바람피우는 거라도 봤단 말이니?
길  녀 :  차마 내 입으로 말은 못하지만, 얌체처럼 너무 그러지 말라구요.
봉순어미 :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너보고 뒷조사해 달랬니?  왜 남의 뒤를 미행하고 난리야?  

            나 원 참!  (한길로 나가며) 에이 재수가 없을라니….  야, 오길녀 너 나 좀 보자.
길  녀 :  (노려보기만 한다)
명덕네 :  봉순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어?  밤에 무슨 일을 하는데?
길  녀 :  정 궁금하면 직접 물어 보던지, 밤에 같이 따라 나서면 알 것 아냐?
명덕네 :  사실 길녀가 기분 상할까봐 말은 안 했지만, 요즘 와서 길녀가 변한 건 사실이여.  

            우리하고는 이야기도 잘 않고 저녁만 먹으면 혼자 동네를 쏘 다니는 게 예전의 다소곳하던 길녀는 아니란 말여.
길  녀 :  (부아가 치밀어) 그래 내가 어물전 꼴뚜기란 말이지?  왜 내가 어린애들처럼 섣부른 불장난이라도 하는 줄 알어?

            난 시집가지 말란 법이라도 있냔 말야?  부모형제 없이 컸다고 그렇게들 얕보지 말라구.  (재빠르게 한길로 나간다)
명덕네 :  얘, 길녀야!
남  씨 :  놔둬.  망할 것.  아주 푹 빠져 버렸구먼.  혼자 제멋대로 하던 행실머리라 오죽할까?  

           그래서 자식은 완고한 부모 밑에서 커야 한다는 거야. 쌍것 같으니.


한길에서 고씨, 들어오다 길녀와 마주친다.


고  씨 :  아니 오길녀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남  씨 :  자넨 알 것 없어.
명덕네 :  우리집에 오신 거예요?
고  씨 :  예.  읍내에 계신 전주 어른께서 연락이 왔습니다.
명덕네 :  하이고, 그럼 우릴 고향으로 보내라는 말 아닌가요?
고  씨 :  처음엔 어르신도 더 이상 작업도 어렵고 빚도 어느 만큼 잦았으니 나머진 저축해 논 돈에서 까겠다는 걸 내가 말렸어요.  

           아직 약속한 기일이 두 달이나 남았는데 그냥 돌려 보낼 수 있냐고 말입니다.
명덕네 :  그랬더니 뭐래요?
고  씨 :  내가 난바르 얘길 꺼냈어요.
명덕네 :  난바르?
남  씨 :  아무리 돈도 중하지만 누구 애 먹이려고 난바르를 간단 말이여?
고  씨 :  하는 수 없잖아요?  그렇다고 마냥 바다가 맑아지기만 기다릴 겁니까?  여기서 물질을 못하면 배타고 나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다고 한창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남  씨 :  배에서 생활한다는 게 오죽 힘든 일이여?  그러다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엔 모두가 물귀신이 되기 십상인데.
고  씨 :  배도 최신식 발동선이고 라디오도 있고 하니까 문제없어요.  어르신도 먹을 것이란 땔감을 충분히 마련해 주신다고 했고

           잠수들의 고충도 이해하셔서 이번 난바르의 수입은 반반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어촌계에 세를 안 내어도
           되니까 얼마나 수입이 좋겠습니까?

남  씨 :  뜻은 좋지만 안 간다는 걸 강제하지는 말어.  제대로 먹기를 하나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나.  

           허구헌날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생활인데 오죽 힘들어?  난 안 가.
고  씨 :  강제는 아닙니다.  서해안을 중심으로 보름 정도로 잡고 있는데 작업량에 따라 더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 봉군 어미, 호들갑스럽게 들어온다.


봉순어미 : (들어오며) 왔어요.  성님, 성님 청애가 돌아왔단 말이예요.
남  씨 :  청애가?  어디?


청애, 보따리를 들고, 길녀와 함께 들어온다.  

마당에 들어서자 미안스러운 듯 뒤돌아서서 처분만 기다린다.  

남씨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봉순어미 : 청애야.  잘못했다고 용서 빌어.  어서.
남  씨 :  아녀.  저년은 내 새끼가 아녀.  (외면한다) 난 자식이 없어.  한 년은 용왕님 시중 들러 갔고

           또 한 년은 서울귀신에 홀려 갔는데 무슨 자식이 또 있단 말고?
청  애 :  (돌아서서 울먹이며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어머니.
남  씨 :  내새끼는 좀녜의 딸이여.  물고기처럼 뒹굴며 짠물 먹고 자란 년이여.  물 속이 시리면 시린 대로 파도가 사나우면

           사나운 대로 몸을 움직이면 그만, 불평을 해선 안 되는 게 좀녜의 팔자야.  그걸 견디지 못하면 바다에 들어갈 수 없다.  

