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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그 아름다운 여행에서 만난 풍경들

강용준 2021. 11. 14. 07:40

 

문학, 그 아름다운 여행에서 만난 풍경들

강용준

 

청춘 시절의 꿈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과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막연하게 한의사, 건축사가 되고자 했으나 수학은 늘 나에게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나서 영화감독 되기를 꿈꾸었다. 첫 번째 대학 진학을 실패한 이후 난 과감하게 문과로 바꿨고 재수를 하며 국문과를 선택했다.

당시 경희대 국문과에는 황순원 소설가, 조병화 시인, 신봉승 극작가, 서정범 수필가 등 기라성 같은 문인 교수들이 있어서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는 삼선개헌반대, 유신철폐 등 시위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대학 연극이 한창 붐을 이루고 있었다. 극의 내용이 반정부, 군사독재를 풍자하는 마당극, 탈춤이 활발했으나 주류는 정통극이었다.

그 당시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본 차범석 작 산불은 내 인생의 죄표를 바꿔놓았다. 그 감동이 극작가를 꿈꾸는 문학도가 되었다. 희곡을 쓰기 위해서는 연극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대학 연극반에 가입하여 연극의 제작과정을 익혔다. 그러나 연극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어 기성 극단 동계워크숍에 참가했다. 삼일로 창고 극장이 있던 자리에 방태수 선생이 이끄는 극단에저또연습실이 있었는데, 단원을 모집하는 정보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 겨울방학 3개월 간의 합숙을 통하여 한 편의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이었다. 훈련은 체계적이며 혹독했다. 아침 11시 에 모여 신체 훈련을 하고 밥은 딱 한 끼 라면으로 때웠다. 오후에는 화술 훈련, 이론 수업, 토론 그리고 장클로드 반 이탤리 원작인 이라는 작품을 연습했다. 이 작품은 현대사회의 여러 사건과 문제들을 엮은 정치 연극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병을 얻어 공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결국 이듬해 휴학을 하고 낙향했는데, 이 기간이 내게는 문학을 집중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제주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그리스·로마신화부터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헤밍웨이 등 유명 고전 명작들과 희곡들을 섭렵하며 독학했다.

그리고 대학 교지에 희곡을 발표하고 대학연극반에서 내가 쓴 작품들을 연출도 했다. 영화감독의 꿈이 연극 감독(연출)으로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독립운동 같던 극단이어도 시절

대학을 졸업하면서 취업을 위해 경기도 교원임용시험을 보았고 다행히 합격하여 경기도 남양주, 이천, 평택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때가 되면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하는 생활은 내 꿈을 완성하기 어려웠다. 젊은 시절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다.

당시에 제주는 연극 불모지였다. 제주대학, 간호대학 출신 학생들과 시인, 예술가 등을 중심으로 제주 최초의 극단인 극단이어도를 창단했다.

연습 장소도 마땅한 곳이 없어서 개인 집, 커피숍 등지에서 책 읽기를 했고, 무용학원의 빈 시간을 이용하여 선을 밟았다. 그리고 신문사 강당을 빌어 1978년 창단 공연을 가졌다.

모든 극단이 그랬겠지만 지방에서 극단을 운영하는 일은 독립운동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대학가의 시위가 한창일 때라 사정 당국의 감시와 견제가 심했다. 행정당국에 대본을 검열받아야 했는데 공연 포스터의 스타일, 문구에도 트집을 잡고 신고필을 안 찍어 주었다. 할 수 없이 없는 살림에 포스터를 새로 제작해야 했고, 공연 준비를 마쳤는데 대본 심사를 미루다 공연 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연기자가 회식 자리에서 시국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고 구금해 버려 공연이 무산된 경우도 있었다.

극단 대표는 스폰서를 찾아다니며 공연재정을 마련해야 했고, 기획, 극작, 연출 이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지금처럼 극장이 많은 것도, 연습 공간이 있는 것도,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지원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서로의 호주머니를 털며 연습 경비를 마련했다.

필자가 제주에 내려올 때 집사람과 딱 10년 만 고향의 예술발전을 위해 봉사하기로 약속했다.그래서 창단 10년이 되는 해에 제자에게 극단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단원들간의 마찰로 극단이 와해 될 지경에 이르자 2년을 쉬다가 다시 극단 대표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다시 10년 후 대표직을 벗었다. 되돌아보니 20여 년 동안 50여 편을 연출했다.

