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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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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무렵

강용준 2022. 11. 9. 13:27

2022.11.05-06  서귀포 에술의 전당 공연 장면(극단가람 /이동훈 연출)

 

해경(解警) 무렵

 

 

 

등장인물

 

이막순

어머니

김갑생

심진경 : 김갑생의 딸

김철종 : 이막순의 아들

오동추 : 오만석의 아들

오만석 : 어촌계장

동추모 : 오만석의 처

순덕네 : 식당 찬모

김을봉

해녀 1

 

무대 : 뒤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오른쪽 앞으로 간판도 허름한 모녀 식당내부.

왼쪽 사이드에서 바다에 연한 절벽(가린돌)이 슬라이딩 된다.

절벽 위는 작지왓, 수선화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중앙은 불턱 등 여러 공간으로 쓰인다.

 

 

서 장

 

객석 불이 꺼지면서 노래가 흐른다.

 

난 다시 바다로 나가야겠네,

그 외로운 바다, 그 하늘로

필요한 건 오직 높다란 배 한 척과 길잡이 별 하나

타륜의 반동과 바람의 노래, 펄럭이는 흰 돛

그리고 바다 위 뿌연 안개, 동터 오는 뿌연 새벽뿐

 

난 다시 바다로 나가야겠네,

뛰노는 물결이 부르는 소리

세차게 또렷이 들려와 차마 저버릴 수 없어라

필요한 건 오직 바람 이는 날의 날아가는 흰 구름

튀는 물보라와 날리는 물거품, 울어대는 바다 갈매기뿐

(존 메이스필드의 바다에 몸이 달아중에서)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 절벽 위로 오르는 실루엣,

노래가 끝나면 여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서로 묶인 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들

 

 

1

 

 

어둠 속에서 이막순 전화 받는 소리가 들리면 식당 밝아진다.

 

이막순 : , 모녀 식당입니다. 누구요? . 내가 막순인데 누구십니까? ? 지금 장난하세요? 그 사람 죽은 게 언젠데? ? 그렇지요. 당신 도대체 누구세요? (사이) 뭐라구요? 아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말씀이세요? . 작지왓은 그대로 있습니다. 작지왓의 수선화요? 정말 김을봉이 맞아요? (눈물을 닦으며) 당신이 살아 있다니 믿을 수 없어요. 날 놀리려는 거지요? 아니요? 얼굴 보기 전에는 믿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오세요. 제발... (전화가 끊긴 듯)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를 놓으며) 아니 이럴 수가... 그럴 수만 있다면... 제발 얼굴이라도 한 번 보았으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눈물 흘린다)

순덕네 : (주방에서 나와 이막순을 살피다) 언니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수가?

이막순 : (눈물을 훔치며) 글쎄, 길순 아버지가... 김을봉이가... 아니다. 30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니... 누가 믿어주겠어?

순덕네 : 꿈 꿉디가?

이막순 : 그랬는가? 헌데 너무 생생해. 코맹맹이 목소리하며 작지왓의 수선화를 기억하는 걸 보면 길순 아버지가 틀림없는데.

순덕네 : 몸이 허해 귀신이 보이는 모양이우다. 해경이 코앞인데 삼계탕이라도 고아 드십서.

어머니 : (나오며) 너희들만 몰래 먹으려고? 나도 줘. 삼계탕 어딨어?

순덕네 : 아이고 귀도 밝기는. 우리 집엔 닭 없어요. 시장가서 사와야지요.

어머니 : 언제? 날 굶어 죽일 생각이지? 니 밥 줘.

순덕네 : (테이블을 닦으며) 좀 기다립서게. 여기 좀 닦고 마씸.

어머니 : 배고파, 이년아. 창지에 뭐 들어가야 약 먹지.

순덕네 : , 금방 차려 올릴 테니 여기 앉읍서. (들어가며) 약이 벼슬이구나.

이막순 : 어머니, 길순 아버지가...

어머니 : , 을봉이 제삿날은 아직 멀었는데?

이막순 : 살아 있다구요.

어머니 : (생각하다) 미친년. 제사 받아먹는 놈이 살아 있다구?

이막순 : .... 전화 왔었어요.

어머니 : 살다 살다 별 미친 소릴 다 듣네. 야 이년아, 정신 차려. 시에미도 정신 멀쩡한데 벌써 노망하냐?

순덕네 : (찬을 가지고 나와 식탁에 놓으며) 하이고 그거 봅서. 괜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 해가지고...(나간다)

이막순 : 난 들었는데... 분명 생생하게 들었는데...

어머니 : 불쌍한 놈. 피어보지도 못하고... 꿈이라도 좋으니 얼굴 한 번 봤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년도 소식 한 번 없는데, 죽은 놈이 어떻게 온다구...

이막순 : . 갑생이가 온대요.

이막순 : 얘가 오늘 시어멍 놀리려고 작정했나? 여태 생사 모른 딸년이 온단 말여?

이막순 : . 어제 연락 왔어요.

어머니 : 혹시 나 죽을병에 걸린 거야? 의사선생님이 그랬어? 언제 죽는데?

이막순 :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닌 오래 사실 거우다.

어머니 : 헌데, 생전 꼴도 안 비치던 년이 뭐 하러 오냐구?

이막순 : ... 보고 싶으니까 오겠죠. 참말이에요. 어머니. (배가 꼬이는 듯 배를 잡고 쓰러진다) .

 

어머니 의아해서 쳐다보는데, 암전.

 

2

 

오만석이 혼자 열 올리며 얘기하는데 순덕네가 찬을 가지고 들어온다.

 

오만석 : 거 사람들 뭘 좀 알고 나불거려야지. 우미도를 레져타운으로 개발할 때도 얼마나 반대했어? 헌데 동네 사람들 일자리 찾고 좀 좋아? 이제 해저잠수함까지 생기면 관광객 몰려들고 마을이 발전할 텐데 왜 반대하느냔 말야?

순덕네 : (밑반찬을 놓으며) 사람들 생각이 다 같습니까? 사돈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법인데. 헌디 마을회관 식당은 언제 개업할 거우꽈?

오만석 : 해경 끝나면 회관 개관식하고 바로 관광객 맞을 준비할 거야. 잠수함 타고 우미도 한 바퀴 돌고 나면 딱 점심시간이거든. 단체 손님 몇 팀만 받아도 이문이 많이 남지. 흐흐흐....

순덕네 : 허면 우린 문 닫아야겠네요?

오만석 :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세상 흐름을 누가 막아? 하지만 순덕네는 특별히 생각하고 있지.

순덕네 : 특별한 게 뭔데요?

오만석 : 조리사로 채용한다구.

순덕네 : 조리사? 하이고, 우리 오라버니 최고야. (어깨를 주무르고 안마한다)

오만석 : 간지러워. 그만 그만.

순덕네 : 헌디 개관식 때 기부한 사람도 옵니까?

오만석 : . 은행 통해 기별했으니 오겠지.

순덕네 :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 그 많은 돈을 내놓은 걸 봐선 아주 부자겠지요?

오만석 : 나도 궁금해. 1억은 평생을 가도 못 만져 볼 돈인데. 그것도 자기 이름 숨기면서 내놓는 게 보통사람은 아니겠지. 헌데, 이거 무슨 냄새야?

순덕네 :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매운탕이...(황급히 들어간다)

 

오동추 들어온다.

 

오동추 : 아버지, 외삼촌댁 안 가실 거에요?

오만석 : 거 매년 하는 제사 한 번 빠진다고 귀신이 토라지나? 취해서 난 못 가. 헌데 바쁘신 분이 심부름을 다하시고. 어인 일이십니까?

오동추 : 아버지?

오만석 : 제가 댁의 부친 맞습니까?

오동추 : 정말 취하신 거에요?

오만석 : 너 애비 얼굴에 똥칠 할 생각이냐? 도와주지 못할 거면 좀 가만히 있어.

오동추 : 아버지. 잠수함 유람선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바다가 망가지고 해녀들 다 꿂어 죽어요. 아시면서 마을 어른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만석 : 이놈이 이젠 설교하려 드네? 근거를 대봐 바다가 망가진다는 근거를.

오동추 : 선착장 생기면요 물의 흐름이 바뀌고 잠수함 다니면 생태계 파괴되는 건 상식이잖아요? 아버지, 해양은 제 전공입니다. 사조리를 보세요. 방파제 만들었다가 녹조 끼고 해파리, 파래 몰려들어 어장 망가진 거 못 들었어요?

오만석 : 그거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 없어. 당국에서도 원인을 모른댔잖아?

오동추 : 집으로 가세요. 인터넷 자료 보여 드릴 테니.

오만석 : 너 앞가림이나 잘해. 비싼 등록금 바치며 데모질 하다 잘리고. 지금 무슨 꼴이냐? 마을 발전은 돕지 못 할망정 이간질을 해?

오동추 : 아버지. 세상 넓게 보세요. 재벌한테 재산 바치는 게 무슨 마을 발전이냐구요?

오만석 : 임마, 자본주의 사회가 다 그렇지. 있는 사람이 자본 투자해서 사업 하면 없는 사람 일자리 얻고 오죽 좋아? 너 잠자코 있어. 잠수함 선착장만 되면 취직시켜 주기로 다 약속 받았어.

오동추 : 저 그런 회사 안 들어갑니다.

오만석 : 그래? 니깐 놈이 이 회장님을 이길 수 있을 거 같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잠수함을 띄우고 말 텐데.

오동추 :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합니다.

오만석 : 이거 오만석 핏줄 아니구만? 그래 다치든 죽든 너 마음대로 해. (나간다)

오동추 : (따라가며) . 놔두세요. 어디 제 아들이 다칩니까?

 

김갑생과 심진경이 들어온다. 김갑생은 털모자를 쓰고 승복을 입었다.

김갑생, 오만식과 마주치자 합장 한다.

 

오만석 : 가만 어디서 많이 봤던 사람인데?

김갑생 : (합장하며) 절 알아보시겠어요?

오만석 : 혹시 가 갑생이?

김갑생 : . 김갑생입니다. 너무 오랜만이지요?

오만석 : (낯빛이 변하며) 어허 이거 어쩐 일이야? 생전 소식 한 번 없던 사람이.

김갑생 : 죄송합니다.... 건강하신 모습 뵈니 반갑군요?

오만석 : (빈정대듯) 이거 해경 때가 되니까 어중이떠중이 다 모여드는 구먼?

김갑생 : 진경아 인사 드려라. 동네 어른이시다.

심진경 : 안녕하세요? 심진경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오만석 : 부탁? 아가씨도 무슨 선거 나오나?

김갑생 : 딸이에요. 방송작간데 이번에 소설가로 등단했어요.... 아저씨 책 한 권 드려라.

오만석 : (진경 가방에서 책을 꺼내는데 심사가 뒤틀리는 듯) 촌무지랭이가 책은 무슨...(헛기침을 하고 나간다)

오동추 : (받으며) 주세요. 제가 읽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성질이 원래 제멋대로 꼬인 꽈배기에요. 이해하세요. 그럼. 이만. (목례하고 나간다)

 

갑생과 진경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데 이막순과 마주친다.

 

김갑생 : 막순이? 막순이 맞지?

이막순 : (멍하니 처다만 본다. 눈물이 흐른다)

김갑생 : 진경아 외숙모다.

심진경 : 안녕하세요? 심진경이에요.

 

이막순, 대답 없이 눈물을 닦으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모두들 의아해 하는데, 암전.

 

 

3

 

다음날. 식당.

김철종은 밥 먹고 있고, 이막순은 한쪽에 앉아 채소를 다듬고 있다.

김갑생 나온다.

 

김갑생 : 삽상한 공기는 예전과 다름없구나.

이막순 :

김갑생 : 미안해. 그간 연락도 못하고...

이막순 :

김갑생 : 어머니 모시느라 고생 많았어.

이막순 : 철종아 인사 드려라. 서울 사는 고모다.

김갑생 : 얘가 막내 철종이구나?

김철종 : (시큰둥하게) 안녕하세요?

김갑생 : 그래. 다 큰 아들 있으니 엄마가 든든하겠네? 말만 고모지. 제사 명절 때 한 번 오지도 못하고. 면목 없다. 어서 식사해.

