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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추렴

강용준 2022. 11. 9. 13:32

2022년 11월 1일 설문대여성문화센터 공연(한국연극협회 제주도지회/ 강상훈 연출)

 

 

돗추렴

강 준

 

 

등장인물

 

유옥순(77): 해녀.

후안 (25) : 베트남 출신 손자며느리.

김병수(30) : 손자, 환경미화원.

김용철 : 아들

심복녀 : 며느리

김명순 : 시누이.

장충삼 : 김명순의 남편,

박수호 : 도감.

동네사람 1,2

 

시간 : 현대

장소 : 제주도 어촌 마을 유옥순 씨 댁

 

무대

 

무대 뒤쪽으로 제주도의 전통 가옥,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무대 왼쪽으로는 우영(텃밭)이 있는데 한쪽 구석에 오래된 배나무가 있고 각종 송키(채소)가 자라고 있다. 오른 쪽엔 보리낭 눌(노적가리)이 있고 그 뒤로 돗통시(돼지가 있는 변소)가 있다.

집의 왼쪽은 정지(부엌).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안쪽은 안커리(안채) 바깥쪽은 밖거리(바깥채)가 있으나, 밖거리는 무대 상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도록 설정하고 통상 밖거리에 붙어 있는 이문간(대문)은 왼쪽으로 설정하여 올레로 나가는 길이다.

부엌 앞에 수돗가, 마당 가운데는 오래된 평상이 놓여 있다.

 

 

1

 

꿀꿀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진다.

이윽고 여자의 짤막한 비명소리 들리고 잠시 후 후안이 두 손으로 월남치마를 잡아 무릎까지 올리고 어거적 거리며 돗통시에서 나와 정지로 들어간다.

유옥순, 망사리와 테왁이 든 물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물질해서 채취한 파래와 감태를 마당 한쪽에 비닐 포대를 깔아 그 위에서 말린다.

 

유옥순 :(집안을 살피며) , 후안. (사이) 후안아.

후 안 : (소리) , 할머니 잠깐만요.

 

유옥순, 바구니에서 태왁과 잠수복을 꺼내 마루에 걸고 수돗가로 가 손을 씻는다.

수호 들어온다.

 

박수호 : 삼촌 집에 이서수과?

유옥순 : 응 이게 누구고?

박수호 : 나 수호우다. 용철이 친구 마씸.

유옥순 : . 오래만이로구나. 경헌디 어떵헌 일이고?

박수호 : 도새기 호쏠 보래 와수다.

유옥순 : 우리 도새긴 무사?

박수호 : 나 도새기 잡는 일 허염수게. 헌디 알동네 새 집 짓는 명호네 있잖수과?

유옥순 : 명호네 무사?

박수호 : 집이 다 되언 성주풀이 허젠 허난 돼지머리 필요허댄 마씸.

유옥순 : 게민 우리 도새기 잡으켄 말이라?

박수호 : 나가 양 이 동네 누게 집 도새기 몇 근 짜리 꺼정 다 꿰고 이수게. 잘 멕여시믄 지금쯤 삼촌네 껀 백근은 되실 거우다.

유옥순 : 아이고 당최 그런 소린 말라. 그 도새긴 우리 벵수 장개 갈 때 쓸 거여.

박수호 : 날 나수가?

유옥순 : 읏다. 해도 경해젠 길루어신디.

바수호 : 걱정맙서. 날 나믄 그땐 나가 구해 안넵주.

유옥순 : 말다. 우리 벵수가 얼매나 애지중지 질루는 건디.

박수호 : 삼촌, 너미 솔져도 고기 맛이 어십니다게. 호쏠만 양. 확인 해 봅주. (변소로 간다)

 

옷을 갈아입은 후안이 나온다.

 

후 안 : 할머니, 물질 다녀오셨어요?

유옥순: , (후안을 보며) 무사 어디 가젠?

후 안 : . 해녀 학교 가려구요.

유옥순 : 물에 드는 거 경 오래 배울 게 뭐 이시니?

후 안 : 거기가면 친구들도 만나고 좋아요. 해녀 학교 마치면 할머니랑 같이 물질 할 게요.

유옥순 : 그래 착하다.

박수호 : (들어와 후안을 보며) 거 문들락헌게 솔토매기광 맛 좋게 솔져신 게 마씀.

후 안 : (자신을 보고 얘기하는 줄 알고)어머.

유옥순 : 느 보고 하는 소리 아니여.

박수호 : , 베트남에서 왔다는 병수 각시구나? 나 윗동네 느 아버지 친구여.

후 안 : , 안녕하세요?

박수호 : 하이고 선융광 인사성도 좋고. 하도 곱들락허연 사람들 눈독들이쿠다.

유옥순 : (버럭) 거 무슨 소리고?

박수호 : 아니 혼저 날 잡앙 식 올리랜 허는 소리우다.

후 안 : 우린 이미 결혼했어요. 베트남에서.

박수호 : 일터가 그런 게 아니다. 잔치를 벌려서 동네 사람들한테 국시 멕이멍 신고를 해야 허는 거다. 무신 말인 줄 알아들엄샤?

후 안 : 그럼요. 때가 되면 잔치할 거예요.

유옥순 : 외국 여자엔 함부로 곧지 말라. 머리가 하도 명석허연 제주말도 다 알아듣나.

박수호 : 기꽈? 병수 횡재해신 게 마씀.

유옥순 : 무사 우리 뱅수가 뭐 어떵허댄 말고. 양지영 등치가 그 정도면 말곡, 직장 있겠다 착하겠다. 머리가 조금 모라란 것 아니믄 일등 신랑이주. 경 안허냐 후안아?

후 안 : 할머니 말이 맞아요. 병수 오빠 착하고 사람 좋아요. 부족한 건 제가 채우면 되요.

박수호 : 그래 천생연분이다. 삼춘 저 도새기 추렴 헙주. 사름덜은 나가 모아 보크매.

유옥순 : 거 씨알도 안 멕힐 소리 하지도 말라.

박수호 : 삼춘이 안 된다면 할 수 없주만 더 이상 솔지믄 고기값 떨어집니다 양. 잘 생각해 봅서.

유옥순 : 생각하고 자시고 할 거 어서. 거 어떵 키운 도새긴디 남의 일에 잡을 말이고?

후 안 : 할머니 서로 돕고 살아요. 아저씨 다른데 둘러보시고 없으면 다시 오세요. 제가 병수 씨랑 할머니하고 의논해 볼 게요.

박수호 : 기여. 역시 똑똑하구나. 고맙다. (나가려다 돌아서며) 참 헌디 행불자 신고는 허였지 양?

유옥순 : 거 무신 말이고?

박수호 : 삼춘네 부친님도 4·3 사태 때 행방불명되지 않허여수과?

유옥순 : 그거 멫 십년 지난 일을 이제 왕 무사?

박수호 : 성안 비행장 알녁에서 그때 죽은 사람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되엇댄 마씸.

유옥순 : 참말이가? 게매 어젯밤 꿈자리가 숭숭핸게 그 소식 듣젠 경했구나게.

박수호 : 우리도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시신 못 찾아수다.

유옥순 : 신고는 진즉에 했주만 이거 언제고? 이젠 기대도 안 햄져. 생각허민 무신 것 허느니 가슴만 능착허고 을큰헌디.

박수호 : 경해도 조상 시신 찾는 일인디 내부러 집니까? (돌아서며) 나 감수다.(나간다)

후 안 : 안녕히 가세요.

박수호 : 그려, 날 잡히면 연락해라. 도새긴 내가 잡아 줄테니.

후 안 : . 고맙습니다.

유옥순 : 저런 염치대가리 어신 피쟁이 하고는. (평상에 앉다가 기우뚱하자) 아이고 이거 나 닮안 다 되어 감구나.

후 안 : 저쪽으로 앉으세요. 그래도 아직 쓸 만해요. 병수 씨 오면 고치라고 할게요.

유옥순 : (옮겨 앉으며) 기여. 우리 집 역사를 다보고 견딘 거라 버릴 수도 없다.

후 안 : 헌데 할머니, 저 못된 꿀순이 팔아버려요.

유옥순 : 것도 잘 먹고 날마다 통통해지는 도새기를 무사?

후 안 : 저를 아주 속상하게 해요.

유옥순 : 무슨 일 이서시냐?

후 안 : 한두 번이 아니에요. 오늘도 속이 안 좋아서 변소에 가서 앉았는데 아 저것이 돌다리 밑으로 들어오더라고요. 난 저리 가라고 몇 번을 소리쳤는데도 말을 안 듣고 머리 쳐들고 쳐다보잖아요. 난 참지 못하고 설사를 갈겼죠. 그게 하필 돼지 머리 위에 쏟아졌는데 머리를 푸드득하며 흔드는 바람에 오물이 사방으로 튀어 옷 다 버렸어요.

유옥순 : (웃으며)호호호 보기 좋게 당했구나.

후 안 : 샤워하고 옷 갈아입었는데 아직도 냄새 나는 것 같아요.

유옥순 : 향기로운 냄새 밖에 안 난다. 괜찮다.

후 안 : 이 녀석, 오빠 오면 몽둥이로 패 주라고 할 거야.

유옥순 : 거 축생이라고 타박하지 마라. 축생들도 다 사람 하는 만큼 베푼다.

후 안 : 그럼 내가 돼지 눈 밖에 났다는 말씀이에요?

유옥순 : 도새기영 눈 맞추멍 잘 사귀어사주. 앞으로 도새기 것은 느가 주라. 도새긴 쌀 뜨물에 깻묵 쭈시랑, 막걸리쭈시랑 타서 주는 거 제일 좋아헌다.

후 안 : 기억해 놓을 게요.

유옥순 : 고향에선 아직 무슨 기별 어시냐?

후 안 : (고개를 흔들며) 아직요.

유옥순 : 경 말앙 느가 한 번 댕겨 오라.

후 안 : 여기서 베트남이 어딘데요? 교통비도 만만치 않아요.

유옥순 : 여비는 나가 호쏠 보태 마. 결혼식 늦어지니 동네 사람 눈치도 보이고.

후 안 :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유옥순 : 일터가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병수가 도둑장가 드는 것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 국수도 멕이구, 사돈들도 보고 싶구나. 귀하게 기른 딸을 이국 만리까지 보내 주시고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병수 들어온다. 말을 더듬는다.

 

김병수 : 가 각시야. 흐흐

후 안 : 오빠 일 끝났어? 오늘은 좀 이르네?

김병수 ; (껴안으며) 후안 보 보고 싶어서 친구들 수 술 먹자는 거 뿌리치고 왔어.

후 안 : (유옥순 눈치를 보며 풀려나오며) 어머, 이거 왜 이래요. 할머니 앞에서.

유옥순 : (일어서며) 에고 이젠 할망도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시장할 텐데 밥이나 차려줘라.

김병수 : 하 할머니, 흐흐. 우리 각시 이 이쁘지?

유옥순 : 그래. 우리 집에 복덩이가 굴러들어왔다. 월남 가 죽은 네 하르방이 혼자 늙는 할멍 불쌍허연 후안을 우리 집에 보낸 모양이구나. 아멩 경해도 남들 앞에선 각시 자랑하는 거 아니여.

김병수 : 사 사람들이 난리여. 가 각시 보여 주라고. 흐흐 나 각신데 왜 보여줘.

유옥순 : 인석아 예쁜 각시 구해 왔으면 한 턱 내고 그러는 거여.

김병수 : 하 할머니, 우 우리 빨리 결혼식 시켜줘.

후 안 : 아이 오빠.

유옥순 : 니도 그러고 싶다. 헌데 사돈들이 와야지. 오기만 하면 언제라도 식 올려 줄테니 네 장모 병 빨리 낫기를 빌기나 해라.

김병수 : 아 알았어. 기 기도 흐흐흐.

후 안 : 배고프지?

김병수 : 아니. 우리 각시 보고 있으면 배 안고파. 으흐흐.

후 안 : 아이 오빠도.

유옥순 : 병수 밥 차려주고 넌 어서 학교 가. (들어가며) 난 한숨 자야겠다.

후 안 : .