 

등단 무렵 만났던 은사들

고향에 와서 희곡을 쓰고 공연하던 어느 날, 당시 경희중학교 교감이었던 희곡작가 홍승주 선생이 제주에 관광을 왔다고 연락을 받았다. 그는 대학교 국문과 선배이면서 내 교생실습 지도교사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가 내 근황을 묻더니 아직도 희곡을 쓰고 있느냐고 작품 좀 보자고 했다. 그때는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어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때여서 군부독재의 무단 공포정치에 무참히 쓰러져가는 무기력한 서민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다룬 작품을 써서 보냈다. 그게 1987월간 문학53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된 방울소리란 작품이다. 희곡을 공부한 지 15년의 습작 시절을 마치고 비로소 작가소리를 듣게 됐다.

그러나 필자가 중앙 무대에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좀녜란 작품이다. 당시 삼성그룹에서 삼성미술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래 전부터 도의문화저작상을 제정 운영하고 있었다. 섬에서 사는 나는 그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서울의 희곡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정보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 제주 해녀들의 바깥 물질을 다룬 이야기를 써서 응모했는데 그게 1991년 제21회 도의문화저작상(삼성문학상 전신)에 당선되었다. 당시로는 상금이나 상의 권위로도 최고의 희곡상이었다. 그때 심사를 맡은 분이 연극평론가 유민영 교수, 윤조병 작가, 이근삼 작가였는데 시상식에서 처음 인사를 드렸다. 이후 유민영 선생님과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서 오랫동안 교유하면서 희곡의 트랜드와 세계 문학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셨다.

좀녜는 이후 수원에서 열린 전국연극제에 직접 연출하여 참가해서 제주도 연극사상 처음으로 단체상인 장려상을 받았다. 이후 서울 강서구의 초청을 받아 원정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도내 극단들에 의해 여러 번 공연 되었다.

1993년에는 한국연극협회에서 창작극 개발 프로젝트를 공모했는데 거기에 4·3사건을 다룬 폭풍의 바다를 응모해 당선되었다. 그때 가르침을 주셨던 분이 윤대성 작가다. 서울문예회관대극장에서 극단 전망(연출 심재찬)에 의해 5일간 공연되었고, 제주문예회관에서도 초청 공연을 가졌다. 이 작품으로 대산문화재단이 공모한 제4회 창작기금에 당선되어 희곡집이 나오게 되었고, 한국희곡작가협회가 제정한 한국희곡문학상을 받았다.

 

설문대할망이 도와준 성화 점화 연출

1998년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이 행사는 제주 유사 이래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전국 행사였다. 그러나 나라가 부도가 날 지경에 IMF 구제금융을 받는 힘든 상황이었다. 어느 날 교육청에서 나를 불렀다. 제주도교육청에서 개·폐회식 행사를 담당하게 됐는데 식전행사 총감독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무대 연출만 했던 난 새로운 야외 연출에 도전해 보기로 하고 쾌히 승낙했다. 나는 제주도교육청으로 파견되었고 예체능 교사를 중심으로 식전행사 기획단을 조직해서 행사를 준비했다.

식전 행사의 꽃은 성화 점화다. 역대 올림픽, 아시안 게임, FIFA월드컵 등의 개막 행사 시청각 자료를 구해서 분석했다. 제주가 섬이고 당시 IMF 상황인 것을 감안 해서 행사 주제를 가자! 바다를 건너서로 정했다. 그리고 성화 점화 방법을 제주 신화 속에 나오는 설문대할망에 착안했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에서 흙을 퍼다 제주 섬을 만든 창조주 신이다.

신화에 의하면 설문대할망은 가난해서 속옷이 없었다. 섬사람들에게 자신의 속옷을 만들어주면 섬에서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설문대할망을 성화 점화에 활용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 거대한 여신을 어떻게 형상화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풍선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는 광고물 제작을 하는 이벤트 업체를 만났다. 그 업체와 협의를 하면서 성화 점화로를 한라산 형상으로 만들고 성화로 밑바닥에 바다를 상징하는 비닐 천을 깔아 거기에서 설문대할망이 솟아오르도록 하고 그 거대한 여신의 손가락 속에 크레인 장치를 넣었다. 부풀어 오른 거대한 설문대할망의 손가락 위에 최종점화자인 한국 탁구의 미래인 어린 여자 선수가 올라서면 서서히 팔이 성화대로 움직여 점화를 하도록 했다. 이게 중앙일간지 톱 사진으로 실릴 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IMF의 경제 불황 속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안과 희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지금도 뿌듯함을 느낀다.

 

문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여정

필자는 제주에 살면서 세 채의 문학 관련 공간을 마련하는 일에 앞장섰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에 문학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공론화 되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도지사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들에게 공약사항이 되도록 노력하였으나 당선된 도지사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5년도에 처음으로 제주문인협회와 제주작가회의가 공동으로 제주문학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세미나와 토론회 등을 열며 분위기를 만들었으나 행정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학인들의 강력한 요구로 2009년 도비 3억이 책정되었는데, 이 예산으로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문학관을 운용하라고 했다. 추진위원 중에는 이것을 받으면 행정당국이 생색만 내고 제주문학관 건립은 물 건너간다고 반납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필자는 이왕 책정 된 예산인데 이 예산을 활용하여 제주문학관건립거점센타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그래서 건물을 임대해 리모델링하여 제주문학의집을 개관했다. 한 지붕아래 제주문인협회와 제주작가회의 사무실이 마주보며 화합하고 교류하는 계기도 됐다.

