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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강용준 2009. 9. 18. 21:49

 

 

 

외할머니


강 용 준


등장인물


외조모(73) : 정순녀. 좀녀

이하정(26) : 간호사. 손녀.

외삼촌(47) : 오태창. 교사

손봉구(30) : 하정 남자친구.

석주어멍  : 이웃 여인

의사



제1장


외할머니가 물질을 다녀와서 물구덕의 톳을 마당에 널어 말린다. 석주어멍이 음식을 들고 들어온다. 흥겨운 유행가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석주어 :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한참 음악에 취해 몸을 흔들며 춤을 추다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시오? 예? 아니우다. (끊는다)

외조모 : 거 무슨 오도방정이고?

석주어 : (자랑하며) 이거 비싼 거우다. 우리 석주가 사줘수게. 아무디서나 노래도 듣고 전화 할 수 있으니 참 좋은 세상 아니우꽈. 삼춘도 하정이신디 하나 사도랜 헙서.

외조모 : 집에만 이신 할망이 그런게 무사 필요허느니. 나신디 자랑허래 와서?

석주어 : 아니우다. (음식을 내밀며)삼춘. 이거 좀 잡숴 봅서. 태물이우다. 어제 시아방 제사 지내수게.

외조모 : (받으며) 경허난 아침 물질 안 왔구나? 잘 먹크라.(한쪽에 놓는다)

석주어 : 하영 잡읍디가?

외조모 : 잡을 게 뭐 이서. 점점 씨는 말라 가곡. 헌데 어제 그 비에 물이 노랑해서라.

석주어 : 골프장 공사 시작헌지 꽤 됐댄 하던데, 공사판 흙이 곶자왈로 스며든 게 틀림없어 마씀.

외조모 : 큰일이여. 저렇게 하면 금새 갯녹음이 생길 건디. 바당 다 죽게 생겼져.

석주어 : 에그, 그것만이 아니우다. 청년회장 하는 경택인 요전날밤에 깡패들한테 맞안 병원에 실려 갔댄 햄수게. 마을이 온통 난리우다.

외조모 : 착한 경택이가 무사?

석주어 : 골프장 사장이 행패를 부린 겁주. 경택이가 앞장서서 골프장 건설 반대하니까 깡패들 시켠 패닦은 거라 마씀.

외조모 : 나쁜 놈들. 이거 어떵 할 거라. 젊은 것들은 몇 방울 없고. 힘센 놈 하는 대로 구경만 할 거라.

석주어 : 게믄 어떵 헙니까? 주민들은 현장사무실에도 접근 못하게 하는디.

외조모 : 공무원들은 다 뭐하는 놈들이여? 골프장은 농약도 많이 친다고 하던데 바당이 썩든 말든 좀수들 죽든 말든 지들하곤 상관없다 이거여?

석주어 :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귓고망을 탁 막아부러수다. 그것뿐이우꽈? 새달부터 갯가로 통하는 길 막는다고 판대기 박아논 거 못 봅디까?

외조모 : 길 막아불면 바당엔 어떻게 가? 그놈들 아주 바당까지 들어 삼킬 모양이로구나. 이거 우리 목숨이 달린 문젠디 좀수회는 뭐햄서.

석주어 : 잠수들 낌새도 이상허우다. 경 열심히 반대하던 똘맹이어멍도 요즘은 회의에도 안나오고, 영식이어멍도 심드렁헌 게 쏙 빠져 부럼수다.

외조모 : 다 쳐 받아먹으니까 귀먹시 벙어리 행세들이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바당인데 그걸 누가 팔아먹는단 말이여. 참, 동의서 도장 찍으면 돈 준다는데, 석주어멍도 받았어?

석주어 : (마음에 걸리는 듯 망설이다) 도장 찍으랜 와십디다만 ….

외조모 : (따지 듯)받았어 안받았어?

석주어 : (부러 큰 소리로)안 받아수다게.

외조모 : 절대 그놈들 수작에 넘어 가지 말라.

석주어 : 에그 물질 수입이 좋암시민 영 헙니까? 돈이 웬수지. 밭이영 산이영 팔아먹은 사람들 욕할 것도 아니우다.

외조모 : 조상 팔아먹고 잘 된 사람 보질 못했져.

석주어 : 게민 어떵 헙니까? 우리가 무슨 힘이 이수가? 돈 있는 사람들 돈질하는 걸 무슨 수로 막읍니까?

외조모 : 맞다. 에그 답답도. 그냥 앉아서 목숨 끊길 판이로구나.

석주어 : 헌디, 삼춘넨 얼마나 받읍디가?

외조모 : 받다니 뭘?

석주어 : 삼춘네 멀왓땅 팔지 않읍디가?

외조모 : 억만금을 준대도 우리 땅은 어림없어.

석주어 :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 이상하네?

외조모 : 주인이 안 팔았다는데 뭐가 이상해?

석주어 : 허면 철영이 아방 신문에 난 건 알암수가?

외조모 : 우리 태창인 신문에 자주 나지. 학교 옮길 적마다 난다더라.

석주어 : 그게 아니고. 참말 몰람수가?

외조모 : 그 양반 하도 바빠서 얼굴 본지 오래. 가만 있자 그러면 또 상 탔구나. 맞다. 우리 오태창인 무신 걸 해도 열심히 허난 상도 하영 탔주.

석주어 : (고개를 갸웃거리며)그게 아닌데.


하정 들어온다.


하  정 : (노래하듯)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외조모 : 야이 이거 무슨 일이고?

하  정 : 석주어머니 오셨구나. (인사하며)안녕하세요?

석주어 : 그래. 아유 좋을 때지. 연애한다는 소문 온 동네 다 났어.

히  정 : 기다리세요. 봄이 가기 전에 국수 먹여 드릴게요.

석주어 : 경 빨리? 하이고 하정인 좋겠네. 이런 때 느네 어멍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외조모 : 무사 죽은 사람 일려 세우멍 지랄이고? 거늘이 왕상허게.

석주어 : 에그, 혼자 소리우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받으면 음란 전화인 듯 듣다가)아이고, 아이고 이 사름아 아프민 병원에 가사주. 나 의사 아니여게. 아이고 숨넘어가기 전에 병원 가라. 병원 ….(끊긴 듯) 할딱거리멍 신음소리 하는 걸 보난 막 아픈 사람 담수다.

하  정 : (우스워 죽겠다는 듯 깔깔거린다) 하하하.

석주어 : (영문을 모르고)무사 실게에 보름 들어시냐?

하  정 : (웃음을 참으려고 하며) 석주어머니. 아픈 게 아니고 그거 음란전화에요.

외조모 : 아이고 사람이 얼마나 싸게 보여시믄 그 모양이라.

석주어 : 해해해 어쩐지 신음소리가 요상하더라.

하  정 : 그런데 병원 가라니, 아이고 배꼽 빠지겠네.

석주어 : (버럭 성을 내며)그만 허라. 모르민 경헐 수도 이신 거주. (나가며 전화기에 대고)더러운 새끼 어디다 수작이야. (주먹 불끈 쥐며)잡히기만 하면 확 까 불켜.

하  정 : (절하며)안녕히 가세요.

외조모 : (뒤에서 하정의 옷차림을 보다가)야야, 너 간호사가 옷 입은 꼴이 그게 뭐꼬? 아예 벗엉 다니주. 좋은 빤스 입었댄 선전 햄시냐?

하  정 : 할머니, 이게 요즘 유행이야. 젊은 애들 다 그래.

외조모 : 난 그런 꼴 못 본다. 가위로 짝짝 찢어불기 전에 어서 벗어.

외조모 : 알았어. 아유 지독한 시어머니. 갈아입을 테니 할머니도 시내 갈 준비해.

외조모 : 난 데 없이 시내는 왜?

하  정 : 말했잖아? 남자 친구 생겼다고. 봉구 씨가 정식으로 인사드린다고 외삼촌 네랑 저녁 함께 먹기로 했어.

외조모 : 외삼촌 네랑?

하  정 : 응. 식당 예약까지 다 했어.

외조모 : (실망해서)난 싫다. 맛있는 거 사먹는 버릇하면 쌀독에 곰팡이 쓴다. 허튼 데 돈 쓰지 말고 한 푼이라도 더 모아.

하  정 : (아양떨며)할머니, 봉구 씨가 차를 가지고 오고 있단 말이야.

외조모 : 방구고 뽕구고 내 허락 없인 안 돼.

하  정 : 알았어. 어서 옷이나 갈아입어.

외조모 : 저녁 생각 없다. 소화 안돼 배도 꾹꾹거리고. 어제 꿈만 꾸다 깨어나선지 몸이 피곤해. 

하  정 : 무슨 꿈인데?

외조모 : (혼자 생각에 미소까지 지으며) 네가 알아 뭘 해.

하  정 : 좋은 꿈인가 보다. 그렇지? 말해 봐 어서. 궁금해 죽겠어.

외조모 : (자랑하듯) 허허 글쎄, 도통 꿈에 못 보던 하르방이 나타나지 뭐냐. 얄미운 영감탱이.

하  정 : 왜 얄미워?

외조모 : 난 쭈구렁 할망군데 영감은 하나도 안 늙었어.

하  정 : 만나니 좋았어?

외조모 : 이년아 너라면 지 서방 몇 십 년 만에 봤는데 안 좋겠냐?

하  정 : 할아버지 잘 생겼었어?

외조모 : 암. 까무잡잡하고 탄탄한 게 남자다웠지. 등치도 좋아서 수영 빤스 입고 헤엄치고 있으면 숨어서 구경하는 아주망들 오줌을 찔끔찔끔 쌌다니까?

하  정 : 에이, 허풍도. 아무렴.

외조모 : (과거를 회상하며)넌 모른다. 궁합도 잘 맞아 금실도 좋았지. 그놈의 난리통만 아니었으면 자식 서넛은 더 낳고 알콩달콩 살았을 건디. 애고 서방 복 없는 년이 자식 덕은 있을라고.

하  정 : 할머니, 외숙모 보기 싫어 시내 안 가려는 거지?

외조모 : 그 불효막심한 년 얘긴 왜 꺼내?

하  정 : 할머니 마음 다 알아. 이젠 노여움을 푸세요. 미련곰탱이처럼 이러면 할머니만 손해야.

외조모 : 난 그년 도움 안 받아도 얼마든지 산다. 너도 물질하면서 키운 거 알아?

하  정 : 할머니 고생한 거 다 알아. 시집가면 몇 배로 호강시켜 드릴거야.

외조모 : 넌 시집가면 그러지 마라. 웃어른이 시키면 토 달지 말고 죽는 시늉이라도 해. 이 핑계 저 핑계 속이려 들지 말고, 항상 정직 하란 말이다.

하  정 : 또 잔소리.


봉구 보약상자를 들고 들어온다.


봉  구 : 제대로 찾아왔구나. (꾸벅 절하며)안녕하세요.

하  정 : 어머, 벌써 왔네. 할머니, 봉구 씨에요.

외조모 : (혼자 소리로) 하이고 생긴 것하곤.

봉  구 : 손봉구라고 합니다. 할머니에 대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정 씰 곱게 키워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외조모 : (야단치듯) 이봐 총각이 왜 은혜를 갚어? 

하  정 : 할머니.

외조모 : 부모 없이 큰 자식이라고 얕보는 거야? 내 승낙 없인 어림도 없어.

봉  구 :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친할머니처럼 모실게요.

외조모 : (퉁명스럽게) 직장은 있어?

하  정 : 할머니, 우리 봉구 씨 공무원이야.

봉  구 : 예. 도청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외조모 : 공무원?

하  정 : 그럼. 얼마나 경쟁률이 높았다고. 그것도 성적이 우수해서 첫 발령지가 도청이야.

외조모 : 공무원이라니 밥 굶기지는 않겠구만. 그러면, 나 부탁하나 들어줘.

봉  구 : 말씀하십시오. 만사 제치고 해결하겠습니다.

외조모 : 오면서 봤겠지만 이 동네 골프장이 들어서고 있지.

봉  구 : 동네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이죠.

외조모 : 골프장 땅이라고 바다로 가는 길을 막아버리면 우리 좀수들은 굶어 죽어. 그러니 골프장 임자가 어떤 작잔지 알아봐 줘.

하  정 : 알아서 뭐 하게? 할머니가 따질 거야?

외조모 : 따지긴? 사장을 만나 사정 해야지. 찌시래기들 하곤 입 아프게 싸워야 소용없어.

하  정 : 할머니, 공무원도 맡은 일 밖에는 몰라.

봉  구 : 알아봐 드릴게요. 직접 만나긴 힘들겠지만 할머니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외조모 : 그거 해결 못하면 우리 집엔 얼씬도 마라.