김병수 : 후 후안. 우리 어머니한테 저 전화하자.

후 안 : 어제도 했잖아. 전화비가 얼만데. 어서 씻고 들어와, 상 차려 놓았어.

김병수 : 아 아까는 무지 배고팠는데 이 이젠 괜찮아.

후 안 : 밥을 잘 먹어야 힘을 쓰지.

김병수 : 히 힘? (웃으며) 히히히 그 그래, 밥 많이 먹고 바 밤에 힘 하영 쓸 게.

후 안 : 오빤 밤낮 그 생각이야?

김병수 : 그 그럼. 우리 아 아기 빨리 마 만들어야지.

후 안 : 그게 힘쓴다고 마음대로 되냐구? 쓸데없는 소리말고 평상이나 고쳐. 다리 한쪽이 불구야.

김병수 : (평상의 상태 확인하며) 아 알았어. 이게 삑꾸가 됐구나.

후 안 :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며) 늦었어. 밥 차려 놓았으니 국만 떠서 먹어.

김병수 : (후안이 움직이는 것 보며) 후 후안. 어 어디가?

후 안 : (나가며) 해녀 학교.

 

후안 나가고 병수 배시시 웃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암전.

 

 

2

 

밝아지면 김명순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나이는 들었지만 도시 여자답게 화려한 복장이다.

 

김명순 : (안채를 향해) 안에 이시냐? (사이) 용철이 어멍.

후 안 : (안에서 나오며) 누구셔요?

김명순 : (후안을 살피며) 응 느가 그 월남에서 왔다는 병수 각시로구나?

후 안 : . 할머닌 물질 가셨는데 누구셔요?

김명순 : 시내 사는 네 고모할망이다.

후 안 : 고모할망?

김명순 : 네 죽어븐 부친에, 아니지 네 할아버지 누나.

후 안 : (생각하다) 아 그러셔요? 아침 일찍 가셨는데 오실 시간 되셨어요. 안으로 들어와 기다리세요.

김명순 : (평상에 앉으며) 아니다. (검은 비닐을 건네며) 오는 길에 과일 있기에 사왔다. 이거 받고 나 시원한 물 한 잔만 다오.

후 안 : .(받으며) 잠깐만 기다리세요. (들어간다)

김명순 :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닦으며) 아이고 덥다. 추석이 다가오는데 무슨 날씨가 이 모양인지.

후 안 : (물컵을 가지고 오며) 드세요. 이 마을 물맛은 최고에요.

김명순 : (겁을 받아들고 들이키고 나서) 어 시원하다. 헌데 병수는 어떻게 만났어?

후 안 : 결혼상담소 통해서 만나서 베트남에서 식 올렸어요.

김명순 : 그래? 그 모자란 아이 받아줘서 고맙고 장하다.

후 안 : 병수 오빠 마음이 얼마나 착한데요. 체격도 당당하고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제 차례가 됐겠어요? 히히 운명이에요. 제 아버지가 라이따이한이거든요.

김명순 : 라이따이한?

후 안 :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란 말씀이에요.

김명순 : 병수 할아버지가 월남 갔다 죽은 건 알어?

후 안 : 얘기 들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신 할아버님이 맺어줬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김명순 : 한국말을 잘하는구나?

후 안 :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아버지도 한국에 오려고 열심히 배웠대요.

김명순 : 아버지는 살아계신 거여?

후 안 :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 잡으며 어머니 병간호해요.

김명순 : 저런. 많이 아픈 게로구만.

후 안 : 아니에요. 병 다 낫고 있어요. 어머니 병 나으면 함께 한국 오셔서 결혼식 참석도 하고 여행도 시켜 드릴 거예요. 나도 한국 꼭 한번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시집 와서 살게 되니 꿈만 같아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한국 총각 소개해 달라고 난리에요.

김명순 : 그렇구나. 참 뒷간이 저기 맞지?

후 안 : . 돼지 조심하세요.

 

명순, 뒷간으로 가고,

후안 컵과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갔다가 쟁반에 과일과 과도를 들고나온다.

유옥순, 물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후 안 : (인사하며) 다녀오셨어요?

유옥순 : 웬 과일이야?

후 안 : 고모할머님이 사 오셨어요.

유옥순: 고모할망? (알아차리고 편치 않은 듯) 으응, 그 여편네가 웬일로?

김명순 : (옷을 추리며 나오며) 아파서 누운 줄 알았는데 아침 물질도 햄구나?

유옥순 : 와수가? (후안에게 물바구니를 가리키며) 얘야 저거 좀 정리해라.

후 안 : . (물바구니에서 테왁과 물옷을 꺼내 수돗가로 가져간다)

유옥순 : 그거 다 단물에 씻었으니 그냥 햇빛에 말리기만 하면 되고 톳이나 널어라.

후 안 : . (비료 비닐을 가져다 마당에 깔고 망사리에서 톳을 꺼내 말린다)

김명순 : 어째 사람을 봐도 시큰둥 한 얼굴이야?

유옥순 : (핑계를 대듯) 하근디가 아프고 피곤허연 마씸. 참 고모부는 입원했다고 하던데 차도가 이수과?

김명순 : 아니 소문 듣고서도 병문안 한 번 안 온 거라?

유옥순 : 나도 제우 오멍허므로 시내까지 저서다닐 정신은 어수다.

김명순 : 아맹 경해도 그렇지. 따지고 보면 그 병이 다 용철이 때문 생긴 거 알암서? 그때 후유증으로 고생 고생허다가 영 된 거주.

유옥순 : 참 나 원.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직도.

김명순 : 세월 지나도 그게 잊어지는가? 잊어불게 따로 있주.

유옥순 : 그 일로 우리 용철인... 아니 그만 둡주.

후 안 : (망사리에서 문어를 찾아 들고) 할머니 이거 엄청 크네요? 아직도 살았어요. (손을 감아오르는 문어의 다리가 징그러운 듯) 할머니 이거 보세요. 으으.

유옥순 : 그 물꾸럭, 생복이영 구쟁기영 담앙 고모할망 드리라.

후 안 : .

김명순 : 아니야, 아니야. 그게 다 돈인 걸.

후 안 : 우리 할머니 이런 거 잘 잡아오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유옥순 : 아져당 아주버니 죽이나 써 드립서. 물꾸럭은 끓는 물에 살짝 드리쳤당 좀질허게 썰엉 참기름에 살살 볶앙 죽을 써 먹으민 기력회복에 좋덴 헙니다.

 

후안, 해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가져와 옆에 놓고 나서 과일을 깎는다.

 

김명순 : 고맙네. 헌데 그럴 기회가 어실 거 담다.

유옥순 : (의아해서) ? 그게 무신 소리우꽈?

김명순 : 의사 말이 나이도 있고 가망이 없댄 해라.

유옥순 : 경 돼수가?

후 안 : (과일 접시를 내밀며) 이거 좀 잡수세요.

김명순 : 얘가 눈치도 빠르고 착하네. (과일 한 쪽을 들고 먹는다)

후 안 : 할머니도 드세요.

유옥순 : 입맛도 없고 느나 먹어라.

김명순 : (화제를 바꾸며) . 도새기 잡을 때 되아션 게.

유옥순 : 갑자기 도새긴 무사 마씸?

김명순 : 그 양반 이시 저시 하니 하나씩 우렁마춰야 할 거 같아서.

유옥순 : 그거 병수 잔치에 쓸 거우다. 다른 데 알아봅서.

김명순 : 는 아직도 우리 영감신디 섭섭한 감정 이시냐?

유옥순 : 무사 고모부 얘긴 또 꺼냄수과?

김명순 : 하긴 우리 영감 재게 죽어부러시믄 속 시원할테주.

유옥순 : 말이야 버른 말이주. 부친 죽인 웬수가 죽는다고 잊혀집니까?

김명순 : 웬수? 하이고 참말로 어이가 없네. 따지고 보면 참 웬수는 느그 신랑 상옥이지.

후 안 : (듣다가) 할머니들 왜 이러세요?

유옥순 : 나 북부기뒈스젠 옵디가?

김명순 : 초마가라. 웬수영은 어떵 결혼허영 살아신고?

유옥순 : 날 골빈 년이랜 놀리는 거꽈? 그걸 알아시믄 어떵 살아집니까? 무사 월남은 보내영 사람 죽게 만듭디가? 양 무사?

김명순 : 이거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난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그때 상옥인 나이가 많안 어림도 어서신디 사정사정하기에 우리 영감이 힘을 썽 보내준 건디 지금 와서 무슨 소리야. 상옥이 때문 이 정도 산 거 아니? 목숨 바꾼 돈으로.

유옥순 : 돈이 무슨 소용이우꽈. 난 바다만 이시민 얼마든지 삽니다. 헌디 죽어븐 사람 얘긴 무사 꺼낸 이 난리우꽈? 공쟁이 걸래 와시면 그만 갑서.

김명순 ; (일어서며) 가주. 아예 형제간 의리도 끈어불주. 도새기 하나 가정 경 유세 떨지 말라. 형제간 의리도 어시. (나가려 움직인다)

후 안 : (봉지를 들고) 고모할머니 이거 가져가세요.

김명순 : 필요없다. 너네나 잘 먹고 잘 살라. 초하룻날부터 재수없어. 에이 퇴. (침을 뱉고 나간다)

유옥순 : 의리 좋아하네. 망할 놈의 할망구 하고는. 후안아 정지에 강 소곰 아져당 뿌리라.

후 안 : 할머니, 왜 그러세요. 형제간이라면서?

유옥순 : 형제가 아니라 애초부터 웬수여 웬수. 나가 속아서 이 집안에 시집 온 거야.

후 안 : 할머니. 그런 소리 마세요. 할머니가 시집 안 왔으면 병수 오빠도 없고 내가 어찌 여기 있겠어요?

유옥순 : 하긴 경허다만.

후 안 : 할머니, 할머니 아버님은 어떻게 된 거에요. 말해 주세요. 궁금해 죽겠어요.

유옥순 : 지나간 옛일 알아서 무엇허잰. 생각하기도 싫다. (수돗가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시고 숨 비우는 소리를 낸다.)

후 안 : 할머니 제 꿈이 소설가거든요. 가슴에 담아두면 병이 돼요. 할머니 아픔 제가 글을 써서 풀어드릴 게요.

유옥순 : (돌아오며) 그려 이제 느도 우리 집 사름 되어시난 집안 내력은 알아야겠지. 요영 앉아라.

후 안 : 잠깐만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작동하며) 녹음해 두려구요. 말씀하세요.

유옥순 : 그러니까 해방이 되고 나라가 무척 어지러운 때였지. 내 나이 열 살 때 사람이 총 맞아 죽어가고 죽창에 찔리고 무시무시한 세상을 보았다.

후 안 : 우리 베트남에도 전쟁이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도 전쟁 때 폭격 맞아 한 쪽 다릴 잃었어요.

유옥순 : 저런.

후 안 : 어렸을 적 그랬는데 머리는 아주 좋았대요. 동네뿐만 아니라 전국 대회까지 나가 받아온 상장이 많아요.

유옥순 : 경 영리하니까 우리나라 말을 혼자 익히고 널 가르쳤겠지. 그 피를 받은 후안도 영리하고.

후 안 : 제가 할머니 말씀 막았네요.

유옥순 : 아 참. 그 때도 추석 명절이 가까워 가난 우리 집에서 돗추렴을 했주.

후 안 : 돗추렴이 뭐에요?

유옥순 : . 그게 제사 명절을 하려면 도새기 고기가 필요하거든. 그래서 동네 사람들끼리 필요한 만큼씩 공동 부담을 해서 돼지를 잡는 일이지.

후 안 : 아 그렇구나. 돼지가 귀하니까.

유옥순 : 그때 나라에선 섬의 젊은 장정들은 모두 빨갱이라 해서 심어가던 시절이었어. 우리 아방은 토벌대가 무서워 산으로 피신했저.

후 안 : 그때 우리나라도 양쪽으로 나누어 싸웠대요.

유옥순 : 그랬지. 그 난리통에 우리 하르방과 아버지가 죽었다. 그땐 먹을 게 귀하던 시절이라 제삿날 명절날이라야 곤밥에 도새기 고기를 맛볼 수 있었으니까.