          욕심을 부리게 되면 재앙이 따르는 법이다.  덕천리 앞바다가 기름으로 덮인 것도 그냥 생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청  애 :  (한 발자국 나서며) 어머니, 잘못했어요.
남  씨 :  물질할 생각이 없다면 어머니라 부르지도 마라.
청  애 :  할께요.  이젠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마음 굳게 먹었어요.  어머니.  (손을 잡는다)
남  씨 :  (덥썩 안으며) 녀석.  이제야 내 새끼로구나.  고생 많았지?
청  애 :  죄송해요.  어머니.
남  씨 :  아니야.  이 어미가 죄인이다.  애초에 좀녜의 몸에서 생겨난게 죄여.  

           하지만 여자는 한 번 무너지면 알맹이 없는 소라 껍데기 신세야.  가재, 새우,  게 할 것 없이 벼라별 놈이 다 기웃거리거든.
청  애 :  어머니.  이젠 다 끝났어요.  몸도 깨끗해졌으니 따지지 말고 용서해 주세요.  이젠 어머니 곁에서 물질만 할 거예요.
남  씨 :  그래도 시집은 가야지.  그래야 대를 이을 좀녜가 생길 것 아녀?
청  애 :  두려워요.  어머니.
남  씨 :  아니다.  정신만 바짝 차리면 진주보다 더 곱게 살 수 있어.  조가비를 봐라.  

           조가비는 제 몸에 상처가 나면 그걸 감싸기 위해 액을 내뿜는다.  그게  굳어서 진주가 되는 거야.  사람이 되서 조가비만 못하겠니?
청  애 :  부지런히 살 거예요.  어머니.
봉순어미 : 이제야 발 뻗고 자게 되었구만.  밤중에 바람소리만 들려도 잠 못 이뤘는데.
명덕네 :  난 정말 서울여자가 돼버린 줄 알았지.
길  녀 :  얼마나 고생했으면 몸이 반쪽이 되었네.
청  애 :  길녀 언니 고마워요.  언니 도움이 컸다고 현우 오빠에게 얘기 다 들었어요.  은혜는 꼭 갚을께요.
길  녀 :  은혜는 무슨.  죄송해요.  버릇없이 굴어서.
남  씨 :  알면 되었어.
고  씨 :  귀향 전에 영영 못 보나 했어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봉순어미 : 아니 고씨도 청애에게 마음이 있었수?
고  씨 :  아이고.  농담도.  자 난 난바르 준비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모레 아침 일직 출발하니까 가실 분은 내일 아침까지 연락해 주세요.
남  씨 :  허리가 아파서 난 못 가지만 대신 청애를 데려가 줘요.
고  씨 :  (놀라서) 예?
남  씨 :  아직 어리긴 하지만 상군이 되려면 난바르쯤 거뜬히 이겨내야 해. (청애에게) 안 그러니?
청  애 :  가고 말고요.  어머니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길  녀 :  하지만 몸이 말이 아닌데.
남  씨 :  하루쯤 잘 먹고 푹 쉬면 괜찮을 거야.  난 배가 산더미만해서도 물질을 하다 너를 낳았어.
청  애 :  그럼요.  전 상군의 딸인데 못 할 게 뭐있어요.  문제없어요.
고  씨 :  자 그럼 난 갑니다.  (나간다)
명덕네 :  나도 갈 거야.  우리 신랑을 위해선 어떠한 힘든 일도 할수도 있어요.  어쩌면 물질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몰라요.  

            우리 명덕 씨가 사업을 하게 되면 시내 나가서 살게 될 테니 말예요.
남  씨 :  그려, 젊었을 때 악착같이 벌어야지.  자 들어들 가자.  오늘은 내가 한 턱 낼 테다.
봉순어미 : 청애는 미운 자식인가봐.
명덕네 :  아니 어째서요?
봉순어미 : 매보다 떡을 주시니 말이야.
명덕네 :  아이 언니두.
남  씨 :  저년 말하는 것 좀 보게.  넌 국물도 없어.
봉순어미 : (능청스럽게) 아이고.  잘못했어요.  성님.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안 그러면 나도 가출할 거예요?
남  씨 :  아이고 저 능청.  (손을 비비며) 제발 좀 나가 달라고 요렇게 빌께.
일  동   (웃음)


    사람들 가벼운 마음으로 제각기 움직이며 암전된다.
어둠 속에서 해녀노래(이어도사나) 들려온다.



제 3막

제1장


    전막에서 며칠 후.  

    파도가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 들리며 밝아진다.  

  진천댁, 무대를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려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씨네 거처로 간다.