이후 추진위원회는 여러 번 구성원이 바뀌다가 2017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공식적인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체계적인 계획과 실행에 돌입했다.

당국에서 추진계획서를 만들고 예산 마련을 위해 담당 공무원들이 문화체육부를 찾았으나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은 도종환 시인이었는데, 추진위원이던 김수열 시인과 가근한 사이였다. 그가 장관과 직접 연결하여 면담 요청을 했고, 김 시인과 이종형 공동위원장과 함께 장관 면담을 했다. 결국 38억 원의 국비 지원 약속을 받아내어 사업 추진이 속도를 내게 되었다. 제주문학인들의 건립추진 16년 만인 20211023일 제주문학관이 개관된다.

고향인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한담동에 장한철이란 분이 살았었다. 이분은 해양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표해록의 저자이다. 1701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났다가 풍랑에 난파 당해 유구(오키나와)까지 표류하다가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서 남긴 작품이 표해록인데 문학사적 가치와 의미가 많은 작품이다. 장한철 선생의 생가터를 복원하기 위해 애월 출신 제주 문인들과 애월읍 도의원, 장 씨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2014녹담 장한철선생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해서 위원장을 맡고 행사를 추진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행정과의 협의 과정을 거쳐 20212월 개관했다. 이 공간은 앞으로 문인들의 창작실로 이용될 것이다. 이 세 채의 문학 공간은 많은 제주 문인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물이다. 앞으로 제주문학관 부설로 레지던스 사업을 할 수 있는 창작관도 마련돼야 한다. 미력이나마 힘을 보탤 생각이다.

 

인생 여정으로서의 문학

필자는 2012년 교단을 조기 퇴직하면서 지인들에게 약속한 일이 있다. 전업 작가를 선언하며 등단 25년에 4권 뿐이던 작품집을 10권은 채우겠으며 앞으로 소설을 쓰겠노라고 공언했다. 극단을 떠나니 내 희곡을 공연하겠다는 극단도 없고, 희곡은 독자도 없는데 써야 할 동기부여도 안됐다. 그래서 돌파구로 찾은 게 소설이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지금은 문학이라는 공동체 마을, 희곡이라는 동네에 살다가 소설이라는 이웃 동네에 집필실을 마련한 셈이다.

그간 집필실을 찾아 도내 성읍, 한동, 수산, 우도, 마라도 등지를 떠돌았다. 그리고 인제 만해마을, 원주 토지문화관, 증평 21세기 문학관, 이천 부악문원 등 10여 년을 전국의 레지던스 창작실을 찾아다녔다. 이것을 남들은 유랑이라고 하지만 난 여행이라고 말한다. 곳곳에서 만났던 여러 장르의 많은 문인들, 그들은 내 문학 인생의 훌륭한 가이더며 동반자였다.

희곡이나 소설이나 서사가 기본이어서 소설이 쉽게 써질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소설, 특히 장편소설은 많은 자료 수집과 인터뷰, 현장 답사가 필요했다.

첫 장편인 붓다, 유혹하다를 쓸 때는 불교의 이론서를 찾아 오랜 시간 연구하며 공부했고, 주인공의 행적을 좇아 서울, 경기도, 강원도의 사찰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사우다드는 중국 여행을 갔다가 허물어진 광개토대왕릉을 보면서 의심을 가졌다. 자료를 찾아보며 중국의 동북공정, 고구려 역사와 친일 사관에 대해 공부를 했다. 내가 소설에 자신을 갖고 동기부여를 받게 된 것은 이 장편 사우다드가 한국소설가협회가 주는 한국소설작가상을 받게 되면서다.

이후 20193월부터 한라일보 인터넷판에 장편 갈바람 광시곡20202월 까지 50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는 제주 언론 최초의 웹소설이다.

그래도 희곡 작업은 놓을 수가 없다. 2020년에는 희곡집 랭보, 바람구두를 벗다(청어), 2021년에는 내 인생의 백테클(평민사)을 냈다. 이 작품들이 무대 상에서 빛을 보게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극작가란 의무감에서 희곡집을 냈다. 글을 쓰지 않으면 그게 어디 작가인가?

내 공언한 10권의 약속은 금년 초에 완성됐다. 이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쓸 수 있을 때까지 희곡의 형식이든 소설이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망한다.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아름다운 사람들과 풍경들을 많이 만나게 되기를.

 

창작마을 2021 가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