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소설 나무 동산

야수와의 산책

강용준 2021. 7. 23. 10:12

 

강 준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윤 국장이 아무런 감정 없이 툭하고 던진 말은 돌팔매가 되어 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마창석이 죽었다니? 작년 문학관에서 함께 하는 동안 희한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는 생존에 강한 애착을 보였는데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3월이면 문을 열던 문학관이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4월 중순이 되어서야 입주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한 시간 반쯤 자동차를 몰고 문학관에 도착했을 때 마창석은 이미 한쪽 구석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미투 사건으로 구속되며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 후 그는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출감 후 떠돌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A 문학관에 은둔하고 있었다. 사무국장의 말로는 2월 초에 오갈 데 없다며 막무가내로 쳐들어와서 죽치고 있는데 매정하게 내보내기도 그렇고 골치 아프다고 했다.

매년 오던 곳이었으나 첫날은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적응을 못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유리창 커튼 틈 사이로 달빛과 함께 스며든 짐승의 거친 숨소리에 잠이 깼다. 은은한 달빛의 명상을 부수는 소리가 두려움으로 다가오자 벌떡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현관문을 여는데 퍽퍽한 경첩의 삐걱대는 소리에 놀란 검은 물체 한 마리가 후다닥 도망쳤다. 길 건너 채마밭에는 파헤쳐진 월동 무가 여러 조각으로 동강 난 채 하얗게 뒹글고 있었다.

고라니예요. 저기 똥 보세요. 요즘 산에 먹을 것이 없어선지 자주 내려와요.”

돌아다보니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람이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직감적으로 마창석임을 알았다.

마 작가?”

. 선생님, 오신다는 소식 들었어요.”

이거 얼마 만이야? 같이 있게 돼 반가워요.”

반색하며 맞잡은 손을 몇 번 흔들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따르던 그가 날 불러 세웠다.

한 선생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밤이 깊었지만 잠깐 시간 내주시겠어요?”

그는 나를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자 벽면에 즐비하게 진열된 문학 잡지들이 오랜만에 보는 나를 반겨주었다. 불빛에 완연하게 드러난 마창석의 모습은 가년스러웠다. 감귤색 모자에 후줄근한 회색 티셔츠와 무릎 언저리가 심하게 튀어나와 단물나게 생긴 추리닝을 입은 그는 50대 중반의 한창 나이임에도 세월의 더께에 짓눌린 초로의 행색이었다. 그의 화려했던 이력을 생각하니 애련의 감정이 스멀거리며 몰려왔다.

10여 년 전 내가 심사에 참여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 문학상의 기존 수상자로 초대되어 온 그와 난 메인테이블에 마주 앉아 인사를 했다. 화려하고 흥성스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잘 나가던 명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그의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이국적인 얼굴에다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넘긴 긴 머리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재킷은 보통 사람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짙은 보랏빛이었다. 엄친아의 용모에 좌중을 사로잡을 만큼 자신감에 넘친 유려한 언변은 단연 영웅의 모습이었다.

마창석은 휴게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컵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한 선배님, 건강은 여전하시군요?”

선생님에서 선배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는 것은 무슨 신호지? 커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고 나서 난 화답했다.

고생 많았지요? 그 좋던 얼굴이 많이 상 했구만.”

내 말에 울컥했는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그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더니 커다란 두 손으로 덥수룩한 얼굴을 감싸며 매만졌다

다 제가 처신을 잘못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구속 소식을 접했을 때 난 작품 세계의 지평 확장을 위해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기대했었다.

색다른 경험 했으니 좋은 작품 나오겠구만요?”

위로한다고 건넨 말에 용기를 얻은 그는 얼굴빛을 바꾸며 선심 쓰듯 말했다.

선배님.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한참 어린데.”

한참이라 했지만 일곱 살 차이었다. 그는 넉살 좋게 내 마음의 빗장을 풀더니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뵙는데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급하게 쓸 데가 있어서 그런데 이십만 원만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말을 마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천하의 마창석이 자존심 다 버리고 구걸이라니?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고 매년 베스트셀러 작가에 선정될 정도로 인세도 많이 받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늘어진 눈꺼풀과 풀기 없는 그의 목소리에서 알량한 형편이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돈 빌려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석 달을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하므로 선뜻 지갑을 열어 호의를 베풀었다.

 

문학관에 딸린 자그만 식당에 손맛 좋은 아줌마가 있었는데 투병 중이었다. 달리 찬모를 구하지 못해 동네 식당에서 식사해야 한다고 윤 국장이 양해를 구했다. 아침은 문학관 식당에 준비해 놓은 식자재로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고, 점심과 저녁은 정해진 시간대로 한마음식당에 모여서 먹었다.

A 문학관은 3개월씩 나누어서 작가들을 입주시켰는데, 작년 1기 동기생들은 나와 마 작가 그리고 중년의 여성 시인과 두 명의 젊은 여류 소설가 등 다섯 명이었다.