진천댁 :  (안에다 대고) 안에 있어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서며)

             이 양반이 어딜 갔을까이?  (한길로 나간다)

    

오른쪽 통로에서 현구 부친과 남씨가 나온다.  

현구 아비의 손에는 낫이 두 개 들려 있고 남씨는 낡은 밀짚모자를 쓰고, 옷꾸러미를 들었다.


현구부 :  폭삭 속았구만요.  남씨가 아니었으면 며칠 걸려 부렀을 것인디.
남  씨 :  (수돗가로 가며) 현구 아버지가 더 고생했지요.  나야 무슨.
현구부 :  그렇게 베어 버렸응께, 모구도 덜헐 거시구만요?
남  씨 :  헌디 바람살이 심상치 않네요.  엊그제부터 안개가 자욱했는데 난바르 간 사람들 걱정되는구만요.
현구부 :  큰바람이 한 번 불어사 바다가 깨끗해지지라.  먼 바다하곤 날씨도 틀리고 그 사람들도 일기예보 듣고 있을 껑께 염려 놓으소.
남  씨 :  아니예요.  며칠 전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한 게 조바심이 나서 죽겠어요.
현구부 :  그거야 여럿이 지내다 혼자 있으니까 그런 거지요.  별일 있겠소?
현  우 :  (집에서 가방을 들고 나오며) 아부지 어디 가셨었소?  어머니가 찾으러 나가셨는디 못 보셨습디여?
현구부 :  으째?  뒷동산에 풀이 왕성해서 고고 베고 왔는디?
현  우 :  청애 어머니하고요?
현구부 :  그려, 그것 땜시 남씨가 욕 많이 봤다.
현  우 :  아니 뒷동산에서 단 두 분이서 일을 했단 말이요?
현구부 :  아니먼 니가 헐 일을 우리가 뺏었냐?
현  우 :  흥!  이제사 알겠소.  그런께 청애를 반대했어구만요이?
현구부 :  고거시 뭔 소리다냐?
현  우 :  아버지허고 남씨 아줌마허고 그런 사잉깨 청애가 우리집 사람이 될 수 없단 말 아니요?  

           우린 개새끼가 아닝깨 아무 허고나 붙어 먹을 수 없단 논리지요이?
현구부 :  아니 이놈이 미쳤나?  그런 사이라니?  니가 머슬 안다고 엄한 사람 욕을 해쌌냐?
현  우 :  뒷동산이 얼마나 옴팡진 곳인디요?  댕기는 사람도 없고.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외간 사람끼리 그것도

            과부허고 단둘뿐인디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요?  어머니한테 한 번 물어 보까요?
현구부 :  아니 요 싸가지없는 놈의 새끼, 애비헌테 말허는 꼬라지 좀 보소?  
         지 행실머리로 애빌 저울질 헐라고 드네?  이 쌍놈의 자식.
남  씨 :  (묵묵히 물옷을 빨다가 물옷을 보이며) 현우야.  이것이 왜 뒷동산에 있었는지 넌 알지?  

           명덕네가 잊어버린 건데 어째서 그 풀 속에 곱게 깔려 있었느냔  말여?
현  우 :  (당황하며) 나가 그걸 어떻게 아요?  고거시 나허고 뭔 상관있다고 나한테 물어 쌌소?
남  씨 :  바람에 날려 갔다면 속에 펼쳐져 있지도 않았을 게고.  거길 출입하는 건 이 집 식구들뿐이잖여?
현구부 :  니 바른 대로 대야 써이?  안 글먼 다리몽댕일 아주 분지러버릴 텐깨.
현  우 :  (외면하며) 난 모르는 일이요.  거기 출입해 본 적도 없고.  괜히 두 분 입장이 난처해징께 나헌테 뒤집어 씌우라고 하지 마씨요.
현구부 :  뭐여?  난처?  이놈의 새끼가?
남  씨 :  (막아 서며) 너 길녀하고 어떤 사이냐?  길녀하고 거길 간 거여?
현  우 :  어떤 사이건 아줌마가 뭔 상관이시오?  정 알고 싶으면 길녀한테 들어보면 알 거 아니요?  

           글고 아버지도 너무 그러지 마시오.  남 먹여 살리는 건 아깝지 않고 제 새끼 살아 보겄다고 발버둥치는 건 모른 척 허요?
         이젠 아버지 아니라도 먹고 사는 수가 생겼은 깨 잘들 계시시오?
현구부 :  그래 이놈아.  그 따위 행실 헐라믄 다신 나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썩 꺼져 부러.
남  씨 :  안 돼.  가긴 어딜 가?  네가 가면 우리 청애는 어떡하란 말이냐?
현  우 :  흥.  천덕스러운 짓 마시오.  청앨 빌미삼아 우리 집에 붙어 있으려는 수작을 누가 모를 줄 아요?  