김철종 : 다 먹었어요.

김갑생 : 오랜만에 바다도 보고 마을 한 번 돌아보려고... 많이 변했겠지?

이막순 : (대답대신) 안내해 드려.

김갑생 : 아냐. 아냐. 옛 추억도 더듬을 겸... (나가며) 혼자 다녀올게.

김철종 : 어머니 왜 그래? 고모랑 안 좋은 사이야? 어머닌 마음에 안 들면 아예 입이 자크지?

이막순 : 너나 잘하세요.

김철종 : 용돈 좀 줘.

이막순 : 어제도 가져가고 매일 무슨 돈이야?

김철종 : 담배도 사고 비지니스도 해야잖아?

이막순 : (계산대로 가며) 백수가 넉살은? 바쁜데 집안 일 좀 도와주면 안 되니?

김철종 : 할 일이 뭔데?

이막순 : 해경 다가오는데 리아까 빵꾸도 때워야 하고, 장작도 구해야지, 바지게 다리도 나갔는데 할 일이 좀 많아?

김철종 : 하면 되잖아. 아직 시간 널널한데 뭘. 하지만 마줌꾼은 사양하겠어. 작년 그거 때문 허리 다쳐 얼마나 고생했다구... ?

이막순 : (서랍에서 돈을 꺼내주며) 으당 할 일이다 생각 해. 집안에 누가 있니? 여자는 쇠처럼 일하는데. 꼴에 남자라고 상전 노릇할 참이여?

김철종 : (받으며) 알았어요. 어머니. 이담에 장가가면 다 갚을게.

이막순 : 관 둬라. 제 각시 궁둥이만 쫓아다닐 녀석이. 난 혼자서도 얼마든지 산다. 바다만....

김철종 : (동시에) 바다만 있으면.... 어머니. 딸 잡아먹은 바다 지겹지도 않아?

이막순 : 아니면? 너희들이 누구 덕에 먹고 자랐는데?

김철종 : 어휴. 또 그 소리.

이막순 : 바다가 내 휴식처고 병원이여. 헌데 넌 쫓아다니는 여자애도 없어?

김철종 : 왜 데려다 해녀 만들게? 내 나이 이제 스물둘이야.

이막순 : 이 녀석아 난 열 아홉에 길순이 낳았어. 시간 많이 남은 거 같지? 인생 금방이야.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게끔 살어. 에미 쓰러지기 전에 손주도 보여주고...

김철종 : 왜 이래? 당장 죽을 사람처럼.

이막순 : 사람 팔자 아무도 모른다. 멀쩡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황천길 가고, 재수 없으면 변보다가도 벼락 맞는 법이여.

김철종 : 오늘 참 이상하네?

이막순 : 요즘 꿈자리가 안 좋아서 말이다. 느 아버지 산소에도 가봐.

김철종 : 아버지가 어디 있어? 난 아버지 없어. 매일 술 먹고 패고 때려 부수던 개망나니가 아버지라고? 벌 받아 일찍 잘 죽었지.

이막순 : 넌 그런 소리할 자격 없어.

김철종 : (버럭)내가 뭘 어쨌다고?

이막순 : 그 욱하는 성질. 그 핏줄 아니랄까봐 그러니? 행실이나 똑바로 하고 다니라구. 공부시켜 준대도 싫다고 집어치우고, 사람이 그렇게 찰지지 못해서 어디에 써먹을 거니?

김철종 : 나한테도 다 생각 있다구요. 동추 형이랑 양어장 하기로 했어. 육지선 떼돈 번대. 그러니 아들 믿고 투자 좀 하세요.

이막순 : 일없다. 지금까지 좀 투자했니? 술 쳐 먹고 싸움질해 병원비며 합의금에... 친구 보증 섰다 말아먹고...

김철종 : 그만 해. 젊은 나이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다 인생 공부잖아? (라이터뚜껑을 닫았다 열었다 한다)

이막순 : 세상에 공짜 없다. 욕심 버리고 농사나 부지런히 지어. 투자할 돈이 어디 있다구?

김철종 : 작지왓 있잖아?

이막순 : 그걸 팔자구? 지금 제정신이니? 작지왓이 어떤 밭인 줄 알면서 그런 소리야? 그리고 그거 담보 잡혀 빚 문 거 알잖아? 빚 갚으려면 이번 해경에 죽을힘을 써야 해.

김철종 : 큰 누나가 여러 사람 고통 주는 군. 그러고도 소식 한 번 없으니...

이막순 : 물질 그만 둬서 벌 받은 거지. 작지왓은 대대로 물릴 재산이니까 눈독 들이지 마.

 

순덕네 주방에서 나와 식탁을 치우고 닦는다.

 

김철종 : 작지왓으로 길 나는 거 알잖아? 그게 다 잠수함 선착장 때문이라고.

이막순 : 누구 맘대로? 난 한 평도 내놓을 수 없어.

김철종 : 그렇지? 안 돼지? 작지왓은 내가 지킬 거야. 누구든 건드리기만 해봐. (라이터 심지를 올린다)

이막순 : 거 왜 쓸데없이 불장난이야.

김철종 :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갔다 올게요.

이막순 : 성질 죽이고 살어. 선착장 반대도 앞장서진 말고. 이젠 우리 집에 너 말고 누구 있니?

김철종 : (나가며) 알아서 해요. 어린애 취급 마세요.

이막순 : (뒤에다 대고) 고모네 관광안내 좀 해.

김철종 : 나 바빠.

이막순 : 백수가 뭐가 바쁘다고? 에그. 모두 자기 생각뿐이니...

순덕네 : 그래도 철종인 효자우다. 다 도시에서 빈둥대는데 취나물 갈아 지 용돈 벌지... 술만 안 먹으면 샌님인데...

이막순 : 애비 사랑 못 받고 자라서 그래. 다 내 탓이주.

 

양단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 입고 어머니 나온다.

 

어머니 : (목걸이 자랑한다) 이거 좀 보라. 잘 어울렴시냐?

순덕네 : 아이고 곱다. 어디 새 영감님 선보래 가셤수가?

어머니 : 흐흐흐 우리 갑생이가 준 거여. (돈주머니를 흔들며) 용돈까지 받았다.

순덕네 : 하이고 부럽네. 나도 좀 줍서.

어머니 : 그래 이리와 줄게. (가까이 오자 가래를 뱉어낸다) 옛다.

순덕네 : 에에 나 원. 그냥 삼킵서게.

어머니 : 더러운 걸 어떻게 삼켜?

순덕네 : (발로 짓이기며) 보는 사람은 안 더러웁니까?

이막순 : (쳐다보지 않고) 비비지 말고 물걸레로 닦으라.

순덕네 : 아 예.

어머니 : (막순에게) . 허채(해경) 날짜가 언제라고?

이막순 : ....

순덕네 : (대걸레를 가져오며)보름 쯤 남아수다.

어머니 : 보름? 그때까진 기력 돌아오겠지?

순덕네 : 그 몸으로 해경 참여하젠 마씸?

어머니 : 왜 평생 짠물에 뒹근 년이 못 할게 뭐꼬? 이래도 중국 청도까지 물질 갔다 온 몸이여. 난 좋은 미역 구덩이가 어디 있는지 난 알지. 빛깔 좋고 큼직한 상질이라 돈 많이 받을 걸...흐흐흐.

순덕네 : 지난 번 쓰러진 거 생각 안남수가? 이젠 소일거리로 갓물질이나 헙서.

어머니 : (화내며) 가만있으면 누가 돈 갖다 줘? 돈이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데, 방구석에서 뒹글란 말이여? 나 아직 안 죽었어. 기력을 찾아야해. 어서 전복죽이나 끓여내.

순덕네 : (준비하러 가며) 예예 갑서.... 알아수다.

어머니 : 마줌꾼은 구해 놔시냐?

이막순 : 철종이 있수게.

어머니 : 그놈 어떻게 믿어? 작년에 낭패 본 거 잊어불언? 고기도 먹던 사람이 먹는다고. 하기 싫은 일 억지로 시키니.... 할망 앞에선 숫제 귀머거리 행세여.

이막순 : ....

어머니 : 시어멍 말, 개 짖는 소리로 들었구나?

이막순 : ...

어머니 : (빈정대며) 돈이 싫으냐?

이막순 :

어머니 : 모자가 닮았구나. 왜 대답 못 해?

이막순 :

어머니 : (가슴치며) 어이고 답답이여....

이막순 : 걱정 맙서. 춘보가 도와 주기로 해수다.

어머니 : 길순인 소식 없어? 힘 좋아서 한몫 단단히 할 텐데. 물질 계속했으면 상군 소리 듣고도 남지.

이막순 : 그년은 잊어 붑서. 이름만 들어도 소름 돋암수다.

어머니 : 시방 날 욕하고 싶은 거지? 나 때문 길녀 죽었다고..., 아픈 가슴 콕콕 찌르는 게 그렇게 재미이시냐?

이막순 : 길순인 돌아오지 못합니다. 무슨 염치로... (정리한 채소를 들고 들어간다)

어머니 : (뒤에다 대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경 모질게 말어.

순덕네 : (나오며) 죽 다 돼 가는데... 방으로 가져갑니까?

어머니 : (들어가며) 생각 없다. 너나 먹으라

순덕네 : ? 아이고 전복 듬뿍 놓았는데... 그래 나도 체력 보강이다. (들어간다)

 

이막순 나와 컵에 물을 따르고 약봉지를 꺼내 주위를 살피며 약을 먹는다.

암전.

 

 

4

 

며칠 뒤. 가린돌 작지왓. 갈매기 우는 소리와 파도소리 들린다.

벤치에 심진경이 심각하게 앉아 있는데, 오동추가 핏대를 올리고 있다.

 

오동추 : (소설책을 들고) 도대체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심진경 : 무슨 근거로 엉터리라는 거죠? 나름 열심히 조사하고 연구했는데.

오동추 : 산사람들이 폭도라구요? 이건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에 대한 모독이에요. 43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광기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구요. 미친개 풀어놓고 사람 잡으려는 놈들과 물리지 않으려고 몽둥이 휘두르는 역사.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야욕. 그것 때문 세상은 편할 날이 없는 거죠. 지금 거성이 하는 일이 그래요. 저기 우미도에 가 봤어요?

심진경 : . 어제. 곧 잠수함도 다닌다면서요?

오동추 : 나쁜 놈들이죠. 골프장에다 레져 타운으로 야금야금 갉아먹더니, 섬과 바다도 날로 먹으려는 거죠. 진경 씨 좀 도와줘요.

심진경 : 제가 무슨 힘이 되나요?

오동추 : 한 번만 이슈화 시켜줘요. 방송에 뜨면 동조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고, 제 아무리 재벌이라도 동네사람들 들고 일어서면 어쩌지 못할 겁니다.

심진경 : 방송국에 아는 기자와 피디들이 있어요. 연락해 볼게요.

오동추 : 꼭 모셔 오세요. 여기로요.

심진경 : (사방을 둘러보며) 여기 경치 참 좋다. 어머 저기 수선화 맞죠?

오동추 : . 여길 가린돌이라 하는데 바로 역사의 현장이거든요.

심진경 : 역사의 현장? 무슨...?

오동추 : 사람들 끌고 와 여기서 총살하고 이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죠.

심진경 : (놀라며) 그래요?

오동추 : 더 웃기는 건 장인 될 사람 죽이고도 뻔뻔하게 그 집에 장가 든 놈도 있대요.

심진경 : (놀라며) 세상에 인간이 어떻게...?

오동추 : 사람 마음이 하나같다면 지옥 갈 사람 어디 있겠어요?

심진경 : 여긴 자주 오나 봐요?

오동추 : 여기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근심 걱정 다 사라지죠. 파도 부서지는 소리하며 외로움을 달래긴 안성맞춤이죠.

심진경 :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죠? 그죠?

오동추 :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요 아래 수선화 핀 곳이 작지왓인데 길녀네 밭이에요. 수선화를 무척 좋아했거든요.

심진경 : 아이러니네요? 하필 조상들 죽임 당한 곳에서 사랑이라니?

