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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시를 읽는 벤치

서정이여, 흥하라

강용준 2024. 3. 14. 12:24

322편의 시를 한권에 모아 2021년 출간한 류흔의 시집

서정이여, 흥하라

                                                      류 흔

 

생생히 기억하는데

소백산 아래 영주동부초등학교 오 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서정주 씨의 시를 읽고

나도 서정주의 시인이 돼야겠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폭설 맞으며

결심했었다

 

서정에 꼴려서

화사한 꽃뱀인 줄 모르고 혹

했었다

 

내 애비는 종이 아니었지만

내 애비는 종보다 못한

철도원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기적(汽笛)이고

중앙선 비둘기호가 물어 온

구구단이 틀리는 즉시 입술이 터졌다

 

손톱이 붉은 에미의 자화상이 바로

나였으니

휴천동(休川洞) 집 뜰에는 망할 봉숭아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지고 지고

육군 오장(伍長) 마쓰이 오데이가

지고

아득히 파도 소리에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져버린 국화꽃 한 송이를

놓는다

어려서 죽은 내 누이에게도 주지 못한

꽃을 바쳤다

 

숭고이 죽은 시인을 위해

함부로 살아남은 시인이

모든 서정에 바친다

 

서정이여

시인이여, 어쩌다 한 번은

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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