하  정 : 골프장하고 우리 결혼하고 무슨 관계야?

외조모 : 이년아, 가만 있어. 사람 잘못 만나 팔자 조진 사람이 한둘인 줄 알어? 총각 능력을 어디 한 번 보자.

하  정 : 할머니, 봉구 씨 집안에선 급해. 누이동생이 사정이 있어 당장 식을 올려야 하는데 거꾸로는 못한대.

외조모 :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이 미련곰탱아 아무리 막된 집안이라도 대사에는 순서가 있고 격식이 있는 법이여. 급하다고 돼지 접붙이듯 혼사를 치르란 말이냐?

봉  구 : 그건 할머님 말이 맞습니다. 할머니가 OK할 때가지 기다리겠습니다.

하  정 : 저 심통. 잔소리 들을 사람 없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까?

외조모 : 바닷물이 짠데 왜 심심해? 바당이 내 친구고 어멍이야. 바당에서 났으니 물질하다 바당으로 돌아가는 게 이치고, 살만큼 살았으니 지금 당장 저승차사가 데려 간데도 미련 없다.

봉  구 : 무슨 소리에요. 증손자들 장가드는 걸 보시려면 백 살은 사셔야죠?

외조모 : 백 살? 글쎄 아프지나 말아야지. 요즘 같아선 하루가 귀찮아.

봉  구 : 왜 어디 아픈데 있으세요?

외조모 : (말하려다) 아니다, 늙으면 다 그렇지. 헌데 총각이 의사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렇게 쉽게 보여?

봉  구 : 아닙니다. 할머니를 보니 처음 만난 것 같지 않아서요?

외조모 : 본 적 있다구? 지금 나한테 수작 거는 거야? 이거 순 바람둥이 아냐?

봉  구 : 오햅니다. 친근감이 든다는 말입니다. 

하  정 : 할머니 나 골탕 먹이려 부러 이러는 거지? 나 속 아프라고? 나 시집 가버리면 혼자 어떻게 살까 걱정돼서 이러는 거야?

외조모 : 걱정은. 혹이 떨어진 것처럼 시원해서 좋지.

하  정 : 걱정 마. 시집가서도 할머니 모시고 살 거야.

외조모 : 난 싫다. 더 이상 손주들 뒷바라지 하기 싫어. 편하게 혼자 살 거다.

봉  구 : (선물을 건네며) 저 할머니 이거 보약이에요. 매일 하나씩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외조모 : 보약? 이 따위 뇌물로 내 마음 잡으려고? 택도 없어.

하  정 : (대신 받으며) 할머니. 요즘엔 맥박도 약해지고 기력도 많이 떨어졌어. 이젠 물질 그만 하고 외삼촌댁에도 놀러 다니면서 편안히 살아.

외조모 : (들어가며)평생 짠물에서 뒹근 년이 물 멀리하면 병나. 난 좀 누워야겠다.

하  정 : (뒤에다 대고) 뭐가 좋다구 바다 핑계만 하는 거야. 그러니까 미련곰탱이 할망구라 하는 거지.

외조모 : 너희들은 모른다(들어간다)

봉  구 : 어떡하지?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봐.

하  정 : 아냐. 괜히 심통 나서 저러는 거야. 그냥 외삼촌네랑 먹자.


외삼촌 들어온다.


하  정 : 외삼촌.

외삼촌 : 그래, 일찍 들어왔구나. 할머니 계시냐?

하  정 : (안에다 대고) 할머니! 외삼촌 오셨어.

봉  구 :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손봉구라고 합니다.

외삼촌 : 그래? 오늘 소개시킨다던 그 친구냐?

하  정 : 예, 외삼촌. 아주 짱이죠?

외삼촌 : 인석이, 아주 뻑 갔구나.

외조모 : (다시 나오며) 철영이 애비가 웬일이냐?

외삼촌 : 지서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잠깐 들렸어요. 자주 뵈러 못 와서 죄송해요.

외조모 : 바빠서 그렇겠지. 애들은 안 데리고 왔냐?

외삼촌 : 어머니두. 건망증이 심하시네. 철영인 재수하러 서울 갔고. 보영인 고시 공부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외조모 : 그랬나? 며느린 장사 핑게로 못 오구. 가족이라고 있으면 뭘 하나. 얼굴 잊어버리겠다. 헌데, 얼굴 꼴이 그거 뭐꼬? 낮술 먹었냐?

외삼촌 : 예. 요즘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외조모 : 그려 상을 타려면 남보단 열심히 해야지. 하지만 건강도 챙기면서 해라.

외삼촌 : 상 타기 위해 일 합니까?

외조모 : 나 다 들었다. 신문에 났다면서?

외삼촌 : (당황하며) 아 그거요? 별 일 아니에요.

외조모 : 별 거 아니긴, 신문에는 아무나 나냐?

외삼촌 : (하정에게) 너희들 먼저 가 있거라. 어머닌 내가 모시고 갈게.

하  정 : 예.

봉  구 : (인사 꾸벅하며)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퇴장한다)

외조모 : 헌데 너 멀왓 땅 팔았냐?

외삼촌 : (당황하여 할 말을 잃고)그게 그러니까….

외조모 : (다구치듯) 팔았어? 어쨌어?

외삼촌 : 어머니, 잡목 우거진 땅 놔둬 봐야, 골프장으로 둘러싸이면 헐값으로도 못 팔아요.

외조모 : 그게 어떤 땅인지 잘 알지? 혼자서 물질하고 시장바닥에 쭈그려 앉아 동냥하듯 번 돈으로 마련한 땅이다.

외삼촌 : 알아요. 제게도 다 생각이 있어요. 이담에 더 넓은 땅으로 마련할 게요.

외조모 :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에미가 시퍼렇게 눈 떠 있는데 그걸 팔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하질 말어.

외삼촌 :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외조모 :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안 돼.

외삼촌 : 헌데. 어머니도 골프장 반대 시위하는데 나설 거에요?

외조모 : 좀수들 목숨이 걸린 문제데 늙은이라고 가만있을 수 있냐?

외삼촌 : 제발 제 입장 생각해서라도 나서지 마세요.

외조모 : 왜 골프장 하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외삼촌 : 어머니, 전 교육공무원이고 진급도 해야 쟎아요. 헌데 여기 골프장 회장과 교육청에 높으신 분이 사돈 관계래요.

외조모 : 자식이 출세하겠다는데 막아설 부모 없지. 그려 네 입장이 정 그렇다면 핑계대고 안 나서마. 하지만 물질 못하게 막진 말어야지.

외삼촌 : 어머니, 세상이 변했어요. 이젠 힘든 물질 안 해도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어요. 골프장 생기면 거기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데요.

외조모 : 많으면 우리 같이 늙고 힘없는 사람도 일자리 준다든? 나쁜 놈들. 잠수들 협박하고 꼬셔서 하나둘 빼어간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외삼촌 : 누가 시켜 온 거 아니에요. 어머니 다칠까봐 걱정이죠. 사장이 깡패에요.

외조모 :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늘 당하며 살아왔어. 가진 놈들 힘센 놈들 때문에 아버지도 내 청춘도 다 뺐겼다. 억울하고 분통 터지나 말도 못했다. 한이 맺혀 가슴이 아릴적마다 바당에 들어 숨 비우며 달랬지. 헌데 저 바당마저 없으면 어찌 산단 말이냐? 절대 빼앗길 순 없다. 암 안 되고말고.


석주어멍 다시 등장한다.


석주어 : 삼춘, 삼춘.

외조모 : 왜 또 회의 있어?

석주어 : 그게 아니고 유골 나온 소문 들읍디가?

외조모 : 유골이라니 무슨 뚱딴지 소리여?

석주어 : 공사장에서 유골이 나왔대요.

외조모 : 지금 공사하는 데가 검은 오름 아래 아녀?

외삼촌 : 예. 오름부터 바다까지 골프장이 다 사 들였어요.

외조모 : 그거 느네 아방이여. 경 가까운데 묻힌 걸 모르고. 아이고 이 노릇을 어떵 허코?

외삼촌 : 그때 없어진 사람이 한둘이우꽈?

외조모 : 틀림없다. 어제 꿈에 나타났단 말이다. 나쁜 놈들 그런데도 공사를 계속했단 말이냐? (대문 쪽으로 가며) 어서 가보자.

외삼촌 : 어머니, 벌써 경찰에서 가져갔어요. 저도 조사 받고 오는 길인데 행불자 가족이 많아요. 유전자 감식하고 있으니 신원이 밝혀질 겁니다.

외조모 : 조사고 뭐고 틀림 없대두. 에이구 영감, (허둥대며)하정아, 이년아 방안에서 뭘 해. 어서 나와 밥 좀 해.

외삼촌 : 하정인 나갔어요. 시내 나가서 저녁 먹기로 안했어요?

외조모 : 우리만 주둥이냐? 애비 누웠던 자리에 밥이라도 올려야지. (긴 숨을 내쉬며)원통해서 눈도 못 감았을 텐데. 아이고 억울해라.(하다가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비틀거린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쓰러진다)

 

외삼촌과 석주어멍 외조모를 향해 움직이는데 암전.



제2장


며칠 뒤. 하정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온다.


하  정 : (외조모에게 들으라는 듯)전복죽 끓여 놨으니 일어나면 먹어. 죽 먹고 약 꼭 먹어야 돼. 조금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석주어멍 들어온다.


석주어 : 아이고 예뻐라. 그렇게 꽃단장하니 당장 시집가도 되겠네.

하  정 : 오늘 시아버지 되실 분 생신이라서요. 식구들한테 인사도 드릴 겸 가는 길이예요.

석주어 : 하이고 진도 빠르네. 신랑이 엄청 좋은가 봐. 그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하  정 : 그럼요. 누가 뺏어가기 전에 얼른 낚아채야죠.

석주어 : 에그 좋겠다. 참, 삼촌은 어때? 퇴원했다며? 괜찮은 거여?

하  정 : 참 고마웠어요. 석주어머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석주어 : 내가 한 일 있나 뭐. 철영이 아방이 구급차 부르고 다 했는걸.

하  정 : 그래도 따라가서 입원 준비도 해주셨잖아요. 고마워요.

석주어 : 헌데, 퇴원해도 괜찮은 거냐?

하  정 : 오죽 갑갑해 하셔야죠? 종합 검진해야 하는데 완강히 반대해서 몇 가지 만 검사하고 퇴원했어요.

석주어 : 늙으시니 겁도 나시겠지. 죽을병이라도 걸렸다고 진단 날까봐.

하  정 : 그런가 봐요. 늙은이가 병명 모른 채 죽는 게 복이라고 우기시는 걸 당해 낼 재간이 있나요? 깨어나자마자 집에 가겠다고 생난리 피우셨어요.

석주어 : 에그 성질도. 그러고도 남지. 헌데, 태창이 선생은 어떻게 되는 거여? 학교 짤리는 거여?

하  정 : 무슨 소리예요?

석주어 : 정말 소식 모르는 거여? 신문에 다 났다는데?

하  정 : 금시초문인데요?

석주어 : 연애하느라 신문 볼 시간도 없었구만?

하  정 : 신문에 뭐가 났는데요?


외조모, 이마를 수건으로 묶은 채 나온다.


외조모 : 도대체 신문에 뭐가 났단 소리여?

석주어 : 아이구, 삼촌. 몸은 괜찮수과?

외조모 : 학교 짤린다니 무슨 소리냐구?

석주어 : 아니에요. 그냥 소문에….

외조모 : (따지듯) 소문에 우리 태창이가 왜 짤린다는 건데?

석주어 : 그게 저…. 소문이라는 게 다 경헌 거 아니우꽈?

외조모 : 아니여, 나만 모르는 일이 분명 있어. 신문에 난 거 상 타는 일 아니지?

석주어 : 나도 잘 모르겠는디, 태창이 선생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우다.

외조모 : 선생에게 좋지 않은 일이 뭐여? 학생을 패 죽었어? 아니믄 뇌물이라도 받은 거여?

석주어 : 그런 일이 아니우다. 삼춘, 차마 말 못 허쿠다. 아이고 나 정신 보라. 쇠돌이네 밭 매어주기로 해신디. (나가면서 울리지 않은 전화기를 꺼내) 예, 이제 감수다.

외조모 : 미친년. 사람 복장만 뒤집어 놓고는…. 도대체 무신 일인고?

하  정 : 할머니 신경 쓰지 마.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들 만들어 낸 이야기야. 죽 떠 줄까?

외조모 : 생각 없다.

하  정 : 약 먹어야지?

외조모 : 약은 무슨? 며칠 굶으면 나을텐데.

하  정 : 그렇게 나을 병이 아니라니까.

외조모 : 의사가 그냥 창자가 꼬여 그리됐다고 하던데?

