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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제주설화의 연못

사랑의 농신 자청비

강용준 2011. 4. 25. 19:24

사랑의 농신(農神) 자청비


아주 오랜 옛날 주년국 땅에 나이 많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전답과 재산을 가지고 비복들을 거느리며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고민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오십이 되었는데도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시주승에게 공양을 하고, 불당에 가서 백일 불공을 드린 후, 딸을 얻었는데 자청하여 나은 자식이라 하여 ‘자청비’라고 불렀다.

세월은 흘러 자청비의 나이 열다섯이 되었을 때, 빨래터에서 글공부를 하려고 하계에 내려오는 하늘 옥황 문국성의 아들 문왕성 도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느끼었다.

자청비는 문 도령을 따라 갈 심산으로 자신의 오라비를 글공부에 함께 데려 가줄 것을 문 도령에게 부탁했다.

자청비의 부모는 여자가 글을 배우면 팔자가 박복해진다고 만류했지만, 자청비는 남장을 하여 오라비 행세를 하며, 문 도령을 따라 글공부를 떠났다.

그날부터 둘이는 한 솥 밥을 먹고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서당에 같이 앉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문 도령은 자청도령의 책 읽는 소리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의심을 하였지만, 남잔지 여잔지 알아 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글공부 성적은 자청비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청도령의 성별을 판별할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 낸 문 도령은 자청도령에게 내기를 제의했다.

남자들끼리 오줌발이 누가 멀리 가느냐 시합을 하자는 것이었다.

자청비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그러자고 쉽게 응낙했다.

달 밝은 밤 두 사람은 오줌 갈기기 시합을 하는데, 문 도령보다 자청비가 훨씬 멀리 나갔다. 자청비는 대나무를 잘라다가 바지가랑이에 끼우고 죽을힘을 내며 맥을 썼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 도령은 자청비에 대한 의심을 버리게 되고, 둘이는 사이좋게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 도령은 옥황의 부친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색시감을 구해 두었으니 글공부는 그만하고 올라 와 혼사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삼 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 정이 흠뻑 들어버린 자청비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자청비도 글공부를 그만 두고 문 도령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시냇가에 다다른 자청비는 문 도령에게 삼년동안 글공부하였으니 글때나 씻고 돌아가자고 하며 같이 목욕하기를 권했다.

자청비는 자신의 마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내고 문 도령이 목욕하고 있는 위쪽으로 올라가 버들잎에 ‘남자, 여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 멍청아’라고 써 시냇물에 흘려보내고는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와 버렸다.

뒤늦게 자청비가 여자인 것을 안 문 도령은 자청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용솟음침을 억누를 수 없어 자청비의 집을 찾아갔다.

자청비는 옷을 곱게 차려 입고 문 도령을 맞이하여 부모님께 인사시켰다.

진수성찬으로 저녁상을 차렸으나, 어찌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겠는가.

밥상을 한 쪽으로 치워놓고, 원앙금침 이부자리 펴서 삼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올올이 풀어내었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닭이 울어 날이 밝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이별이 시간이 다가왔음을 못내 아쉬워 했다.

문 도령은 빗을 꺾어 반쪽을 나눠 가지고, 박 씨를 정표로 주었다.

박 씨를 심어서 박이 줄을 벋고 익어서 박을 타게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 줄 알라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재회를 약속하며 눈물의 이별을 하였다.

문 도령을 보내고 난 자청비는 창문 앞에 박씨를  심었다. 하지만 박이 익기 전에 돌아온다던 문 도령은 돌아올 줄 모르고 박이 커 가는 것처럼 자청비의 수심은 한없이 쌓여만 갔다.


한편, 자청비네 집에는 정수남이라는 종이 있었다.

이 종은 게으르지만, 먹는 것에는 상대할 자가 없는 대식가였다.

자청비는 정수남에게 소와 말을 끌고 가서 땔감을 하러 오라고 일을 시켰다.

소와 말을 몰고 산에 올라온 정수남은 다리도 아프고 해서 한 숨 쉬고서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여 끌고 온 소와 말들을 나무에 묶어 두고, 가져온 음식을 단숨에 먹어 치웠다.

배불리 먹고 나니 슬슬 잠이 오는 것이었다.

