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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무 동산

명품 가방 피렌쪼

강용준 2023. 8. 23. 08:15

문학나무 2023 여름호

명품 가방 피렌쪼

강 준

 

나는 가짜입니다. 지금은 가방박물관 유리 상자 속 빨간 카펫 위에 앉아 따스한 핀 조명을 받으며 관람객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사실은 안내문 속 원조가 아닙니다. 원래 여기 있어야 할 가방은 진짜 황금으로 치장된 우리 가문의 비조입니다. 이탈리아의 가죽공예 명장인 피렌쪼가 만들어 일본의 유력 정치인에 선물했는데 어떻게 해서 한국으로 건너오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난 이탈리아 태생이 맞습니다. 피렌쪼는 인기 있는 브랜드로 고가의 가죽제품입니다. 뼈대는 단단한 플라스틱으로 사각을 유지하고 모서리마다 금도금이 된 보호 장치가 박혀 있고 붉은색이 도는 소가죽 옷을 입었습니다. 피렌쪼란 이름표는 이마에서 빛납니다. 속을 들여다보려면 갈색 혁대를 풀고 굵은 이빨의 지퍼를 열어야 합니다. 속은 화려한 문양의 보라색 천으로 치장되었는데 파일럿에게 인기가 있어 파일럿 수트게이스로 불리기도 합니다.

자고로 사물도 임자를 잘 만나야 빛을 발할 수 있는 법인데 인간들이란 참. 애초부터 내 삶은 꼬여버렸습니다. 처음 이탈리아 매장에서 한국인에게 팔렸는데 그 사람이 내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습니다. 내 속을 뜯어내 등에다 얇게 편 필로폰 봉지를 붙이고 감쪽같이 꿰매어 내용물을 인형과 향수와 양주 등으로 채워 위장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난 두근거리는 속병을 앓게 되었지요.

무사히 이탈리아 세관을 통과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내렸으나 공항에서 사달이 났습니다. 피렌쪼 가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수하물 찾는 곳에서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원 주인은 의심 없이 다른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나중에야 가방이 바뀐 것을 알고 당황했겠으나 마약이 들어있는 것을 들킬까 봐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겠지요.

남의 가방을 들고 온 여인 역시 귀가해서 지퍼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공항에 신고했으면 어찌해서 도로 자기 가방을 찾을 수 있었겠으나 귀찮기도 하고 안에 있는 내용물이 더 탐이나 그냥 나를 취했던 것입니다. 내용물은 비워지고 난 그녀의 겨울 옷가지를 보듬고 옷방 어두운 곳에서 웅숭그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편안히 쉴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옷 주머니 속 음식물이 부패해서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헛구역질하며 오랜 기간을 기절한 채 살았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수심에 찬 얼굴로 들어오더니 나를 꺼내 들고 거실로 나갔습니다. 이미 곰팡이는 가죽 바깥까지 침투했고 악취까지 풍겨 명품의 체신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코를 막으며 옷가지를 꺼내더니 타월에 둘둘 말아 싼 물컹한 물건을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그녀에게 귀염받던 반려견 사체였습니다. 나는 졸지에 관이 되었습니다. 한밤중이 되길 기다려 차에 태워져 옆 동네에 있는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졌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란 말 뼈저리게 느꼈지요. 썩는 냄새에 먼지까지 뒤집어 쓴 영락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 난 한없이 슬펐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성공의 통과의례란 것을 믿었습니다.

어느 날 난 한 청년에 의해 구제되었습니다. 뼈다귀만 남은 내용물을 털어내고 자기 하숙집으로 데려가더니 정성스럽게 세탁해서 따스한 햇볕에 말렸습니다. 비로소 제 모습을 찾은 나는 그제야 웃음도 되찾았습니다. 그는 대학생이었습니다. 내 안에 문학책, 교양서적을 차곡차곡 담아 방 한구석에 내 자리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 삶의 의미를 천착하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학생에게는 연극에 심취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가 내 집을 방문했는데 한쪽 구석에 요염하게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응큼한 생각을 했습니다.

. 저 가방. 못 보던 건데?”

길에서 주었어.”

그는 나를 끌어내더니 한눈에 명품인 걸 알아보았습니다.

이거 피렌쪼네?”

미련스러운 동거남은 내 가치를 몰랐습니다.

유명 상표야?”

연극인 친구는 나를 품어갈 욕심으로 너스레를 떨었지요.

짝퉁이겠지. 명품이면 누가 길에 버리겠냐? 마침 잘 됐다. 이번 공연에 소품으로 가방이 필요한데 나한테 팔아.”

팔 것까지. 빌려줄게.”

아냐. 장기 공연하다 보면 상할 수도 있어. 그냥 가져가긴 그렇고. 만 원 놓고 갈게.”

헐값에 팔린 난 주인공과 함께 연극무대에 오르게 됐고 많은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가치를 느낀 시간이었지요.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기어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를 한국으로 데려왔던 사람이 어디서 소식을 듣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가방 임자를 찾아 그 가방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가방 귀퉁이에 살짝 흠이 생긴 것이 증거라는 겁니다. 연극 청년은 어이가 없었죠. 옥신각신하던 끝에 경찰서로 가자고 하자 그는 욕을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소품실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도둑은 나를 비밀 공간으로 가져가선 예리한 칼로 속을 찢어냈습니다. 그리고는 등짝에 붙어 있는 하얀 분말이 담긴 비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만족한 듯 웃었습니다.

속이 너덜난 난 다른 허접한 물건을 품고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난 이대로 종말을 맞지 않길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진리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동네 사는 박물관 직원의 눈에 띄어 인생 역전을 한 겁니다. 그는 쓰레기를 버리러 왔다가 엉망이 된 나를 발견하고 가방박물관 관장에게 넘겼습니다. 전시된 진품과 똑같은 물건을 보자 관장은 다른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는 나를 들고 가서 전문가에게 수리를 맡겼지요. 그래서 시집가는 신부처럼 꽃단장을 마친 나는 원조 가방과 교체되어 진열장에 앉게 된 겁니다.

고생 끝에 행운을 잡았지만 기품이 넘치는 진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정말 궁금합니다.

 

 

문학나무87(2023년 여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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