오동추 : 삶이란 늘 그렇지 않나요? 낡은 초목을 태워야 새 풀이 번창하듯이...

심진경 : 헌데 해경이 뭐에요? 마을 사람들이 그것 때문 들떠 있던데?

오동추 : 마을 잔칫날이니 모두 기대가 커요. 미역이 다 자랄 때까지 따지 못하게 했다가 금채를 푸는 날이 해경이죠. 미역 금지가 좋아서 한 밑천 되거든요.

심진경 : 일년 농사 수확하는 날이군요?

오동추 : 그럼요, 해경 지나면 장가도 가고 밭도 사고 그래요.

심진경 :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바다에 모이면 볼 만하겠는데요?

오동추 : 보는 사람은 장관이겠지만 한 푼이라도 더 건지겠다고 허둥대는 꼴이 아수라장이 따로 없어요. 과욕이 화를 부른다고 길녀도 그러다 당했어요.

심진경 : (화제를 돌리려고) 어머 저기 개들 이쁘다. , 개하곤 경주 하지 말란 소리 들어봤어요?

오동추 : 아니? 왜죠?

심진경 : 득 될 게 없으니까요. 개한테 이기면 개보다 지독한 놈 되고. 같이 들어오면 개 같은 놈이 되죠? 그럼 개한테 지면?

오동추 : 개만도 못한 놈?

심진경 : 정답.

오동추 : (깔깔대며) 듣고 보니 그렇네. (사이) 하지만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죠.

 

인기척이 들리며, 잠시 후 오만석이 나타난다.

오동추, 이외의 출현에 놀란다.

 

오동추 : 아버지. 여긴 웬일이세요?

오만석 : 왜 내가 못 올 델 왔냐? 나도 손님 좀 만나러 왔다. (시계를 보며) 내가 늦었나? (헛기침) 일 다 봤으면 어서들 가.

심진경 : 안녕하세요?

오만석 : (냉담하게 돌아서 헛기침하며) 동추 나 좀 보자.

심진경 : 먼저 갈게요. (나간다)

오동추 : 같이 가요. (따라 나가는데)

오만석 : (등 뒤에 대고) 양심이 못 봤어?

오동추 : 집에 있는 강아지가 왜요?

오만석 : 찾아봐. 어제부터 안보여.

오동추 : 아버지 싫다구 가출했나 보죠.

오만석 :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오동추 : 헌데 아버지 요즘 연애하세요? 밤잠도 못 주무시지 입맛 없다고 식사도 거르시지, 몸이 마르는 게... 누구에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오만석 : 거 쓸 데 없는 소리. 봄을 타서 그렇지. (헛기침) . 너 저 애 만나지 말어.

오동추 : ? 이건 프라이버시 침해에요. 아버지가 무슨 상관이에요?

오만석 : 이놈아 애비가 말하면 예하고 좀 들어. 왜 항상 삐딱해?

오동추 : , 진경 씨 엄마가 첫사랑이라도 됩니까?

오만석 : 그런 거 아냐 임마. 만나지 말라면 만나지 말어.

오동추 : 아버지. 이해되도록 말씀하세요. 밑도 끝도 없이 만나지 말라니요?

오만석 : 우린 쌍놈의 집안 아니야. 배를 부렸어도 손가락 받을 짓은 하지 않았어. 근본이 다르다구.

오동추 : 진경 씨네 집안이 어떻다는 겁니까?

오만석 : 차차 알게 될 거야. 어서 가.

오동추 : (빈정대며 나간다) 나 참. 오늘 바람 맞기 좋은 날이네.

오만석 : (시계를 보며) 허어 이거 왜 안 와? 정말 바람... (생각하다가) 저 자식이 애빌 놀려?

 

암전.

 

 

5

 

같은 날 저녁. 식당.

관광객 둘이 식사를 하고 나간다.

순덕네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오만석 들어온다.

 

오만석 : 거 갑생이 좀 나오라 그래.

순덕네 : 갑생이가 누구꽈?

오만석 : 왜 서울서 온 여자 중 있잖아?

순덕네 : , 진경이 어멍?

오만석 : 그렇게 눈치가 없나? 척하면 착 알아먹어야지?

순덕네 : 아직 안 들어왔수다. 헌디 동추아버지, 우리 막순 언니 좋아하는 거 맞지 예? 춤바람났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만석 : (의자에 앉으며) 어허 점잖지 못하게 무슨 소리야?

순덕네 : (툭 치며) 아이고 요즘 일요일마다 데이트 나가는 거 다 알아 마씀.

오만석 : (좌우를 살피며) 어허, 누가 들으면 정말 연애하는 줄 알겠네.

순덕네 : 이른 아침 보건소 앞에서 동추아버지 차타고, 슬로우 슬로우 퀵퀵 이거 배우러 다니는 거 아니우꽈?

오만석 : 이거 큰일 날 사람이구만. 그런 거 아녀.

순덕네 : 척하면 착입주. 아이구 얼굴 붉히는 거 보니 좋아하긴 좋아하는 구나?

오만석 : 그 따위 소리하면 조리사고 나발탱이고 없어.

순덕네 : 아이고, 오라버니도 농담인데 역정은? 해해해 무안하게.

오만석 : 쓸데없는 소리 말고 막걸리나 내와.

순덕네 : 알아수다.

 

순덕네 주방으로 가는데 미역이 든 망사리 들고 어머니 들어온다.

 

순덕네 : 하이고 이 날씨에 물에 들었구나게.

어머니 : 바람이 심상치 않아. 깊은 바다 해초들이 밀려왔어.

오만석 : 봄바람 불어 봤자주. 밤새 몰아치다가도 새벽녘이면 시침 뚝 떼는 게 바다 날씨 아니우꽈?

어머니 : 미역농사 망칠까 걱정이여. 해경이 낼 모렌데...

오만석 : (망사리를 살피다가) 헌디, 그거 무슨 거우꽈? 지금 미역 따옵디가?

어머니 : 그려. 혹시나 했는데 헤엄은 문제없어. 너븐여까지 단숨에 갔주. 미역이 잘 자랐더라. (망사리에서 캐온 미역을 보이며) 이거 봐.

이막순 : (막걸리와 안주를 들고 와 탁자에 놓는다)

오만석 : 아니 벌써 미역을 캐면 어떻게 헙니까?

어머니 : ? 늙은이 미역 맛 좀 보면 안 돼?

오만석 : 벌써 노망햄시냐? 금채 기간에 미역 캐면 벌금 물린다는 거 잊어붑디가?

어머니 : (역정 내며) 노망? 터진 주둥이라고 함부로 주절될 거여? 그려 캤다. 어쩔 거여?

이막순 : (말리려고) 길녀 제사에 쓰려고 내가 좀 부탁해수다.

오만석 : 그러면 모를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주.

어머니 : 하이고 어촌계장도 벼슬이라고 위세 햄구나. 어이고 무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 옛날 버릇 어디가? 에이고 더러워. 학 퉤. (들어간다)

오만석 : 어허 술맛 떨어지게. 넨장.

순덕네 : 잠깐 눈 감고 이십서. 금방 닦으쿠다. (대걸레를 가져다 닦는다)

어머니 : (다시 나와서) 헌데 요즘 왜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갔다야? 어떻게 아직도 우리 갑생이한테 마음 있어?

이막순 : 어머니. 그만 들어 갑서.

오만석 : 거 뭔 말이우꽈?

어머니 : 꽁무니 졸졸 좇아다니던 건 잊어 불언? 갑생이 혼자 된 거 어디서 들은 모양이구나? 꿈 깨.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오만석 : . (헛기침을 하고서)허어, 이거 나 참 모양 빠지게. 거 언제 코 흘리던 적 얘기 햄수과?

이막순 : 그만들 헙서.

어머니 : 수상한 짓허면 다 고자질 할 거니까 조심허여. 동추 어멍 성질 알지? 세상 무서운 줄도 알아야지. 쯪쯪

오만석 : 허어 이거야 원. (술을 들이킨다) 오늘 술은 왜 이리 써?

순덕네 : (등 떠밀어 들어가며) 어서 들어 갑서게.

어머니 : (밀려들어가며) 왜 밀치고 난리여? 이거 놓으라. 내 발로 걸어가켜....

이막순 : 순덕네도 그만 들어 가. 오늘 수고했어.

순덕네 : 아직 시간 안됐는데...? 아이고 이 주책. 호호호. . 알콩달콩 좋은 시간 보냅서 양. 눈치 없는 년 물러갑니다. (나간다)

이막순 : (어이없어서) 무슨 소리야?

오만석 : (술병을 들고) 신경 쓰지 말고 한 잔 받아.

이막순 : (받으며) 나 원 참.

오만석 : . 건배. (술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비운다) . 우리 양심이 못 봤어?

이막순 : 애지중지하는 양심이가 어째서요?

오만석 : 어느 놈이 훔쳐 갔는지 안보여. 거 쇠고기 먹이며 키우는 비싼 건데...

이막순 :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사람보다 낫구만.

오만석 : 헌데, 갑생이 말이야.... 나에 대해 무슨 말 않던가?

이막순 : 마주 앉아볼 시간도 없어수다. 왜요?

오만석 : 아니면 됐어. (술을 마시고) 이막순 여사 정말 내 체면 안 세워 줄 거야? 모르는 처지도 아니고. 혼자 반대한다고 공사 안할 것도 아닌데 말야. 벌써 목표량 오버야. 공사 날짜도 정해 졌구.

이막순 : 당장 빼먹긴 곶감이지만 우린 좀녀우다. 바다를 어찌 버립니까? 난 도장 못 찍습니다.

오만석 : 어허 고집은 넨장. 선착장 생긴다고 해녀들 굶어죽는다는 건 유언비어 날조야. 오히려 잠수함 때문에 일자리 생기구 땅값 오르고 이막순 여사도 크게 성공하면 좋은 거잖아?

이막순 : 지금 날 놀리는 거우꽈? 손님 없어 당장 문 닫게 생겼는데.

오만석 : 어허. 내가 이막순이를 얼마나 생각하는데 헛소리하겠나? 이번에 잠수회 회장에 나서게. 경험도 있고 하니 해녀식당 관리도 잘 할 거야.

이막순 : 잠수회 회장요?

오만석 : . 내가 누군가? 이 오만석이 나서서 안 되는 일 뭐 있어? 내가 만들어 줄 테니 한 번 해봐.

이막순 : 못할 건 없지만 동추 어멍이 가만 안 있을 텐데....

오만석 : 남편이 큰 뜻을 품고 있는데 그 정도는 양보해야지. (술잔을 들고)헌데 지금 바쁜가?

이막순 : 아뇨.

오만석 : 잔이 비었잖아?

이막순 : . (술을 따르며)그만 둡서. 내 처지에 회장이라니 당치도 않수다.

오만석 : 이막순이 처지가 어때서? 걱정 마. 내가 뒤에서 다 봐 줄 테니.

이막순 : 내버려 둡서. 조용히 살쿠다. 허고 앞으론 자가용 안탈 거우다. 동네 소문 난 거 알암수과?

오만석 : 뭔 상관이야? 우리만 떳떳하면 되는 거지.

이막순 : 이러다 나 쫓겨납니다. 버스 타고 다닐 테니 앞으론 기다리지 맙서. 안 그러면 학교 그만 두쿠다.

오만석 : 무슨 소리.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조심할게.(술을 들이킨다)

이막순 : 하실 말씀 끝났으면 그만 일어납서.

오만석 : 술이 남았잖아? 들어봐. 이제 배 팔고 재산 정리해서 관광 사업 할 거야. 내가 가방 끈이 부족해서 그렇지. 학교만 졸업하면 도의원도 못할 거 없지. 이 회장이 밀어주기로 언질도 받았고. 그래서 이력도 닦을 겸 가린돌에다 펜션을 크게 지을 생각인데...

이막순 : 거성이 아니고 동추네가 지어요?

오만석 : (얼버무리듯) 말하자면 복잡해.

이막순 : 그래서요.

오만석 : 땅이 부족하단 말씀이야. 그래서 말인데 담보 잡힌 작지왓 있잖은가? 그걸 도로 팔게.