후 안 : 곤밥?

유옥순 : 쌀밥을 예전엔 곤밥이라 그랬다. 헌데 그건 밤 열두시가 넘어 제를 파해서야 먹을 수가 있었지. 그거 한적 얻어 먹으려고 오는 잠 눈비비며 얼마나 애를 썼는지.

후 안 : 할머니 이야기가 자꾸 다른 데로 새고 있어요.

유옥순 : 그렇지 돗추렴 이야기 했었지. 하여간 할아버지가 동네사람들 성화에 못 이겨 도새기를 잡았지. 돗추렴하는 날은 동네 잔치날이 됐다. 아이덜은 도새기 오줌보로 공놀이를 하고. 배설에 순대에 멈국이랑 얻어먹을 게 많았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날 저녁에 일어났어. 일이 다 끝나 가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타난 거야. 돗추렴 소식이 산 사람들한테도 알려졌던 모양이야.

후 안 : 산으로 피신하신 분 말씀이죠?

유옥순 : . 어린 시절이었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깡마른 얼굴에 텁수룩한 수염으로 내 뺨을 부비며 울던 아버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후 안 : 마지막이라니. 왜요?

유옥순 : 산에 이시민 먹을 거라곤 나무 열매뿐이니 얼마나 배가 고파시크냐? 하르방은 아버질 배불리 먹이고 괴기랑 순대를 싸서 다시 산으로 보낼 준비를 하는데 한밤중에 경찰이 들이 닥친 거야.

후 안 : 누가 고발을 했군요.

유옥순 : (끄덕이며) 산에서 내려온 사람을 지서에 알리면 상을 주었거든. 돗추렴에 참여한 사람 중 누군가 지서에 가 꼬질른 거야.

후 안 : 어디서나 나쁜 놈은 꼭 있어요. 그래서요?

유옥순 : 경허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잡혀 가고 그 후론 행방을 몰라. (눈가를 훔치며) 그런데 세상에 비밀이 어신 법이더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가 이 집에 시집오라네 용철일 낳고 남편이 죽고나서야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영 고찌 잡혀 있다가 용케 도망쳐 나온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듣게 되었지. 그 고모 할망 남편 되는 사람이 그때 서청출신 경찰이었는데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잡아간 당사자라는 거였어. 그 말을 들은 때도 그는 시내에서 경찰을 하고 있었다. 난 아버지 행방을 알려고 찾아가 사정했지. 헌데 거기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거야. 박복한 년의 팔자라니.

 

무대 어두워지고 한쪽 구석에 젊은 시절 장충삼 나타난다.

유옥순은 평상 앞에 엎드려 사정한다.

 

유옥순 : 제발 영 빌엄수다. 우리 하르바님과 아버지 어떵 되어신디 말씀 해 주십서. 예 아주버님.

장충삼 : 거 몇 십년 지난 옛날 일을 무사 나한테 왕 들엄서?

유옥순 : 아맹 오래 되어도 알건 알곡 밝힐 건 밝혀얄 것 아니우과?

장충삼 : (시치미 때며) 난 모르는 일이야.

유옥순 :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곡 제사 드리고 이수게. 사람들이 아주버님이 붙잡아 갔댄 고랑게 똔난 이야기꽈.

장충삼 : 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육지로 보냈어. 그런 빨갱이들이 무사하리라 생각하는 게 잘못이지.

유옥순 : 정말 육지로 보낸 게 맞수과? 그날 잡아간 사람들 재판도 어시 처형한 게 아니구마씸?

장충삼 : 누가 그 따위 소리해?

유옥순 :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거짓말을 허쿠가?

장충삼 : (마음을 숨기는 듯 헛기침을 하고서) 난 그런 짓 한 적 없어.

유옥순 : 돗추렴허영 가족들 먹인 게 죄우꽈? 뱃일 하는 촌무지랭이 우리 아방이 어떵 빨갱이란 발이우꽈? 아주버님. 우리 아방광 하르바님 어떵 해부러수과? . 제발 고라줍서.

장충삼 : 그려 알고 싶다면 말해주지. 애초에 일을 그렇게 만든 것이 누군지 알아? 내 이런 사실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제 상옥이도 가버렸으니... 생각해 봐. 그때 고발한 사람이 없었으면 어떻게 그들을 잡아갈 수 있었겠나?

유옥순 :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우꽈?

장충삼 : 그 고발자가 당신 남편 김상옥이었단 말이야. (사라진다)

 

유옥순 충격에 빠지고 멍한 사이 젊은 시절의 명숙 나타난다.

 

유옥순 : 언니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 결혼을 모른 채 했단 말이우꽈?

명 숙 : 내가 알았다면 그냥 두고 보진 않았겠지. 우리 영감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나에게도 오랜 세월 숨겼거든. 상옥이가 죽고 나서야 왜 하필 너를 반려자로 택했는지를 알았어. 그건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속죄하는 일이라 판단했던 거 아니겠어?

유옥순 : 이럴 순 어수다. 어떵 인간의 탈을 쓰고 우리 집안을 통째로...

명 숙 : 따지고 보면 상옥인 어린 마음에 상금이 탐나서 그랬던 것이고, 크면서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너를... 그리고 월남에 자원해 가서 죽음 무릅쓰고 돈을 벌려고 했겠어? 그 동안 부쳐오는 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았잖아? 죽은 우리 동생만 불쌍하지.

유옥순 : 그걸 무사 이제사 골암수가. 무사?

 

유옥순 울부짖는데 암전.

 

 

3

 

며칠 후. 꿀꿀거리는 돼지 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진다.

후안과 병수, 돗통시 쪽에서 손을 털며 나온다.

 

김병수 : 거 봐, 도 도새기 잘 먹지?

후 안 : 아주 좋아하네. 앞으로 돼지 것은 내가 줄 거니까, 오빠는 먹이나 구해 와요.

김병수 : 마 마을에 기름집 있어. 도 도새기 깻묵 좋아해.

후 안 : 그래 알았어요. 헌데 저녁에 꼭 내가 나가야 해요?

김병수 : 그 그럼. 그 그거 때문 치 친구들이 나 쉬는 날 어 얼마나 기다렸다구. 다 당신 소개 시키라구. 해해해.

후 안 : 알았어요. 예쁘게 화장하고 기다릴 게요.

김병수 : 해해해. 치 친구들 우리 새각시 보면 부 부끄러워 죽을 거야. 해해해.

후 안 :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러워.

김병수 : 그래. 부러워. 해해해.

후 안 : 식당은 예약했어요?

김병수 : 지 지금 나가서 기 기름집 들리고 시 식당 에 예약할 거야.

후 안 : 할머님도 모시고 가야죠.

김병수 : 그 그럼.

후 안 : 어서 다녀와요. 내가 말씀 드릴 게요.

김병수 : 다 다녀올 게. (나가다가 다가와 후안을 껴안는다.)

후 안 : 어머, 대낮에 이거 무슨 짓이에요?

김병수 : 뭐 어때. 내 가 각신데. 나 후 후안 무지무지 좋아.

후 안 : (인기척을 느끼며) 이거 놔요. 할머니 나와요.

김병수 : 다 다녀올게.

 

병수 싱글벙글 거리며 나간다. 방안에서 나오는 유옥순이 뒷모습을 본다.

 

유옥순 :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후 안 : 오늘 일 안 나갔어요. 쉬는 날이라고. 저녁에 친구들한테 한턱 쏜다고 식당 예약하러 갔어요. 할머니도 함께 가요.

유옥순 : 난 싫다. 너나 가서 하영 먹고 축하 받아라. 젊은 애들 노는데 늙은이 눈총받기 싫다.

후 안 : 정 그러시면 포장해서 갖고 올 게요. 바다에 가시게요?

유옥순 : 오늘은 사리라 물에 못 든다. 밭에 강 검질 좀 매사키여. 요 메칠 걸렀더니 엄블랑해서라. 날씨가 가물언 큰일이여.

후 안 : 할머닌 너무 부지런하세요. 밭일도 하고 물질도 하고. 좀 쉬기도 하세요.

유옥순 : 일하단 사람은 쉬면 병난다. 그게 제주 여자들의 팔자다. 오죽하면 쇠로 못나면 여자로 난다고 하겠냐? 여기선 아들보다 딸을 나야 좋아해.

후 안 : 왜요?

유옥순 : 딸이 물질허영 돈 벌어오는 재산 밑천이니까? 그래서 딸 많은 집은 부자라고 하지.

후 안 : 여자의 섬이라는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유옥순 : 도새기 것은 줬어?

후 안 : , 수박 껍질이랑 얻어온 막걸리 쭈시 주니까 와삭바삭 잘 먹어요.

유옥순 : 그 녀석 살이 쪄 갈수록 걱정이 되는 구나.

후 안 : (화제를 바꾸려고) 할머니, 이제 나도 할머니랑 물질 할 수 있어요. 잠수하는 법이랑 빗창으로 전복 따는 법까지 다 배웠어요.

유옥순 : 숨 비우는 법도 알어?

후 안 : 그 휘파람같이 소리내는 거 말이죠?

유옥순 : 그래.

후 안 : (자랑스럽게) 그럼요. 물속에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어요. 다음 주에 수료식이에요.

유옥순 : 그려? 착하다. 이제 제주 사람 다 되어 가는 구나. 가만있어 봐라. (도로 안으로 들어간다)

 

후안, 수돗가로 가서 손을 씻는다. 유옥순, 망사리와 테왁을 들고 나온다

 

유옥순 : 어디 물 때 맞춰 혼디 가보자. 엤다. 이거 선물이다.

후 안 : (받으며) 이거 할머니가 만드셨어요?

유옥순 : 네가 해녀 학교 다닌다고 할 때부터 준비해 뒀던 거다.

후 안 : (기뻐하며) 와 우리 할머니 최고다. 고마워요. 이걸로 전복이랑 해삼 많이 많이 잡을게요.

유옥순 : 인석아. 물질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우습게 봤다간 바당에 잡혀 먹힌다. 모든 게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넌 누께통에서 이 할망신디 다시 배워.

후 안 : 할머니 누께통이 뭐예요?

유옥순 : 좀수가 되려면 물이 얕은 겡이통에서 헤엄을 배우고, 조금 깊은 곳, 누께통에서 물에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거야.

후 안 : 자맥질하는 건 진즉 마쳤지요. 내 실력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걸요?

유옥순 : 기여. 기여. 하이고 이렇게 착한 우리 손주 며느리, 느 아방이 봐시민 좋아할 건데.

후 안 : 참 사진을 보니까 우리 아버님 틀이 좋고 멋지게 생겼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대요?

유옥순 : (옛 생각에 잠기며) 흐흐 그 녀석 애비처럼 덕대가 좋았지. 어려서부터 우리 용철이 이길 놈이 없었어. 하도 싸움 잘해서 병원비에 합의금에 에미 속도 많이 태웠지. 그 뭐시냐. (흉내내며) 이렇게 하는 운동.

후 안 : 아 태권도요?

유옥순 : 그래. 태권도 선수로 대회 나가서 메달도 하영 탔다.

후 안 : 오빠가 보물이라면서 보여줬어요. 오빠도 아버님 닮아서 덩치가 좋은가 봐요.

유옥순 : 그 녀석 머리만 정상이었어도 한 가닥 했을 건데. 허나 이 다음 애기가 어찌 이상하게 될 거라곤 생각 마라. 그 녀석 배냇병신은 아니니까?

후 안 : 그 얘긴 저번에도 했잖아요? 뇌수막염으로 몇 달 간 고생했다구요.

유옥순 : 그랬나?

후 안 : 걱정 안 해요. 헌데 잘 나가던 아버님이 왜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님도 몹쓸 병에 걸렸어요?

유옥순 : 그것도 다 그놈의 영감탱이 때문이지. 광주에 그 뭐시냐 사건이 나던 해에 우리 용철이가 깡패라고 잡아간 거야.

후 안 : (갑자기 헛구역질을 한다)

유옥순 : 얘야 왜 그러냐? 뭘 잘못 먹었냐?