잠시만 눈을 붙이려고 했던 게 동쪽으로 돌아누워 한잠, 서쪽으로 돌아누워 한잠을 자다보니, 몇 달 며칠을 잤는지, 끌고 온 소와 말들은 그만 굶어 죽어 갔다.

잠이 깬 정수남은 삭정이 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 주걱 같은 손톱으로 죽은 쇠의 가죽을 벗겨 가며 고기를 굽기 시작하였는데, 익었는가 한 점, 설었는가 한 점 먹다보니 소와 말들이 간 곳이 없어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쇠가죽과 말가죽인데, 정 수남은 그것들을 짊어지고, 도끼를 둘러메고 집으로 향하여 오다보니 연못에 오리 한 마리가 두둥실 떠 있는 모습이 그지없이 고와 보였다.

정수남은 오리를 잡아다가 자청비의 환심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소, 말가죽은 길가에 놓아두고, 오리를 겨냥하여 도끼를 던졌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도끼를 찾으려고 옷을 벗고 연못으로 걸어들어 갔으나 도끼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찾다가 포기하고 연못에서 나왔는데, 이번에는 소, 말가죽은 물론 잠방이까지 도둑맞고 말았다.

정수남은 발가벗은 몸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넓은 나뭇잎들을 모아 겨우 아랫도리만 감추고,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뒷길로 해서 뒷문으로 집에 들어섰지만 차마 자청비가 무서워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정수남은 할 수 없이 장독대에 가서 장독 뚜껑을 쓰고 독 안에 숨어있기로 하였다.

헌데, 이때 저녁밥을 지으려고, 간장을 뜨러 왔던 하녀가 장독 뚜껑이 들썩들썩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가보니 정수남이 발가벗고 숨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질겁을 하게 되었다.

 정수남은 기어코 벗은 몸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되며 자청비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정수남은 자초지종을 묻는 자청비에게 '굴미산에 올라보니 하늘 옥황 문 도령이 궁녀와 시녀를 데리고 내려와 노는 모습이 하도 재미가 있어, 구경하다보니 소와 말은 간 곳이 없고 오리라도 잡아 보려고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옷까지 도둑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문 도령을 보았다는 말에 자청비가 흥미를 느끼자, 정 수남은 한술 더 떠 문 도령이 모레 오후에 다시 온다는 약속을 하였노라고 거짓말을 더 보탰다.

자청비는 문 도령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달아 정 수남에게 많은 음식을 먹이고, 그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

자청비는 문 도령 만날 생각에 가슴만 부풀어 하루 낮 이틀 밤을 꼬박 세우고도 피곤한 줄 몰랐다.

약속한 날이 밝자, 고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배불리 얻어먹은 정수남은 꾀를 내어 말 안장아래 소라 껍질을 집어넣었다.

자청비가 말 위에 올라타자 소라껍질에 찔린 말은 요동을 치면서 자청비를 땅에 넘어뜨리고야 말았다.

정수남은 말이 거부하니 할 수 없이 자기가 타고 가겠노라고 했다.

자청비는 정수남의 비위를 건드리면 심통을 부릴까 봐, 그리하라고 허락했다.

안장 밑에서 소라껍질을 꺼낸 정수남이 말에 올라타고 채찍을 휘두르니 말은 바람같이 십리 밖을 내달았다.

자청비는 속은 줄도 모르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나무에 옷을 찢겨 가며 산에 올라보니, 정수남은 말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그늘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자청비는 기가 막혔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정수남의 욕심과 심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청비의 음식까지 모두 빼앗아 먹고는 문 도령과 약속한 곳을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자청비는 자신이 정수남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문 도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자청비가 문 도령 있는 곳을 알려주면 정수남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정수남은 자신의 신분도 모르고 응큼하게 자청비의 몸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목을 잡아보려다가 거절당하자, 입술을 원했고, 허리를 안아보려고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하자 정수남은 벌컥 화를 냈다.

자청비는 정 수남이 화를 내는 것을 보고는 겁이 났다.

이제 곧 어둠이 찾아오면 정수남이 자기를 그냥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에 그를 달래었다.

자청비는 정수남에게 밤을 같이 새울 움막을 지으라고 하였다.