이막순 : (멍해서 한참 생각하다) 지금 무슨 말씀 하셨수과? 작지왓을 팔라니요? 밀린 이자 때문 이우꽈? 걱정 맙서. 이번 해경만 지나면 원금까지 다 갚을 거니까.

오만석 : 누가 그냥 달랬나? 금지는 잘 계산해 줄게. 그거 길 나면 세금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막순 : 그 밭엔 길순이 부친이 묻혀 있수다.

오만석 : 막순이. 내 다 알아. 그 봉분 허묘잖아? 을봉인 시체도 못 찾았고?

이막순 : 김을봉인 살아 있수다.

오만석 : 아니 뭔 소리여?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이막순 : 분명 나타날 거우다.

오만석 : 이봐 막순이. 배 타고 나갔다가 죽은 거 내가 증인인데 무슨 헛소린가?

이막순 : 행방불명이지 죽은 건 아니잖수가?

오만석 : 그럼 밤에 몰래 헤엄이라도 쳐 갔다는 거여 뭐여?

이막순 : 나타날 테니 두고 보십서.

오만석 : (부드럽게) 그래? 나타나면 그땐 그냥 돌려주지. 각서까지 쓸게 응? 빚 갚고 편하게 살어. 내가 도와줄게.

이막순 : 해경 때 까지만 기다려 줍서.

오만석 : 그럼 그려. 내 생각해서 그 때 까진 눈 감아 주지. 해경 지나면 법대로 할 거야.

이막순 : 알았수다.

오만석 : 막순이. 세상에 믿을 사람 누구 있어? 나만 믿어. 이 오만석이가 누구야? 내가 막순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지? 이 오빠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믿고 맡기라구. ? (옆으로가 손을 잡으며)이 오만석이 그렇게 시시한 사람 아니야. 오빠를 믿어. . 막순이.

 

막순이 손을 뿌리치는데, 동추 모 밖에서 이 광경을 몰래 지켜보다 들어온다.

 

동추모 : 오냐, 연놈들 오늘 딱 걸렸다. 오빠? 뭘 알아서 다 해주는데? 그냥 가만히 자빠져 있으면 벗겨주고 닦아주겠단 말이지?

오만석 : (놀래서) 동추어멍. 오해 말어.

동추모 : 오해? 내가 헛것을 봤단 말이야? 일요일마다 연놈이 놀아난 거 내 다 알아.

이막순 : 그런 거 절대 아니우다.

동추모 : (머리채를 잡으며) 이 갈보년아, 서방 둘 잡아먹더니 이젠 우리 서방까지 잡아먹을 작정이냐?

오만석 : (말리며) 여보.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동추모 : (말리는 오만석 배와 얼굴을 가격하고) 둘이 손잡고 있는 걸 봤는데...?

오만석 : (도망가며) 아이쿠. 그게 아니라니까.

동추모 : 안이고 밖이고 간에 무슨 값을 잘 쳐 줘? 거시기 값이 얼마나 되는데, 그간 밑구멍으로 얼마나 쳐 먹었어?

이막순 : 뭔 말을 그렇게 햄수가?

동추모 : 이년아. 넌 가만있어. 저놈 입에서 실토하게 만들 테니까. 이리 와. 너 오늘 축 사망이여. 이리 안와?

오만석 : (뒷걸음치며) 여보, 길순이 어멍은 아무 잘못 없어.

동추모 : 좋은 말로 할 때 이리와.

오만석 : (부들부들 떨며 다가온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오해야.

동추모 : 바른 대로 못 불어.

어머니 : (나와 보다가) 이거 무슨 짓들이고?

 

심진경과 김갑생도 밖에서 들어오다 목격한다.

동추 모 오만석을 허리걸이로 내팽개치는데 암전.

 

 

6

 

20년 전.

잔잔한 물결 부서지는 가운데 숨비소리(해녀들이 숨을 고르는 소리)들리다가

불턱(몸 녹이는 곳)에 조명 들어온다.

해녀들 서너 명이 불을 쬐며 깔깔대는데, 동추 모 망사리를 들고 들어온다.

 

해녀1 : 아이고 언니는 많이도 캐었네.

동추모 : 아이 춥다. (가운데로 비집고 들어가며) 저리 비키라. 무슨 얘길 그렇게 재미있게 햄서? 나 흉 본 거야?

해녀1 : 언닌 막순이 소문도 못 들었수과?

순덕네 : 아직 한창 때 아니우꽈? 그 나이에 과부 되었으니 오죽 하겠수과?

동추모 : . 마을 남자 다 품고 다닌다는 소문 말이지?

해녀1 : 얼마나 좋아요. 입맛대로 이 고추, 저 고추 맛보고. 매우면 냉수 한 사발 들이키고.

순덕네 : (깔깔댄다)

동추모 : 좋아들 말고 너희들 서방 간수나 잘해.

해녀1 : 헌데, 나 오늘 이상한 걸 봤수다. 글쎄 새벽에 오줌 싸러 가는데, 막순네 집에서 남정네가 나오지 안 헙니까?

동추모 : 그게 누구여?

해녀1 : (말할 듯하다가) 아이고 말 못 허쿠다.

순덕네 : 우리 순댁이 아방은 아니지 예?

해녀1 : 꼴에 너니까 살지. 그럴 위인이나 돼?

동추모 : 가만 동추애비도 새벽에 들어왔는데?

해녀1 : 언니, 심하우다. 아무려면 막순이도 눈이 있는데.

동추모 : 뭐여? 그럼 우리 동추애비가 못 생겼단 말이여?

해녀1 : (해해거리며) 그게 아니고 아무렴 임자 있는 사람 찍겠냐구요?

순덕네 : 아이구 궁금해 죽겠구만. 그럼 도대체 누구여?

해녀1 : 정 알고 싶으면 전복 하나씩 내 놓읍서.

동추모 : 에라 이년아 관둬라.

순덕네 : 아녀요.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망사리에서 전복을 꺼내 주며) 자 됐지요?

해녀1 : (순덕네 귀에다 대고 이야기 한다)

순덕네 : 뭐여요? 광태 오빠?

해녀1 : 하이고 이년 아주 스피커 광고하네.

동추모 : 광태? 그 고주망태 광태?

순덕네 : . 탐 낼만 하지. 돈도 있고 힘도 좋고. 돌아온 총각이고.

동추모 : 힘 좋은 거 어찌 알아? 자 봤어?

순덕네 : 아이고 언니도, 된장인지 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압니까?

동추모 : 술주정이 문제주. 오죽허면 각시가 도망가실 거라?

해녀1 : . 저기 막순이 왐수다.

순덕네 : (혼자소리로) 아이고 한 발 늦었네. 작년엔 우리 마줌꾼 해 줬는디.

동추모 : 그려. 짝짜꿍 한다고 소문났더라.

해녀1 : (웃으며) 들통 다 나네. 아이고 재미있다.

동추모 : 세상에 비밀은 없지. 해경 때 다 밝혀질 걸 뭐. 솔직히 털어놔. 몇 번 주고 부탁했어?

해녀1 : (배꼽 잡으며 웃는다) 하이고 웃겨.

 

이막순이 망사리를 들고 들어온다.

 

이막순 : 아이 추워.

순덕네 : 춥지. 이리 와서 앉읍서.

동추모 : (건너 가려하자) 어허 똥꾼이 어딜? 거긴 상군자리여.

이막순 : 내가 왜 똥꾼이여? 너희들 바깥물질이나 해 봤어?

동추모 : 하이고, 그거야 을봉이 있을 때 얘기지. 을봉이가 인솔자 아니었으면 어떻게 애도 낳고 땅도 샀겠어?

해녀1 : 맞아. 맞아.

순덕네 : 올해도 작지왓엔 수선화가 곱게 피어서라.

동추모 : 수선화가 밥 먹여 줘? 을봉이 죽어버리니까 뭐여? 그 잘난 몸뚱이 하나에 애가 둘인데 어떻게 먹여 살릴 거여? 애초에 돈 많은 홀아비 꿰차는 게 훨씬 났지.

이막순 : 과부라고 염장 지르는 거우꽈?

동추모 :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이놈 저놈 찝쩍거리는 거 성가시지 안 해? 듣자하니 애인도 있다며?

이막순 : (깜짝 놀라며) 어머 무슨 생사람 잡을 소리우꽈?

동추모 : 오늘 새벽에도 그 집에서 남자 본 사람이 있다는디?

이막순 : (당황하며) 혼자 산다고 모략하지 맙서.

해녀1 : 요 며칠 전에 광태하고 단둘이서 술 마셨다며?

이막순 : ? 홀애비와 과부가 술 마시는 게 어때서요?

동추모 : 그려, 안될 거 없주. 같이 살면 되니까.

순덕네 :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 결혼해서 술 못 먹게 꽉 잡읍서.

이막순 : 쉿 어머니...

 

어머니 젖은 몸으로 들어온다. 해녀들 가운데 자리를 비켜준다.

이막순 마른 수건을 가져다준다.

 

어머니 : (숨비소리를 낸다) 아이 숨 차.

이막순 : 어머니 춥지 예? 여기 마른 수건 이수다.

해녀1 : (망사리 살피며)아이고 역시 상군은 다르네. 우리 갑절이여.

어머니 : 미역이 몽실몽실 하늘하늘 춤추는 게 참 보기 좋더라.

동추모 : 금년은 모두 최상품 값을 받을 거우다.

어머니 : 헌디 해경이 코앞인데 우리 집 마줌꾼은 어떻게 할 거라?

동추모 : 무슨 걱정이우꽈. 막순이 애인이 도와 줄 텐데.

해녀1 : (놀라며) 언니?

순덕네 : 아이고 촐삭대긴.

어머니 : 무신거 애인?

동추모 : 아이고 요놈의 입방정. (웃음으로 넘기려 한다) 호호호. 아니우다 삼촌.

어머니 : 아니긴 뭐가 아니여? 거 주정뱅이 그 광태 놈 말이지?

이막순 : 어머니, 을봉 씨 친구잖아요? 그냥 도와주는 거 뿐이우다.

동추모 : 자 그만 쉬고 물에 들게.

이막순 : (같이 나가려 하며). 갑주.

어머니 : 어디 가.

 

이막순과 어머니만 남기고 모두 눈치 보며 사라진다.

 

어머니 : 소문이 쫙 퍼진 걸 너만 모른다 잡아뗄 거여?

이막순 : 어머니 오해 맙서. 마줌꾼 해달라고 부탁한 걸 가지고 괜히들 놀리는 거우다.

어머니 : 몸을 줘야 마줌꾼 해 준다더냐?

이막순 : (울먹이며) 어머니...아니우다.

어머니 : 내 눈으로 보았는데 시침뗄 거야?

이막순 : 어머니...

이막순 : 소문이 기가 막히기에 어제는 불 끄고 지켜 봤다. 그래 나도 그 나이에 홀어멍 되었으니 그 심정 잘 안다.

이막순 : 어머니, 애들 먹여 살리려 그랬수다.

어머니 : 과부 되니까 이놈 저놈 잘도 꼬이더라. 눈 딱 감고 시집가고 싶은 마음 꿀떡 같았지만 자식들이 눈에 밟혀 그리 못했다. 허나 이젠 세상도 바뀌었으니 그럴 필요 있겠냐? (사이) 가라.

이막순 : 어머니, 무슨 말씀 이우꽈? 어디로 가란 말 이우꽈?

어머니 : 재산은 한 푼도 못주니 애들 두고 나가.

이막순 : 어머니, 잘못 했수다. 다시는 그 사람 안 만나쿠다. 재산 필요 없으니 나가라곤 맙서. 예 어머니.

어머니 :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가서 그놈하고 붙어먹어 이년아.

이막순 : (울부짖는다) 어머니, 안 됩니다. 절대 애들만은 안 됩니다. 어머니.

 

어머니 뒤도 안돌아보고 나간다.

파도가 크게 부서지는데 암전.

 

 

7

 

5 장과 같은 날 밤. 식당.

이막순이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다. 얼굴에는 반창고가 붙었다.

어머니 들어오고 잠시 뒤에 갑생이 들어온다.