하  정 : 미련곰탱이처럼 그러지 말고 시키는 대로 제발 약 좀 먹어.

외조모 : 알았으니 놓고 가. 그저 잠자다가 숨이 멈췄으면 좋겠다.

하  정 : 할머닌 물질로 단련된 몸이니까 오래 살 거야. 걱정 붙들어 매시고 약이나 열심히 잡수세요. (시계를 보며) 아이고, 이거 늦었네. (나가다 외삼촌이 들어오는 걸 발견하고) 외삼촌 오시네.(나가며) 놀다 가세요.


외삼촌이 마당으로 들어온다.


외삼촌 : 몸은 괜찮아요?

외조모 : 어이고 술냄새. 너 술독에 빠져 사는구나.

외삼촌 : 어제 먹은 술이 안 깨서 그래요.

외조모 : 그래도 정체는 차리고 다녀야지. 선생 꼬락서니가 이게 뭐꼬?

외삼촌 : (머리를 긁적이며)사정이 그렇게 됐어요.

외조모 : 바쁠 텐데 왜 왔어?

외삼촌 : 공사장에서 나온 유골 있잖아요?

외조모 : 그래 아버지 맞지?

외삼촌 : 예. 아버지라고 통보 왔어요.

외조모 : 그것 봐라 내가 뭐라 그랬냐? 어디 있어? 어서 가서 모셔 와야지.

외삼촌 : 서울서 돌아오려면 며칠 걸릴 거예요.

외조모 : 그려? 돌아오면 정식으로 장사 지내고 멀왓땅에 모셔라.

외삼촌 : 거긴 묘지 허가 안 나와요.

외조모 : 내 땅에 산소를 쓰겠다는데 누가 뭐래?

외삼촌 : 사람들 드나드는 곳엔 산소를 쓰지도 못하고, 아버지도 공 때리는 소리 때문 편안히 주무시지 못해요.

외조모 : 그놈의 골프장이 끝내 속 썩이는 구나.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외삼촌 : 장사는 치러야겠지만 유골도 두상뿐이라 완전치도 못하고 해서 화장해서 가까운 납골공원에 모실 게요.

외조모 : 택도 없는 소리 집어 쳐. 아무리 죽은 육신이지만 불에 태우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안 된다 제대로 봉분도 만들어. 제 명에 못 죽은 것도 억울한데 누울 땅 한 뼘 못 차지한대서야 얼마나 서운 하겠어? 

외삼촌 : 이담에 벌초는 누가 해요? 애들은 다 육지로 나가 버리고 골총이 되고 말텐데 봉분을 만들어 어떻게 하잔 말이에요?

외조모 : 너 반대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단정하던 사람이 정체 없이 다니질 않나, 지금 학교 있을 시간인데 무슨 일이냐?

외삼촌 : 아무 일 없어요.

외조모 : 아무 일 없는데 신문에 까지 나? 마을 사람 죄다 아는데 나만 몰라. 뭔 일인데 학교까지 짤린다는 거여?

외삼촌 : 누가 그런 소리해요. 절대 그런 일없어요. 그 까짓 일 가지고 직장까지 쫒겨 나면 말이 안 되죠.

외조모 :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외삼촌 : 죄송해요. 술 먹다 사고 터졌어요.

외조모 : 답답해 죽겠다. 자세히 말해 봐.

외삼촌 : 직원들끼리 회식했는데, 제가 성추행했다는 거예요.

외조모 : 성추행? 여자를 건드렸단 말이냐?

외삼촌 : (고개를 끄덕이며)억울해요. 2차 끝나서 노래방엘 갔는데 행정실 여직원하고 둘이 남았다는 겁니다. 취해서 아무 기억 없는데 글쎄 내가 입 맞추고 가슴을 만졌다고 난리지 뭡니까?

외조모 : 남자가 취하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신문에 광고까지 했단 말이야? 지가 창피 당하는 건 생각 못하고?

외삼촌 : 그 남편이 더 난리예요. 학교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않나, 교육청, 경찰에 고발한 것도 부족해서 중앙부처에 알린다고 협박이에요.

외조모 : (충격을 받으며)하이고 이 뭔 벼락이냐? 술이 웬수지.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시지. 이 미련곰탱아.

외삼촌 : 면목 없습니다. 어머니 그래서 그랬어요?

외조모 : 그랬다니? 너 혹시 멀왓땅을 건드린 건 아니지?

외삼촌 : 그럼 어떻게 해요. 합의금을 요구하는데 당장 목돈 마련할 방도는 없고. 철영이 어미는 이혼 한다 난리 치지. 저쪽에선 으름장을 놓지. 재판 걸면 유치장 갈게 뻔한데.

외조모 : 안 돼. 당장 물려 와. 그 땅이 어떤 땅인데. 이놈아 공부시켜 줬으면 됐지그 땅은 왜 손대. 어서 가서 물려 와. 그 땅 돌려놓기 전에는 다신 나타나지도 마. 어서 가 이놈아.

외삼촌 : 땅이 그렇게 중합니까? 자식이 죽게 생겼는데?

외조모 : 이놈아. 네 잘난 여편네한테 내놓으라고 해. 장사한다며 그것 하나 해결 못해 에미 재산 팔아 먹냐?

외삼촌 : 그 사람 성질 잘 아시잖아요? 아주 독종이예요.

외조모 : 왜? 제 돈은 아깝고 에미 재산은 공돈이냐? 당장 물려 놔. 이 녀석아.

외삼촌 : 알았어요. 그만 하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돈 갚을 테니까, 잘 먹고 잘 사세요. 에이 더러워서(나간다)

외조모 : 더러워? 그려 돈 더러운 거 이제야 알았어? (퍼질러 앉으며) 기가 차고 가슴이 터질 노릇이지. 평생 번 재산을 한 순간에 남에게 갖다 바쳐? 이놈아 목숨을 주고받은 땅이여. 흥, 어림없지. 암 억울해서 어찌 살어. (그러나 끝내 현실을 인정하고서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고. 내 땅 내 재산. 어떻게 찾아. 어서 내놓아 이놈들아.


외조모 넋두리하며 울부짖는데 암전.




제 3 장


무대 밝아지면 며칠 뒤 아침.

외조모 물질 갈 준비를 하는데 봉구 들어온다.


봉  구 : 할머니 어디 가세요?

외조모 : 남이야 어디 가든 무슨 상관이야? 보아하니 싹수가 노랗군. 직장을 팽개치고 아침부터 연애질이나 하고.

봉  구 : 잠깐 외출 나왔어요. 하정 씨 안에 있죠?

외조모 : 그년이 나한테 보고하고 다니는 줄 아냐? 할망 알기를 날구쟁기똥으로 아는 년이야.

봉  구 : 전화해도 받질 않아요. (부른다)하정 씨.

하  정 : ….

봉  구 : 하정 씨. 좀 나와 봐요.

외조모 : (팔을 잡고 이끌며)총각 이리 와봐. 자네 하정이 하고 어디까지 갔어?

봉  구 : 예? 어제 호프집에서 말다툼하다 헤어졌어요.

외조모 : 그게 아니고 (성행위를 말하는 듯 손바닥을 마주 치면서) 이거 했느냔 말이야?

봉  구 : (못 알아듣고 손뼉을 치며)이거?

외조모 : 같이 잤느냐구?

봉  구 : (알아차리구) 아이 할머니도. 하정 씨가 어디 그럴 여잔가요?

외조모 : (하정이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그럼 일찌감치 포기해. 하정인 아직 나이도 어리고 성질도 못 돼 먹었어. 아직 시집 못 가.

봉  구 : 그렇지 않아요. 하정 씨가 얼마나 야무진데요.

외조모 : 속 모르는 소리.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라니까.

하  정 : (안에서 나오며) 할머니, 우리 할머니 맞아?

외조모 : 봤지? 고생고생하며 키워놓았더니 할망한테 대들고 이런데 시집은 어떻게 가?

하  정 : 할머닌 상관 마. (봉구에게) 왜 왔어? 가. 난 할 애기 없어.

봉  구 : 하정 씨.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하  정 : 다 끝났어.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날 업신여기는데 무슨 말을 또 들어?

봉  구 : 누가 뭐라든 나만 믿으라구. 난 다 이해한다니까.

하  정 : 그래 나 한 때 돈 벌려고 술집에서 일했어. 술집종업원이라고 다 더러운 거야?

봉  구 : 내가 다 아는 일이잖아. 숙부님이 걱정 삼아 한 말 가지고 왜 그래?

하  정 : 걱정? 까페에서 잠시 일한 것 가지고 몸 파는 여자 취급해? 그리고 부모 없이 자랐다고 내가 막 되먹은 년이야? 난 집안사람들 손가락질 받으며 시집 갈 생각 없으니까. 가. 이젠 우리 사이 땡이야. 종쳤어.(들어간다)

봉  구 : 잠깐만, 하정 씨.

외조모 : (혼자소리로)에그 성질머리도. 총각. 하정인 비뚤어질 까봐 엄하게 키운 애야. 매도 많이 맞았지.

봉  구 : 하정 씨가 막 되먹은 여자라면 결혼하자고 쫓아다니겠습니까?

외조모 : 나도 처음엔 몰랐지. 학교 졸업하고 물질 따라다니다가 싫증을 내더라고. 벌이가 시원치 않고 힘드니까 나도 그냥 내버려 뒀어. 헌데 용돈도 벌고 아는 언니 옷가게 잠시 도와준다는 말에 속았지.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맨날 술 냄새를 풍기니 못하게 한 거야. 성질은 저래도 내말은 거역 못해.

봉  구 : 압니다. 먹고살려고 일한 게 무슨 허물이 됩니까? 더구나 하정 씬 번 돈 으로 학원 다녀 간호사 됐잖아요. 그런 억척스럽고 성실함 때문 제가 프로포즈한 거예요.

외조모 : 그려 안다면 됐어. 허나 결혼은 집안끼리 대사니까….

봉  구 : 예. 전 무슨 일이 있어도 하정 씨와 결혼할 겁니다. 꼭 허락 받아내겠습니다.

외조모 : 누구 맘대로? 아직 승낙한 거 아니야.


석주어멍, 태왁이 든 구덕을 들고 들어온다.

하정 몰래 숨어서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석주어 : 삼춘, 준비 다 됩디가?

외조모 : 그려, 나가던 참이여.

석주어 : (봉구를 보고) 하이고, 하정이 신랑꼬심(신랑감)이로구나?

봉  구 : 안녕하세요? 석주어머님이시죠? 하정 씨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석주어 : 그려 내가 하정이 에미 친구니까, 앞으론 처이모처럼 대해.

봉  구 : 예 잘 부탁합니다.

외조모 : 이년아, 덜 익은 밥솥 열고 숫갈질 하지 마. 아직 허가 안 났어.

석주어 : 허가? 어디 공사 햄수가 아니면 학교 조퇴 맡암수가? 둘이 좋으면 되는 거주. 요즘 세상에 할망 허가라니 무슨 유세우꽈?

외조모 : 이년이 염장지르러 왔나? 너희 같은 쌍놈의 집안이나 그렇지 우린 안 그래.

석주어 : 쌍놈의 집안? 게민 난 쌍년?

봉  구 : 저 때문에 이러지 마세요.

석주어 : (능청스럽게) 해해해. 아이고 삼춘 참읍서. (입술을 때리며) 요놈의 주둥이가 주책이우다. 하이고 삼춘 손지 사위감 아주 미남이우다 양?

외조모 : 미남 다 죽었다. 남잔 실속이 있어야지. 잘 생긴 놈이 여자 밝히고 노름에 술주정에 꺼떡하면 마누라 주어 패고 개망나니 짓 하는 것 보고도 그 소리야?

석주어 : 에이고 삼춘. 사람 앞에 놓고 무사 그런 소린.

봉  구 : 할머니, 전 술 못 마십니다.

외조모 : 총각 보고 하는 소리 아녀. 그런 진상이 있었어. 생각만 해도 섬찟 해서 그래.

석주어 : 하이고 도청 다닌다고 삼춘이 자랑하던데 하정이 봉잡았구만.

외조모 : 내가 언제 자랑했어?

석주어 : 에그 삼춘도 이젠 그만 헙서. 직장 든든하겠다 이만한 신랑도 없수다.

외조모 : (봉구에게)참 부탁한 건 알아봤어?

봉  구 : 아차. 그걸 먼저 말씀 드려야 하는데. 골프장 사장은 경기도 사람인데 부동산으로 돈 번 부친이 물주랍니다. 헌데 그 부친이 이 마을과 연고가 있어요. 본적이 바로 해암립니다.

외조모 : 이곳 출신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지.

석주어 : 기여, 나도 들었져. 제 부친 고향에 투자하는 거라면서 땅을 사들였젠 헙디다. 예전에 경찰했다던가?