           제발 남의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지 말고 여길 좀 떠나 주시오.  대체 몇 집안이나 말아 먹일 작정이요?
         아줌만 미쳤어요.  송애도 아줌마가 죽인 거고요.  욕정을 못 이겨서 바다에 뛰어든 걸 난 다 안다고요.
남  씨 :  (대답할 기운도 없이 털썩 주저앉으며 멍해진다)
현구부 :  야 이놈아.  집안 꼴이 보기 싫은 놈이 나가면 그만이재 청애 어머니가 뭘 어쨌다고 니가 나가라 마라 명령이냐?  

            이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현  우 :  (한길로 피하며) 예.  전 살고 싶어서 떠나니까요, 두 분이서 행복하게 잘들 해보시요.
현구부 :  (따라가며) 야 이 새끼야 니 이리 오지 못해.


   현우, 한길로 나가는데, 진천댁, 들어온다.


현  우 :  아부진 저 아줌마허고 뒷동산에 있었는디 어딜 찾아다니요?  어머니요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버지허고 딴 방 쓰게 될 것이요.
진천댁 :  뭐여?  뒷동산에?
현  우 :  한 입 갖고 두 소린 않을 텐깨 본인한테 직접 확인하시오.  나 가요.  (퇴장한다)
진천댁 :  어쩐지 이야기가 쬐깨 이상하게 흐르네요이?  나도 더 이상은 속고 못 살아유.  어디 변명이나 한번들어 봅시다.  

          뒷동산에서 둘이 붙어 지냈다는 게 사실이유?
현구부 :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눈깔을 뒤집음서 난리여?  뒷동산에 풀이 우거진깨로 모구가 많아서 베버려야 쓰것다고 말한 사람은 누군디

             인자 와서 딴 소리여?
진천댁 :  누가 남씨하고 같이 하랬어유?
남  씨 :  내가 물에도 못 들고 놀고 있기가 뭐해서 하겠다고 했어요.
진천댁 :  심심하니깨 기회는 요때다 하고 서방질이나 하자는 생각였단 말이지?
현구부 :  남은 더운 디서 땀 흘리며 일했는디 뭔 싸가지없는 소릴 고로코롬 헌당가?
진천댁 :  아따, 땀도 났겄제.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으면 벌써 땀이 말라 부렀을까이?
현구부 :  허어 나 원 참.  이거.
진천댁 :  당신은 가만히 있으소.  보소.  남씨 내 남씨를 처음 보는 순간 화냥기가 있는 여자란 걸 단번에 알았고.  

            같은 여자끼리니깨 그런 직감은 남씨도 있을 것이로구만.  그런디도 설마 하면서 난 남씨를 믿었소.  

           헌디, 우리 현우와 청애의 혼담을 반대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혔는디 나가 좀 둔해 갖고,

           두 분의 사이를 몰랐던 거여유.
남  씨 :  현우를 반대한 건 다른 뜻이 아니었수.  지금은 어쩐지 모르지만 서울을 왔다갔다 하는 바람둥이에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주고 싶지 않은 게 첫째 이유였고.
진천댁 :  자신의 경험으로 보니깨 두려웠단 말이구만?  그렇다고 어찌 남으 집 귀한 자식을 대놓고 난봉꾼 취급헌대유?
남  씨 :  (수모를 참으며) 현우는 서울만을 고집하지.  청애는 이 에미 뒤를  이어 바다를 지켜야 하는데,

           에미 몰래 임신까지 했으니 화 안 나게 생겼소?
진천댁 :  에미 꼴을 닮아가니 화도 나겄지.  다 물려받는 것이유.  

            그래서 이젠 제사 명절 지내 줄 고추씨라도 줏어 보려고 그 나이에 서방질을 했단 말이여?
현구부 :  이 예쳔네가 인자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남  씨 :  무슨 소릴 해도 좋아요.  마음대로 욕하소.  하지만 용왕님만은 내 마음 알 거요.
진천댁 :  (소매를 걷으며) 아니 이년이.  아주 배짱이네.  어디 한 번 해보겠다는 거여?
          그래 한번 붙어 보자.  덤벼 봐 이년아.
현구부 :  (말리며) 아니 동네 시끄럽게 왜 이래 싼가?  (밀치며) 빨리 들어가.
진천댁 :  그려.  한 패니까 둘이서 해보겠단 말이지?  아녀, 당신은 저리 비켜요.  여자끼리 결판을 낼 것인깨 비켜 서란 말이유.  

