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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벤치

편의점의 달

강용준 2024. 3. 21. 11:08

유정남 시인의 첫 시집(2023)

 

편의점의 달

                                              유정남

 

편의점에 달이 뜬다

밤의 뚜껑을 따고 나온 번데기들이 간이테이블에 앉어

별을 마신다

컵라면에 뜨거운 국물을 부어주면

굳은 혀들이 깨어나 풀어놓는 매콤한 언어들

풀어진 넥타이 하나 보름달로 행운의 즉석복권을 긁는다

구름으로 채워진 함량 미달의 과자 봉지들은

팽팽히 헛바람으로 부풀어 있다

차갑게 식은 유리병들의 마개를 따거나

삼각형을 베어 먹으면 동그라미가 될 거라 했지만

조각난 아이들은 달빛 우유나 몇 갑의 담배를 훔쳐 달아

났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 찍힌 바코드를 지울 수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는 천직이 되었다

김밥들은 자정을 기다려

어제라는 유통기한을 지우고 폐기된 하루를 위장에 채워

주곤 했다

어느 날 사막으로 걸어간 아버지는

불 꺼진 도시의 별을 지키려는 편의점이 되었지

가시뿐인 손목에 걸린 시계가 늘 가리키던 25

낙타의 밤은

지독한 모래바람이 불었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뚫고 아버지는 언제쯤 돌아

오실까

고치를 열고 나온 나방들은

어둠이 묻은 초콜릿 하나씩 입 안에 녹이며 제 갈 길로 떠

나고

진열대 위의 얼굴이 멀고 먼 아침을 기다린다

골목엔 둥근 과자가 떠오르고

길 잃은 고양이들만 차가운 달빛 조각을 뜯어먹는 밤

편의점은 잠들지 않는다

 

 

* 해남 토문재에서 만난 유정남 시인(2024년 3월) 2018 등단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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