봉  구 : 맞아요. 경찰 간부로 은퇴했답니다.

외조모 : 경찰? 이름이 뭐여?

봉  구 : 진병건 씨라고 아세요?

외조모 : 진병건? 진씨는 맞는데, 진덕호 아니고?

봉  구 : 진병건이 확실 합니다. 아들이 진동철이고요.

외조모 : 이상하다? 진병건이 누구지?

석주어 : 이름이사 얼마든지 바꿀 수 이십주?

봉  구 : 개명 했는지 읍사무소에 조회해 보면 금세 알 수 있어요.

외조모 : 진가 경찰이라면 그놈 밖에 없어. 사실대로 하면 이곳 사람도 아니지.

석주어 : 삼춘이 아는 사람이우꽈?

외조모 : (몸을 부르르 떤다)진가 소리만 들어도 몸서리난다. 그런 놈한테 내 땅을 팔았단 말이여? 받을 빛도 있는데, 안 돼지. 진가 놈이 확실하다면 그냥 둘 수 없다. (태왁을 마루에 두고 움직이는데)

석주어 : 삼춘, 물질은 안 가쿠가?

외조모 : 지금 물질이 문제여? 당장 확인해야겠어. 총각, 읍사무소에 같이 가서 확인 좀 해줘.

봉  구 : 예. 어서 가시죠. (나간다)

외조모 : 나쁜 놈. 도둑질에 살인까지 한 개백정 같은 놈이 무슨 낮짝을 들고 나타나?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놈이 이젠 마을을 통째 말아먹으려고? (나가면서) 택도 없다. 이놈아.

석주어 : 삼춘(뒤따라가는데).

하  정 : 석주어머니, 잠깐만요.

석주어 : (돌아서며) 무사, 느도 물에 들젠?

하  정 : 석주어머닌 우리 엄마 잘 알죠?

석주어 : 그럼 명자하곤 둘도 없는 단짝이었지. 물질도 같이 배우고, 학교도 같이 다니고 시집가기 전까진 그 뭣이냐, 응 부랄 친구였주.

하  정 : 어머머 여자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석주어 : (넉살 좋게 웃으며)해해해 하여튼 그만큼 친하단 말이주.

하  정 : 헌데 정말 물질하다 죽은 거 맞아요?

석주어 : (당황하며)그 그렇지. 물에서 죽은 거 맞아.

하  정 : 젊은 좀녀가 물에서 죽다니 이상하잖아요? 아니죠? 도대체 자식한테 숨기는 사연이 뭐예요?

석주어 : (한숨을 내쉬며) 에휴, 삼촌이 신신 당부했는데.

하  정 : 전 중학교 때까지도 할머니를 엄마라 불렀어요. 정말 엄만 줄 알았으니까요. 우리 엄마 그냥 물질하다 익사한 거 아니죠?

석주어 : 기여(그래) 이젠 너도 시집갈 때 되었으니 알아도 되겠지. 에그, 사람 잘못 만나 팔자 그르쳤지. 네 아버지는 울산에 사는 마도로스였지. 원양어선을 타서 돈도 많이 벌었고, 얼굴도 서글서글한 게 호인이었지. 헌데 겉은 멀쩡해도 속 빈 조개가 있는가 하면, 거칠어도 알찬 구살(성게)이 있는 법인데. 명자는 겉모습에 반해서 식도 안올리고 신랑을 따라 갔어. 한동안 육지 가서 살면서 오누이 낳고 잘 살았지.

하  정 : 제 위에 오빠가 있었어요?

석주어 : 기여, 넌 어린 때난 잘 모를 거여. 니 애빈 아는 것이 뱃놈 일뿐이라 사업을 했다하면 까먹었지. 그러다 노름에 빠져서 가산 탕진하고 부모네 재산까지 다 말아먹은 거야. 그것 때문 네 성 할머니도 제명에 죽지 못했대. 더 나쁜 건 본처가 있는 걸 속인 거야.

하  정 : 전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어요.

석주어 : 넌 갓난애였으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네댓 살 난 오라비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왔지. 물질은 타고 났는지 상군소리를 들었어. 먹고 살려고 악착같았으니까.

하  정 : 저도 물구덕에 앉아 바당에 간 기억나요.

석주어 : 그려, 그땐 전복이 귀해 아무나 못 먹을 때였지만 할머닌 어멍 몰래 숨겨다가 씹어서 널 먹였어.

하  정 : 헌데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석주어 : 네 오라비가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됐을 때, 진상 같은 네 애비가 나타난 거야. 물질하며 모은 돈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니 오라빈 연령이 찼는데도 학교를 못 붙였지. 어느 날은 물질 갔다 오니 집 지키던 네 오라비가 행방불명 된 거야. 동네 사람들 동원시켜서 온 마을 뒤지고 바다 밑이랑 산까지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며칠 뒤 학교에서 발견되었는데….

하  정 : 학교에서요?

석주어 : 허참, 얼마나 학교에 가고 싶었으면…. 놀다가 학교 변소통에 빠져 버린 거야. 시커멓게 독이 올라 부었는데 옷차림으로 겨우 알아 볼 지경이었어.

하  정 : 어머, 어떻게 해.

석주어 : 그걸 본 네 어멍과 할머니가 어떤 심정이었겠니? 니네 어멍은 혼절하고 들어 누웠지. 헛소리하고 온몸에 열이 나는 게 푸다시를 해서 겨우 나았어. 그렇게 상처가 아물만 하니까 또다시 네 애비가 나타나 돈 내놓으라고 행패 부렸지. 술 먹고 때리고 부수고 심지어 말리는 할머니까지 떠밀어서 팔이 부러졌어. 그러니, 내 어머니가 제정신이었겠니? 술 취해 잠든 네 에비 입에 농약 부어넣고 피토하는 남편 끌고 함께 바당으로 걸어 들어갔어.

하  정 : (이내 눈물을 흘리며) 병신같이 죽긴 왜 죽어. 그리 되도록 왜 놔둔 거예요. 왜 말리지 않았냐구요?

석주어 : 할머닌 치료받느라 철영이네 가 있었고,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몰랐지. 나중에 니 애비 시신이 떠올라서야 알게 됐어. 허나 명자는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어도에 갔다고 했지만 니 할머니는 명자가 아직도 어딘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하  정 : (눈물을 닦으며)살아 있다면 기별도 안 해요? 난 그런 엄마 필요 없어요.

석주어 : 삼춘도 지독했지. 사람들이 말려도 기브스한 팔로 몇날 며칠을 바당 밑바닥을 헤엄치며 명자의 시신을 찾으려고 몸부림 쳤어. 기어코 상어에 다리를 물려서야 그만 뒀어. 그 마음이 오죽 했겠니? 애간장이 다 녹아 없어졌을 거야.

하  정 : (다시 눈물을 흘리며)할머니가 불쌍해요. 오래 사셔야 하는데 우리 할머니 불쌍해서 어떡해요.

석주어 : 그게 다 팔잔 걸 어떡허니. 시집가더라도 할머니 잘 모셔.

하  정 : 그래야죠. 헌데 얼마 못 사실 것 같아요.

석주어 : 얼마 못 산다니?

하  정 : 암이래요.

석주어 : (놀라며) 암?

하  정 : 예. 췌장에 암이 생겼대요.

석주어 : 하이고, 건강에 유난 떨던 양반이 암이라니?

하  정 : 하지만 비밀이에요? 할머니가 아시면 상심해서 포기해 버릴지 몰라요.

석주어 : 기여. 에그 억척스럽게 살면 뭐해. 다 두고 가는 인생인 걸. 얘기하다보니 너무 지체 했네. (나가며) 물 때 놓치겠네. 같이 안 갈래?

하  정 : 전 죽어도 물질은 안 해요.


하정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석주어멍 움직이는데 암전.




제 4 장


바닷가, 천막이 쳐지고 그 안에 젯상이 놓여 있다.

상 위에 유골함과 젊은 시절 외조부의 사진, 제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태창은 검은 양복 위에 상장을 두르고 두건을 썼다.

외조모와 하정은 흰 광목치마를 입었다.

심방(무당)이 상 앞에서 위령굿을 하고 있다.

굿이 끝나면 차례로 절을 하고 유골함을 열어 바닷가에 가루를 뿌린다.

외조모 한 쪽에 앉아 넋두리한다.


외조모 : (달래는 투로)여보, 그 좋은 허우대는 어디 두고 어찌 허연 백골만 남읍디가? 불 속에선 뜨거웠지 예? 미안허우다 죽어서 묻힐 한 뼘 땅도 마련하지 못하고…. 당신이 헤엄치고 낚시질 하던 이 개끄시(바닷가)도 이젠 오지 못허게 허염수다. 부디 이 바당을 지켜 주곡 명자 혼백이랑 함께 잘 사십서.

하  정 : (유골단지를 내밀며) 할머니도 한줌 뿌리세요.

외조모 : (한줌 쥐어 뿌리며) 당신 죽인 원수놈들도 제명에 죽진 못 헐 거우다.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까, 이젠 그만 노여움 풀고 편안히 잠을 잡서. (손을 털며)됐다. 저쪽 갯바위 쪽이랑 골고루 뿌려라.


하정과 봉필은 유골단지를 들고 나가고 외삼촌은 상의와 두건을 벗은 채 상 앞에

앉아 술을 마신다.


외조모 : 술에 웬수졌냐?

외삼촌 : 잔소리 그만 하세요. 저도 괴로워요.

외조모 : (길 쪽을 바라보며)끝내 코빼기도 안 비치는구만.

외삼촌 : 그 자식들 양심 가지고 돈 벌었겠어요? 나쁜 새끼들. 사람 죽여 놓고….

외조모 : 니 각시 말이다.

외삼촌 : 기대하지 마세요. 원래 싸기지 없는 년이에요. (술을 들이킨다)

외조모 : 아무리 서방이 미워도 소식을 들었으면 시아방 상에 고별잔은 올려야 할 것 아녀?

외삼촌 : 이혼장에 도장 찍어 줬어요. 

외조모 : 이혼? 아니 어떻게 한 결혼인데 그렇게 쉽게 갈라선단 말이냐?

외삼촌 : 내참 더러워서. 자기 재산 축날까봐 보채는데 어떻게 합니까?

오조모 : 이십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애들도 있고 그럴 순 없다. 사정하고 빌어. 내가 빌어볼까?

외삼촌 : 어머니가 왜 나서요? 필요 없어요. 여잔 많습니다. 다 정리하고 농사나 지으면서 살 겁니다.

외조모 : 농사라니? 아니 학교는 어떻게 하고 농살 지어? 농사지을 땅은 있고?

외삼촌 : 밭이야 빌려 병작하면 되잖아요. 배운 게 그건데.

외조모 : 너 정말 학교 그만 둔 거여?

외삼촌 : (괴로운 듯 술잔을 들이킨다)

외조모 : 왜 말을 못해? 어미가 몰라도 되는 거냐?

외삼촌 : (쓴 웃음을 날리며) 이놈의 술은 왜 이리 먹어도 먹어도 질리질 않나.(잔에 술을 따르는데 외조모가 술병을 가로챈다)

외조모 : 이놈아, 몸 버리겠다. (밖에다 대고) 석주어멍아 여기 국 좀 가져와.

석주어 : (소리만) 예.

외삼촌 : 술 이리 줘요.

외조모 : 술만 마시면 개고기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외삼촌 : 내 팔자가 그런 걸 어찌 합니까? 놔두세요. 제 인생 제가 삽니다.

외조모 : 이놈아 정신 차리고 말 좀 해 봐. 학교 어찌 된 거여?

외삼촌 : 예. 그만 뒀습니다. 아니, 그만 두래요. 잘렸어요. 그 까짓 젖통 한번 만졌다고 퇴직금도 다 날아갔어요.

외조모 : (휘청거리다 중심을 잡으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여. 어이구 이 미련곰탱아. 남의 것 탐내는 놈이 도둑놈이지. 각시가 못 만지게 하더냐? 그렇게 만지고 싶으면 어미 젖 만져라. 이놈아. 자.


석주어멍, 뜨거운 국을 차반에 받쳐 들고 들어온다.


석주어 : 멈국이 맛있게 끓여 졌어요.

외삼촌 : 씨발 놈의 여편네 젖통이 국가 보물이라도 돼? 왜 그리 비싸. 술병 이리 줘요. (하면서 팔을 올리는데 뜨거운 국이 팔위로 쏟아진다) 아 뜨거.

석주어 : 아이고, 이일을 어째.(외삼촌의 옷을 쓸어낸다)

외조모 : (황급히 소주병을 들고 와서) 저리 비켜. (소주를 외삼촌에게 들이 붓는다)

석주어 : 아이구 미안해서 어쩌지? 많이 쓰라리지?

