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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설화의 연못

삼성혈과 혼인지

강용준 2011. 6. 15. 12:29

  개국신화의 모태 삼성혈과 혼인지


 

'삼성혈'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高), 양(梁), 부(夫)씨 세 성씨의 신인(神人)들이 땅 속에서 솟아난 구멍이란 뜻이다.

이들은 아득한 옛날 한날한시에 땅으로부터 솟아났는데 태어난 순서에 따라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 칭했는데, 일설에는 활을 쏘아 형과 아우를 정했다고도 한다. 또한 일부 문헌에는 양을나가 먼저라는 이설이 있어서 고씨와 양씨 후손들 간의 논쟁이 있기도 했다.


세 신인들은 사냥을 해서 육식을 했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동굴에서 잠을 잤다.

그들은 의가 좋아 공동작업을 하며 먹을 것이 풍부하여 걱정이 없었으나, 마땅한 배필이 없어 후손을 생산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섬을 떠돌며 사냥을 하던 세 신인은 동쪽 바다를 바라보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꽃으로 장식한 자줏빛 상자가 떠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세 신인은 단숨에 바다로 내려갔다.

상자는 주인을 기다리는 듯 거친 파도에도 움직이질 않고 뭍에 닿았다.

 이윽고 상자가 열리니 안에는 새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옥함 옆에는 사자가 지키고 있었다.

사자가 먼저 말을 타고 나와 세 신인에게 절을 하고 옥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아름다운 처녀 세 사람이 나왔다.

이들은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내렸다.

사자가 말했다.

“저는 동해 벽랑국의 임금의 명을 받들고 온 사자입니다.

저희 임금께서 세 딸을 두셨는데 혼기가 다 차도 마땅한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서쪽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이 이곳으로 뻗히는 것을 보고 점을 쳐본즉 장차 나라를 여실 귀한 분들이 여기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임금께서는 저에게 세 공주를 모셔가 짝을 짓도록 명령 하셨습니다.

부디 배필로 맞이하여 혼인식을 올리시고 나라를 열어 자손 번창하십시오.“

말을 마친 사자는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세 신인은 이는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내리신 선물이라 하고 쾌성을 질렀다.

세 신인은 곧 목욕재계하여 혼인을 하늘에 고하고 순서에 따라 그녀들을 배필로 맞이하여 '혼인지'에서 혼인식을 올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동굴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로부터 이들은 곡식 농사를 지어 양식을 마련했고, 소를 키워 농사를 짓는 데 활용했으며, 말을 교통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또한 가족을 이뤄 정착생활을 시작했고 자체적인 규율로 질서를 마련함으로써 사회가 이뤄지고 문화와 정치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는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식이 생기고 자손이 불어나가자 이들은 한곳에서 모여 살기가 불편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땅이 기름지고 살기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활을 쏘아 거처를 정하기로 했는데 고을나가 제1도에, 2도에는 양을나, 3도에는 부을나 가족들이 살았다.

지금 화북동에 이들이 쏜 화살이 꽂혔다는 '삼사석(三射石)' 유적이 있으며 제주시의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의 명칭은 이에서 원용했다.


세 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맞이한 포구를 '연혼포'(延婚浦-결혼을 이끌어들인 포구)라 하고, 꽃으로 장식된 상자가 도착한 곳을 '화상(花箱)개 '또는 세 신인이 쾌성을 질렀다고 하여 '쾌성개'라 부르며 그곳에 말이 올라오면서 힘차게 내딛은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를 '몰성개'라 한다.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 포구에 있다.

이 세 신인과 세 공주가 목욕재계를 했던 못인 '혼인지'는 암반지대 500평 정도의 연못이다.

이 연못에서 동쪽으로 50미터 지점에 동굴이 있는데 결혼한 세 신인이 한동안 신혼방으로 거처 했던 '신방굴'이다.

이 삼성신화에 등장하는 벽랑국은 일본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의하면 탐라의 자손들은 육지부와의 교류 이전에 이미 일본국과 교류를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을나는 천 년을 살았는데 구백 살이 나던 해에 탐라국을 세워 재위하니 기원전 2337년이라 한다. 15세 후왕에 이르러 왕은 아우 청, 계 형제와 더불어 신라에 입조했다.

신라왕은 이들이 도착하기 전 남쪽 하늘에 객성이 나타나자 역관에게 이를 풀이하게 한즉 남쪽에서 귀한 손님이 올 징조라 했다.

마침내 탐라에서 온 일행이 도착하므로 신라왕은 크게 기뻐했다.

이에 신라왕은 고후에게 성상(星象)을 움직였다 하여 성주(星主)의 칭호를 주고 고청에게는 친아들과 같이 사랑한다는 뜻으로 왕자(王子)의 작위를 주고 고계에게는 도내(徒內)라는 작위를 주었다. 

 탐라국이 해외 외교를 시작한 첫번째 기록이다.

한편 이도의 양을나는 왕위를 백팔 세까지 이어갔다.

양을나는 기원전 2332년에 나라를 열고 고조선과 국교를 가졌으며 중국의 요․순에 조공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삼성신인을 모신 삼성사에선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이들 신인들을 위한 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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