 

어머니 : 어이구 꼴좋다. 훈장 붙였구나? 마줌꾼이 그렇게 없어 동추 아방이가?

이막순 : ...

순덕네 : 하이고 삼촌도 조용 헙서게.

어머니 : 눌 자리 보고 발을 뻗으랬다고. 자기 집 놔두고 우릴 도와주켄 해냐?

이막순 : 그런 거 아니우다.

어머니 : (빈정대듯) 아니면 씨앗 싸움이구나?

이막순 : (어머니를 노려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 참는다)

순덕네 : (말리며) 아이고 삼촌도. 내가 압니다. 절대 그런 사이 아니우다.

어머니 : 아니긴.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남자 그리워 꼬리 친 거주.

이막순 : ...

어머니 : 둘이서 바람 나난 동추 어멍 그 난리 친 거 아니라? (갑생이를 보고 힘을 얻은 듯) 둘씩 차고 살았으면 됐주. 그렇게 남자가 그리워 또 서방질이라?

이막순 : (폭발한다) 내가 화냥질이라도 했단 말이우꽈?

어머니 : ? 내가 못 할 말했냐? 그 잘난 작지왓 때문에 을봉이 죽여먹고, 서방 둘한 건 사실 아니라?

깁갑생 : (말리며) 어머니 왜 이러세요.

이막순 : 누가 그렇게 만들어수가? 나 혼자 호사하려 그리 해수가? 애들 먹여 살리려고 매도 맞고 별 수모 다 참으며 살았는데...

순덕네 : (어머니를 막아서며) 옛날 얘기 가지고 왜 이 난리우꽈? 삼촌 어서 들어갑서게.

어머니 : (뿌리쳐 나오며) 하이고 젊은 나이 아까완 길 치워 주니 이젠 별소리 다 듣겠네. 돈에 환장해서 딸까지 잡아먹은 년이. 갑생아 이년이 지 딸 잡아먹었다. 독한 년. 진 다 빠져 누워 있는 길녀를 바다에 내 몬 게 이년이여.

김갑생 : 어머니. 자식 죽이고 싶은 사람 어디 있겠어요?

어머니 : 여기 있다. 빚 갚아야 한다고. 삼계탕 한 그릇 먹이고 태왁 안겨 등 떠민 게 이 년이란 말여. 아이고 나쁜 년. 아이고 더러워. . (가래침을 뱉고 들어간다)

순덕네 : 하이고 어떻게 갈수록 이쁜 짓만 햄시니? (대걸레를 가져다 닦는다)

이막순 : (넋두리하듯) 그게 좀녀 팔자인 걸 어떡합니까? 걸음마보다 갱이통(얕은 물가)에서 헤엄치는 걸 먼저 배운 길녀우다. 바다에서 놀며 자란 천상 좀녀마씸. 남들은 살림 밑천 장만하는데, 마음 아프다고 누워만 있을 아이우꽈? 어머니도 할 수 있다고 부추겼잖수가? 지 명줄이 그것밖에 안 된 걸 누구 탓 한단 말이우꽈? 좀녀 팔자가 다 그런데...

김갑생 : 자식 죽으면 품에 묻는다고...

이막순 : 아이고 분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좋던 재산 사기당해 다 말아먹고 오갈 데 없는 사람 살려 놓으난... 아이고 억울해.

김갑생 : 다 내 탓이야. 내가 자주 왕래 했으면 일이 그렇게까지 되도록 놔두지 않았을 텐데....

이막순 : (한숨을 길게 내쉬며) 에고 내 팔자야. 서방 복 없는 년이 무슨 복은 있겠어? (술을 따라 마신다)

김갑생 : (술잔을 들고 와서) 오래 못 사실 거 같아. 맥도 많이 약하시고.... 오랜만에 한잔 하자. 순덕네 안주 좀 만들어 줘.

순덕네 : 술값은 스님 언니가 낼 거지 예?

김갑생 : 나 돈 많아. 비싼 안주로 부탁해요.

순덕네 : (들어가며) 장사도 안 되는데 매상 올리게 생겼네.

김갑생 : (술을 털어 넣고서) 술맛이 달콤한 게 오늘 뭔 일 나겠네?

이막순 : (술을 따르며) 스님이 술 마셔도 되는 거야?

김갑생 : 곡찬데 어때? 오늘은 계급장 떼고 (저고릴 벗으며) 인간 이막순 대 김갑생으로 마시는 거야. 마셔. 오늘 취하도록 마셔보자고. 원샷. (술을 단숨에 들이킨다)

이막순 : (술을 마시고 나서) 미련한 놈이 세상 탓 한다지만. 그놈의 43사건만 아니었어도. 탄탄대로 같던 인생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그 탓에 너희 집 신세만 졌지만...

김갑생 : 그때 너도 학교 다녔어야 했는데...

이막순 : 돈 벌어야 했는데 호사스럽게 무슨 공부야. 식모 노릇했잖아.

김갑생 : 우리 을봉이와 결혼했다는 건 한참 뒤에 들었다. 연락 못할 사연 있었어. 헌데 왜 하필 을봉이었지?

이막순 : 빈정대는 거야? 나 같은 년이 올케 됐다고?

김갑생 : 하긴 을봉이가 널 무척 따랐지.

이막순 : 그래. 잘 사는 게 통쾌한 복수라 생각했어. 바깥 물질도 같이 나가고 참 좋았지. 헌데 새끼 둘 놓아두고 저 혼자 가버리더라. 애들 살리려고 돈 많은 홀애비하고 살았지. 헌데 술만 먹으면 때리고 부수는 거야. 애들이 무서워 가출까지 했었는데 천벌을 받았는지 술로 일찍 가더라구. 복도 더럽게 없는 년. (술 한 잔 마시고) 길순인 애비만 한 남자에 미쳐 바달 떠나고. 나쁜 년 망하려면 혼자 망하지 피라미든가 뭔가 하는 걸로 길녀까지 꼬드겨 죽여 먹더라구. 길녀 죽으니 정신이 퍼뜩 드는 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더군. 이게 다 무식한 탓이다 싶고. 그래서 나 학교 다녀.

김갑생 : 학교?

이막순 : 방송통신학교라고 동추아버지랑 같이. 늦게 학교 다니는 게 부끄러워서 도둑질하듯 숨어 다니다 보니...

김갑생 : 참 용기가 대단하다. 그 나이에.

이막순 : 컴퓨터도 배우고, 친구도 사귀고, 좋은 선생님들 만나고 전혀 다른 세상이야. 난 바다 속만 아는 청맹과니였어. (갑자기 어조를 바꿔) 너무 억울해. 할 말 못하고 참으며 산 세상이 너무 억울해. (갑자기 울컥해지며 울음을 참는다)

깁갑생 : 왜 그래?

이막순 : (눈물을 닦으며) 취했나봐. 자꾸 옛날 생각이 나네.

김갑생 : 아직도 날 원망하니?

이막순 : 미친 년. 서울 갔으면 잘 살아야지. 이 꼴이 뭐꼬?

김갑생 : 평생에 지은 죄 많아서 그래. 너한테도 면목 없다. 미안해. 그 사람 사랑했었지?

이막순 : 지금 날 놀리는 거지? 가정부 주제에 무슨 사랑이냐구? 그래 서울 데려 간다는 말을 사랑이라 생각했어. 떠나기 전만 해도 그를 철석같이 믿었지. 난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결혼해서 이 지긋지긋한 섬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헌데 친구 년이 가로 챌 줄이야.

김갑생 : 그의 손가락 하나에 사람들 목숨이 왔다갔다 했잖아?

이막순 : 거짓말. 언제나 라이벌로 생각했으면서? 아직도 열등의식 느끼니? 왜 솔직하지 못해?

김갑생 : 그래 맞아. 질투했어. 미워서 네가 가진 걸 모두 빼앗고 싶었어. 헌데 덥석 잡은 것이 독사의 꼬리였어. 지금 내 꼴을 봐. 여북하면 이 꼴이겠냐구?

이막순 : 이년아 그러면 숨어 살지. 왜 나타나 마음 긁어?

김갑생 : 오라고 한 게 누군데? 평생 의절할 듯 전화도 안 받다가...

이막순 : 그래. 이젠 지겨워. 나도 편하게 살고 싶어. 제발 모셔 가. 가서 일 년만 모셔보라고. 중생 구제보다 어머니 구제나 먼저 하셔.

김갑생 : (손을 잡으며) 막순아, 난 알아. 어머니 약 타러 병원 갔다 얘기 들었어.

이막순 : .....

김갑생 : 일 년밖에 못 산다는 거... 막순아. 어머니랑 같이 가자. 우리 절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이 있거든? 식이요법으로 나은 사람도 있어.

이막순 :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요양원엘 가? 난 안 죽어. 난 건강해. 네가 뭔데 남 뒷조사하고 난리야? 네가 뭔데?

 

철종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폭행을 당한 듯 온몸이 피투성이에 엉망이다.

 

김철종 : ....(쓰러진다)

이막순 : (놀라며) 아니 철종아? 철종아?

 

이막순 달려가는데 암전.

 

 

8

 

며칠 뒤. 식당.

막순이 한지에 쌀을 싸서 몸지를 만들고 있다.

진경 들어온다.

 

심진경 : 다녀왔습니다.

이막순 : 고생했다. 거기 앉아라. (큰소리로) 진경이 왔어.

순덕네 : (안에서) . 금방 차려 갑니다.

심진경 : (앉으며) 외숙모 그게 뭐에요?

이막순 : 몸지를 만들고 있지.

심진경 : 몸지? 뭐에 쓰는 건데요?

이막순 : 미역 잘 길러주어 고맙습니다고 해경 날 고사 지내거든. 요건 용왕 할으바님 꺼, 요건 용왕 할마님께 드릴 선물이지. (한 쪽에 잘 정리해 놓는다)

순덕네 : (식사를 탁자 위에 놓는다) 병간호 힘들지?

심진경 : 아뇨.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 하는 일 없어요.(수저를 들며) 잘 먹겠습니다.

순덕네 : 그래. 많이 먹어라.

이막순 : 정개호미는 어디 둬서?

순덕네 : 자루가 떨어져서 뒷마당에 내 놓았수다.

이막순 : 에고 박복한 년이 무슨 팔자에 아들 건사를 바래.(나가는데)

순덕네 : 놔 둡서. 자루 남은 게 있는데 내일 가져 오쿠다.

심진경 : 외숙모. 동추네 땅 다 넘어갔다는데 작지왓도 팔았나요?

이막순 : 그걸 왜 팔아? 어림없지. 헌데 펜션 하겠다던 양반이 왜 넘겼을까?

심진경 : 외숙모도. 그 말을 믿었어요? 동추 부친, 이 회장 말이라면 꼼짝 못한다면서요?

이막순 : 그럼 우리 땅도 넘겨서 구전 먹으려했단 말이야?

순덕네 : 능히 어린애 엉덩이에 붙은 밥풀도 떼어 먹을 양반입주.

이막순 : 사기꾼 같으니라고.

 

갑생이가 어머니를 들쳐 업고 들어온다.

어머니는 왼팔을 다치고 기력이 약해진 듯 가끔 헛소릴 한다.

진경이 숟갈을 놓고 마중한다.

 

어머니 : (엄살하듯) 아이고 아파. 아이고 팔이야.

순덕네 : 아이구 이거 무슨 일이우꽈?

김갑생 : (이막순에게) 큰 일 날 뻔 했어.

심진경 : (거들어 어머니를 내려놓으며) 많이 다쳤어요?

김갑생 : 미끄러져 저만치 쓸려 나갔어. 곁에 있었기 망정이지...

이막순 : (팔을 잡아당겨 상태를 보며 순덕네에게) 주방 선반에 약통 가져와.

순덕네 : . (들어가서 들고 나온다)

어머니 : 아파 내 팔. 살살해 이년아.

심진경 : 병원 안가도 될까요?

이막순 : 살짝 벗겨진 건데..... 약 바르고 며칠 지내면 나을 거야.

어머니 : (약을 바르는데 엄살을 부리며) 아가가, 이년아 네가 의사여?

순덕네 : 아이고 엄살은. 이걸로 되쿠가? 병원 가서 대주사로 한 방 맞아야주.