후 안 : 낮에 바다에서 짠물을 너무 많이...(다시 헛구역질)

유옥순 : 봉 먹었구나.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좀 쉬어라.

후 안 : 예 할머니. 속이 니글거리는 게. .

유옥순 : (고개를 갸우뚱)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니?

후 안 : (들어가며)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어두워지면서 유옥순에게만 스포트 라이트 떨어지고 한 쪽에 젊은 시절의 수호 나

타 난다.

 

박수호 : (들어오며) 삼촌. 삼촌.

유옥순 : (평상에 앉아 채소를 다듬는다) 무사, 또 우리 용철이 사고 쳐시냐?

박수호 : 그게 아니고 용철이 잡혀 가수다.

유옥순 : 경찰서 드나든 게 한두 번이라야 말이주. 이젠 아무 상도 않다.

박수호 : 나 얘기 잘 들읍서 양. 나라에서 사회정화를 한다고 깡패나 불량배들을 그 뭐시냐 응 삼청교육대에 잡아다 정신개조 시킨답니다.

유옥순 : 뭐 잡아가? 아니 우리 용철인 아직 학생인디? 무사 우리 용철이가 깡패가?

박수호 : 그거 소용어수다. 학교 파하고 집에 오는디 차 들이대고 잡아가 붑디다. 얼른 명순이 고모 찾아가 봅서. 그 고모부가 시내 경찰 간부 아니우꽈. 사정하면 빼낼 수도 이실 거우다.

유옥순 : 아니여 잘 되었져. 그 자식 이 참에 정신 차리게 내블켜.

박수호 : 삼촌. 거기 잡혀가면 맞앙 죽거나 병신 되엉 나온댄 마씸. 용철이가 무슨 죄 이수가? 우리한텐 정의의 사잔디. 용철이 성질에 고분고분 말 들을 아이도 아니고. 하나 이신 아들 개죽음 당해도 좋댄 허는 거우꽈?

유옥순 : (놀라며) 그게 촘말이가?

 

장면 전환되면, 한쪽에 장충삼 나타난다.

 

장충삼 :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라에서 읍내에 할당량 주어 잡혀 온 거니까? 용철이가 싸움 잘하는 거 나도 알아. (서류를 보며) 사유가 조직폭력배로 되어 있구만.

유옥순 : 우리 용철인 운동 선수우다. 싸움을 걸어온 아이들 혼내 준 거 뿐인데 무슨 깡패란 말이우과. 어멍 생각 끔찍이 잘 허는 착한 아인데. 아주버님. 용철인 조카 아니우꽈? 한 번만 봐줍서.

장충삼 : (고개를 저으며) 그놈 사람 만들려거든 그냥 놔둬. 정신 개조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유옥순 : 아방어시 키운 새낀디 용철이 어시믄 나 무슨 희망으로 살아갑니까? 제발 한 번만 살려줍서. 예 아주버니.

장충삼 : 거기 간다고 다 죽는 건 아니야. 세상이 바뀌었는데 순응하면서 살아가야지. 지난 번 시내에서 데모하는데 그 녀석이 앞장서서 돌팔매 질 하는 걸 내 눈으로 봤어. 어린놈이 무얼 안다고. 가만히 놔두면 빨갱이가 돼. 이번 참에 새 인간 되야지. 흐흐흐.

유옥순 : (울부짖으며) 정말 너무 햄수다. 남도 살려주는데. 제발 우리 용철이 한 번만 뵈 줍서 양 아주버님. 아이고 불쌍한 용철아.

 

암전 속에서 유옥순의 내레이션.

비바람 소리 거세다.

 

유옥순 : (소리) 착하던 놈이 거기 다녀오더니만 많이 변했어.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아이가 신경질도 많아지고, 얼마나 맞았으면 온몸이 수술자국이고 골병들언 비만 오면 하근 데가 쑤셔서 뒹굴며 난리도 아니었어.

김용철 : (평상에 누워 몸이 아파서 신음을 하며 나뒹굴며 발광을 한다) ..으흐흐. 어머니 나 좀 살려 줘. 아이고. 아이고 삭신이야. 아이고 나 죽네.

 

암전

 

 

4

 

밝아지면 80년대 중반이다.

용철 쇼핑백을 들고 들어온다. 유옥순은 평상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다.

 

김용철 : 어머니.

유옥순 : 아니 훤한 대낮에 무신 일이고?

김용철 : 날씨가 꾸물거리니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해수다.

유옥순 : 그렇게 자주 조퇴하면 회사에선 좋아해?

김용철 : 싫어해도 내 몸이 욱신거려 견디지 못하는 걸 어떵헙니까? 그렇잖아도 나이도 어린놈이 상사랍시고 잔소리하기에 그냥 사표내고 나와수다.

유옥순 : 그거 무슨 말이고? 느 고모부한테 사정사정 부탁허연 들어간 회사를 앞뒤 생각없이 그만 둬? 한 달 만에?

김용철 : 적성에도 안 맞고 봉급도 얼마 안돼요. 차라리 우리 밭에 축사나 지엉 돼지나 기르쿠다.

유옥순 : 그건 돈이 안 들어 가?

김용철 : 걱정 맙서. 융자 받앙 얼마든지 됩니다. (쇼핑백을 내밀며) 이거 받읍서. 선물이우다.

유옥순 : 봉급 족댄허멍 무신 쓰잘데 어신디 돈 썸시니?

김용철 : 그거 몇 푼 안 되는 거우다.

유옥순 : (쇼핑백 속에서 붉은 내복을 꺼낸다.) 하이고 이거 무신 거라?

김용철 : 남들이 첫 봉급 타서 어멍신디 내복 선물 했댄 소리 들을 때마다 막 부러워신디.

유옥순 : 나 내복 필요읏다.

김용철 : 나중에 돈 벌면 더 좋은 거 하영 사드리크메 나뒀당 저슬 들엉 찬바람 쌩쌩허걸랑 입읍서.

유옥순 : 고맙다. 밥은 먹어시냐?

김용철 : (들어가며) 하근디가 쑤셔서 술이나 한잔 먹엉 누엉자야쿠다.

유옥순 : 약을 먹어야주. 대낮부터 무슨 놈의 술이고?

김용철 : 내 병은 내가 압니다.

유옥순 : (하늘을 바라보며) 에고 회사 다니믄 좋은 색시 구허영 결혼시키젠 해신디. 그것도 다 틀렸구만. 하도 가물언 비는 내려사 할 거주만 용철이가 걱정이네.

 

암전 후 밝아지면 며칠 후. 돼지소리 꿀꿀거리는데 장충삼 들어온다.

 

장충삼 : (안을 향하여) 안에 있는가? (사이) 아주망?

유옥순 : (창문을 열고) 누게꽈? (장충삼을 발견하고 머리 손질 하며 나오며) 아이고 여기까지 무신 일이우꽈?

장충삼 : , 부탁할 말이 있어서. (평상에 앉으며) 용철인 집에 이신가?

유옥순 : (신발을 확인하고) 밤 도깨비우다. 낮인 퍼질렁 자당 저녁 되믄 나강 무신거 햄신디 날이 밝아사 들어옵니다..

장충삼 : 그 녀석 삼청교육대 다녀온 후론 사람 좀 되어신가 했더니.

유옥순 : 골병들언 술로 살암수다. (안을 향하여) 용철아? 용철아? 재게 일어낭 나와보라. 고모부님 오셨져.(사이) 들엄샤?

김용철 : (짜증섞인 소리로) 예게.

유옥순 : 재게 나오라.

장충삼 : (평상을 보며) 이거 예전부터 여기 이서나신가?

유옥순 : 병수 하르방 월남 가기 전 만들어 둰 간 거우다.

장충삼 : 오래 됐구만. 거 굴무기 낭 같은데 값 좀 나가겠는디...

유옥순 : (장충삼에게) 점심은 드십디가? 찬은 어수다만...

장충삼 : 먹어시난 거 시원한 물이나 한 잔 줘.

유옥순 : . 호꼬만 지둘립서. (부엌으로 들어간다)

김용철 : (안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오며) 오셨수과.

장충삼 : 그래. 이리 좀 앉아라. 경 매일 술로 젊은 인생 다 보냄시냐?

김용철 : (머리를 긁으며) 아니우다. 어젠 일이 있어서.

장충삼 : 너 사표 냈다는 말 들었다. 요즘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주선해 준 사람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김용철 : 죄송합니다. 저도 계획이 있어서요.

장충삼 : 계획?

김용철 : 나중에 확실하게 잡히게 되면 말씀 드리쿠다.

유옥순 : (물잔을 쟁반에 바치고 가져오며) 아이고 도새기 키우켄 햄수다.

장충삼 : (고개를 저으며) 그거 쉽지 않을 걸. 냄새 때문 마을 사람들이 동의 안 해 줄 거여. (물을 마신다)

김용철 : 친구 몇 명이서 중산간에다 땅을 마련허영 크게 해보기로 해수다.

장충삼 : 허가 날지도 의문이고 동업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경험 있는 것도 아니고.

김용철 : 젊다는 게 자본 아니우과? 실패를 두려워 말아사주 마씸.

장충삼 : 나 퇴직한 건 알고 있지?

김용철 ; . 어머니신디 소식 들어수다.

장충삼 : 너 사업하려면 나랑 같이 하자.

유옥순 : 아이고 얘가 아는 것도 어신디 어떵 사업을 합니까?

장충삼 : 내가 시내에 빌딩을 구입해 놓았는데 세입자 하나가 권리금 고집하며 버티는 바람에 말이야. 그래서 놀고 있는 네가 생각났지.

김용철 : 제가 무슨 일을 해요?

장충삼 : 그 세입자 잘 얼러서 나가게 해줘.

김용철 : 그냥 내쫓으라는 말씀이세요?

장충삼 : 아 아니지. 계약이 2년 남았는데 권리금은 무슨 권리금이야. 최소한의 보상금 주는 조건으로 앞장서 해결해 줘.

김용철 : 해결사 노릇 하라구요?

장충삼 : 내가 일을 그냥 시키겠어? 자네한테 돈 벌 기회를 주려는 거지.

김용철 : 뭘 어떻게요?

장충삼 : 요즘 노래방이 유행이잖아? 그 식당 뜯어 고쳐서 최신식으로 노래방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자본이 좀 달려서 말이야. 자본 좀 대.

유옥순 :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장충삼 : 그걸 전부 부담하라는 게 아니고 있는 만큼만 지분을 가지고 들어오면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게. 그 가게를 용철이 네가 운영하라는 거야.

김용철 : 그렇게 큰 돈 없어요.

장충삼 : 노가다 뛰면서 장가 갈 밑천 만들어 놓았다면서. 네 고모한테 들었다. 그리고 왜 월남 돈으로 마련한 그 밭 있잖은가?

유옥순 : 아이고 택도 어신 소리 맙서. 그건 아방 목숨하고 바꾼 건데.

장충삼 : 그걸 팔라는 게 아니고 담보 잡히면 내가 돈을 끌어올 수 있어. 그거 시설만 해놓으면 돈 들어갈 게 없고 현금을 만질 수 있는 거야.

김용철 : 시골 밭 얼마 주지도 않을 텐데, 생각은 해볼 게요.

유옥순 : 용철아, 재산이라곤 이 집과 그게 전부다. 어차피 네 것이니까 잘 생각해서 해라.

장충삼 : (일어서며) 시간 그리 많지 않다. 덤비는 사람 많지만 조카 생각해서 제안하는 것이니까. 얼른 돈 벌어서 장가도 가야지. 마음 정하면 연락 줘. 가네.(나간다)

김용철 : 살피고 가세요.

유옥순 : 용철아, 심으로 사람 상대하려 말고 착하게 살아라. 돈에 눈이 어둑우면 안 된다. 정직하게 벌고, 있는 만큼만 쓰면 되는 거야. 네 튼튼한 육신이면 무슨 일을 하던 굶어 죽기야 허크냐? 그리고 고모부 너무 믿지 마라. 아방이 무사 월남 간 죽었는지 알암지?

김용철 : 알아요. 어머니. 잘 생각해서 할게요.

