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이여, 흥하라
류 흔
생생히 기억하는데
소백산 아래 영주동부초등학교 오 학년 겨울방학 때
나는 서정주 씨의 시를 읽고
나도 서정주의 시인이 돼야겠다, 마당으로 뛰쳐나가 폭설 맞으며
결심했었다
서정에 꼴려서
화사한 꽃뱀인 줄 모르고 혹
했었다
내 애비는 종이 아니었지만
내 애비는 종보다 못한
철도원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기적(汽笛)이고
중앙선 비둘기호가 물어 온
구구단이 틀리는 즉시 입술이 터졌다
손톱이 붉은 에미의 자화상이 바로
나였으니
휴천동(休川洞) 집 뜰에는 망할 봉숭아가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지고 지고
육군 오장(伍長) 마쓰이 오데이가
지고
아득히 파도 소리에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져버린 국화꽃 한 송이를
놓는다
어려서 죽은 내 누이에게도 주지 못한
꽃을 바쳤다
숭고이 죽은 시인을 위해
함부로 살아남은 시인이
모든 서정에 바친다
서정이여
시인이여, 어쩌다 한 번은
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