            내가 죽든 저년이 죽든 오늘은 꼭 해결을 지어야 쓰겠어.
현구부 :  이 예편네가 미쳤나?  (끌고 가며) 아무데서나 성질 부리지 말고 이리 오란 말이여.
진천댁 :  이거 놔.  저년과 얼마나 붙어먹었기에 저년 편만 드느냔 말이유.
         저년이 난바린가 뭔가 안 간 것도 당신하고 꿍꿍이가 있은 게 틀림 없지유?
현구부 :  (끌어당기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씨부렁대지 말고 헐 소리가 있으먼 나한테 허란 말이여.  왜 남헌테 욕을 해쌌는가?
진천댁 :  (소리) 이거 놓지 못해.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이래?  난 못살아.  이러고는 못 살아.
현구부 :  (소리) 못 살먼 가란 말이여.  안 말리껑께.
진천댁 :  어유 분해.  어이구 분해.  (울음소리가 멀어진다)


    파도가 밀려 왔다 사라진다.  

  남씨,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쉰 후, 대야에 있는 물옷을 짜서 빨래줄에 넌다.  

  봉순 어미, 물바구니를 든 채 울상이 되어 들어온다.


봉순어미 : 하이고 성님, 청애 어머니.
남  씨 :  아니 무슨 일이냐?  난바르 간 지 며칠이나 되었다구 벌써 돌아와?
봉수어미 : 청애하고 명덕네가.  (말을 못하고 울먹인다)
남  씨 :  우리 청애가 어찌 되었단 말이여?  응?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얼른 말해 봐.


    고씨가 길녀를 업고 들어오고 그 뒤를 정순과 덕자가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남  씨 :  우리 청애는 어찌 안 보이나?  어데 간 거여?
길  녀 :  (업힌 채 헛소리로) 정임아.  청애야.
남  씨 :  이게 무슨 일이냔 말여?
고  씨 :  사정은 차차 말씀드릴 테니 길녀를 어디다 눕혀야겠어요.
봉순어미 : (집안을 가리키며) 저기로 들어가요.
고  씨 :  (들어가며) 진정해요.  길녀, 다 왔어.
남  씨 :  대체 무슨 일들이여?  배가 부서졌어?
정  순 :  청애하고 명덕네가….
남  씨 :  그려 청애하고 명덕네가 어찌 되었단 말이여?
덕  자 :  없어졌어요.
남  씨 :  (놀라며) 뭐여?  없어져?  죽었단 말여?
정  순 :  그려요.  청애 어머니.  이 일을 어째요?
남  씨 :  덤비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해 봐.  도대체 어떻게 되었단 말이여?
덕  자 :  바다 속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길녀는 떠날 수 없다고 바다 가운데서 울부짖다가 저렇게 넋이 나가 버리고….  (울먹인다)
고  씨 :  (나와서 수돗가의 물을 떠서 마신다)
남  씨 :  (안 되겠다 싶어 고씨에게) 자네가 인솔 책임자니 잘 알겠구먼?
고  씨 :  (소매로 입을 닦고서) 면목없구만요.  난바르 떠나서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어요.  

           청애는 자신의 몸 생각도 않고 다른 잠수들같이 작업을 했는데 그날만은 이상하게 몸이 피곤하다면서 물에 들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명덕네와 같이 배에 남았어요.
정  순 :  배를 멀리다 댄 게 잘못이예요.
고  씨 :  잠수들이 일은 않고 배에 올라와 농담만 하려고 하니까 그런 거 아니우.  하지만 시간을 맞춰 몸을 녹이게는 했잖아요?
덕  자 :  그날은 물 속이 얼마나 추웠는지 거기다 갑자기 안개가 몰려왔구.
고  씨 :  우린 잠수들을 내려 주고 좀 떨어짐 곳에 배를 멈췄어요.  기관장과  난  무료하기도 하고 전날 마신 술기운도 있고 해서 한숨 잔 것뿐이예요.
정  순 :  정임이 혼자서 물질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배를 돌려 우리에게 와버린 게 탈이었어요.
고  씨 :  그 시간이 얼마 되나요?  우린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늦었다 싶어 무심코 잠수들 있는 대로 배를 돌렸지요.  

           명덕네가 없어진 걸 청애가 확인하고 되돌아가서 물 속을 뒤졌고 우린 나머지 잠녀들을 싣고 현장에 돌아와 봤더니….
정  순 :  바다에 태왁만 둥둥 떠있고….
고  씨 :  꼬박 사흘을 찾았는데 태풍이 온다길래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덕  자 :  부지런도 죄여.  남은 일하는데 몸이 좀 불편하다길래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할 수 있었겠소?  (눈물을 찍어낸다)
남  씨 :  (넋이 빠진 사람처럼 터벅터벅 걸어가서 빨래줄에 널린 물옷을 걷어 들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만히 움켜쥔다.  사이)