어머니 : 이년들이? 병원 안가. 나 병원 안 간다구.

이막순 : 알았어요. 그럼 가만 계세요.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준다)

김갑생 : 어머니. 올케는 평생 친구잖아요. 친구를 믿어야죠?

어머니 : 친구? 니가 내 친구여? (멀뚱이 쳐다본다) 히히히.

이막순 : (애처롭게 바라본다)

김갑생 : (등을 도닥이며) 나이 들면 다 그래.

심진경 : 할머니 들어가 좀 쉬세요.

어머니 : (엉뚱하게) 자리 떼 떴져. 어서 배 띄우랜 허라.

순덕네 : 지금 어느 철인데 자리가 뜹니까?

어머니 : 내 눈으로 봤어. 진경아 너도 봤지?

심진경 : (안타까워서) 할머니...

어머니 : 그래 길녀였어. 물속에서 길녀를 봤다. 바위틈에 팔이 끼어 허우적대며 할망을 부르는데... 힘이 부쳐 빼낼 수 있어야지... 어서 가서 길녀를 구해. 어서.

순덕네 : 삼촌, 걱정 맙서. 벌써 데려와서 편안히 잠수다.

어머니 : 그랬어? 그려 잘했어. 그래야 동추한테 시집도 보내지. 헌데 왜 가만히들 섰는 거야? 멸치 떼가 떴는디 구경만 할 참이여?

순덕네 : 자리 떼가 아니고 마씀?

어머니 : 젊은 년이 귀 먹었나? 이년아 지금이 어느 철인데 자리가 떠?

순덕네 : 아이고 아깐...?

어머니 : 이년도 노망하나?

순덕네 : (포기하며) . 내가 왔다갔다 햄수다.

어머니 : 왜 가만히들 서 있어? 멜 거리러 안갈 거여? 어서 뜰채 들고 나서.

김갑생 : 어머니 배 들어오려면 멀었어요. 좀 들어 가 쉬세요.

어머니 : 나만 떼어놓고 가는 거 아니지? 어서 돈 벌어 작지왓 찾아야지.

순덕네 : 아이고 돈이 뭔지? 걱정 맙서. 내가 알려 드립주.

김갑생 : (어머니를 부축하며) 어서 들어가요.

어머니 : (다친 팔을 건든 듯) 아가가. 내 팔.

김갑생 : (들어가며) 미안해요. 아이구 엄살은..

심진경 : (식탁으로 돌아가며) 할머니 꼭 어린애 같애. 호호호.

 

김갑생과 어머니 들어간다.

 

 

9

 

며칠 후. 병원 뒤뜰.

진경이가 철종의 휠체어를 끌고 나온다. 오동추가 뒤따라 나온다.

 

김철종 : 그래서 기어코 공사를 한단 말이야?

오동추 : 그래. 내일부터 강행할 모양이야.

심진경 : 굴삭기랑 중장비들 벌써 쫙 깔렸어요.

김철종 : 개자식들. 해경이 코앞인데 바다 가는 길 막아버리면 어디로 다니라고?

오동추 : 미친개들 눈에 보이는 게 있겠어? 스케줄대로 밀어붙이는 거겠지.

김철종 : . 어떻게든 막아야할 것 아냐?

오동추 : 막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돌아섰어. 주변 땅도 전부 매입했나봐. 회유하고 협박하고 우리만 포위된 상태야.

김철종 : 이러면 안 되는데.... 형네 땅은?

오동추 : 땅 임자가 팔겠다는데 도리 있냐? 작지왓이나 잘 지켜. 선착장 생기면 바로 공사 들어갈테데.

김철종 : 작지왓은 어림 없어. 우리 어머니 목숨줄인데.

오동추 : 우리 꿈 다 깨졌다. 양어장 터는 주차장이 되고 마을은 이제 거성의 놀이터가 되겠지.

김철종 : 그래서 보고만 있을 거야? 그냥 이대로 당할 거냐구?

오동추 : 손발 놓을 수는 없지. 낼 마을 회관 앞에서 모이기로 했어. 할 때까지 해 봐야지.

심진경 : 서울방송국에서도 오기로 했으니 사람들 모아 봐요. 전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 먼저 가요. (나간다)

오동추 : 상황을 반전 시켜야 하는데...

김철종 : 그런데...?

오동추 : 여론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묘수가 없어.

김철종 : 우릴 촌놈 취급하는 놈들에겐 촌놈의 무지막지한 맛을 보여줘야지. 나도 참가할거야.

오동추 : 그 몸으로?

김철종 : 가만 앉아 당하라고? 나 걸을 수 있어.(목발을 짚고 일어서 걷는다) . 비록 발이 넷이지만.

오동추 : 미안하다. 나대신 네가 당해서...

김철종 : 대신이라니 무슨 말이야? 우리 작지왓의 운명이 달린 문젠데. (앉으며) 날 이 지경 만든 놈들 가만 안둘 거야.

오동추 : 헌데 마을 회관 말이야.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서청 출신이 기부한 거래?

김철종 : 그럼 서청 출신과 이 회장 합작품이야? 짱짱한 우리 미래까지 막아놓은 게...?

오동추 : 아주 이상한 예감이 들어. 진경 씨 소설 내용도 그렇고.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김철종 : . 사람들은 우리가 바다 지키려 했다는 거 기억해 줄까?

오동추 : 기억? 우린 피가 뜨겁기 때문에 싸우는 거야. 불의에 맞설 수 있는 건 젊음의 특권이지. 어른들도 젊었을 땐 불같았을 텐데, 나이가 들면 피도 식나 봐. 43을 봐. 그때 맞서 싸운 젊은이들이 어른 되니까 우릴 나무라잖아?

김철종 : 헌데, 형 아직도 길녀 누나 생각해?

오동추 : 그럼 어찌 잊어? 아직도 말갛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한 걸.

김철종 : (목걸이를 벗으며) 이거 본 적 없지? 누나가 동추 형 꿈꾸고 캔 거래. 아마 형 주려고 목걸이 만들었을 거야. (주며) . 받어.

오동추 : (받고 입 맞추며) ......흑진주. 참 예쁘다.

김철종 : 앞으로도 우리 집 자주 드나들 거지?

오동추 : 마줌꾼 때문 그러니? 걱정 마 형이 도와줄게. 근데 이번 일 끝나면 나 고향 뜰 거야. 원양회사에 대학선배가 있는데 당장 오래. 더 큰 바다를 누빌 거야.

김철종 : 형은 좋겠다.

오동추 : 나 갈게.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 몸조리 잘해.

김철종 : 그래 형 고마워. 내일 봐.

 

암전.

 

 

10

 

다음 날. 식당.

이막순 물질을 하고 들어온다. 어머니가 왼팔을 목에 걸고 나오다 가래침을 내뱉고서,

이막순이 쳐다보자 미안한 듯 발로 비빈다.

 

어머니 : 나 배고파, 밥 줘.

이막순 : 걸레 가져다 닦읍서.

어머니 : 배고프다 했잖아?

이막순 : 닦기 전엔 국물도 없수다.

어머니 : 나 아프다고 무시하는 거야?

이막순 : 죽을 병 아니우다. 오른 팔도 전염 됐수가? (대걸레를 가져다주며) 닦읍서.

어머니 : 이년이 늙은일 괄시하네? 이년아 넌 안 늙을 거 같애?

이막순 : 이년 저년 하지 맙서. 내가 종년이우까? 요즘 세상에 며느리한테 욕하는 시에미가 어디 있수가?

어머니 : (버럭) ! 나 안 죽었어.

이막순 : 그렇게 총기가 팔팔하면 밥도 손수 해 드십서. 다른 어른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어머니 : 이년 이거 쥐약 먹었나?

이막순 : (단호하게) 안 닦을 거면 들어 갑서.

어머니 : (큰소리로) 나 배고프다고?

이막순 : (지지 않고 맞서며) 귀 안막아수다. 밥 차려 올 테니, 어서 닦읍서.

어머니 : (마지못해 걸레를 받으며 눈치를 보다 엄살을 부리며 닦는다) 팔이 아픈데...

이막순 : (들어가며) 이왕 하는 거 성의 있게. 주변도 깨끗하게 닦읍서.

어머니 : (혼자 중얼거린다) 저년이 미쳤나? 갑자기 왜 이래? 시어멍 일을 다 시키고. 어디 두고 보자. 이 팔만 나으면 머리채를 확 잡아챌 테다.

이막순 : (찬을 들고 나와 밥상을 차린다) 다 닦았으면 주방에 갖다놓고 손 씻고 옵서.

어머니 : (주방으로 들어가며) 아픈 시어멍 시켜 먹는 거 경 재미이시냐?

이막순 : 그러니까 가래침 뱉지 맙서. 자기 더러운 거 남은 보기 좋겠수과?

어머니 : (물만 묻히고 나와 치마에 손을 닦는다)

이막순 : 거 치마에다.... 거기 수건 있수게. 여자는 늙어도 깨끗하게 차려 다녀야 합니다.

어머니 : 이 나이에 어디 가서 하르방 만날 거라?

이막순 : 누가 압니까? 외로운 영감님이 친구 하잘지. 여기 앉읍서.

어머니 : (앉으며) 근데 웬 잔소리가 이리 많아?

이막순 : 자기 하고픈 대로 세상 살아지는 거 아니우다. 속으로 삭이며 살아얍주. 어서 드십서.

어머니 : 더러워서. 나 원. (자리에 앉으며 다시 가래침을 내뱉으려는데)

이막순 : ?

어머니 : (입안에 담고) 나오는 걸 어떻게 해?

이막순 : (밥사발을 들고) 그냥 삼킵서. 뱉으면 밥 없수다.

어머니 : (마지못해 꿀꺽 삼킨다)

이막순 : 잘 했수다. (도로 밥을 놓으며) 앞으론 그렇게 헙서.

어머니 : (억울한 듯) 에그 더러워. 이년 때문 더러운 걸 먹었어.

이막순 : 다시 한 번 말해 봅서.

어머니 : 이년 학교 다닌다더니 날 가르치려 드네?

이막순 : 또 이년?

어머니 : 그럼 뭐라 불러?

이막순 : 그냥 에미야, 길순이 어멍아.

어머니 : 길순 어멍? 길순이 어멍? (웃으며) 너가 길순 어멍이가?

이막순 : . 내 이름은 이막순이고 길순이 에미우다.

어머니 : 막순아. 근데 왜 날 괴롭혀? 밥 주기가 그렇게 아까우냐?

이막순 : 나쁜 버릇은 고쳐얍주. 집에서야 참아주지만 남들 싫어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키기 싫으면 휴지 가지고 다닙서.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난 마씀. 국 떠올게 천천히 드십서 양? (들어간다)

어머니 : (숟갈을 들며) 참 별 일이여. 큰 소리를 다치고? (밥을 먹는다)

 

이막순 국을 가지고 와 어머니 앞에 놓는다.

잠시 후 심진경과 김갑생 나온다.

 

심진경 : (나오며) 외숙모 마을 회관 앞에서 시위하고 있는데 안 가실 거에요?

이막순 : 그래. 가 봐야지.

어머니 : 나도 갈래.

김갑생 : 어머닌 저랑 가요. 이젠 제가 모실 게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 마련해 두었으니까 함께 가요.

어머니 : 해경은 어떻게 하고?

김갑생 : 어머니, 어머닌 여기 있으면 짐만 돼요.

어머니 : 난 안가.

이막순 : 못된 며느리 구박 안 받으컬랑 갑서. 앞으론 바빠서 예전처럼 모시지 못합니다. 갑서. 딸이 더 의무로웁니다. 딸 호강도 받아 봅서.

김갑생 : 그래요 어머니. 저한테도 기회 주세요. 어머니 모시지 못해 얼마나 가슴 아팠다구요.

심진경 : 할머니, 우리랑 가요.

어머니 : 안 가. (갑자기 사정하며) 막순아, 내가 잘못했다. 나 보내지 마.

이막순 : 어머니, 가야 합니다. 남들과 어울릴 때랑 꼭 깨끗하게 하고 마씸.