 

암전

 

 

5

 

신나는 음악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지면 한쪽에 노래방.

복녀, 혼자서 격렬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다가 탈진한 듯 바닥에 쓰러진다.

암전되었다가 밝아지면 용철 음료수를 들고 들어와 쓰러진 복녀를 발견한다.

 

김용철 : (흔들어 깨우며) 여보세요. 여보세요?

심복녀 : (부시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 잘 잤다. (용철을 발견하고 움츠리며) 어머, 누 누구세요?

김용철 : 깜짝 놀랐잖아요. 저 이 노래방 주인입니다.

심복녀 : 그러세요? (툭툭 털고 일어나며) 시간 다 되었죠?

김용철 : 시간 더 드렸어요. 근데 아무 소리 안 나서.

심복녀 : 지금 몇 시예요?

김용철 : 새벽 다섯 시요. (음료수를 내밀며) 이거 좀 드세요.

심복녀 : (받으며) 고마워요. 문 닫을 시간이 훨씬 지났네요.

김용철 : 괜찮아요. 손님이 있으면 아침까지도 해요. 시간 더 넣을까요?

심복녀 : 아뇨.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는데 몸부림치고 나니 후련하네요.

김용철 : 노랠 좋아하시나 보다. 헌데 관광 오셨어요?

심복녀 : . (했다가) 아뇨 누굴 만나러 왔어요.

김용철 : 이 노래방에서요?

심복녀 : 아뇨. 한라산에서요.

김용철 : (고개를 갸웃하며) 한라산에서 산신이라도 만나나요?

심복녀 :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김용철 : 난 농담으로 한 말인데 정말이세요?

심복녀 : . 전 산신님을 꼭 만나야 해요.

김용철 : 아이디가 한라산신님인 거죠?

심복녀 : 아뇨. 정확히는 제 어머니예요.

김용철 : (무슨 말인지 몰라 갸우뚱)...

심복녀 :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헌데 부탁이 있어요. 저 며칠 동안만 여기 있으면 안돼요? 대신 잔심부름은 할 게요.

김용철 : 그렇잖아도 알바를 구하려던 참인데 잘 되었네요. 헌데 많이 드릴 수 없어서.

심복녀 : 괜찮아요. 먹고 잘 돈만 있으면.

김용철 : 좋습니다. 우리 가겐 아침 열한 시에 문을 열어 새벽 두 시까지 영업해요. 저녁에 손이 딸리는데 7시부터 끝날 때까지 괜찮겠어요? 대신 저녁은 드릴 게요.

심복녀 : 다 좋은데요. 잘 곳이 없는데 여기서 자면 안될까요?

김용철 : 여긴 불편해요.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멀지 않은 시골에 제 집이 있는데.

심복녀 : (생각을 하며) 싱글이세요?

김용철 : 아 어머니랑 함께 살아요. 작지만 여분의 방도 있고요.

심복녀 : 그럼 당분간만 신세 질게요. 그분 만나면 난 떠나야 해요.

김용철 : (실망하며) 오래 있을 분이 필요한데.

심복녀 :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분의 명령에 따라야 해요. 곁에 있으라 하면 여기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김용철 :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리를 하며) 자 문 닫고 집에 가서 눈 좀 붙여요.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거예요.

심복녀 : (갑자기 생기를 띠며) 해가 뜬다고요? 아 멋있겠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어요. 함께 가요. 높은 산 위에 올라 태양의 기운을 마셔요. 몸에 천상의 활력이 담길 거예요. 우린 감사의 뜻으로 하늘에 재를 지내요. 오빠가 노랠 불러 주신다면 난 춤을 추겠어요.

김용철 ; 재미있겠네. 갑시다.

 

암전.

 

 

6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 자지러진다.

복녀는 외출 복장을 하고 평상에 멍하니 앉아 있다.

유옥순 들어오다 애기 울음소리 듣고 복녀를 나무란다.

 

유옥순 : 아니 아기 우는데 어멍은 뭐 햄시?

심복녀 : (고개를 흔들며) 내 애기 아니에요.

유옥순 : (들어가며) 미친년.

심복녀 : (혼자소리로) 나 그냥 보내줘요. 난 여기선 못 살아요.

유옥순 : (포대기에 아기를 안고 나온다. 애기는 계속 운다) 어여 그래그래. 병수야. 배고픈가 보다. 우유 먹여시냐? 어멍이 족발 고은 물이라도 좀 먹어야 젖이 나오주. 경 통 안 먹으니 몸이 말이 아니여.

심복녀 : 나 애기 못 키워요.

유옥순 : 이런 복둥이 나 놓고 무사? 용철이와 씨워샤?

심복녀 : 아뇨 어머니.

유옥순 : 아이고 순둥이. 졸려서 그랬구나. (포대기를 도닥이며) 그래. 그래. 병수야 코 자블라. 아이고 착한 거. 자장. 자장.

심복녀 : 용철 씨가 날 속였어요.

유옥순 : 우리 용철이가 어때서. 틀 좋겠다, 무사 남자 구실 못 햄시냐?

심복녀 : 난 시집가면 안 되는데 오빠가 꼬시는 바람에.

유옥순 : 완전한 사람 어디 이시니. 사람 사는 게 그런 거지. 속는 거 알면서 눈감아주고, 배설창지 끈차지게 억울해도 속으로 삭이며 살아야 하는 게 세상살이다. 복녀야 난 네가 너무 고맙다. 없는 집안에 시집와 이렇게 두꺼비같은 아들 낳아주고 하늘이 내린 복이라 생각하고 있다.

심복녀 : 아니에요. 어머니, 난 가야해요. 그 분이 떠나라고 야단치고 계세요.

유옥순 : 애기 어멍이 애길 두고 어디 간다는 말이고? 다른 남자 생겨시냐?

심복녀 : 그런 게 아니에요.

유옥순 : 게민 그 분이 누구고?

심복녀 : 제 어머니에요. 내 몸의 주인인 신어머니 말이예요.

유옥순 : 헛소릴 하는 걸 보니 제 정신이 아닌 모양이로구나.

심복녀 : 어머니 미안해요. 제 몸속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유옥순: 무신 거? 복녀야, 어디 불편한데라도 이시냐? 아니면 간밤에 악몽을 꾸었던지. 몸이 허해서 그런 모양이로구나. 그래 애를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못했으니. 내가 미안하다.

심복녀 : 아니에요. 어머니. (핸드백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유옥순 : , 복녀야.

 

애기가 다시 자지러지게 운다. 유옥순 애기를 달래면서 따라가는데, 장충삼이 들어

온다.

 

장충삼 : 무슨 일 생긴 거여? 사람보고 인사도 없이.

유옥순 : (둘러대듯) . 친정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장충삼 : 아침에 뭐 잘 못 먹었는지. 차 타고 오는 내내... 나 급해. 변소 어디야?

유옥순 : (가리키며) 저기요. 그래 그래. 가서 자자.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장충삼 어그적거리며 변소로 들어가고 유옥순은 손주를 어르며 방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 장충삼, 옷을 추스르며 나와 수돗가로 가서 손을 씻는

데 할머니 쟁반에 참외를 들고 나온다.

 

유옥순 : 아침 일찍 어쩐 일이세요?

장충삼 : . 용철이 하고 의논할 일이 있어서. (평상에 앉는다)

유옥순 : 올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안 들어왔는데요?

장충삼 : 가게는 일찍 문닫아 놓고 또 어디 가서 밤새 쳐먹었구만.

유옥순 : (과일을 깎으며) 이것 좀 드시구 이십서. 연락 취해 보쿠다.

장충삼 : 그거 깎지 마. 속이 안 좋아서 먹지 못해.

유옥순 : 요즘 장사 안돼서 속상한지 맨날 술타령이우다.

장충삼 : 장사가 안 되면 대책을 세워야지. 난 더 손해막심이라 속상해 죽을 판인데.

 

애기가 운다. 그러는 사이 용철 등장한다. 용철은 술이 아직 덜 깬 상태다.

 

유옥순 : 저기 오람수다. (방으로 들어가며) 잘 놀던 녀석이 오늘은 왜 저럴까?

김용철 : (장충삼을 발견하고 인사한다) 오셨어요?

장충삼 : 그래. 요즘은 몇 시까지 영업하는 거냐? 어제도 열 시 쯤 가게에 들렀더니 불이 꺼져 있던데.

김용철 : 친구 생일이어서 일찍 문 닫았어요. 요즘 손님 없어요.

장충삼 : 그렇게 많던 손님이 뚝 끊어진 이유가 뭐야?

김용철 : 기계를 잘 못 들였어요. 매번 손님이 노래를 하는데 고장도 잦고, 주변에 최신식 시설 갖춘 노래방이 많이 생겼잖아요.

장충삼 : 요즘 몇 달 영업실적도 그렇고 해서. 그 비싼 시설해 놓고 이자도 안 나온다면 대책을 세워얄 것 아니냐?

김용철 : 몇 개 방의 기계를 갈면 되긴 합니다.

장충삼 : 들어간 돈이 얼만데 거기다 또 투자하라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그래서 말인데 내 결심했어.

김용철 : 무슨 말씀이신지.

장충삼 : 노래방 처분 하려고 한다.

김용철 : (놀라며) 처분이라니요?

장충삼 : 아니면 네가 전부 맡아나던지.

김용철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돈이 어딨다고?

장충삼 : 투자한 것에 비하면 택도 없지만 담보로 맡긴 밭 내가 인수하마.

김용철 : 말도 안 됩니다. 그게 어떤 밭인데.

장충삼 : 그럼 팔자. 서로 손해 보는 거지. 팔아도 네가 빌린 돈 반도 못 갚을 거야.

김용철 : 어린아이 궁둥이에 붙은 밥풀 떼어먹는 거지. 여유 있는 고모부님이 이럴 수 있는 겁니까? 가만히 있는 조카 꼬득여 놓고.

장충삼 : 난 사업가야.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자네는 손해 난 거 없어. 거기서 각시 만나고 한동안 그 수입으로 먹고 살았잖아?

김용철 : 기계 몇 개만 바꿔주세요.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게요.

장충삼 : 난 한번 결심한 건 안 바꿔. 자네 밭 넘긴다면 기계 몇 개 살 돈은 주지. 난 그 밭에다 팬션을 지을 생각이야.

김용철 : (버럭) 뭐라고? 이 개새끼가. 너 우리 집 아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구나.

장충삼 : (급변한 태도에 놀라며) 용철이 자네 술이 안 깨었는가? 왜 이러는가?

김용철 : 네가 한 행실을 몰라서 물어? (주변을 둘러 몽둥이를 집어들고) 야 이 개백정같은 새끼야. 너 우리 외할아버지 죽이고, 우리 아방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날 삼청교육대 보낸 거 다 네놈 짓이잖아?

장충삼 : 그거 다 오해야. 난 잘못한 것 없어. 다 도와주려고 그런 거야.

김용철 : . 뭘 도와? 우리 집 망하는 걸 도왔냐? 이 개만도 못한 놈. 그러고서 이젠 우리 재산까지 들어먹으려 해. 이리와 널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 거야. (다가선다)

유옥순 : (나오며) 용철아 이게 무슨 짓이고?

장충삼 : (피하며) 용철이 나 고모부야. 정신 차려.

김용철 : 고모부 좋아하네. 넌 대대로 우리 집안 웬수야. 개새끼야. (몽둥이 후려 친다)

장충삼 : (피하면서 유옥순 뒤에 숨는다) 아이고 날 살려줘.

유옥순 : (막으며) 용철아, 술 취해시믄 곱게 들어강 자라. 이 무슨 행패고?

김용철 : 어머닌 상관 마시고 비낍서.

장충삼 : 술이 덜 깬 모양이군. 나중에 연락 줘.

김용철 : 야 이놈아. 어디 가. 나 정신 멀쩡해 이 새끼야.(어머니를 제치고 몽둥이로 후려치려 한다)

장충삼 : (도망치며) 나 가네.

유옥순 : 무슨 일 이시냐? 고모부한데 무신 와달씀이고?