움막을 다 지으면 몸을 허락하겠다고 하자, 정수남은 큰 돌들을 날라다 벽을 쌓고, 나무를 엮어 지붕을 만들어 금새 움막을 완성시켰다.

그러자, 자청비는 돌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추워 못 자겠다고 하고는 밖으로 나가서 돌 틈새를 억새로 막으라고 하였다.

정수남이 불빛이 새는 구멍을 열 개 막으면, 자청비는 안에서 다섯 개를 빼내고, 스무 개를 막으면 아홉 개를 빼내고 하는 동안에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나중에 움막에 수북히 쌓인 억새를 보고 정수남이 속은 것을 알았다.

정수남이 화를 내자 자청비는 요 대신 깔아 놓은 것이라고 달래며,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우면 머리에 이를 잡아 주겠노라고 하였다.

정수남이 기뻐하며, 자청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밤새 고단하게 움직인 정수남은 곧 잠이 들었다.

자청비는 청머루덩굴 가지를 꺾어 정 수남의 왼쪽 귀로 오른 쪽 귀까지 관통하도록 찔러 정수남을 죽게 하였다.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온 자청비는 자초지종 얘기를 부모에게 하였으나, 부모는 도리어 자청비에게 화를 내었다.

딸은 시집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종은 자신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신들을 돌봐 줄 것이라며 자청비에게 나가서 정수남을 살려 오라고 호통을 쳤다.

자청비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서러워 울면서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서산에 해는 기울고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무서움에 떨면서 한참을 뛰어 달리는데, 어느 인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안에서 베틀소리가 들려왔다.

노파 혼자서 비단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비단은 옥황의 문 도령이 장가가는데 혼수 감으로 사용할 거라는 것이었다.

자청비는 그토록 믿었던 문 도령이 자기를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자청비는 자신이 그 비단을 짜겠노라고 자청하고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비단을 짜나갔다. 비단이 완성되어 가자 끄트머리에 가련하다 가령비, 자청하다 자청비라고 새겨 넣었다.

그리고, 비단이 다 되자 노파는 비단을 가지고 옥황에 올라 문 도령과 만났다.

문 도령은 아름답게 짜여진 비단을 보고 누구의 작품이냐고 물었다.

노파는 자청비와 함께 비단을 만들었노라 하자, 문 도령은 깜짝 놀라며, 다음날 자청비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자청비는 그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 도령이 찾아온다는 밤이 되었다. 달빛은 교교하게 비치는데, 자청비는 단장을 마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노래를 불렀다.

문 도령이 그 노래 소리를 듣고는 자청비임을 알았지만, 자청비는 문 도령의 사랑을 지레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별할 때 정표로 남긴 빗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문 도령은 빗 반쪽을 간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러진 빗을 맞추고는 그들의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단정회를 풀었다.

날이 밝자 문 도령은 자청비를 데리고 옥황으로 올라갔다.

문 도령은 부모에게 자청비를 인사시키고 나서, 이미 둘 사이는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서수왕 딸과의 혼약은 파기하겠노라고 했다.

문 도령의 아버지는 자청비를 시험하겠다고 했다.

문국성 가문의 며느리가 되려면, 숯불이 이글거리는 쉰 자나 되는 구덩이에 작도를 걸어놓고 그 위를 걸어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청비는 문 도령을 향한 사랑에 무엇이 두렵겠는가하고는 작두를 타다 떨어져 죽더라도 후회를 않겠다고 작심하고는 시험에 응하기로 했다.

자청비의 그 갸륵한 뜻이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자청비는 무사히 작두를 타고 건너 문 도령의 아내가 되었다.

어느 해 옥황에는 큰 변란이 일어났다.

군사들이 난을 일으켜 나라가 온통 시끄러웠다. 문 도령도 전쟁에 나갈 처지가 되자 자청비는 문 도령을 대신하여 전쟁터로 나가길 자청하였다.

자청비는 서천 꽃밭에서 얻어온 멸망 꽃을 뿌려 반란군들을 제압하니, 천자가 기뻐 하며 자청비를 친히 부르고 소원을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자청비는 오곡의 씨앗을 원하였다.

자청비는 문 도령과 함께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 왔다.

그리하여 자청비는 농신(農神)이 되었고, 자청비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날을 기념하여 칠월 보름에는 백종제(百種祭)를 지내는 풍습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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