외조모 : 너 잘못 아녀. 가서 된장 좀 가져와.

석주어 : 예.(나간다)

외삼촌 : (웃으며) 으흐흐흐, 사람이 미련스러우니, 술국까지 날 먹으려 드네.

외조모 :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 살 떨어지면 흉터 진다.

외삼촌 : 이 까짓 거. 괜찮아요. 다 된 몸 흉터 좀 있으면 어떻습니까?

외조모 : 이놈아, 그게 에미 앞에서 할 소리여.


석주어멍이 된장을 가져오자 외조모 된장을 태창의 팔에 바르고 광목치마의 한 쪽

끝을 찢어내어 묶어 준다. 석주어멍은 제상을 치우고 정리한다.


외삼촌 : 우리 어머니 유식하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란 말씀이죠? 어머니께 물려받은 신체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가 이토록 날 사랑하시는데, 전 신세가 이 모양이니. (울먹이며)불효자 용서하세요. 죄송합니다.

외조모 : 취했구나. 눈 좀 붙여라.

외삼촌 : 아닙니다. 제가 아버질 두고 어찌 잠을 잡니까. 졸리지 않아요. (영정을 보면서) 아버지, 기다리세요. 제가 원수를 갚을 겁니다. 땅도 반드시 되찾아 올 겁니다.

외조모 : 됐다. 이미 팔아버린 걸 어찌 되찾아. 아버지 유골 찾은 거만도 다행이다.

외삼촌 : 훔쳐 간 땅문서 되돌려 받아야죠. 아주 개종자들이에요. 나 가만 안 있을 거예요.(나간다)

외조모 : 어디 가니?

외삼촌 : 진가 놈을 꼭 만나겠어요. 나타날 때까지 진드기처럼 달라붙을 거예요.

외조모 : 만나려거든 맨 정신에 만나.

외삼촌 :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보세요. 저 하나도 안취했어요.

외조모 : 집에 들어가 눈 좀 붙이라니까?

외삼촌 : 알았어요.(나간다)


파도소리 잔잔히 깔리는데 반대편에 하정과 봉구 나타난다.


하  정 : 여기가 물놀이하던 갱이통이고, 요 앞이 수영 배우던 개맡, 저쪽이 첫물질 했던 누께통이야.

봉  구 :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  정 : 오빤 도시에서 자랐으니 당연하지. 처음 수영 배울 때 어쨌는지 알어? 물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누구 하나 건져 줄 생각 안 해. 그러니 살려고 발버둥치다보면 자연적으로 헤엄치는 걸 배우게 되지. 짠물 한 바가지는 먹었을 걸.

봉  구 : 어려서부터 독립심을 가르치는 구나.

하  정 : 그럼. 잠수들은 늙어서도 자식들한테 의지 안 해. 옛날부터 어촌에선 아들보다 딸 낳길 원했어. 딸은 살림 밑천이거든. 좀수가 물질해서 집안을 먹여 살렸으니까.

봉  구 : 그래서 하정이도 생활력이 강하다고?

하  정 : 그럼. 오빠가 직장 그만 둬도 문제없어. 내가 물질해서 먹여 살릴 테니까?

봉  구 : 하정이도 물질할 수 있어?

하  정 : 그럼 초등학교 때부터 할머니 따라 다녔는걸. 계속했으면 할머니처럼 상군 소릴 들었을 거야.

봉  구 : 계속하지 그랬어.

하  정 : 물질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데. 좀수들은 칠성판을 등에 지고 물에 드는 거야. 게다가 옛날만큼 해물이 적어 벌이도 안 좋고 어머니가 익사했다는 소리 들은 후엔 바다와 인연 끊었어.

봉  구 : 저런. 그래 물질하지 마. 난 고생 안 시킬 거야.

하  정 : 생각해 봤는데, 나 자신 없어. 할머니한테도 막 되게 구는 나쁜 년이야. 얼마나 속을 썩혔다구. 부모 없다고 놀리는 애 패서 병원비 물어주고, 가출해서 죽으려고 약 먹고. 할머닌 내 뒤치다꺼리 하느라구 빨리 늙으셨어. 할머닐 떠날 수 없어.

봉  구 : 그러니까 함께 잘 모시자구. 결혼하면 우리 할머니잖아? 아직도 화 안 풀린 거야?

하  정 : 고마워. 오빠만 믿어준다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거야.

봉  구 : 역시 하정인 바다처럼 마음이 넓어서 좋아.

하  정 : 절대 날 배신 않을 거지?

봉  구 : 그럼 약속할 게.

하  정 : 배신하면 꽁꽁 묶어다 바다에 처넣어버릴 거야.

봉  구 : 아이고, 난 헤엄도 못치는데?

하  정 : (안기며)사랑해. 오빠.

봉  구 : (안으며)하정이.


멀리서 외조모의 소리가 산통을 깬다.


외조모 : 거기서 뭐하는 짓들이야?

하  정 : (놀라며)어머. 할머니.


봉필과 하정 계면적은 듯 손과 옷을 털며 외조모 있는 데로 다가간다.


외조모 : 할으방 장사 지내는데 그새 못 참아 연애질이야?

하  정 : 우리가 뭘 했는데?

외조모 : 그려 눈 어두워 아무 것도 못 봤다.

하  정 : 에이 할머니도.

봉  구 : 골고루 잘 뿌렸어요.

외조모 : 수고했다. 여기 앉아서 밥 먹어라.

하  정 : 난 배 안 고파.

외조모 : 좋은 사람 곁에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지. 시도 때도 없이 밥 달라 말고 줄 때 먹어. (큰소리로) 석주어멍아! 상 차려라.

석주어 : (멀리서 소리만) 예.

봉  구 : 여긴 바다 경치가 참 좋아요.

외조모 : 바다 속 경치는 더 볼만하지. 헌데 이젠 끝이야. 골프장에서 농약이 흘러들면 다 썩고 말 거야. 바다를 더럽히면 재앙이 내린다 했는데 천벌을 받을 거야.

하  정 : 오빠, 저기 팻말 봤지? 모레부턴 여기 출입금지야.

외조모 : 공무원 나으리, 우리 좀수들 좀 살려줘.

하  정 : 무슨 방법 없어?

봉  구 : 공유수면은 사유재산이 아닌데?

하  정 : 진입로를 폐쇄해 버리면 여길 어떻게 다녀?

외조모 : 저쪽 밭 돌담 몇 개 건너고 돌바위 넘어야 올 수 있는데, 그 짓을 매일 어떻게 해?

석주어 : (다가와서)밥 차려 놓았어요.

봉  구 : 그런 줄 알면서 동의는 왜 주셨어요?

외조모 : 해주긴 누가 해줘. 돈 먹은 몇몇 년놈들이 찍어 준 거지. (석주어멍에게 동의를 구하며)안 그러냐?

석주어 : (마지못해 동의하며)그렇주 마씀.

외조모 : 헌디 사름들 말들어보면 다 안 찍었다 하는데 누가 동의했단 말이라.

봉  구 : 조사해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석주어 : (그 말에 당황하며) 아이고 돈 주난 생각 없이 찍은 사람들도 이십주. 하지만 후회하는 사람들도 많수다. 지금이라도 돈 돌려주겠다는 사람도 있고 마씀.

봉  구 :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부당한 사태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좀녀들 생존권을 내세워 당국에 탄원서도 내고 언론에 부당성을 알리는 기사도 내서 여론을 조성해야 합니다. 바다 진입로를 막아 자기네 이익만 취하겠다니 말도 안됩니다.

외조모 : 내가 그 말이여. 헌데 그 방도를 누가 알아야 말이지. 알만한 놈들은 다 꿀 먹은 벙어리 행세고.

석주어 : 하이고, 똑똑도 하지. 하정이 신랑감 하나는 잘 골랐네.

하  정 : 공무원 시험은 아무나 합격하나요? 우리 오빠가 도와줄 거예요. 그렇지?

봉  구 : 당근이지. 군청에 다녀올 게요. 우선 서류부터 검토하구요. 환경 단체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거에요.

하  정 : 오빠, 같이 갈까?

봉  구 : 아냐. 할머니 모시고 뒷정리 하고 있어. 금방 다녀올 게.

석주어 : 밥 먹고 가.

봉  구 : 제 걱정 마시고 드세요.(나간다)

석주어 : 원 성질도 급하긴.

외조모 : 성질 급한 게 아니라, 싹싹한 거지.

석주어 : 아따 삼춘도 마음에 쏙 드나부다. 잘 생긴 놈 조심하랄 땐 언제고 편백은?

외조모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밥들 먹고 치워.

하  정 : 할머닌 안 드세요?

외조모 : 밥알이 목으로 넘어 가겠냐? 시방 바당에 서방을 묻었는데.

하  정 : 외할아버지 말이야. 배를 부렸다면서 어쩌다 그런 곳에서 돌아가셨어?

외조모 : 에그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하  정 : 내력을 알아야 봉구 씨도 제 일처럼 나설 거 아냐?

외조모 : (회상하며)그래, 억울하게 당했다. 할아버진 옛날 4․3 사태 때 뱃사람이었다. 헌데 젊은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 취급해서 잡아간다는 바람에 친구들과 덩달아 산으로 피신했다가 자수를 했지. 그러다 전쟁이 나자 그 뭐라더라?

석주어 : 예비검속 말이우꽈? 입산했다 자수한 사람들 죄다 잡아간 거.

외조모 : 기여. 네 할아버지도 그땐 잡혀 갔다. 헌데 우리 집 바깥채에 진덕호라는 서청출신 경찰이 살았다.

하  정 : 서청? 서청이 뭔데?

외조모 :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재산 다 뺐기고 넘어온 사람들 말이주.

석주어 : 맞수다. 그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을 결성해서 빨갱이들 소탕에 앞장 섰댄 헙디다.

하  정 : 아. 서북청년단을 줄여서 서청이라 하는구나.

외조모 : 그려. 빨갱이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들로 토벌대를 만들었으니, 산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악랄하게 죽였지. 할아버지가 입산자 출신이라는 것을 안 진덕호는 그걸 빌미로 형 아우하면서 돈을 많이 빌려 갔어. 할아버지는 경찰을 알아둬야 신분안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배에서 번 돈을 다 줬다.

하  정 : 경찰이라면 봉급도 받을 텐데 무슨 돈이 필요해요?

외조모 : 노름에 손을 댄 거지. 그러니 돈이 남아나? 헌데 어느 날은 도둑이 들어 조상대대로 물려온 밭문서가 없어진 거야. 증거는 없지만 진가 놈 짓이란 거 뻔히 알고도 달란 말을 못했어.

석주어 : 돈 빌려준 차용증은 있을 것 아니우까?

외조모 : 그것까지 죄다 훔쳐 간 걸. 거기다 예비 검속에 서방이 잡혀 갔으니 진가 놈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 할아버지 빼내달라고 사정사정 했더니 광주교도소로 넘어갔다고 했어. 그 말 믿고 광주로 가 찾아봤지만 할아버진 없더라. 그러고선 진가 놈이 육지로 발령 가버리는 바람에 영영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하  정 : 나쁜 새끼.

석주어 : 그 후로 소식을 영 못 들었수가?

외조모 : 아니지. 난리 후에 소문하여 찾다보니 그때 도망쳐 온 사람을 만났지. 그런데 분명한 건 주정공장에 수용 되어 있을 때 진가 놈이 데리고 나갔다는 거야.

석주어 : 그 놈이 죽인 거 맞구나.

외조모 : (끄덕이며) 그놈이 빚 때먹을 작정하고 죽여 버린 거야. 은혜를 원수로 갚은 놈. 그놈이 살아 있다니 눈이 안 뒤집히겠어? 개백정놈.

하  정 : 할머니, 그 사람을 꼭 만나. 만나서 손해배상 청구를 해.

외조모 : 양심 있는 놈이라면 제 발로 찾아와 용서를 구했겠지. 증거가 있어야지. 만나도 오리발 내밀 게 뻔한 놈. 면상 마주치기도 싫어.

석주어 : 하이고 그런 놈이 마을 발전을 위해 골프장 한다니 똥강생이가 웃으켜.

외조모 : 못된 짓 하던 놈들 버릇 개도 안준다. 돈 좀 있다구 벼슬 사구 양반 행세한다고 사람패고 못된 짓 한 거 없어지냐?

하  정 : 이런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해요. 나쁜 자식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우리 봉구 씨한테 얘기하면 가만 안둘 거에요.

외조모 : 소용없다. 철영이 아비가 몇 번 갔지만 사장은 만나주지도 않고 콧방귀만 퐁퐁 뀐데.

하  정 : 억울해서 어찌 살아. 방법이 있을 거야.

