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희곡 열매 맛보기

에밀 타케

강용준 2018. 5. 8. 09:07




위 사진은 서귀포 면형의 집에 있는 에밀 타케 신부가 1911년 심은  제주 최초의 온주밀감나무


제주를 사랑한 에밀 타케신부

강용준

 

모니카 : (무릎 꿇고 성호를 긋고 기도하며) 신부님, 에밀 타케 신부님.

타 케 : (신비스런 음악과 함께 나타나며) 조용히 명상에 잠긴 날 불러낸 이 누군가?

모니카 : 신부님, 제 애타는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서귀포 출신 생물학과 학생 모니카라고 합니다.

타 케 : 천주교 신자면서 생물학과 학생이라?

모니카 : 그렇습니다. 신부님이 제 고향에서 천주교를 전교하시면서 우리나라 식물 발전에 공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저는 소름 돋으며 감동받았습니다.

타 케 : 착각하지 말게 난 식물학자도 아니었고 단지 돈을 얻기 위해 한라산을 수백 번 올라 다녔을 뿐이네.

모니카 : 돈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타 케 : 생각해봐. 내가 부임한 1902년은 신축교안 즉 이재수 난이 일어난 다음 해였어. 천주교 신자 300여명이 그 난리에 죽고, 천주교에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는데 어디서 선교활동비를 구하겠어? 또한 그 당시 성당은 습지인 한논분화구 안에 있어서 곰팡이가 슬고 지붕이 내려앉고 주민들은 말라리아에 신음하고 말도 아니었어. 그래서 맨 처음 한 일이 빚을 내어 홍리 본당을 신축하는 일이었지.

모니카 : 지금 면형의 집 말씀이지요?

타 케 : . 본당 신축은 했지만 선교 할동은 고사하고 빚 갚을 방법이 막연했어. 그때 일본에서 선교 활동하는 포리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게 행운이었지. 그는 식물도감을 펴낸 식물학자였고 동기 신부여서 내 사정을 듣고는 방법을 알려줬지.

모니카 : 식물채집을 하여 유럽에 보내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말이지요?

타 케 : 그래 난 심부름꾼에 불과 했소. 가난한 교회와 먹을 것 부족한 신도들을 생각하면 한라산에 오르는 고행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지.

모니카 : 그래서 1908년 관음사 뒤쪽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한 것이로군요?

타 케 : 그때가 왕벚꽃이 한창인 3월 말이었지.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이었어. 채집하여 표본을 일본 포리 신부에게 보냈더니 신종이라는 거야. 그래서 세계학회에서 코리아체리트리로 명명 받았지.

모니카 : 일본에서 자랑하는 사쿠라는 자생지를 발견 못했다면서요? 그러면서 아직도 왕벚꽃이 한국에서 온 것이라는 걸 부정한답니다.

타 케 : 그 사람들 우기는 건 세계 제일 아닌가? 흐흐흐

모니카 : 신부님. 신부님은 1873년 프랑스 노드주에서 태어나 1987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서품을 받으시고 19881월 한국 경남 마산 교구에 선교사로 오셨지요.

타 케 : 그랬지. 그때 내 나이 24살이었지. 파리외방전교회는 죽을 때까지 선교지를 떠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선교사가 될 수 있거든. 그래서 난 한국에 온 후 1952년 병으로 소천하기 까지 65년간 죽어서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어.

모니카 : 대단하신 분이라는 걸 알고서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헌데 면형의 집에 가보니까 110년이 넘는 온주밀감나무가 있던데 그것도 타케 신부님이 심었다면서요?

타 케 : 말도 마. 그거 성산포 항에서 서귀포까지 옮겨오느라 무진 고생도 많았어. 왕벚나무 묘목을 일본에 보냈더니 포리 신부가 답례로 온주 나무 열네 그루를 보내주었지.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온주밀감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교인들이 이것을 심어 소득을 올렸으면 좋을 것이라고 해서 보내 준 걸 몇 그루는 수고한 교인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홍로본당에 심었지.

모니터 : 그게 1911년도지요? 저도 면형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110년이 다 된 나무에서 아직도 과실이 달리는 걸요.

타 케 : 당시는 제주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 땐데, 1913년이었어. 하루는 잘 자라는 온주나무를 본 한 일본인이 과수원을 해 보겠다고 찾아왔더군. 제주 과원이 한국 감귤 산업의 시작이야.

모니카 : 그게 지금 우리가 먹는 온주 밀감이죠? (온주 밀감을 꺼내며) 이거 말이에요.

타 케 : . 그래서 그 과원이 성공하자 토평, 신효, 하효, 위미, 남원으로 확산되었어.

모니카 : 그것이 제주도가 잘 살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걸 키워 자식들을 대학 보냈다고 대학나무라고 불렸죠. 다 신부님 덕이에요. 헌데 신부님을 힐난하는 분도 있어요?

타 케 : (버럭) 뭐라고? 제주의 가난을 물리친 게 누구 덕인데? 내가 얼마나 제주와 제주인을 사랑했는데. 난 제주를 떠나서도 부임하는 곳마다 제주왕벚나무를 심었어. 늘 제주를 생각하면서 말이야.

모니카 : 신부님의 제주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한 쪽만을 생각해요.

타 케 : 도대체 날 힐난 하는 이유가 뭔데?

모니카 :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전 세계적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잖아요? 그게 제주도 한라산 구상나무가 원조라면서요?

타 케 : 그걸 코리아 전나무로 명명까지 받았는데 왜 날 힐난한다는 거요?

모니카 : 요즘 와서는 외국 꽃이나 나무를 사용하려면 로열티를 내야해요. 상표사용처럼 말이에요. 헌데 그게 한국에만 있었으면 엄청난 로열티를 받았을 텐데, 아쉬워서 하는 소리에요.

타 케 : 내가 1917년 구상나무를 학계에 보고하는데 협조한 건 맞아요. 헌데 그게 왜 내 탓인가. 그걸 관리하지 못한 연구자들, 학자들, 행정가들 탓이지.

모니카 : 타케 신부님. 마태복음에는 이런 말이 나오지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백년이 지나서야 타케 신부님이 하신 일에 감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2009년에는 제주 자연의 가치를 빛낸 선각자 7인에 선정되셨고, 2016년에는 제주와 대구에서 신부님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타 케 : 내가 한 일이 재조명되고 있다니 보람을 느끼오. 모니카 자매님도 자기 분야에서 빛을 내는 사람이 되길 기도할게요,

모니카 : 고맙습니다. 타케신부님.

타 케 : 주님 곁에서도 늘 제주민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자주 만나게 될 거요.

모니카 : 존경합니다. 신부님. 신부님을 기리는 현장에서 다시 만나요.

 

음악소리 들리며 타케 신부 사라진다.

모니카 성호를 긋고 일어선다.


- 이 대본은 2018년 4월 28일 서귀포 면형의 집에서 열린 '바람난장'을 위해 쓴 것임.


'희곡 열매 맛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라져서 남은 샘  (0) 2020.11.22
게스트하우스 꿈  (0) 2020.06.07
좀녜  (0) 2017.12.03
무이파  (0) 2013.03.07
천지대왕  (0) 2010.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