           용왕님도 참으로 얄궂습니다 그려.  늙은 난 이렇게 남겨 두고….
길  녀 :  (안에서 나오며) 찾아야 돼.  우리만 어떻게, 무슨 낯짝으로 돌아갈 수 있냔 말야.  아줌마 청애가….  (오열한다)
봉순어미 : (따라나오며) 길녀야.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건 아니잖아. 진정해.
길  녀 :  (울먹이며) 망할 놈의 바다에 날 내버리지, 왜 데리고 왔냔 말야?
남  씨 :  (벌컥 화를 내며) 그만 해.  (넋두리처럼) 바다를 부쳐먹는 우리가 사람 목숨인 줄 알았어?  우린 육지에 사는 바다 짐승이여,

            물고기나 매 한가지란 말여.  물 속에서 먹을 것 입을 것 찾다가 낚시에 걸리듯 그물에 잡히듯 붙들리면 거기가 우리 무덤이고 천국이여.

            바다에 조상 무덤을 만든 게 어디 한두 집인가?  허지만 바다를  욕하지 마라.  

            바다를 욕하는 건 조상을 욕하는 것이니까 말여.
봉순어미 : 세상에 성님은 사람도 아녀.  청애가 죽었는데 어찌 그런 소릴 할 수 있어?


    현구 아비, 안에서 나온다.


현구부 :  먼 소란이여?  아니 어째 벌써 돌아들 왔는가?
남  씨 :  (실성한 사람처럼 현구 부친 앞으로 가서) 현구 아버지.  우리 뒷동산으로 가요?  

            풀도 베어 버렸으니 놀기도 좋잖아요?  예?  (붙잡으며 애원하듯) 현구 아버지 날 좀 어떻게 해주소.  

            한 번만 안아 달란 말입니다.  아직도 난 애를 낳을 수가 있어요 예?  현구 아버지.  한번만 부탁하겠어요.
현구부 :  청애 어머니 왜 이런다요?
진천댁 :  (어느새 나와서) 아니 저년이 하얀 대낮에 청중들 모아 놓고 영화 찍는 줄 아나베?
           아주 공개적으로 남의 서방 채 갈려고 작심했냐?  어디 나하고 결투라도 하겠단 말이지?  (팔을 걷으며) 그래 좋다.  해 보자.
남  씨 :  (돌아서며) 아니지.  그래.  아직 하나 더 남았어.  가야지.  헤엄쳐서라도 가야 해.  난 꼭 찾고 말 거야.  

            (태왁을 거머쥐고 한길로  달려나간다)
봉순어미 : 성님. 


 바람소리 거세진다.


현구부 :  무슨 일이 있었소?
고  씨 :  태풍이 온다는데 바다에 헤엄치는 걸 구경들 할 참이요?
현구부 :  뭐여?  바다에?  (나가려 한다)
진천댁 :  (막아 서며) 어딜 가유?  못 가유.
현구부 :  이 여편네가 사람 죽게 생겼는디, 저리 안 비켜?  (밀치고 달려간다)
진천댁 :  (쓰러지며) 아이고 이젠 막 쥐어 박네?  아이고 억울해.  아이고  난 못 살아.


    고씨와 정순, 봉순 어미도 한길로 쫓아나가는데, 김씨, 황급하게 들어온다.


김  씨 :  뭔 일이 났소?  왜 이리 달음박질 경주란가?
봉순어미 : 빨리 아줌마를 붙들어요.  줄초상 나게 생겼어요.
김  씨 :  (막아서며) 말순 씨 나 좀 보시오.
봉순어미 : 저리 비켜요.  급하다니깨?
김  씨 :  나도 화급한 문제로 왔당깨.  봉순 어미한테 말여.
봉순어미 : 나 시간 없은깨 치근거리지 마소.
김  씨 :  그게 아니고, 현우말이지라.
봉순어미 : 현우가 뭘 어쨌다고 그러시오.
김  씨 :  말순 씨, 맡겨 둔 전표 다 환불해도 좋다 그랬소?
봉순어미 : 뭔 소리요?  잠시 보관해 둔 것뿐인데.
김  씨 :  하이고 그럼 큰일이네.  어제 전표를 갖고 와서 하도 협박 비슷이 굴길래 계산해 줬지요이.  

           헌디 금방 서울 차 타고 사라졌단 말씀이요.
봉순어미 : 하이고.  길녀야.  이 일을 어쩌지?  현우 어머니.  

           (말을 잇지 못하고 재빠르게 현우네 집으로 향한다)
길  녀 :  현우 씨가?
김  씨 :  길녀 씬 현우헌테 빌려 준 것 없지요이?
길  녀 :  (혼자소리로) 현우가… 갔어요?
김  씨 :  그라고 본깨 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만이?
봉순어미 : (현우 집에서 나오며) 아이고 난 몰라.  어떻게 모은 돈인데?  (마당에 퍼질러 앉으며) 아이고.  정말 갔어.  