석주어 : 국이 다 식었겠다. 새로 데워 올테니 말아서 한 숟갈 드세요.

외조모 : 너희들이나 먹고 얼른 치워. 갯냄새가 독해지는 걸 보니 비라도 한 주전자 할 것 같다.

하  정 : 바다에 안개가 몰려와요. (전화벨이 울리고 받는다) 응 오빠. 뭐라고? 병원? 어디? 안 돼, 우리 병원으로 모셔. 응, 금방 갈게.

외조모 : 뽕구가 어디 아프대?

하  정 : 그게 아니라 외삼촌이 병원으로 실려 갔대.

외조모 : (놀라며) 뭐라고 우리 태창이가? 아이고 세상에 이거 무슨 일이고? 응?


놀라 서로를 쳐다보는데, 멀리서 무적이 울리면서 암전.



제 5 장


병원. 중환자 응급실 앞 보호자대기실.

외할머니가 기도를 하고 있다.

잠시 후 석주어멍이 들어온다.


외조모 : (연신 절을 하며 손을 비빈다)천지신명님. 영등할마님, 구슬할마님, 동이바당 광덕용왕님, 서이바당 광신용님, 북이바당 홍이용왕님, 남이바당 정이용왕님 이 할망 좀 도와줍서. 내 마지막 소원이우다. 우리 태창이 어시민 난 누굴 믿엉 삽니까? 제발 눈 좀 뜨게 도와 줍서. 나 목숨으로 아들이 살 수 이시민 날 데려 갑서. 날 데려 가고 제발 우리 아들 살려 줍서. 제발 좀 도와 줍서.

석주어 : 삼춘. 어떵 눈이나 떠수가?

외조모 : (고개를 저으며)벌써 일주일 짼디 틀린 거 담다. (한숨을 내쉰다)에고, 천벌 받을 놈은 따로 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고?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라고, 잃어버린 재산 탐내는 게 아닌데. 다 못난 어멍 탓이다.

석주어 : 경해도 숨은 쉬엄시난 다행이우다.

외조모 : 에그 답답도. 산소호흡기 떼어내면 송장이나 한가지엔 햄져.

석주어 : 사름 목숨 경 쉽게 안 어서 집니다. 문성이 아들 봅서. 5층에서 떨어져  죽은 줄 알아신디, 한 달 만에 눈을 떴잰 합디다. 기일은 걸려도 틀림없이 일어날 거우다.

외조모 : 기여, 날 닮앙 악착 같으면 눈 뜰 거여.

석주어 : 억울허영 죽어지쿠가? 꼭 일어납니다.

외조모 : (눈물을 흘리며)그놈의 새끼들 아방 죽여 놓곡, 아들까지 잡아먹잰 이 난리 아니가. 아이고 가지 말랜 무사 못 말려신고. 나 잘못이여. 어멍이 자식 영 만든 거여. 태창이 없으면 난 못산다. 태창이 죽으면 나도 물에 빠졍 죽어 불켜.

석주어 : 삼춘 영허면 안됩니다. 삼춘이 마음 단단히 먹어사 태창이가 살아납니다.

외조모 : 개백정 망나니들놈들. 우리 태창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패 죽이냔 말이여.

석주어 : 지난 번 경택이 두드린 놈들 아니우꽈. 주먹과 돈이면 다 된댄 허는 놈들 가만 둬선 안 됩니다. 경찰에서 조사햄시난 다 엮어 갈 거우다.

외조모 : 잡아가면 뭘 해. 이신 놈이난 돈을 썽 다 풀려 날 건디.

석주어 : 태창이가 깨어나면 사실이 밝혀질 거 아니우까? 경허곡 이번엔 동네 사람들도 가만 안 이시켄 헙디다.

외조모 : 가만 안 있으면 무슨 수라도 있어?

석주어 : 예. 내일 도청 앞에서 데모할 거랜 허염수게. 환경단체에서 앞장서고 경택이가 동네사람들 설득햄수다. 철영이 아방 폭행 당했젠 허난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고 마씀.

외조모 : 데모?

석주어 : 예. 으쌰으샤 허는 거 있잖으꽈?

외조모 : 경허당 다치믄 어떵허젠? 4․3사태 때도 경허당 사름들 하영 죽어신디.

석주어 : 이젠 세상이 바뀌난 총질허곡 경 안험니다.

외조모 : 경허영 태창이가 살아난댄만 허면 백번이라도 참여 허켜마는.

석주어 : 참말로 삼춘은 태창이한테 정성을 많이 드려십주. 난 지금도 생각납니다. 태창이 육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말이우다. 동네 영광이라고 마을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해수과?

외조모 : 경했주. 허나 난 한숨만 나오더라. 우리 형편에 어찌 육지 대학을 시키겠나? 빚내서 학비 보내니, 그 빚 갚으려 남의 집 식모에 식당 설거지에 안 해 본 일 없다. 그래도 그땐 고생이란 걸 몰랐다. 태창이 얼굴만 생각하면 부끄러움도 피곤함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석주어 : 대학졸업하고 학교 선생 시험에 합격했을 땐 마을 잔치해수게.

외조모 : (회상에 젖어) 암. 없는 돈에 돼지도 잡았지.

석주어 : 그때. 동네 처녀들 난리 났수다. 삼춘은 또 얼마나 유세가 심해수가? 태창일 낚아 챌까봐. 작대기 들고 다니며 동네 처녀들 접근도 못하게 해수게.

외조모 : 택도 없는 촌년들이 넘볼 걸 넘봐야지.

석주어 : 나도 얼마나 구박해수가. 집에 드나들지도 못하게 해수게.

외삼촌 : 이년아 너도 마음 있었잖아?

석주어 : 하이고 삼춘두, 난 명자 친구고 태창인 네 살이나 아래 아니우꽈?

외조모 : 그때 시골에선 다 그랬어. 다 여자가 연상이었다는 걸 몰랐어?

석주어 : 그럼 삼춘도 연상이어수가?

외조모 : 암. 다섯 살이나 어린 것한테 시집 들었지.

석주어 : 어이구, 너무 심했다. 삼춘이 유혹했구나? 누나누나 하는 어린 동생 총각 꼭지 따먹은 거지 양?

외조모 : 이년이 사람 죽어가는데 못하는 소리 없네.

석주어 : 누나 동생 하다가 여보 당신 된 거 맞잖아요?

외조모 : 그럼 뭘 해. 좋은 세상 얼마 살아보지도 못 했는걸. 저 녀석 그렇게 고생하며 공부시켜 놓으니 지 각시 말 밖에 안 들어.

석주어 : 품엣 자식 아니우꽈? 삼춘도 이젠 물질도 그만 허곡 태창이 퇴원하면 시내 나가 삽서.

외조모 : 물질 그만 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여? 석주어멍 무슨 말 들은 거지? 

석주어 : (당황하며)아아니우다. 하정이 시집 가버리면 아들 집에 강 편안히 살랜 말입주. 병 걸리지 마랑.

외조모 : 병? 도대체 무슨 병인데?

석주어 : 그냥 나이가 들민 암도 걸린댄 헙디다만 삼춘은 아니우다 게.

외조모 : 암이로구나. 그래, 요새 허리가 결리고 헛배가 불러 꾹꾹거리는 게 오래 못살 병인 줄 알았주. 괜찮아. 나도 짐작은 했으니까.

석주어 : 아이고 암 아니엔 허난 마씀. (혼자 소리로)에그 눈치도….


봉필과 하정 들어온다. 하정은 간호사 복장이다.


하  정 : 할머니, 약 어쨌어?

외조모 : 약? 먹었지.

하  정 : 할머니, 그러다가 할머니가 먼저 쓰러져.

외조모 :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태창이보다는 내가 먼저 죽어야지.

하  정 : 정말 속 긁는 말만 할 거야?

외조모 : 먹었대도 그러내.

하  정 : (약을 내밀며) 그럼 이건 뭐야. 방을 청소하다 보니까, 먹으라는 약 이불 밑에 죄다 감춰놨대. 그래 놓곤 다 먹었다 거짓말 한 거지? 약 안 먹으면 큰일 나. 외삼촌 일어나는 걸 보려면 할머니가 건강하게 기도해야 되는 거야.

외조모 : 그려? 그럼, 물 줘. 먹어야지. 내가 기운내서 아들이 산다면 독약이라도 먹어야지.


석주어멍, 주전자에서 물을 떠다 주고 하정이 약을 까서 준다.

외조모 약을 삼킨다.


하  정 : 앞으론 꼭 약을 먹어야 해. 식사도 거르지 말고. 힘든 일도 그만 두고.

외조모 : 나 죽을 병 걸린 거 다 안다.

석주어 : (하정이 눈짓을 주자) 나 아무 말도 안 했져.

하  정 : (말을 돌리듯) 그게 아니고, 할머니가 건강해야 날 데리고 예식장 행진할 거 아냐?

외조모 : 예식장 행진?

하  정 : 왜 있잖아? 딴따따딴 하는 음악에 맞춰 신부를 데리고 들어가는 거. 외삼촌이 이렇게 됐는데 할머니밖에 더 있어?

외조모 : 그건 남자들이나 하는 일인데 남사스럽게.

하  정 : 꼭 할머니 손잡고 들어갈래. 괜찮지 오빠?

봉  구 : 그럼. 할머닌 자격 충분히 있어요.

외조모 : 싫다니까.

석주어 : 하이고 삼춘. 손지들 하겠다는 대로 합서.

외조모 : (하정에게) 태창이가 눈뜨기 전엔 난 아무것도 못해.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니?

하  정 : 꼭 눈을 뜨실 거니까 기다리래요.

외조모 : 병신이 되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줘. 철영이 에미한텐 연락했지?

하  정 : 어디 여행 갔는지, 가게도 폐업 팻말 붙이고 잠겼더라구. 쪽지 써놓고 왔어. 참 애들한테도 연락해야 하는데 전화번호 알지?

외조모 : 놔둬. 공부하는 애들 알아야 마음만 아프지. 죽지 않는다니까 천천히 알려도 돼.

하  정 : 그리고 할머니.(부적을 보이며)이거 뭐야? 외삼촌 베개 밑에 있던데.

석주어 : (웃으며)해해해 부적아녀. 요즘 세상에….

외조모 : (석주어멍에게)무슨 참견이여? (하정에게)그걸 왜 꺼냈어? 부정 타게.

하  정 : 병원에선 이런 거 사용하면 안 돼.

외조모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이해 못하니? 당장 가서 다시 넣어둬.

하  정 : 병원 사람들한테 들켜 쫓겨나도 책임 못 져.

외조모 : 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깊숙이 넣어 두래도.

하  정 : 알았어.(나간다)

봉  구 : 할머니, 주민동의서를 확인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어요. 할머니 성함이 정자 복자 순자 맞죠?

외조모 : 나 정복순이 맞아.

봉  구 : 할머니도 동의서에 도장 찍으셨네요.

외조모 : 내가 거기 왜 찍어.

봉  구 : (사본을 내보이며)이것 보세요. 할머니 성함 옆에 분명 지장이 눌러져 있어요.

외조모 : 뭐여? 찍었어? 거참 내 손가락 잘랐다 붙여놨나?

석주어 : 이거 사기꾼들이구만?

봉  구 : 그렇다면 이게 할머니만은 아닐 거예요. 제가 개별적으로 확인해 볼 게요. 거짓이 드러나면 사문서 위조로 고발할 겁니다.

외조모 : 그놈들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까?

봉  구 :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예요. 석주어머님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석주어 : (당황하며) 아이고 난 아니야.

외조모 : 뭐가 아닌데? 안 찍었다고 했잖아?

석주어 : 그게 그러니까, 하이고 그냥 생각 없이 석주아방 말만 듣고 그냥. 제가 실수 했수다.

외조모 : 돈이 그렇게 아쉬웠어? 갈치가 제 꼬랭이 잘라먹는다더니 어디 그럴 수가 있어?

석주어 : 잘못했수다. 당장 돈 돌려주고 취소할 거우다. 그런 나쁜 놈들한테 바당을 뺐길 수가 있우가? 내일 머리띠 메고 나도 앞장 설 거우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사본을 빼앗듯 보며) 누가 찍었는지 어디 봐? 이옥심? 아니, 옥심이년 자기는 안 찍었다고 시치미 떼더니. 나쁜 년.

외조모 : 넌 욕할 자격 없어.

봉  구 : (사본을 받으며) 다투실 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따 퇴근 후에 마을에 들릴 생각이에요.

외조모 : 조심해. 깡패새끼들이 지키고 있을지 몰라.

봉  구 : 지금 경찰이 내사 중에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겁니다.

외조모 : 서방 일찍 여윈 내 처지 봐. 자넨 혼자 몸이 아니란 말이야.

