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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제주설화의 연못

김녕사굴

강용준 2011. 9. 14. 07:56

 

 

김녕사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인습을 타파한 서련과 김녕사굴



제주의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金寧蛇窟)에는 속칭 ‘대맹’이라는 큰 뱀이 숨어 살아,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15~18세 되는 청순한 처녀를 제물로 바쳐오고 있었다.

때마다 제사를 지내 처녀를 바치지 않으면 뱀은 조화를 일으켜 농사를 모조리 망쳐놓기 일쑤였다.

그뿐 아니라 약초나 나무를 캐러 나온 사람들을 물어 죽이는 일도 빈번하여 사람들은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힘센 장사를 구하여 그 뱀을 죽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고 때로는 그 장사마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생기는 터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딸이 있는 집에서는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피하려고 집에 밀실을 만들어 딸을 숨겨놓고 기르는가 하면, 권세 있는 양반 집안에서는 딸을 바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부나 어부의 딸들이 시집도 가지 못한 채 제물로 바쳐져야 했다.

관아에서는 이러한 것을 미신이라고 하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여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사람들은 오히려 겁을 먹으며 이를 듣지 않았다.


조선조 중종 10년(1510).

제주목(濟州牧)에 새로운 판관(判官)으로 서련(徐憐)이 부임하였다.

성종 25년(1494)에 태어난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명하였다.

부모 없이 자람을 가엽게 여긴 외조부 양경공(良敬公) 정문형(鄭文炯)이 그의 이름을 련(憐 : 불쌍히 여길 련)이라 짓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고 가르쳤다.

외조부 슬하에서 학문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서련은 중종 6년(1511)에 1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중종 8년에 제주목 판관에 임명되어 도임했는데 역대 판관 중에 최연소자다.

서련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고 얼마 후 아전으로부터 김녕 마을에서 해마다 나이 어린 처녀를 뱀굴에 제물로 바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크게 놀랐다.

“아무리 무지한 백성이라 하나 귀중한 인명을 뱀에게 바치다니 될 말이냐?”

“그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중지토록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듣지를 않았습니다.”

“행여 피해가 더 커질까봐 무서워서 그러는 것일 게다.

 내 반드시 이 뱀을 죽여 더이상 폐습이 거듭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서련은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는 날짜를 알아두도록 하고 뱀을 죽이기 위한 계책을 마련하였다.


얼마 후 뱀에게 마을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제례가 열리게 되었다.

그는 병졸과 힘센 장사 수십 명으로 하여금 창과 칼을 지니고 염초(=화약)를 준비토록 하여 굴 입구에 대기시켰다.

제례가 시작되고 마지막 순서로 큰북을 치자 커다란 구렁이가 굴 밖으로 기어나와 소녀를 삼키려 하였다.

이때를 기다려 서련이 들고 있던 창으로 뱀을 향해 내리 찌르자 병졸들과 장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도끼와 창으로 사정없이 뱀을 찔렀다. 이와 동시에 뱀의 몸뚱이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당기면서 굴 입구에는 화약을 터뜨렸다.

거대한 뱀은 요란하게 몸부림치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공포에 질렸던 소녀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서련에게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마을 사람들도 뱀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는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사람들은 이어 서련 판관에게 몰려들어 그의 용기와 은혜에 감사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여러분들을 괴롭히던 뱀이 죽었으니 안심하십시오.”

“마을의 우환을 없애준 은덕을 마을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옵니다.”

서련을 도와 뱀을 처치한 병졸과 장사들도 그의 용기와 결단에 모두 감복하였다.

제사를 지내려던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제물을 가지고 기쁨의 잔치를 벌였고

그러한 마을 사람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면서 서련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서련이 마을을 빠져나와 제주성을 향하는데 갑자기 하늘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따르던 부하 한 명이 서련에게 급히 아뢰었다.

“이는 필시 대맹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뒤를 쫓는가 봅니다.

성 안에 이를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시고 말을 달리십시오.”

“알았다. 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서련은 부지런히 말을 달렸다.

제주성이 가까워지자 붉은 기운은 온 천지를 감싸는 듯했고 자꾸만 자신을 불러세우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리는 것만 같아 서련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순간 그의 귓전에는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제주목 관아에 닿자마자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고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말았다.


제주 목사(牧使) 성수재(成秀才)는 소식을 듣고 의원들을 불러 백방으로 약을 쓰며 회복에 노력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련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서련은 충청남도 홍성군 보개산(寶蓋山) 덕은(德隱) 땅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관구(棺柩)가 제주를 떠날 때에 김녕 마을 사람들도 몰려와 그를 애도하며 애절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김석익(金錫翼)은 탐라기년耽羅紀年 에서 서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련(徐憐)이 연소(年少)했기 때문에 기질과 태도가 거칠고 경솔하여 비록 당나라의 한유(韓愈)가 악어를 길들인 고사(故事)에는 비길 수 없으나 그 굳세고 올바른 기질과 백성들의 재해(災害)를 제거해준 공을 우러러볼 때 중국 광동(廣東)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제주 사람은 마땅히 한시라도 서련의 공적을 잊어서는 아니 될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오늘날 그의 공을 알아주는 이가 드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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