어머니 : 난 가기 싫어,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누구랑 정 붙여? 바다 떠나선 못살아.

김갑생 : 어머니, 올케도 좀 편히 살아야잖아요? 그간 어머니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했어요.

 

동추 모가 앞장서고 오만석이 따라 들어온다. 순덕네도 장바구니 들고 들어온다.

 

동추모 : , 마침 다 있구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시다. 누가 꼬신 거여? 우리 동추 마줌꾼 하자고 누가 꼬셨난 말이여?

이막순 : 꼬시다니? 툭하면 와서 시비니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요?

동추모 : 철종이가 다쳤으니깨 우리 동추 꼬신 거 아녀? 길녀 어멍 아니면 어떤 여우 년이 꼬신 거여?

심진경 : 왜 절 보세요? 제가요? 허 참. 착각 마세요. 저 애인 있어요.

이막순 : 마줌꾼은 벌써 구해 놨는데 왜 이 난리요?

동추모 : 누구? 춘보? 하이고 세상 어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춘보는 취직돼서 우미도로 떠났어. 이 미련한 아줌마야.

이막순 : 동추아버지. 이럴 수 있수가? 해경에 우린 어쩌라고? 많이 벌어 빚 갚아야 하는데, 왜 빼돌려요? 그렇다고 작지왓 넘길 것 같수가? 천만에 어림도 없어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오만석 : . 난 관계없는 일이여. (말을 돌리려고 심진경에게) 헌데, 동네 돌아다니며 뭘 조사하는 거여?

심진경 : 43 피해 사례조사 말씀이세요?

오만석 : 그걸 조사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구?

심진경 : 소설 쓰려고 자료 조사하는 건데 왜 그러세요?

오만석 : 소설? 이건 소설이 아니구 네 애비가 저지른 실제 사건이란 말이다.

심진경 : 우리 아버지가 뭘 어쨌는데요?

오만석 : 심종길이 뭘 했는지 모른다구?

심진경 : 전 경찰출신인 게 자랑스러운 걸요.

오만석 : 허어 이거. 철이 없는 건지. 알고도 시침 떼는 건지. 임마 느그 아버지가 서청이었단 말이어. 서북청년단. 서청이 다 나쁜 사람 아니었지만 심종길은 정말 나쁜 짓 많이 했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잡아가 죽인 살인마라구.

심진경 : (멍해지며) 아버지가...?

김갑생 : 애한테 이거 무슨 행패요? 우리 애가 무슨 죄 있다고 이래요?

오만석 : 지 애비 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 애비가 어떤 사람이란 건 알아야지. 그런데 무슨 낯짝 들고 나타났어? 동네 사람들 죽여서 잘 살았다고 위세 떨러 온 거여?

김갑생 : ... 할 말 없습니다.

동추모 : 내 부모 살려놔. 우리가 빨갱이여? 죄 없는 사람 왜 잡아다 죽여?

심진경 : (충격에 혼자소리처럼) 아버지가 빨갱이 소탕하는...? 그럼 아버지가 외할아버지 죽인 장본인이야?

김갑생 : 그만 하자.

심진경 : 그러고서 엄마랑 결혼한 거냐구?

김갑생 : (고개를 흔들며 돌아선다) 아무도 이해 못할 일이지... 아무도

심진경 : 우리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어? 엄마 아빠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냐구?

김갑생 : ..... 넌 아무 잘못 없다.

심진경 : 아니지? 아냐. 아빤 절대 그런 분이 아냐. (밖으로 뛰쳐나간다)

김갑생 : 진경아.

오만석 : 갑생이. 혹시 마을에 희사한 게 심종길이 맞소?

어머니 : 저거 보라 수작 거는 거.

김갑생 : 전 모르는 일입니다.

동추모 : 하이고 동추 말로는 소설에도 나오는 대목이라며?

어머니 : 소설은 소설일 뿐입니다.

오만석 : 그럼 당신이 보냈소?

김갑생 : ....

오만석 : 왜 대답을 못해?

동추모 : 맞구만. 하이고 돈으로 사람 죽인 죄를 면하겠다는 거여 뭐여?

김갑생 : 가슴에 찍힌 화인이 가린다고 없어지겠습니까?

어머니 : 사람 죽인 죄라니? 지금 그때 사건 얘기 하는 거지?

오만석 : 삼촌은 가만 이십서.

어머니 : 왜 가만있어. 그 사건 나보다 잘 아는 사람 누구여? 그려, 이 중에 피해 안 본 사람 누구라? 부모, 형제, 친척 중에 안 죽은 사람 누가 있냐구?

순덕네 : (촐삭거려 나서며) 나 마씸. 우린 아무도 안 죽어수다. 삼촌이 군인이난 마씀. (사람들 눈길이 미안한 듯)해해해.

어머니 : 남정네들은 다 산에 올라가 버리고... 남자들 없으면 그 많은 미역 캐놓고도 파도에 다 쓸릴 판이었으니... 해경 철 되자 몰래들 내려왔지. 헌데 어찌 알았는지 다 잡혀갔다. 본인만 아니고 부모 형제 온 가족이 빨갱이로 몰려 다 죽었다. ! ! !

오만석 : 잡아다 총살시킨 놈이 바로 심종길 아니우꽈? 딸 주고 삼촌네는 살아나왔고 마씸.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수과?

동추모 : 하이고 남편 죽인 놈을 사위 삼다니, 제 정신들이라?

이막순 : (의자에 주저앉으며) 아버지...

김갑생 : 어머니 말씀하세요. 다 보셨잖아요? 심종길 만나 밀고하는 거 다 보셨잖아요?

어머니 : 난 몰라. 난 아무것도 몰라. 에잇 더러워. 세상이 더러워. (가래침을 뱉고선 밖으로 나간다) 더러운 놈들.

동추모 : 더럽긴? 자기만 살아보려고 서청놈 밑구멍 핥은 건 안 더럽고?

김갑생 : 제가 선택했어요. 그래요, 남아 있는 가족들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사태가 진정되고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알았어요. 남편도 무척 괴로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아비 대신 자식들이 벌 받아 둘씩이나 비명에 가버립디다. 결국 직장도 그만두고.... 지금은 산속 절을 떠돌고 있습니다.

순덕네 : 저런.

동추모 : 마을 회관 당장 때려 부셔 버려. 이건 조상님들 모독하는 거야.

오만석 : 몰매 맞아 죽기 싫으면 당장 여길 떠나요.

김갑생 : 죽을 죄 졌다면 마땅히 벌 받아야지요. 하지만... (하다가) 그래요 남편 잘못 둔 죄 속죄하고 있습니다.

오만석 : 다 잊혀진 일인데 왜 돌아와서 이 난리 만들어? 어서 가. 당장 여길 떠나요.

김갑생 : 가지요. 헌데, 내가 떠나면 당신 죄도 없어집니까?

오만석 : 무슨 소리야?

김갑생 :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세요. 그때 밀고한 게 누굽니까? 산에서 사람들 내려왔다고 심종길한테 일러바친 게 누구냐고요?

동추모 : (동추 모 충격 받고) 다 당신이...?

오만석 : (당황하며) ... 아니야. . 밀고자를 내가 어찌 알아?

김갑생 : 우리 어머니도 알고 심종길이도 다 얘기했어요.

오만석 : ... 난 그런 적 없어. 증거 있어?

김갑생 : 당신네 식구들은 온전했잖아요? 무고한 사람들 빨갱이로 몰아 죽여 재산 차지하고, 임자 없는 땅 등기해 배불렸잖습니까?

오만석 : 죄 없는 사람 명예훼손 말고 증거를 대라구. 증거를.

김갑생 : 작지왓이 증거지요. 그 밭은 원래 이태산 씨 소유였는데 그가 죽자 가로챘잖습니까?

이막순 : 오 맙소사. 어찌 이럴 수가....

오만석 : (목소리 높이며) 모함하지 마. 난 합법적으로 불하 받은 거야.

김갑생 : 심종길 씬 아직 안 죽었습니다. 녹음된 증언도 있어요.

오만석 :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날 끌어들여? 난 아무 잘못 없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게 누군데?

이막순 : (허탈하게) 그게 아버지 땅이었어? 작지왓 때문 남편이 죽고, 내 인생 이 꼴이 되었는데...

동추모 : 하이고 이거 무슨 황당 사건이야? 그럼 당신이 내 아버질 죽인 거야? 이 뻔뻔한 백정놈아. 그러고도 니가 인간이냐? (오만석을 때리며) 어찌 아버지를 죽여... 그래놓고 장갈 들어? 이 망할 놈아. 이 화상아 난 못살아. 어찌 살 것이여? 난 못살아. 죽어 이놈아. 죽어. 아이고 못살아. (나간다)

오만석 : 난 아니라니까,

이막순 : 아니면? 귀신이 와서 잡아갔단 말씀이세요? 이념이고 사상이라는 게 사람들 죽이고 그럴 가치라도 있는 겁니까? 인간에게 그럴 권리라도 있어요? 집나간 강아지도 아까워하면서 그 소중한 목숨들을... 제 배때기 채울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흘리고.... 운명이 바뀌었는데... ? 그 엄청난 일 저질러 놓고 어찌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십니까? 그래놓고도 거성의 앞잡이 노릇하세요? 개만도 못한 불쌍한 인간이라니. 쯧쯧.

오만석 : (무너지며 허탈하게)그래. 내가 죽일 놈이요. 개만도 못한 놈이요. 내가 어리석었소. 재물에 눈이 멀어.....

이막순 : 작지왓이 사람 목숨보다 더 탐 납디까? 그놈의 돌무더기 땅이 무언데?

오만석 : 미안하오. 그땐 잘난 척하는 이태산이가 너무 미웠어. 이태산일 밀고했을 뿐인데 줄줄이 잡혀갈 줄이야.... 권력에 빌붙으면 영원히 숨겨 질줄 알았지... 시간은 흐르고 잊혀질 때도 되었는데 자식 크면서 양심이라는 놈이 함께 자랍디다. 그래 오죽하면 장인 기일이 다가오면 술로 지냈겠소. 그래 내가 죽일 놈이요. 죽일 놈... 용서받지 못할 놈이요. (힘없이 나간다)

이막순 : 어이구, 기르던 개 잡아먹으며 백구야, 백구야 운다더니. 어리석기가...쯧쯧. 죄없이 죽은 사람들 원통해서 어떻게 할 거여....?

동추모 : (들어오며) 부 불이야. 저 저기 연기 좀 봐. 마을회관에 불났어. 누군지 속 시원하게 잘했다. (오만석을 보더니) 이 웬수야, 나가 죽어. (갑생에게) 이년아 너도 죽어.(다시 뛰어나간다)

이막순 : 어떤 놈이 저런 짓을...

김갑생 : (불길 솟는 것을 보다 쓰러진다) ....

순덕네 : (쓰러지는 갑생을 부축하며) 아이고 스님 언니.

 

심진경 황급히 들어온다.

 

심진경 : 큰 일 났어요. 철종이가... 철종이가...

이막순 : 우리 철종이가 왜?

심진경 : 몸에 불붙인 채 굴삭기 위에....

이막순 : (털석 주저앉으며) 아이고 무슨 소리여? 이게 무슨 날벼락이고? 철종아 네가 왜. 철종이가 왜? 철종아... (일어나서 달려간다)

 

불자동차 소리 들리는 가운데 파도소리 힘차게 몰아치며 암전.

 

 

11

 

다음날. 가린돌 위.

파도가 밀려왔다가 사라지면서 간간히 위혼굿 바라소리 들린다.

이막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김을봉 나타난다.

 

김을봉 : 왜 거기서 뛰어내리게? 눈감고 딱 두 걸음만 나가면 되겠네.

이막순 : (놀라며) 누구세요?

김을봉 : “골짜기와 산 위에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다니다
나는 문득 떼 지어 활짝 피어 있는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노라.”

이막순 : 김을봉?

김을봉 : 당신이 좋아하던 싯구를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아직도 수선화 좋아하는 건여전하구만.

이막순 : 여보, 어디 갔다 이제야 온 거요?

김을봉 : 난 당신을 떠난 적 없소. 당신은 날 버리고 재가했지만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었어.