봉  구 : 명심할게요. 참 내일 데모하는데 가실 거예요?

외조모 : 가야지. 가고말고. 나 이젠 무서운 거 하나 없다. 가서 아들 이렇게 만든 거 폭로해서 치료비랑 다 받아낼 거야.

석주어 : 이참에 아주 그놈들 우리 동네서 몰아내붑주. 그래야 마음 놓고 물질도 할 거 아니우꽈.

외조모 : 다들 지쳐 쓰러져도 나 혼자서라도 할 거야. 그 진가 놈이 사죄하고 물러설 때까지 난 끝까지 할 거야. 죽는 날 까지 누가 이기는지 해 보자구.

봉  구 : 헌데 진병건 씨는 투병 중이라 올 수 없을 거에요.

외조모 : 뭐여? 투병? 누구 맘대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을 그렇게 죽게 내버릴 순 없다. 병원이 어디여. 내 세상 끝까지라도 쫒아갈 거여.

봉  구 : 억울함을 진 회장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요, 할머닌 시위장에서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외치세요. 억울한 거 참으면 병 되요. 바다에 누우신 할아버지도 그런 할머니를 응원하실 거예요. 그럼 내일 뵈요.

외조모 : 봉구.

봉  구 : 예?

외조모 : (손을 잡으며)고마워.

봉  구 : 고맙긴요. 하정씨 잘 키워주어서 제가 고맙죠. (나가며 주먹을 올리며)할머니 화이팅.

외조모 : (주먹 쥐고 화답하며)그려. 파이팅이다.


암전.



제 6 장


시위 현장. 멀리 군중들을 배경으로 확성기에서 시위음악들이 들리는 가운데 외조

모, 석주어멍, 하정이 ‘남편 죽이고, 아들까지 폭행한 인간백정 진병건 나와라’, ‘바다

진입로 폐쇄 웬말이냐, 좀수 생존권 보장하라‘. ’환경오염 주범, 골프장 설치 결사반

대‘  등이 쓰인 피켓을 들고 섰다. 확성기에서 피켓에 쓰인 구호들이 터져 나온다.

외조모와 일행들이 확성기의 구호를 따라 외친다.

확성기 소리가 멈추자 외조모가 울부짖는다.


외조모 : 내 서방 살려내 이놈들아. 살인마 진덕호 나와 이놈아. 서방 죽인 것도 부족해서 아들놈까지 죽이려 들어. 이 개백정 놈아, 죽어가는 내 아들 살려내. 찢여 죽여도 시원치 않을 깡패 놈아. 도둑질 해 간 돈 다 내놓아. 눈물 속에 산 내 청춘 배상해라 이놈아.


다시 확성기의 음악 속에 외조모의 울부짖음이 묻힌다.

잠시 후 밝아지면 다시 병원보호자대기실. 외조모가 피곤한 듯 졸고 있는데, 봉구

신문을 들고 들어온다.


봉  구 : 할머니, 피곤하시죠? 여긴 하정이한테 맡기고 집에 가서 편안히 눈 좀 붙이세요.

외조모 : (팔을 올렸다 내리고 주무른다)아녀. 안하던 운동했더니, 알이 배겼나 봐.

봉  구 : (신문을 펼치며) 할머니, 대단하던데요. 여기 좀 보세요. 할머니 얼굴이 신문에 나왔어요.

외조모 : 눈 어두워서 안 보여.

봉  구 : 맨 앞에 서서 손을 치켜 든 모습이 잘 나왔어요. 멋있어요. 투사 같아요

외조모 : 투사? 난 그런 것 모른다. 세상이 날 일으켜 세운 거지. 자식이 폭행당해 초죽음 상태인데 가만 있을 부모가 어디 있어.

봉  구 : 여기 할머니 이야기도 실렸어요. 진병건이 어떤 인물인지 제보했거든요. 아마 조금 있으면 할머니 취재하러 기자들이 몰려 올 거예요.

외조모 : 기자들이 왜?

봉  구 : 텔레비전에 내보낼려구요?

외조모 : 난 싫다. 과거 들춰내어 태창이 아방 두 번 죽게 할 수도 없구,  아들 폭행당한 것이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구. 난 조용히 살고 싶어.

봉  구 : 뜻이 정 그렇다면, 제가 할머닐 보호할 게요.

외조모 : 난 평생 좀녀야. 물에서 자식들 낳아 기르고 딸에 서방까지 바당에 묻었어. 나도 거기 묻힐 거니까 바당이나 뺏기지 않게 해줘.

봉  구 : 예. 꼭 그렇게 될 겁니다.

외조모 : 오늘은 몇 시에 모인다고 했지? 듣긴 들었는데 깜빡 했구만.

봉  구 : 제가 알아봐 드릴게요.


하정 들어온다.


하  정 : 할머니, 살았어요.

외조모 : …

하  정 : 외삼촌이 눈을 떴다구.

외조모 : 우리 태창이가 살아났어? (허공에 대고 연신 절을 하며) 하이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나도 살았다. (하다가 허리를 잡고 쓰러진다) 아아, 아이구…. 아이구 배야.

하  정 : 할머니.


하정 다가서는데 암전



제 7 장


한 달 후. 외조모의 집. 볕 좋은 오후.

마당에 외삼촌이 털모자를 쓰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한곳을 응시하며 앉아 있다.

왼쪽이 마비되어 움직임이 불편하다.

잠시 후 하정과 의사 방에서 나온다.


의  사 : (하정에게) 오태창 환자 약은 잘 드시고 계신가?

하  정 : 예. 먹는 건 잘 드시는데 전혀 차도가 없어요.

의  사 : (외삼촌에게) 안녕하세요. 볕이 따뜻해서 좋죠?

외삼촌 : ….

의  사 : 혈색이랑 아주 좋아졌는데.(맥박을 잰다)

하  정 : 맥박이랑 혈압도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헌데 전혀 기억을 못하시나 봐요.

의  사 : 오래 걸릴 거야. 이만한 것도 다행이지. 두개골이 함몰되어 일어서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나머지는 본인의 몫이야. 재활의 의지가 있으면 회복이 빠를 거란 말이지.

하  정 : 그런데 할머닌 다시 입원시켜야 할까 봐요. 노망이 심해지신 것 같아요.

의  사 : 무슨 소리야. 그냥 편하게 놔둬요. 길어야 몇 달이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준비 하라구.

하  정 : 그래도 물질하며 단련된 강단이 있으니까 오래 버티실 거예요.

의  사 : 연세가 어떻게 되더라?

하  정 : 금년이 일흔셋이에요.

의  사 : 어휴 살만큼 사셨네. 내가 다시 올 필요도 없겠어.

하  정 : (섭섭해 하며) 선생님.

의  사 : 섭섭해 하지마. 요즘 세상 천수를 누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도처에 깔린 게 지옥문인데. 나도 그만큼 살 자신 없다구.

하  정 : (배웅하며)왕진 와줘서 고맙습니다. 

의  사 : 이 간호사 빨리 병원으로 돌아와. 그렇게 오래 자리 비우면 곤란해. 더구나 하정인 정직도 아니고, 자릴 노리는 간호보조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  정 : (갈등하며)알겠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의  사 : 그럼 나 갈게, 나오지 마.

하  정 : (문 앞에서)예.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외조모가 나온다. 기력이 많이 쇠진해 진 모습이다.


외조모 : 나 배고파 밥 줘.

하  정 : 조금 전에 드셨잖아요?

외조모 : 이년아, 너희들만 처먹고 난 왜 안줘.

하  정 : 알았어요. 할머니 드릴 게요.

외조모 : (외삼촌을 보고) 아니 잰 누구여?

하  정 : 누군지, 모르겠어?

외조모 : (외삼촌에게 다가가서)넌 누구냐? (얼굴을 살피다) 아니 이거 태창이 아방 아녀? 당신 언제 왔어? 왔으면 들어 와야지 왜 그렇게 앉아 있어?

하  정 : 할머니. 아드님이야.

외조모 : 아녀, 내 남편이여. (손을 쥐고 흔들며) 하이고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외삼촌 : ….

외조모 : 왜 화 났어? 그려 미안해. 고생을 많이 해서 나보다 늙었구만.

하  정 : 할머니 몇 살인데?

외조모 : 나 스물여덟.

하  정 : 스물여덟? 하이고 청춘이내. 나랑 친구해도 되겠네.

외조모 : 친구? 넌 몇 살이야?

하  정 : 나 스물일곱.

외조모 : 너 죽을래? 어린 것이 언니한테 까불어.

하  정 : 할머니, 나 오명자 딸 하정이야. 오명자 몰라요?

외조모 : 오명자가 누구야?

하  정 : 할머니 딸 오명자 몰라?

외조모 : 오명자 내 딸 맞아. 넌 오명자 아니야.

하  정 : 그래요. 전 오명자 씨가 시집가서 낳은 딸 하정이야.

외조모 : 오명자가 시집 갔어?

하  정 : 그래요. 그래서 날 낳았다구요.

외조모 : 거짓말 하지 마 이년아. 오명자는 바당에 갔어. 전복이랑 구쟁기랑 잡아서 올 거야.

하  정 : 그럼 나도 줄 거야?

외조모 : 택도 없는 소리. 너 나 밥도 안주고 구박했지? 명자한테 다 이를 거야. 너 우리 명자 얼마나 싸움 잘하는지 모르지?

하  정 : 알았어요. 식사 차려올테니 외삼촌이랑 함께 드세요?

외조모 : 얼른 가져 와. 이년아. 너 창자 가득하니까 남 배고픈 줄 모르지? 멀리 외방 갔다 온 사람 얼마나 배고프겠어.

하  정 : 알았어요. (차반을 당기며) 이거라도 요기하고 계세요.(들어간다)

외조모 : (과자를 집어 주며) 배고프지? 자 이거 먹어. (입으로 가져가며) 먹어.

외삼촌 : ….

외조모 : 화났어? 왜 말을 안 해? 당신 안 찾아다녔다고 화 난 거야? 오해야. 당신 찾아서 육지로 산으로 안가본 데가 없어. 그 난리 통 속에 꼬박 반년을 당신 찾아 해맸어. 내가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하정, 차반에 죽을 떠들고 나오다가 외조모의 대사를 듣는다.


외삼촌 : (눈물을 흘린다)….

외조모 : 당신 울어? (닦아주며) 울지 마. 나도 참았어. 울고 싶어도 애들 맘 약해 질까봐 울지도 못하고 꾹 참았어. 당신 떠나니까 동네 총각, 홀아방들 결혼하자고 얼마나 쫓아다닌 줄 알어? 나라고 팔자 고치고 싶지 않았겠어? 돈다발 흔들고 밭문서 내밀며 꼬셨지만 나 안 갔어. 당신이 그리우면 물질하며 울고 숨비소리로 삭혔어. 당신 기다리며 태창이 명자 키웠다구. 나 대단하지 않어? 헌데, 왜 이제야 왔어. 어디서 무얼하다 기별 한 장 없이 이제야 돌아왔냐구? (때리며)미워. 미워죽겠어. 말을 해 봐. 내 다 용서해 줄게 말을 해. 어서.

하  정 : (들어서서 말리며) 할머니, 그만 해. 외삼촌이 아파요.

외조모 : 아퍼? 내 간장은 물 된지 오래. 가. 꼴도 보기 싫어. 말도 않으려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어.

하  정 : (방으로 인도하며) 진정하시고 좀 쉬세요. 할머니.

외조모 : 간호사. 나 약 먹었어.

하  정 : (달래며) 잘하셨어요. 말을 잘 들어야 금방 나아요. 자 잠 잘 시간이에요.

외조모 : (하품하며)그래, 졸려. 나 잘 거야.


하정 외조모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봉구 들어온다.


봉  구 : (만면에 웃음을 띠고)하정 씨! 됐어. 우리가 이겼어. 골프장 허가가 취소됐단 말야.

하  정 : 정말? 아 해냈구나. 우리가 해냈어. (할머니를 부등켜 안으며) 할머니, 우리가 이겼어. 바다를 되찾았다구.

외조모 : (빠저 나오며) 놀고들 자빠졌네. 너희들 노망하냐?

하  정 : 중간에 타협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봉  구 : 우회해서 진입로 만들어 준다고 했지만 화난 주민들이 동의해 줄 리 있겠어? 외삼촌이 이렇게 됐는데.

하  정 : 암 절대로 안 돼지. 

봉  구 : 동의서 위조가 들통 났고, 진입로 막는 막가파식 공사가 여론의 철퇴를 맞았어. 게다가 공무원들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고 은행대출이 막히자 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던 거지. 자업자득이야.