김용철 : 고모부가 아니라 저놈 순 날강도 웬수우다. 한두 번 당해시믄 됐주. 친족이라고 만만하게 봐서 이젠 아버지 남긴 밭 들어먹젠 허는 걸 눈 뜨고 보란 말이우꽈?

유옥순 : 처음부터 난 믿지 못했다. 동업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말렸어야 했는데.

김용철 : 절대 난 안 당할 거우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어머닌 신경 끕서.

 

애기 우는 소리.

 

김용철 : 복녀 어디 가수과?

유옥순 : 무사 느하고 의논 안해샤? 친정 갔다 온다고.

김용철 : (절하며) 끝내 그 쌍년이.

유옥순 : 무슨 일 이시냐?

김용철 : 그년하고는 못살아요. 그년은 도망 간 거라구요.

유옥순 : 거 무슨 소리고? 멀리 못 가실 거여. 강 심엉오라게.

김용철 : 소용없어요. 그 여잔 신이 내려서 무당질 해야 할 사람이라구요.

유옥순 : 하이구야. 세상에 이런 일도 이시카.

김용철 : 밤중에 웅크리고 앉아 두려움에 떨며 잠을 못잔지 오래 되었어요.

유옥순 : 먹지도 않고 자지도 못하면서 몸은 가베왕 팔팔 날라다니니 그거 참 신기하다 생각했주기.

김용철 : 애초에 그런 여잔 줄 알면서 결혼 한 내가 잘못이에요.

유옥순 : (자책하며) 지지리도 못난 년. 서방 복 없는 년이 며느리 복은 이실라구. 게민 물애긴 어떵 헐 거라게. (들어간다)

 

배나무에 뱀이 감긴 것을 발견한다.

 

김용철 : 아니 저놈이. (막대기로 뱀을 후려친다.)

유옥순 : (애기를 안고 나와서 보다가 놀라며) 용철아 뭐 하는 것고?

김용철 : 구렁이에요. 이거 잡아서 술 담아야겠어요.

유옥순 : (놀라며) 아이고 큰 일 난다. 건드리지 말아.

김용철 : 가만 이십서. (다시 몽둥이질을 한다). 요놈아 어딜 도망가?

유옥순 : 그만 둬. 거 우리집 지켜주는 영물이다. 건드리면 액을 당한다. (애기를 평상에 눕히고 사라지는 뱀을 보고 합장하고 절을 한다) 아이고 칠성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노여움 푸시고 모르고 한 짓이니 한 번만 용서해 줍서. 이놈아 너도 어서 빌어.

김용철 : 에이 그런 미신 난 안 믿어요.

유옥순 : 에고

 

아기가 자지러지게 운다.

 

김용철 : (평상으로 가며) 어머니, 병수가 무사 마씸?

유옥순 : 게매. 어멍 가분 거 알암신가?

김용철 : (아기를 안으며 이마를 짚어본다)

유옥순 : 어디 아픈가 보다.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자꾸 깨어 남저.

김용철 : 하이고 몸이 불같은데 왜 이리 동여매수과? (평상에 누이고 포대기를 헤쳐낸다)

유옥순 : (수돗가에 가서 수건에 물을 적셔 가져온다) 마 이걸로 닦아보라.

김용철 : 안 되쿠다. 보건소 댕겨 와야쿠다 (아기를 안고 나가려다 휘청거리며 아기와 함께 엎어진다. 아기는 심하게 운다.)

유옥순 : (다가가서) 게난 술을 작작 마시주. 이리 도라.

김용철 : (일어서며) 아니우다. 나가 가쿠다. 병수야. 미안하다. (휘청거리면서도 애를 안고 달려 나간다)

유옥순 : 아이구 내 새끼. 할망이 잘못했구나. (대문 앞에 서서 두손을 모아 빌며) 아이고 산심할마님. 심어가컬랑 날 심어가곡 제발 우리 병수 아무 탈어시 살려줍서. 제발 영 빌엄수다. 제발 살려줍서.

 

암전.

 

 

7

 

어둠 속에서 영혼의 구음 같은 소리 들리다가 희미한 조명을 받고 용철 등장한다.

장충삼 병원 병상에 누워있다.

 

김용철 : (몽둥이를 들고) 장충삼. 어서 일어나.

장충삼 :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구요?

김용철 : 널 잡으러 온 저승사자다.

장충삼 : (피하며) 난 죽기 싫어. 지금은 준비가 안 됐어.

김용철 : 그만큼 누렸으면 됐지. 왜 아직도 더 죽여야 할 사람이 남았는가? 당신은 벌써 죽어야할 사람이야. 도대체 몇 사람을 더 죽여야 만족할 텐가? 당신은 인간 세상에 도움이 안 돼.

장충삼 : 당신 누구야?

김용철 : 똑똑히 봐. 내가 누군지?

장충삼 : (잘못 알아보고) 사 상옥이?

김용철 : 흐흐흐 우리 부친도 다녀가셨는가? 하긴 내 외증조부 유갑식, 외조부 유창수 님도 자주 왕림하시겠지.

장충삼 : (그제야 알아보고) 너 용철이구나. 김용철.

김용철 : 그래. 당신 때문 죽은 김용철이다.

장충삼 : 난 잘못 한 게 없다. 난 직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뿐이야.

김용철 : 장충삼이란 인간은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전생에 우리 집안과 무슨 원한이라도 맺은 건가?

장충삼 : 내가 뭘 잘못했기에?

김용철 : 당신 저능아야? 아니면 벌거벗은 임금님 행세 하는 거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아직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구?

장충삼 : 나도 피해자야. 빨갱이는 내 원수야. 재산 다 빼앗고 부모를 죽이고 나를 적수공권으로 이곳까지 내 몬 원수들이라고.

김용철 : 촌무지렁이 돌챙이 할으방과 뱃사람이 무슨 이념을 안다고 빨갱이라 내몰았는가?

장충삼 : 난 공직자였어.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야. 그때 이곳은 빨갱이 천지였어. 그래서 섬 전체에 불을 놓아 죽여 없애야 한다고도 했어.

김용철 : 그렇게 빨갱이로 모니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올랐는데, 무슨 전염병에 감염된 가축처럼 가족들까지 전부 잡아다 죽였지.

장충삼 : 폭도들은 안 그랬는 줄 알어? 군인 경찰 가족 집에 불 지르고, 우리한테 동조했다고 죄없는 마을 사람들 죽창으로 찔러 죽였어.

김용철 : 원한은 복수를 낳고, 복수는 다시 원한을 낳았어. 풀릴 수 없는 이야긴 그만 두고 한가지 물어봅시다. 정말로 우리 집과 무슨 원한이 있는 건가? 아니면 우리 집안이 그리 만만하게 보여서 아버질 사지로 내몬 건가?

장충삼 : 난 김상옥이가 하도 사정하기에 살릴 방법을 알려준 것뿐이야. 너희 부친이 아니었으면 지금 너희들이 이만큼이라도 살았을 줄 아니?

김용철 : 그래 친족이라고 찾아갔더니 당신은 돈을 요구했다더군. 그것도 공직자의 직무인가?

장충삼 : 그건 내가 먹은 게 아니고 상급자에 기름칠 할 자금이었어.

김용철 : 나를 삼청교육대에서 빼내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했어. 당신이 잡아넣었으니 빼 줄 수도 있었는데 그때부터 당신은 우리 집 알량한 돈을 노린 거야. 결국은 당신은 목적을 달성했고 난 분통이 터져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

장충삼 : 난 너 때문에 이렇게 일찍 병환이 도진 거야. 네게 맞은 후유증 때문에. 그렇다구 그게 죽을 일이었냐구, 자네 성질 값 하느라 그리 된 거지.

김용철 : 이제 당신도 얼마 안 남았어. 이러고도 우릴 볼 낯이 있어?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통하게 죽었는지 생각해 보라구. 저승 오기 전에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 회개해야 살아있는 사람들도 오해를 풀고 마음의 상처를 씻을 거 아냐.

장충삼 : 죄라면 나라에 충성한 죄인데 무엇을 회개하라는 거야?

김용철 :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놈이군. 에라이 나쁜 놈. 너같은 놈에겐 몽둥이가 약이다. (몽둥이를 내리친다) 이놈아 죽어라. 저승에 오면 넌 더 이상 도망 갈 곳도 없으니 각오해 이놈아.

장충삼 : (피해 도망 다니며) 아이고, 사람 살려.

 

암전. 밝아지면 병실의 독방.

 

장충삼 : (병상에서 허우적 댄다) 아이고, 사람 살려. 나 죽네.

유옥순 :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 광경을 본다) 정신 차립서. 아주버님.

장충삼 : (정신이 드는 듯) 누구야?

유옥순 : 나우다. 용철이 어멍마씸. 꿈 꾸십디가?

장충삼 : (일어나 앉으며) . 잘 왔져.

유옥순 : 언니는?

장충삼 : 잠시 집에 다니러 갔어. 곤 올 거야.

유옥순 : 그간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허우다.

장충삼 : 아니야. 내가 많이 밉겠지. 그리 앉아.

유옥순 : (비닐 백을 탁자 위에 놓으며) 뭐 가져 올 것도 없고. 어제 전복 몇 개 건졌는데 죽이라도 쒀 드십서.

장충삼 : 나 그런 거 못 먹어. 이렇게 멀쩡해 보여도 살 날 얼마 안남은 사람이야.

유옥순 : (앉는다) 경해도 오래 사서얍주.

장충삼 : 나신디 서운한 게 아주망이 더 많겠주만. 갈 때가 다 되어가난 꿈자리가 하도 어지러원 잠을 이룰 수가 없네. 자네 부친을 비롯해서 상옥이, 용철이 까지 나타나네.

유옥순 : 다 잊기로 해수다.

장충삼 : 아니야. 내가 편치 못해서 그래. 저승에 가서 볼 면목도 없고. 그래서 아주망을 오라고 한 거네.

유옥순 : 다 지난 일이난 그냥 잊어붑서.

장충삼 :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아주망. 날 용서해 주게. 내가 잘못했네. 처음엔 정말 빨갱이가 미워서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실적 올리는데 혈안이 되어 과잉 충성했던 게 사실이야. 그 때문 아주망 조부와 부친이 죽었지만 개인적 원한은 없었어. 그리고 상옥을 월남에 보낸 것이나 용철이 죽게 한 것도 모두 내 사심 때문이었어. 용서해 주게.(눈물 흘리며) 정말 참회하네. 내가 진즉 죽었어야 할 놈이야.

유옥순 : (눈가를 훔치며) 아주버님, 경 말씀해 주시니 이제야 몇 십 년 가슴에 맺힌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담수다. 원망도 하영했고 눈물도 하영 흘려수다만 가버린 사람은 가버린 사람이고 산 사람은 악착같이 살아얍주. 그만 일어나십서. 이젠 되어수다. 다 용서하쿠다. 영 회개허면 다 풀어질 일을. 가심 속에 담아두난 여러 사람 간장이 녹아부러수게. 진심을 얘기허믄 다 풀릴 일을. 고맙수다.

장충삼 : 그렇게 말해주니, 이젠 편안히 눈감을 수 있을 거 같네.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한다.) 고맙네. 고맙네.

 

암전.

 

 

8

 

유옥순 물질 갔다가 돌아와 물바구니와 체취한 해산물들을 정리하는데 병수와 후안

들어온다.

 

김병수 : 하 할머니! 흐흐흐.

유옥순 :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로구나.

김병수 : 우 우리 애 애기 생겼어.

유옥순 : (놀라서 후안에게) 그게 참말이여?

후 안 : , 3개월째라고.

유옥순 : (돌아서서 손을 합장하고 허공을 향해 허리 숙여 절하며) 하이고 고맙습니다. 요왕님, 삼승할마님 고맙습니다. 칠성님, 산신님도 정말 고맙습니다.

김병수 : 후안. 피 피곤하지? 드 들어가서 쉬어.

후 안 : 아냐, 적당한 운동은 태아한테도 좋다고 했어. 물질도 열심히 해서 오빠처럼 튼튼한 아기 나아야지.

김병수 : 흐흐흐 나처럼?

유옥순 : 당분간 물질은 안 된다. 물질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애기가 온전히 자리잡을 때까진 몸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후 안 : 할머닌 해산하는 날에도 물에 들었다면서요?