이막순 : 거짓말. 당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데. 수평선 바라보며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김을봉 : 그래서 왔잖소.

이막순 : 나쁜 사람. 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데, 얄밉게 주름살 하나 없구만...

김을봉 : 막순이. 당신은 언제나 고운 사람이야. 난 당신이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고. 그래도 당신 뚝심 하나로 작지왓 지키느라 고생했소.

이막순 : 여긴 어렸을 적 아버지와 자주 왔던 곳이죠. (김을봉 수선화 화관을 머리에 씌어 준다)아버진 수선화로 화관을 만들어 내 머리에 씌어주곤 워즈워드의 시를 들려줬어요.

김을봉 : “하염없이 있거나 시름에 잠겨 나 홀로 자리에 누워 있을 때 내 마음속에 그 모습 떠오르니, 이는 바로 고독의 축복이리라.”

이막순 : 돈 많이 벌면 아담한 집 짓고 살자는 약속만 남긴 채... 마지막 가신 곳도 여기에요. 이 땅 마련하자고 보채서 당신 죽게 만들고, 죽을 고생하며 육지로 물질 다녔는데... 원래 우리 소유라니?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와요.

김을봉 : 삶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오? 그러니 집착하지 말아요. 집착은 탐욕을 낳고, 그 탐욕 때문에 당신 부모가 죽고 자식들 까지 그리 된 게 아니겠소? 이젠 집착을 버리고 편하게 살아요.

이막순 : 뭐라구요? 한다는 소리가 고작 작지왓을 버리라구요?

김을봉 : 작지왓에 대한 집착이 당신을 병들게 하고 있소. 버려요. 버려야 당신도 살고 철종이도 구할 수 있소. 그리고 이젠 나도 그만 놓아줘요.

이막순 : 그런 말씀 하시겠거든 가세요. (화관을 내팽개치며) 가서 다신 나타나지 마세요.

김을봉 : 편하게 살아요.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혀 살 거요? 다 헛된 일인 것을... (사라진다)

이막순 : (숨을 비우고 바다를 향해) 참 애쓰십니다. 내가 그리 미우십니까? 날더러 어쩌라고... 이 버거운 시련을 어찌 감당하라고...? 얼마나 더 강해지라고 이러십니까? 바다에 몸이 달은 여자인 줄 뻔히 알면서 바다도 버리라는 겁니까? 인내를 시험하는 거라면 폭풍우 치는 바다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제게 몹쓸 형벌 내리신 것도 모자라 왜? ? 왜 자식들에게 까지 이러십니까? 그래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욕심 뉘우칩니다. 집착도 미움도 버리고 마음도 비우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깨어나게만 해 주세오. 우리 철종이 제 발로 걷고 제 손으로 먹게만 해주십시오. (절규하듯 바다를 향해) 철종아! 가지 마. 철종아! 철종아! 철종아... !

 

조명 바뀌면 바닷가에서 하얀 고깔을 쓰고 바라춤을 추는 김갑생.

죽은 원혼들을 위무하는 춤은 매우 숙연하다.

음악소리 높아지면서 서서히 암전.

 

 

12

 

같은 날 식당.

순덕네 식탁을 닦는데 이막순 장바구니와 강아지를 들고 들어온다.

 

순덕네 : 아니 강아지 사옵디가?

이막순 : 동추네 양심이야. 시장통에서 쓰레길 뒤지고 있더라. 씻겨서 넘겨 줘.

순덕네 : (받으며)하이고 고기만 먹는다던 놈이 요놈이구나. 근데 어쩌다 이 신세 됐니?

이막순 : 바람 많이 자서 낼 해경엔 지장 없겠다. 날 잡아 놓고 어쩌나 했는데.

순덕네 : 아니 아들은 지금 의식불명인데 해경이 문제우꽈?

이막순 : 그럼 어쩔 거여?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고 산 사람은 악착같이 살아야지. 병원비 대려면 한 푼이라도 더 건져야 한다. 빠진 거 없나 봐.

순덕네 : 언니 참 대단허우다. (장바구니를 보며) 피로회복제 사탕도 있고, 생닭은 왜 이렇게 많이?

이막순 : 한 마리 가져가. 그놈 지 몸값은 충분히 할 거여.

순덕네 : 하이고 안 그래도 되는데, 호호호 고맙수다.

이막순 : 순덕네도 준비해야지. 어서 가.

 

순덕네 장바구니와 강아지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이막순 통증이 시작 되는 듯.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다가 약을 찾아 먹는다.

밖에서 오동추 들어온다.

 

오동추 : (들떠서) 길녀 어머니. 됐어요. 공사가 중지됐어요. 우리가 이겼다구요. 중앙 뉴스에 나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잠수함은 뜨지도 못하고 침몰하고 말 거에요.

이막순 : (종이를 찾아 자르며 시큰둥하게)그러고 끝날 일이라면야....

오동추 : 바다를 되찾았는데 안 기쁘세요?

이막순 : 바다가 언제 발 돋아서 도망갔던?

오동추 : 이게 다 철종이 덕이에요. 철종이가 막아 냈다구요.

이막순 : 미련스러운 놈. 조용해지면 예고도 없이 공사 재개될 텐데. 그게 목숨까지 걸 일이야? 바보 같은 놈. 그 까짓 작지왓이 뭔데... (서랍에서 유성 펜을 찾는다) 그려 못난 에미 탓이지.

오동추 : (강아지 소리 난다)? 이건 양심이 소린데? (주방으로 가서) 양심아. 너 어디 갔었어? (안고 나온다) 아버지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이제 집에 가자. (나가며) 철종인 꼭 깨어날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이막순 : (혼자소리로) 그래 깨어만 나. 바다가 있는데 너 하나야 못 먹이겠니? 병신 몸이라도 제발 깨어만 나 다오. 그래야 내가 오래 산다.

순덕네 : (보따리 들고 나와서) 동추 속도 말이 아닐 거우다.

이막순 : (글씨를 쓰며 듣기만)....

순덕네 : 어제 밤 난리 나수다. 동추어머닌 술에 취해 스님 언니에게 칼부림 했지. 동추아버진 농약 먹고 나자빠졌지.... 삐뽀삐뽀 병원차 오고 경찰차까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을 거우다.

이막순 : (혼자 소리로) 에그, 그놈의 사건은 언제면 끝날 건고... 쯧쯧.

순덕네 : 그럼 가 보쿠다.

이막순 : (‘폐업’, ‘작지왓 급매라 쓴 종이를 들고) 그려. 그간 수고 했어.

순덕네 : 섭섭허우다. 해녀 식당 개업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막순 : 포기할 건 포기하고 정리할 건 빨리 정리해야지. 관광객 들어오고 길순이 돌아오면 국수집이라도 열 생각이야.

순덕네 : 그땐 나도 다시 부릅서 예?

이막순 : 그려 거절 말고 오기나 해.

순덕네 : . 낼 바다에서 봅주? (나간다)

 

이막순 출입구에 안내판을 붙이는데 김갑생 오른 손에 붕대를 감은 채 행장을 지고 나온

.

 

이막순 : 몸은 괜찮아요?

김갑생 : 이렇게 해서 용서가 된다면 백번이라도 당하지....

이막순 : 이제 와서 뭘 어쩌란 말입니까? 진정으로 참회하면 이미 용서된 겁니다. 생각나면 언제든지 오십서. 친척도 자주 봐야 정이 들지요.

김갑생 : 고마워. 난 참 행복한 사람이야. 갈 곳이 있고 반겨줄 사람이 있으니. 이젠 우리 화해한 거지?

이막순 : 그럼요. 사람의 일이란 새옹지만데, 마음 터놓으면 해결 못 할 일도 없는데. 그 오랜 세월 꽁하니 마음들을 닫고 살았으니.... 헌데 어쩝니까? 헌납한 재산 잿더미 만들었으니...

김갑생 : 사람들 증오까지 함께 타버렸으면 좋으련만... 일체유심조 아닌가? 애초 내 마음 편 하려 한 일이니... 그나저나 올케는 걱정도 안하네?

이막순 : 늦복 받은 모양이우다. 바람 불어야 해물도 자라는 거고... 이어도에 소풍 간다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길순인 젊으니까 다시 일어설 테고, 철종이만 걱정이우다. 양어장 만들어 주고 가야하는데...

김갑생 : 올켄 이미 보살이야. 거미가 새끼 위해 제 살 먹인다더니... 살아 있는 목숨은 어떻게든 살아. 무리하지 말고 언제든 요양원으로 와.

이막순 : (손을 맞잡으며) . 내 걱정 말고 훨훨 털고 갑서.

 

어머니와 진경이 나온다. 어머니는 화상을 입은 듯 하얀 연고를 얼굴 군데군데 발랐다.

심진경은 가방을 들고 어머닌 태왁을 들었다.

 

어머니 : 가기 싫대두.

김갑생 : 어머니, 이제 세상 구경도 좀 해야지요. 태어나서 오로지 바다에만 사셨잖아요?

어머니 : 난 바다가 좋아.

심진경 : 할머니 대단했어요. 치마 벗어 불타는 몸 껴안고...

이막순 : 피 안 섞인 놈이라고 나무라더니. 그래도 아까워 철종일 껴 안읍디가? (껴안으며) 고맙수다.

어머니 : (엄살떨며) 아아 나 아퍼. 나 병원 가야 돼.

김갑생 : 그래요. 병도 고치고 푹 쉬다 옵시다?

어머니 : 그럼 다시 돌아오는 거야?

김갑생 : . 병 다 나으면...

어머니 : 그럼 빨리 가. 병고치고 오자. (가래를 뱉으려다)

이막순 : ?

어머니 : (삼키며) 삼켰어. 됐지?

이막순 : . 꼭 그렇게 헙서. 헌데 내 테왁은 왜....?

심진경 : 꼭 이걸 갖고 가야 한다고 고집 부리지 뭐에요..

어머니 : 가져 갈 거야. 돈 줄게. (치마를 뒤져 돈주머니 꺼내며) 자 이거 가져. 이게 전부여.

이막순 : 됐어요. 선물로 드릴게요.

김갑생 : 정표라 생각하고 받어.

이막순 : (받으며) 고맙수다.

어머니 : 막순아. 사랑해.

이막순 : (놀라며) ? 지금 뭐라 하셨어요?

어머니 : 그간 미안했고 사랑한다고?

이막순 : 어머니...

김갑생 : (합장을 하고 나가며) 그럼.

어머니 : (손을 흔들며) 기다려. 꼭 돌아올 거여.

심진경 : 나오지 마세요. 할머니가 떼쓸지 몰라요.

이막순 : (밖으로 나와 송별한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어머니. (사라진 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눈물을 닦고) 이제 아무도 없구나. 티격태격 삼십여 년 같이 산 어머니도 보내고. 마음은 후련해서 날 것 같은데, 그 빈자리에 찬바람 몰려드는 건 웬일이지? 바다는 저기 그대로 인데...? 바다만 있으면 살 줄 알았는데... 가쁜 숨 몰아쉬며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내게 남은 건 뭐지? 습관처럼 짠물에 뒹구는 사이 세월은 저만치 가고, 한숨 돌릴 만하니 내가 가야 하는 구나. 이게 인생인가? 혼자면 바다가 무슨 소용이야...? 그렇구나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한 거구나. 길들이고 물들고 부대끼는 사람 때문에 내가 있었구나. 바다는 늘 어울리며 살라 하는데... , 그걸 이제야 알다니... 하지만 늦지 않았어. 내겐 아직 시간이 남았고 내일도 바다는 물결 칠 테니까. (다시 통증이 오는 듯 휘청대며) 어머니... (고통을 참다가 길가로 움직이며 절규한다) 어머니!

 

암전되었다가 풍물소리와 함께 해경(解警) 날 아침이 밝아온다.

깃발을 선두로 풍물패와 해녀들, 마을 사람들이 무대를 가로질러 바다로 향한다.

애기구덕을 짊어진 사람, 땔감나무를 실은 리어커, 물질도구를 실은 손수레, 바지게를 진 마줌꾼, 엿장수, 떡장수 등이 신나게 춤추며 뒤따르는데 막이 내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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