하  정 : 이건 할머니와 외삼촌이 이루어낸 거야. 미련곰탱이 우리 할머니가 이겼어. 제정신이었으면 좋아서 춤을 출텐데. (할머니의 손을 잡고 흔들며) 할머니 축하해. 바다를 되찼았다구. 어서 나아서 마음 놓고 물질해요.

외조모 : 이거 놔. 이년아. 그렇게 흔드니까. 배가 아프잖아.

하  정 : 아이구 엄살도.

외조모 : (엄살을 떤다)아이구 배야, 아이구. 나 죽네. 아이구 나 좀 살려 줘. 아이구 배야.

하  정 : 할머니. 정말 아퍼?

외조모 : (얼굴을 찡그리다) 똥-. 쌌어.


 암전.



제 8 장


며칠 후.무대 밝아지면, 하정 마당을 쓸다가 전화를 받는데 외조모 빨래감을 들고

나온다. 전장보다 훨씬 생기 있고 정신이 또렷하다. 단정한 옷차림이다.


하  정 : (전화기에다 대고) 응, 오빠. (놀래며) 그래요? 할머니가 섭섭해 하시겠다. 응 알았어. 빨리 와. 그래 사랑해.(통화 끝내고 전화기에 키스한다)

외조모 : (빨래를 마루에 내팽개치며)이것들 다 뭐야. 계집애가 항상 깔끔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일렀는데. 똥 묻은 빨래 쳐 박아 두면 냄새는 안나?

하  정 : (이외의 상황에 놀라며)어머 할머니, 일어나셨어요?

외조모 : 일어나니까 나왔지. 내 물옷 어디 뒀어?

하  정 : 그 몸으로 물에 가게?

외조모 : 며칠 물질 안하니까 몸이 근질거려 죽겠다. 아침 운동해야 밥맛이 좋지.

하  정 : 정말 괜찮은 거야?

외조모 : 이년아 백 살 까지 살라며? 애기나 어서 나. 내가 키워 줄테니까.

하  정 :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떻게 애를 나?

외조모 : 여태 시집 안 갔어? 난 행진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안 간 거여?

하  정 : 아니야. 날자 받아 놓았어. (껌을 소리내어 씹으며 자랑하듯) 이제 꼭 32일

남았다. 

외조모 : 무슨 껌을 화냥년처럼 씹어?

하  정 : (화내며)할머니. 같은 말이라도 화냥년이 뭐야?

외조모 : 그럼 양갈보냐? 길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들이 꼭 그 모양이더라.

하  정 : 또 심통. 할머니와 말 안 해.

외조모 : 그려 니 서방이랑 잘 붙어먹어라.

하  정 : (어이가 없어)나 참.

외조모 : 뽕군 어딨어?

하  정 : 어라, 뽕구가 뭐야?

외조모 : 방구를 뽕뽕 잘 뀌니까 뽕구 아녀?

하  정 : 언제 오빠가 방구를 뀌었다구 그래?

외조모 : 아니면 말고. (우스운지 소리내어 웃는다)허허허. 뽕구.

하  정 :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 어젯밤까지도 끙끙 앓았는데?

외조모 : 뽕구 어디 있냐니까?

하  정 : 오고 있는 중이에요.

외조모 : 너 중학교 다닐 때까지 이불에 지도 그린 거, 할망한테 몽니 부린 거 뽕구한테 다 말해버릴 거야.

하  정 : 말하세요. 하나도 안 믿을 걸?

외조모 : (혼자 소리로) 이 녀석들 벌써 볼장 다 본 거 아녀?

하  정 : 참 할머니, 진덕호가 죽었대?

외조모 : 진가 놈이 죽어?

하  정 : 응, 오늘 조간신문에 났대.

외조모 : 죽어도 진작 죽어야 할 놈이지. 잘 죽었다 나쁜 놈. 헌데 끝내 사과 한마디 없이….(한숨을 내쉬며) 휴. 가슴은 시원한데 어찌 맥이 탁 풀린다. 나보다 저 녀석이 문제지. 맺힌 것이 풀려야 병도 빨리 나을텐데. 가서 석주어멍 불러와.

하  정 : 할머니 정말 정신이 든 거야? 아픈데 없어?

외조모 : (신경질적으로) 다 나았다니까? 너 정말 말 안들을 거여?

하  정 : 알았어. 불러 올게요. (나가며 혼자 소리로)기적이야. 기적이 일어났어.


마루에 앉아 있는 외삼촌에게 다가간다.


외조모 : 많이 답답하지?

외삼촌 : ….

외조모 : 하고 싶은 말도 많겠지만 다 용서하고 잊어라. 그게 네가 사는 길이야.  다쳐서 얻은 것도 있잖니? 골프장 공사도 막았고 바당은 네 덕에 되찾은 거야. 좀수들에겐 다행한 일이지만 내 가슴은 아프다.

외삼촌 : ….

외조모 : (옆에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며) 얼굴 씻어주는 사람도 없대? 이런 몸으로 어찌 험한 세상을 살아갈래? 차라리 나랑 같이 바다에 빠져 죽어버릴까?

외삼촌 :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외조모 : 그려 그려 어미가 잘못했어. 울지 마. 살려는 생각만 있으면 다 산다. (품에서 통장을 꺼내며) 자 이거 받아.(손에 쥐어준다) 이거 너한테 받은 용돈 모아둔 거야. 자식들 믿지 말고 요양원에 들어가.


봉구 들어온다.


외조모 : 이제 오는 거야?

봉  구 : (이상해 하며)어?

외조모 :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니?

봉  구 : 아, 아닙니다.

외조모 : 어른이 물으면 공손히 대답해야지. 왜 고갤 쳐들고 빤히 쳐다봐?

봉  구 : 죄송합니다. 하정이 어디 갔나요?

외조모 : 심부름 보냈어. 자네 이리 좀 앉게.

봉  구 : (조심스럽게 앉는다)

외조모 : (다정하게)이제야 말이지만 사람 연분이 따로 있는 것 같애. 자네 처음 봤을 때 이미 결정했지. 하정이 빼앗기는 아쉬움에 심통 부린 거 용서해.

봉  구 : 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싫었다면 일도 시키지 않았을 거예요.

외조모 : 눈치도 빠르군. 일 처리하는 거 보니까 믿음직하고 마음에 들어. 하정이 잘 부탁해.

봉  구 : 걱정 마세요. 할머니도 잘 모실 게요.

외조모 : 말만으로도 고마워.


석주어멍과 하정 들어온다.


석주어 : 하이고 정말이구나게. 삼춘 나 알아지쿠가?

외조모 : 석주어멍아 고맙다.

석주어 : 무슨 말이우꽈. 삼춘이 살아나니 너무도 반갑수다. 오랜만에 식구가 다 모였구나. 철영이 아방도 혈색이 많이 좋아져신게.

외조모 : 그동안 심부름 하느라 수고 많았저. 나 이제 살면 얼마나 사느냐. 석주어멍한테 부탁 하나 허젠 불렀져.

석주어 : 예. 고릅서.

외조모 : (쇳대를 하정에게 주며) 자 이거 받으라. 저 궤 속에건 하정이 몫이야. (봉구에게)자넨 저 양반 요양원 좀 알아봐줘. 합의금 받으면 경비는 충분할 거야.

봉  구 : 예.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도 많아요. 복지과에 친구가 있으니, 당장 알아볼게요. (주머니 뒤지다) 핸드폰 어디 갔지? 차에 뒀나?(나간다)

하  정 : 할머니 왜 지금 이런 소리하는 거야? 오래 살 거잖아?

외조모 : 정신이 있을 때 말 해둬야 다툼이 없지.

석주어 : 내가 증인이난 걱정 맙서.

외조모 : 이젠 됐다. 갑자기 곤밥에 고기국 생각나는구나. 석주어멍아 가게에 가보라. 무신 고기 나신지.

석주어 : 부탁이 그거우꽈? 조금만 기다립서. 얼른 강 사오쿠다. 하정아 물이나 올리라.(나간다)

하  정 : 예.


하정 부엌으로 가는데 외조모가 바다 길로 나간다.


하  정 : 할머니 어디 가?

외조모 : 갯바람 쐬고 올 테니까 밥이나 해.(나간다)

하  정 :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참으로 이상 하네? 다 죽어가다 어디서 저런 기력이 났을까.(들어간다).

외삼촌 : (말을 하려고 애쓰나 안된다) 어어어어.(눈물이 흐른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짐승처럼 소리 내어 운다)으으으흐어어허.

봉  구 : (들어오다 외삼촌을 본다) 외삼촌, 왜 그러세요? (수건으로 닦아준다) 답답해서 그러시죠? 울지 마세요. 외삼촌 마음 다 알아요.

외삼촌 : (울지만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으으으흐.

하  정 : (나오며) 왜 그래?

봉  구 :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드시나 봐.

하  정 : 요양원에 보내신다니까 그러시나?

봉  구 : 요양원에 가시면요 친구도 많아요. 좋은 곳으로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 놨으니 걱정 마세요.

하  정 : 외삼촌. 마음을 조급하게 잡수시지 말고요, 편안하게 가지세요. 답답하시겠지만 시간이 약이에요. 꼭 나으실 거에요.

봉  구 : 울고 나면 마음이라도 편해질 테니, 그냥 둬.

외삼촌 :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운다)

하  정 : 아이 속상해. 오늘 드레스 보러가기로 했는데.

봉  구 : 시간 좀 늦춘다고 드레스가 어디 도망가? 모처럼 할머니도 정신이 드셨는데.


석주어멍 비닐봉지에 고기를 들고 들어온다.


석주어 : 마침 황돔이 이서라. 이거 국 끓이면 듬삭헌(기름이 진) 게 배지근할(구미가 당길) 거여. 손 다 본 거난 그냥 한불 씻어 물에 들이치라.

하  정 : 예. 이리 주세요. (받는다)

석주어 : 삼춘은 들어간 누어시냐?

하  정 : 바다에 가셨는데요?

석주어 : (놀라며)뭐여? 바당에? (감지하고) 아이고, 나 영 헐 줄 알았주. 글쎄 이상하더라니?

하  정 : 뭐가요?

석주어 : 에그 설운 애기들아. 촛불이 꺼지기 전엔 반짝한다고 못 들어시냐? 아픈 사람이 바당엔 무사 가느니. 보고 싶은 사람들 다 봐시난 하직하러 간 거아니가? 죽으러 말이다. (뛰어나가며) 아이구, 큰일 났구나. 이놈의 바람은 왜 이리 정신 사납게….

하  정 : (놀라며 몸이 굳어진다. 잡았던 생선이 바닥에 떨어진다 ) 죽-어-요?

봉  구 : (뛰어나가며)어서 와 하정이.

하  정 :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 앉으며) 할머니 안돼. 죽으면 난 어떻게 해. 투정만 부린 난 어떻게 해. 할머니, 잘못 했어. 죽지 마. 호강시킬 게 죽지 마. (일어서서) 미련곰탱이.(울부짖으며 뛰쳐나간다) 죽긴 왜 죽어. 할머니!

외삼촌 :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조금씩 움직이며 말을 하려고 애쓰다 겨우 한마디를 내밷는다)어-어-머-니-.


성난 파도소리와 함께 비장한 음악이 한동안 흐르다 암전.



제 9 장


파도소리가 잔잔히 부서지다 핀 라이트 들어오면 하정이 물옷을 입고 서 있다.


하  정 : 그렇게 외할머닌 바다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가슴에 못이 박힌 채 살아온 한 맺힌 과거도 파도에 묻혔습니다. 할머니 궤 속엔 한 벌의 무명 물옷과 새로 짠 망사리와 태왁이 들어있었고 제 이름으로 등기된 집문서가 있었습니다. 그건 저를 묶어놓은 끈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왜 그렇게 바다를 지키려 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바다는 할머니의 생명줄이자 위안처였으니까요. 저도 이젠 바다에서 할머니의 품을 느낍니다. 허나 파도가 사납게 소리쳐 우는 것이 게으름과 오만함에 대한 질책이라는 걸 깨닫는 덴 한참 걸렸습니다. 그건 제가 미련곰탱이기 때문이죠.

외조모 : (다른 쪽에 물옷을 입고 핀 라이트를 받으며 ) 미련곰탱아! 어서 빨랑 움직여. 그렇게 꾸물거려 어찌 세상을 살아? 물때 놓치겠다 이 미련곰탱아!

하  정 : (태왁과 망사리를 들고) 예. 가요 할머니.

봉  구 : (나타나서) 여보, 나 출근 늦었어. 밥 안 줄 거야?

하  정 : (나가며) 나도 출근이여, 차려 먹어.


봉구 사라지고 음악이 흐른다. 하정 춤을 추듯 외조모에게로 간다. 외조모도 앞으로

나와 서로 춤을 춘다. 춤이 무르익을 때 쯤 막이 내려온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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