유옥순 : 그게 옛날에 먹고살기 위해 그런 거다. 그렇게 몸을 함부로 했으니 성격 나쁜 애기를 낳은 거지. 뱅수도 이제 애기 아방 되니까 좀더 의젓해져야 하고.

김병수 : 애 애기 아방, 흐흐흐. 애기 나면 기 기저기 빠는 거 목욕시키는 거 나가 다 할 거야.

후 안 : 오빠부터 깨끗해야지. 그렇게 씻는 걸 싫어해요. 옷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김병수 : 어 후 후안 너. 그런 거 다 꼬질러 바치고 너.

유옥순 : 내가 다 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그냥 이불 속으로 들어갔으니까?

후 안 : 그렇게 더러우면 아기 병 나는 거 알지?

김병수 : 아 알아. 씻을게. 청소도 깨끗이 하고.(수돗가로 가서 손을 씻으려 한다)

후 안 : 밥 차릴 테니 들어가서 샤워해요.

김병수 : (전복을 보고) 와 이 이거 대따 크다. 후안 이거 봐.

유옥순 : 그래. 오늘은 좋은 소식 들으려고 그랬는지 운수대통했다. 손바닥보다 큰 게 여럿 눈에 보이더라만 숨이 차서 다 건질 수 있어야 말이지.

후 안 : (다가가 망사리를 헤쳐 꺼내보며) 할머니 정말 대단하세요. 난 언제 이런 거 잡아보나?

유옥순 : 초짜 똥군에게 잡힐 얼빠진 전복이 어디 있나?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 차근차근 하다보면 기량이 늘게 돼 있어. 후안은 아직 젊으니까 할망보다 더 많은 것을 잡을 거야. 옛날엔 나도 상군소리 들어신디 나이가 들수록...

김병수 : 이거 꽤 가 값이 나가겠는 걸? 할머니 이거 나 줘요?

유옥순 : 뭐하게?

김병수 : 이 이거 팔아서 애기 오 옷 사야죠.

유옥순 : 망할 녀석. 아직 나지도 않은 애 걱정은? 할망 재산 다 너 꺼니까 걱정마라. 닭 한 마리 사다 그거 넣고 고아 먹자.

후 안 : 이 아까운 것을?

유옥순 : 영양 보충하는 것이 돈 버는 거다. 오늘같이 기쁜 날 우리끼리 잔치해야지.

김병수 : 그 그거 잔치 아니라 파 파티에요.

후 안 : 멍석이 덕석이죠. 그 말이 그 말이에요.

유옥순 : 아이고 후안 한국말이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그래 파티하자.

김병수 : 나 나가 닭 사올게. 애 애기 아방이 한턱 쏘아야지.흐흐흐

후 안 : 돈 있어요?

김병수 : 요 용돈 안 쓰고 남은 거 있어.(주머니에서 꺼내며) 이거 봐.

후 안 : 어쩐지 요즘 지갑이 빈다했더니 그거 훔쳐 간 거죠? 게임방 드나들려고.

김병수 : 흐흐흐 미안. 나 게임방 안 가고 이렇게 모았어.

유옥순 : 게임방이 무엇고? 애기 키우려면 헛된데 똔 쓰지 말고 부지런히 모아야 한다.

김병수 : 가 각시야. 나 앞으론 절대 게임방 아 안 갈 거야. 정말이야.

후 안 : 알았어요. 가서 큰 놈으로 사와요.

김병수 : 그래, 크 큰 놈으로.

 

복녀 들어오다 병수와 마주친다. 병색이 완연하다.

복녀, 병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김병수 : (한 번 쓱 쳐다보고는 헤헤 웃으며) 하 할머니. 소 소 손님 왔어.(나간다)

후 안 : 어떻게 오셨어요?

심복녀 : 여기가 병수네 집 맞죠?

후 안 : 아까 나간 사람이 병수 오빤데. 누구셔요?

심복녀 : 그랬구나.

유옥순 : (멀뚱하게 쳐다보며) 우리 병수를 어떵 알암신고?

심복녀 : (유옥순을 보고) 아 어머님.

유옥순 : 어머님?

심복녀 : 저에요. 병수 에미. 복녀예요.

후 안 : 병수 씨 어머니요?

유옥순 : (외면하며) 난 그런 사람 모른다. 벵수 어멍은 나여. 나가 키워신디 어멍이 또 어디 있단 말고.

심복녀 : 면목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여도 전 할 말 없습니다.

유옥순 : 지 자식 내팽개쳐 두고 몇 십 년 살아시면 되었주. 무신 것 허래 지금 나타나 어멍이랜 허는 것고?

심복녀 :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침을 하며 휘청인다)

후 안 : (부축하며) 우선 여기 좀 앉으셔요.

심복녀 : 아닙니다. 병수 얼굴 보았으니 됐습니다. 잘 키우셨군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전 그럼. (돌아서 나가려고 한다)

후 안 : (안타까워) 어머님.

심복녀 : (돌아서 후안을 본다)

유옥순 : 후안아. 그 사람 어멍 아니다. 퍼질러 쌌다고 다 어멍이더냐?

후 안 : 먼 길 오신 것 같은데 병수 오빠랑 얘기도 나누시고 가셔요. 병수 오빤 지금도 남들이 엄마, 아빠 얘기만 하면 주눅이 들어요. 엄마, 아빠 소릴 못하고 자랐잖아요?

유순옥 : 경해도 잘 컸다. 이제 와서 괜히 마음만 상하게 만들지 말고 벵수 오기 전에 썩 가버려.

후 안 : 할머니. 몸도 성치 못한 사람한테 왜 그리 박정하게 대하세요? 그래도 우리 집 찾아온 손님인데. 그리 좀 앉으세요.

심복녀 : (마지못한 척 앉는다) 고마워요.

유순옥 : (외면한 채) 그냥 가래도.

후 안 : 할머니 오빠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던 엄만데요.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이건 경우가 아니죠?

유순옥 : 느도 나 말을 안 듣는 구나. 그려 할망은 날구쟁기 똥이지. 그간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아이고 서러워라. 아이고 억울해라. (눈물을 훔친다)

후 안 : 할머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병수 씨나 제가 할머닐 얼마나 사랑한다고요.

심복녀 : 어머님. 마음은 있어도 올 수가 없었어요. 그간 제 몸은 제 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애를 써 몸속의 신을 떼어내니 몸속엔 병마가 들어앉더라고요. 해준 것도 없으니 에미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죽기 전에 내 피를 받은 자식 얼굴은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일어서며) 고생 많으셨어요.(땅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부디 만수무강하세요.

유순옥 : (당황하며) 이거 무슨 짓이고.

심복녀 : (일어서며) 자식 버린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돌아서 나가려 한다)

후 안 : 그렇게 가시면 어떻게 해요. 병수 오빠한테도 용서를 구해야잖아요?

심복녀 : 네가 병수 각시인 모양이구나. 면목없다. 대신 전해 다오. 병수 잘 부탁한다. 고맙다.

후 안 : 할머니 어머님 보내놓고 후회하지 마시고 뭐라 한 말씀 하세요. 이대로 보내면 병수 씨가 할머닐 원망할 거예요.(사이) 정말 그냥 보내실 거예요?

유옥순 : 날도 다 저물었는데 가긴 어딜 가? 웃어른 허락도 어시 함부로 왔다갔다 하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구나? 지금꺼정 고생시켜시믄 말주. 늙어죽도록 이 할망신디 뒤치다꺼리 허랜 말가? 난 말다. 아멩 경해도 와시믄 남편은 만낭 가살 거 아니?

후 안 : 그래요. 이왕 오셨으니 낼 아침 아버님 무덤에 술이라도 한잔 올리세요?

유옥순 : 벵수도 만나고 가.

심복녀 : 고맙습니다.

후 안 : 거기 앉으셔요. 오빠 금방 올 거예요. 잠깐만 기다리셔요. (안으로 들어간다)

심복녀 : (앉으며) 어머니, 밉고 보기도 싫겠지만 여기 와 좀 앉으세요.

유옥순 : (닫혔던 마음이 무너지는 듯 달려와 복녀의 어께를 때리며) 이년아 왜 이제야 왔어? ?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나타나 이년아.

심복녀 : (유옥순을 안으며) 어머님.

유옥순 : 잘 왔다. 이제라도 오니 되었다. (복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예고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추운 날에 똥 기저귀 빨 때면 널 얼마나 원망했는지 알어?

심복녀 : (눈물이 흐른다) 죄송해요. 어머니.

유옥순 : 아방어시 자란 박복한 년이라 서방복도 엇곡 자식도 일찍 가버리고 저 말도 졸바로 못하는 손자를 키우면서 쏟은 눈물만 열 허벅은 될 거여. 그 서러운 사정을 얘기허젠 허믄 달포를 지새우멍 고라도 못 끝낼 거여.

심복녀 : 그 심정 다 이해해요. 어머님.

유옥순 : 이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나 벗하며 살 거지?

심복녀 : . 어머님. 제가 잘 모실 게요.(콜록콜록)

유옥순 : (얼굴을 보며) 언젠가는 한 번 쯤 얼굴 내밀 줄 알았다. 그땐 몽둥이로 실컷 패주고 내쫓으려 했는데. 사람이 딱 마주치니 모심대로 안 되는 구나.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여. 여기 살면 공기도 좋고 물도 맑고 싱싱한 해물 먹으면 병도 나을 게다.

심복녀 : 고맙습니다. 어머님

유옥순 : (한숨을 내쉬며) 이젠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후안, 과일을 가져와 깎는다.

 

심복녀 : 오래 사셔야죠. 헌데 병수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요?

유옥순 : 칠성님을 괜히 건드려 액을 당한 거야.

후 안 : 칠성님이 누구에요?

유옥순 : 집을 지키는 뱀을 칠성이라고 하지. 느 떠나버린 날 용철이가 칠성을 건드린 벌이 병수한테 내린 거야. 그날 이후로 먹이면 토해내고 울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산송장이 되어버렸지. 그걸 보고 용철인 절망을 했어. 암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가 없지. 그렇게 술로 날을 보내던 어느 날.(다시 소매로 콧물을 닦고) 돈벌어먹던 가게가 처분됐다는 소문을 듣자 고모 하르방을 찾아간 난리를 피웠지. 그리고선 농약을 먹고서는 그만.....(다시 눈물을 닦는다)

심복녀 : (눈물을 흘리며) 다 제 잘못이에요. 제 탓이에요.

유옥순 : 지 아방이 죽은 걸 알았는지 그제야 병수가 눈을 뜨더라만 정상이 아니더라.

후 안 : 살아난 것만도 축복이죠.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까요.

유옥순 : 그래. 대가 끊길 뻔 했는데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무를 다하게 됐으니 다행스럽고 복 받은 일이지. 병수가 아니었으면 내가 무얼 믿고 어찌 살았을까? 거기다 예쁘고 똘똘한 손자며느리까지 주셨으니 그게 내 고생의 댓가인가 보다.

심복녀 : 후안이라고 했나?

후 안 : . 어머님. 베트남에서 왔어요.

심복녀 : 어머니 여생 편안히 지내라고 하늘이 내리신 거 같아요.

 

병수, 생닭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김병수 : (봉지를 내밀며) 새 색시야 이 이거 받어.

후 안 : 사 왔어? (봉지를 받아 열어보며) 와 크다.

김병수 : (손을 벌리며) 이 이따만 한 놈으로 사 사 왔어.

후 안 : (병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잘했어, 오빠.

김병수 : (복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어? 아 아직도 있네?

후 안 : 오빠, 인사드려. 어머님이셔.

김병수 : (멀뚱이 쳐다보며) 어어? 베 베트남 어머니? 아 아닌데?

유옥순 : 너 낳아준 어멍이란다.

심복녀 : (와락 껴안으며) 병수야, 미안하다. 병수야. (오열한다)

김병수 : (감정이 없다) 어머니? (사이. 떨어지며) 이러지 말아요. 난 고 고아야. 나 난 어머니가 없어요.

심복녀 : 미안하다. 그려, 내가 무슨 염치로. 날 많이 원망했겠지.