             내가 미친년이지.  어쩌자고 그 돈을…. (울음을 터뜨리며) 고향에는 어떻게 돌아가라고….  난 몰라.

진천댁 :  그만큼 책임 못 진다고 입이 닳도록 말을 했는데도 돈을 빌려 줄 생각이 어디서 나유?  

             우리가 돈이 없어서 현우에게 안 준 줄 아남유?
봉순어미 : 내 돈 찾아내.  그놈이 누구 자식인데 발뺌 하려 드는 거유?  그 돈 찾기 전에는 이 집에서 꼼짝도 않을 거야.
진천댁 :  말이야 바른 말로 무슨 보관증서라도 받아 놓았으면 모를까.  액수가 얼만지 정말 우리 현우가 가져갔는지 어떻게 알아유?
김  씨 :  여기서 번 돈 전부를 찾아 갔구만이라.
봉순어미 : 아이고.  정말 떼어 먹으려고 작당을 했나?  날 이 집에서 먹여 살릴 거요?  아예 과부니께 누구처럼 눌러 앉을까요?  

            (빈정대듯) 누굴 모시고 살았음 좋겠수?  며느리로 써주시겠어요?  아님 동생으로라도 상관없어라이?
진천댁 :  아따.  이제 보니 계획적이었구만?  어디 남자가 없어서 우리 집안을 넘본디야?
봉순어미 : 안 그러면 아들이나 찾아내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가지고 도망을 가요?
진천댁 :  앞에 없는 사람이라고 막말은 마소이?  우리 현우는 그럴 놈이 아닌깨 염려 말고 기다리면 돌아올 거유.  

            집도 공짜니 기다리려면 마음껏 기다려 봐유.  나한테 보증 받고 빌려 준 것도 아니니 난 몰라유.  (들어간다)
봉순어미 : 하이고, 내가 죽일 년이지.  누님누님 하는 말에 속아넘어 가다니. 아이고 분해.  

            (일어서서 한길로 나가며) 내 이놈을 꼭 잡고 말 거여.  세상천지를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고 말 거야.  

             (돌아서서) 길녀 넌 안 갈 거여?  억울한 게 하나도 없어?  그놈은 다시 안 나타난단 말야.  그놈은 사기꾼에다 난봉쟁이여.
             왜 아무 말 않고  있는 거야.  너도 당한 거란 말야.  (사이) 싫으면 관둬.  (나간다)
김  씨 :  이봐요.  말순 씨.  (따라 나간다)
길  녀 :  난 몰라.  혼자만 가 버리면 난 어떻게 해?  (머리에 손이 가며 쓰러진다)
덕  자 :  (다가서며) 길녀야!

    갑자기 어두워진다.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파도소리가 한참 요란스럽게 울린다.


 

제 2 장


    며칠 후 아침.

 갈매기소리 한가롭게 들린다.  

진천댁이 물건꾸러미를 들고 조심스럽게 나와서 남씨네 거처로 간다.


진천댁 :  (문 앞에 서서) 남씨 있어유?  나 좀 보세유.
남  씨 :  (나오며) 왜 그러세요?
진천댁 :  우리 현우가 봉순 에미한테 빌려간 돈을 남씨가 대신 갚아 줬다는게 사실인감유?
남  씨 :  그저 준 건 아니예요.  시방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판에 빈손으로 보낼 수야 없지 않소?  

           현우네 사정도 뻔한데, 당장 목돈 마련도 어려울 것 같아서 그간 모은 것을 대강 정리했어요.  

           딸자식 팔아 먹은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진천댁 :  정말 남씨도 가는 거에유?
남  씨 :  가야지요.  얼마나 가고 싶었던 곳인데, 두 딸을 데리고 함께 가야  하는 건데…

           풀밭에 누워 계신 부모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진천댁 :  바다도 맑아졌는디.  나 때문이라면 마음을 고쳐 잡수세유.  겉으론 그랬지만 남씨를 정말 미워한 건 아니었어유.  

           우리 여기서 그냥 사이좋게 살아유?
남  씨 :  진천댁의 심정 내 다 알아요.  하지만 나도 이젠 고향을 찾을 나이가 됐잖아요?  

          마음을 두면 그게 고향이라고들 하지만 바다 위에 붕붕 떠 다니는 태왁 모양으로 사는 것이 나이 들면 남 보기에도 청승맞아요.
진천댁 :  섭섭해서 워째유?  (물건 꾸러미를 내밀며) 읍내 나갔다가 삼 몇 뿌리 구해 왔어유.  

            그간 몸도 성치 않은데 우리 집일을 봐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유.
남  씨 :  (사양하며) 아이고 아니예요.  집도 삯 없이 빌려쓰고 되려 내가 신세를 많이 졌는데 무슨 염치로 비싼 걸 받겠습니까?
진천댁 :  돈으로 따지면 몇 푼 안 되는 거지만 정표로 생각해서 받으세유.
남  씨 :  정 그러시다면 (받으며) 고맙습니다.
진천댁 :  다시 만날 수 있을까유?
남  씨 :  그럼요.  자식이 저 앞바다에 묻혔는데, 생각나면 언제라도 올 겁니다.


    봉순 어미와 길녀, 가방을 들고 나온다.


봉순어미 : 성님!  성님 가방 여기 있어요.  어서 가야겠어요.  약속한 시간이 지나서 모두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남  씨 :  (길녀에게) 내 대신 남기는 것 같아 섭섭하지만, 네가 택한 길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살아야 한다.
길  녀 :  알았어요.  아줌마도 따님을 꼭 찾으세요.
남  씨 :  암 날 닮았으면 좀녜가 되었을 거여.  아니면 물질을 가르쳐야지.
길  녀 :  대상군인 아줌마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봉순어미 : (진천댁에게) 현우를 찾으면 꼭 연락 주셔야 해요?
진천댁 :  예.  꼭 갚도록 할께요.
남  씨 :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며) 자 이건 결혼 선물이다.  물안경 속에 잘 놔두고 한참 찾았지 뭐냐.

           (목에다 걸어 준다) 섬을 떠나올 때 가지고 온 거니까 고향 생각이 나면 꺼내 보거라.
봉순어미 : 어머 예뻐라.
길  녀 :  (만져 보며 놀란다) 어머!  흑진주.
봉순어미 : 너무 아름답다.
길  녀 :  (넋이 빠진 듯 목걸이를 바라본다)
남  씨 :  난 여태 빚만 지고 살았어.  진주같이 아름답게 살려고 고향을 떠나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아픔만 주고

           빚진 몸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는구나.
길  녀 :  아줌마처럼 부지런히 살 거예요.
남  씨 :  (가방을 들며) 그래.  잘 있어.  현우어머니도 건강히 오래 사세요.
진천댁 :  예, 안녕히 가세유.  (눈물을 참으려는 듯 돌아선다)
봉순어미 : 괜히 슬퍼지니까, 길녀 우린 여기서 작별하자.  잘살아야해.
길  녀 :  언니 잘 가.  아줌마도.
남  씨 :  그래.


    남씨와 봉순 어미, 한길로 나간다.  

   길녀 입구까지 따라가 전송한다.  아쉬운 듯 한참 손을 흔들다가, 이내 터벅터벅 내려온다.


진천댁 :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께 우리 집 풍습을 빨리 익혀야지. 현구아부지가 서울 큰아들한테 갔으니까 곧 연락이 올거다.  

            현우만 찾으면 결혼식도 올리고 서울 가서 살림하도록 할 테니깨 넌 아무 걱정도 말고 기다리면 되는 거여.
            내말 알아듣것냐?
길  녀 :  (물끄러미 목걸이만을 바라보며 건성으로) 예.
진천댁 :  니도 이제 서울 사람이 된단 말이다.  어때 기쁘지?
길  녀 :  (역시 생각에 잠겨 건성으로) 예.
진천댁 :  이젠 물질을 안 해도 되고 말이여?
길  녀 :  예.  좋구 말구요.
진천댁 :  그래.  착하다.  어서 들어가자.  현우에게 소식 올 때까지만 이곳에 함께 있는 거여.  

             지 자식은 외눈배기래도 아까운 법이지만 우리 현우는….
길  녀 :  (무심코 가방을 들고 들어가다 멈춰 서며) 설마?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목걸이와 비교해 본다)
진천댁 :  아가, 왜 그러냐?  내가 무슨 못할 말을 했냐?
길  녀 :  (뒷걸음치며) 아니예요.
진천댁 :  길녀야 왜 그러냐?
길  녀 :  저도 가야겠어요.
진천댁 :  (영문을 모르고) 아가.  여기가 네 집인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이여?
길  녀 :  (허리 굽혀 인사하며) 죄송해요.  안녕히 계세요.  (한길로 뛰어 나간다)
진천댁 :  (따라 나서며) 길녀야, 이리 와.  서울은 우리가 보내 준단 말이여.
길  녀 :  (뛰어 나서며) 기다려요!  같이 가잔 말이예요.


    진천댁,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입구에 서서 아쉬운 표정으로 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리곤 할 수 없이 손을 흔든다.  

   갈매기 소리 한가롭게 들리고 파도소리 잔잔히 부서지며 음악이 흐르는데 막이 내려온다.   



막.


·제21회 삼성문학상(도의문화저작상) 수상('92년 1월).
·제12회 전국연극제 장려상 수상.
  〈극단 이어도〉공연('94년 4월 수원 경기도 문예회관).

   서울 강서구 초청공연(강서구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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