김병수 : 그 그런 거 몰라요. 하 하지만 다 닭죽 먹고 가세요.

후 안 : 전복 넣고 닭을 삶을 거예요.

김병수 : 우 우리 각시 다 닭죽 최고로 잘 끓여.

심복녀 : 그러니?

김병수 : 우 우리 각시, 이 임신했어. 사 삼개월이야. 그래서 닭 사왔어.

심복녀 : 덕분에 보신하게 생겼구나. 고맙다.

김병수 : (후안에게) 후 후안 어서 들어가자.

후 안 : 그래. 오빤 마늘 좀 까줘.

김병수 : 알았어.

 

후안과 병수 방안으로 들어가는데, 수호가 들어온다.

 

심복녀 : (흐믓하게 바라보며) 꼭 오누이 같아요. (기침을 한다) 콜록콜록

박수호 : 삼촌. (심복녀를 보고) ? 누게꽈?

유옥순 : 용철이 각시여?

김수호 : 와우 살아 이섰구나 양. 반갑수다. 나 알아지쿠가? 용철이 친구 수호마씸.

심복녀 : 기억이 나요. 살아있으니 이렇게 보는 군요. 면목 없습니다.

유옥순 : 늘랑 안트레 들어강 좀 쉬엄시라.

심복녀 : 괜찮아요. (다시 기침) 콜록콜록.

유옥순 : 거 눈치도 어시. 제게 들어가랜 해도. 몸도 시원치 않으멍.

심복녀 :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리고) . 알았습니다. (들어간다)

박수호 : 자주 얼굴 봅주양?

유옥순 : 봥 무시것 허젠?

박수호 : 삼촌. 소식 들읍디가?

유옥순 : 무슨 소리고?

박수호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 이수다.

유옥순 : 증손주 가진 거 말고 좋은 소식 또 있단 말이가?

박수호 : 증손자 마씸? 병수 처가 애를 가져수가?

유옥순 : 그려.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박수호 : 경사가 겹쳐수다 양,

유옥순 ; 그거 말고 좋은 일이 뭐꼬?

박수호 : 유창수 씨가 삼촌 부친님 함자 아니우까?

유옥순 : 우리 아버님 이름이 유창수 맞다. 헌디 무사 죽은 사람 거느렴시니?

박수호 : 방금 시내 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이우다. 거 비행장에서 사건 때 죽은 사람들 시신 발굴했젠 안헙디가?

유옥순 : 그 소식은 들었져마는?

박수호 : 경찰서에 조캐가 이선 국과수에서 결과 내려오민 얼른 알으켜 도랜 고라놔십주. 헌디 오늘 아침은 연락 온 거라 마씸.

유옥순 : 경허연 우리 아버님도 있단 말가?

박수호 : . 나 눈으로 확인해수다. 우리 아버님도 찾았고 마씸.

유옥순 : 어마떵허리. 이거 무슨 일이고?

박수호 : 곧세 연락 올 거우다. 장례도 다시 지내야 헐 거난 도새기 내어 노읍서.

유옥순 : 헌디 나쁜 소식은 뭐고?

박수호 : 아참. 시내 간 김에 검진 받으려고 병원엘 들려신디, 거기서 용철이 고모를 만났지 뭐우까?

유옥순 : 경허난?

박수호 : 남편이 돌아가신 모양입디다. 중환자실에서 울며 나오는 걸 봐수다.

유옥순 : 죽어? 에고 나쁜 짓 헌 사름 명도 길댄 핸게. 경 살젠 남의 애간장 다 녹여신가? (한숨을 내쉬며) 에휴.

박수호 : (걱정스런 표정으로) 삼촌.

유옥순 : 참 오늘은 이상한 날이네. 모든 일이 한꺼번에 닥치다니.

박수호 : 돗추렴허랜 영 허는거우다.

유옥순 : 경허주. 집나간 메느리도 돌아와시난 당장 돗추렴 허게.

박수호 : 알았수다. 삼촌. 기다립서. 나가 곧 사람들 모아 오크매. (바삐 뛰어나간다)

유옥순 : (안을 향하여) 후안아! 벵수야!

김병수 : (안에서 나오며) 할머니. 왜 왜요?

유옥순 : 도새기 잡아야 허켜.

김병수 : (영문을 모르고) 도 도새기 잡아요?

 

후안과 심복녀도 나와 유옥순을 지켜본다.

유옥순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춘다.

 

유옥순 : 기여. 동네 잔치해야 허켜. 이렇게 기쁜 날 도새기 잡앙 잔치 해야주. 아이구 좋아라. 지화자 좋네.

 

암전.

 

 

9

 

돼지 잡는 날이다.

돼지의 멱 따는 비명소리 들리다 조명 밝아지면 돼지가 밧줄로 목이 묶인 채 이문

(대문)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실루엣 보인다. 바둥거리다 이내 잠잠해진다.

피쟁이 수호가 앞에서 식칼을 갈고 있고, 후안은 허벅을 지고 물을 길어 나르고,

수는 지게에 나무토막을 지어 나르고,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등 마을 사람들 부산

스럽게 움직인다.

 

합창 : 돗추렴 하는 날

요놈의 도새기 울지를 말어라.

오늘을 위하여 배불리 먹이고

오늘을 위하여 정성껏 돌봤지

살신성인이 너의 운명

소신공양이 너의 팔자

오늘은 돗 잡는 날 돗추렴 잔칫날

 

요놈의 도새기 억울해 말어라

네가 없으면 대소사 못 치르고

네가 없으면 식게 맹질 못 하지.

살신성인이 너의 운명

소신공양이 너의 팔자

오늘은 돗 잡는 날 돗추렴 잔칫날

 

박수호 : (일어서며) 돼지털 주문한 사람 누게라?

동네1 : . 도배장시 덕만이우다. 거 풀비 만드는데 도새기 털 만한 게 어십주. 뻣뻣하면서도 소락소락 헌 게. (엄지를 내밀며) 왔땁주.

박수호 : 쓸 만큼 뽑아 가게.

동네1 : 아 예. (뺀치를 작동해보며 나간다) 이걸로 왕창 뽑아 가쿠다.

박수호 : 거 병수야.

김병수 : .

박수호 : 거 눌쿱에 강 보리낭 좀 빼 오라. 털 다 뽑으민 도새기 기시려야 헌다.

김병수 : 아 알아수다. 헌디, 오 오줌보랑 나 줍서 양.

박수호 : 다 큰 것이 그거 가졍 무신 거 허젠.

김병수 : 아 아이덜이 나신디 부 부탁허연 마씸. 그 그걸 차멍 놀켄.

박수호 : 경허라. 경허곡 느 처 신디 피 받을 바게쓰 아정 오랜 허라.

김병수 : 우 우리 색시 모 몸조심해야 허난 일 시키지 맙서. 나 나가 허쿠다.

박수호 : 아이고 각시 애낌도.

김병수 : 해해해. 나 그 금방 애기 아방될 거. 해해해.

박수호 : 경 좋으냐?

김병수 : 사 삼촌네 용식인 아 아직 애기 없지 양?

박수호 : 이게 날 놀리려고. 야 식도 안올린 게 애기부터 만들엉 되나?

유옥순 : (다가서며) 안될 거 무신 거꼬. 병수야 그 입좀 다물고 다니라. 사름들이 숭 봠시네.

김병수 : (들어가며) 수 숭 봐도 괜찮아. 조 좋은 걸 어떻게. 해해해.

박수호 : 삼춘 수예 담을 준비 되어신가 마씸?

유옥순 : 눈 맬라가멍 부지런히 맹글엄져.

박수호 : 선지는 곧세 굳어부난 재게 섞어야 헙니다.

유옥순 : 알암져. 헌디 추렴할 사름들 다 오라신가?

박수호 : 고만 십서 확인 해봅주. (주머니에서 비료봉지 조각을 꺼내들고 확인하며) 어디 보자. 대가리는 성주풀이헐 선주네. (사람들 틈에서 확인하고 체크하며) 오랐고. 전각은 순보네와 점순이네. (소리친다) 점순이네. 점순이네 안 와서?

후 안 : 옆집인데 제가 가서 데려 올게요.

유옥순 : 거 푸더지지(넘어지지) 말앙 조심허라이.

후 안 : 알았어요. 할머니.(나간다)

박수호 : 아강발은 춘자네. (확인하며) 춘자가 안 보염져?

유옥순 : 정지에서 불 솜암서. 헌디 그 늙은 할망이 아강발은 무사?

박수호 : 메누리 해산 해신디 젖이 족게 나온댄 마씸.

유옥순 : 기이? 아강발이 젖 불리는 덴 최고주.

박수호 : 엽갈리는 할망네 식당에 아져다 주기로 했고.

동네2 : (다가와서) 간 좀 구할 수 이수가?

박수호 : 임자가 이신디? 무신 거 허젠.

동네2 : 간이 빈혈에 좋댄허지 안험니까? 우리 딸 병 구환허젠 마씸.

박수호 : 그거 우리 아들 눈이 나빠서 나가 아도 해신디?

유옥순 : 거 호끔씩 나눵 먹게. 존배설이영 홈치 일꾼들 술안주로도 내놓콕.

박수호 : . 의논 족족헙주.

유옥순 : 경허곡 뒷다리 두 쪽은 나가 쓰는 거 알암주이?

박수호 : . 남겨 두쿠다. 장사 지내는디 경 하영 필요허우꽈?

유옥순 : 한 쪽은 부친 묻는데 쓰곡, 한 쪽은 고모네 집에 보내사켜. 경 안해도 우리 집 도새기 때문 싸워신디. 사름 목숨 하나가 얼매나 중한디.(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죽어블민 아무 소용 어신디. 무사 경 개와 고냉이 마냥 살아신고.

박수호 : 삼촌은 평생 바당에서 사난 경헌지 참 마음이 바당처럼 넙수다.

유옥순 : 게믄 어떵허느니? 잘못 했젠 무릎 꿇엉 비는디. 이젠 가심에 묻은 아픔들 다 털어내곡 잊어부러사주. 알고보믄 동네 사람들이 다 친족이고 사촌들인디. 경허영 화해가 된다면 경 해사주. 혼디 살아사주.

 

털 뽑힌 하얀 돼지가 마당으로 도망쳐 나온다. 사람들 희한한 광경에 놀란다.

 

동네1 : (소리) 도새기 도망감져. 도새기 심으라.

김병수: (뒤따라 나오며) 거 거기서 꿀순아. (피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재 재게 심읍서게. 무 무사 경 피 피허기만 햄수가.

 

돼지와 병수 퇴장하고 수호와 사람들 뒤를 쫓는다.

 

유옥순 : (동네1에게) 아고게. 도대체 어떵 된 거라?

동네1 : 털을 뽑고 나서 끈을 풀고 내려놓았더니, 죽은 줄만 알았던 도새기가 정신이 돌아와신지 저영 되어수다.

유옥순 : 어마떵허리. 이 노릇을 어떵허코.

 

잠시 후, 후안 들뜬 마음으로 들어오며 유옥순을 찾는다. 심복녀 따라 나온다.

 

후 안 : 할머니, 할머니. 전화왔어요.

유옥순 : 나신디?

후 안 : 아뇨. 베트남에서. 어머니가 퇴원했대요 다음 주에 한국 오신다고 비행기표 예약까지 했대요.

유옥순 : 다음 주? 아이고, 이거 돗추렴 괜히 했구나게.

심복녀 : 어머님, 돼지는 얼마든지 있어요. 제가 구해 올 게요.

유옥순 : 그려 느가 혼주니까. 알앙허라. 이제야 사돈 볼 면목도 생겼구나.

후 안 : 아이구 배야. 뱃속의 아기도 기뻐하나 봐요.

심복녀 : 어서 안으로 들어가 몸조리 해라.

후 안 : 예 어머님.

 

이때 돼지 울음소리 들린다.

 

심복녀 : 돼지가 잡혔나 봐요?

유옥순 : 흐흐흐 그 몸에 가긴 어딜 가?

 

며느리 삼대가, 대문간을 바라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데 돼지 울음소리 크게 들리

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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