젊은 두 소설가는 마창석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듯 눈 마주치는 것도 역겨워할 정도로 그를 싫어했다. 눈치 빠른 마창석은 그런 정황을 모른 채 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을 먹는데 생활 리듬과 안 맞으니 따로 먹겠다고 했다. 밤새워 글을 쓰다가 새벽에 잠을 자는데 점심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너희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젊은 소설가들은 눈엣가시 같은 놈 안 보게 돼서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 마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다음날 단톡방에 또 한 명의 이탈자가 나왔다.

내일부터는 마 선생님하고 밥 먹을게요. 저도 사실 올빼미과 거든요.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게 좋고, 저녁도 일찍 먹고 산책 하려구요.’ 나이 50 넘어 시로 등단했다는 김화경이었다.

김화경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마 작가와 비슷한 나이고 등단 6년 차라는데 여태 시집 한 권 못 냈다. 그런데 똥폼은 다 잡고 허세를 부렸다. 외제 차를 주차장에 세워 놓았고,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 온갖 장신구에 실내에서도 늘 파티복 같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 거기다 금연 시설인데도 담배 연기가 옆방에 흘러들 정도로 유유하게 실내 흡연을 즐겼다. 사무국장에게 확인한 결과 그녀는 보험설계사로 삼십 년을 일했고 대리점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규정대로 엄격하게 심사했다면 직장을 가진 사람은 입주할 수 없는데 특혜였다. 그 높은 경쟁을 뚫고서 입주하게 된 배경에는 정실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녀가 만학으로 공부한 문창과의 지도교수가 평소 잘 알던 관장에게 청탁을 넣었다고 했다. 난 그녀의 심리에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집도 사무실도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고 사업관계로 자주 외출하면서 왜 그녀는 굳이 문학관에 입주했을까?

김화경은 젊은 작가들에겐 김 여사로 불렸다. 문자를 본 젊은 작가들은 빈정대기 시작했다. ‘김 여사가 마창석의 마수에 넘어갔다.’‘검색 창에 이름 치면 어떤 놈인지 다 알 수 있는데 설마 그걸 모를까?’ ‘마창석 작품 읽어보셨죠? 어떻게 여자를 골프채로 때려죽일 수 있어요?’‘마초가 아니라 악마에요.’

그의 작품은 문학상을 받을 때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황당한 주장을 내세우며 잔인하게 행동하는 주인공을 옹호하는 작품들에 심사위원들은 인간 내면의 악마주의적인 요소를 교묘하게 짜깁기해서 악한 소설의 가능성을 보였다고 칭송했다.

어느 잡지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쓴 그의 글을 읽은 후, 난 작품에서의 악마적 난폭성은 그의 탄생 비화와 굴곡된 유년 시절에 집적된 잠재의식에서 왔다고 단정했다.

지방 유지의 아들이었던 부친은 한량이었다. 이웃 마을 무녀와 눈이 맞아 송창석을 낳았으나 조부는 무녀를 받아드리지 않았고 부친은 죽음으로 반항했다. 그는 조부모의 손에 자랐으며 모친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굿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삼촌들의 괴롭힘과 멸시를 받아내며 성장했고 그 내용을 일기로 쓰면서 증오를 키웠다. 부친에 대한 원망과 혈육에 대한 미움 때문에 등단하면서 마 씨로 성을 바꿨다. 그가 위안을 받은 것은 읍내 도서관에서 빌려온 문학 명작들이었다. 그때 남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도내 백일장을 휩쓰는 글솜씨를 발휘했는데, 그것은 직접 사서삼경을 가르쳐 주었던 조부의 덕이 컸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에 중국의 경전, 서양 신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인용되는 것도 축적된 독서의 힘이었고, 인간 심리를 현학적으로 풀어내며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자산이 됐다.

 

난 아침을 먹고 나면 문학관 뒤의 산속으로 난 숲길을 산책했다. 관목지대를 거쳐 자그만 언덕을 구불구불 길을 펴며 올랐다. 적송과 편백나무, 상수리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계곡을 끼고 돌아 산 너머 마을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오노라면 생각도 술술 풀리고 등짝이 촉촉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부터 마창석이 뒤를 따라나섰다.

? 김 여사는 어떻게 하고?”

그런 말씀 마세요. 10분만 걸으면 숨을 헐떡거리는데 운동이 됩니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그놈의 담배 때문이죠. 무슨 여자가 니코진 냄새가 몸에 밸 정도로 담배를 피우는지? 내가 그 여자 좋아서 선생님, 선생님 하며 아양 떠는 줄 아세요?”

그럼 왜? 하고 목까지 차오른 의문은 생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자 사라졌다. 그의 웃음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임을 말하고 있었다. 부유한 차림새의 초짜 시인을 보자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마창석의 눈이 번뜩였을 것이고, 김 여사는 그의 수려한 용모와 언변에 한때 잘 나갔던 소설가란 이유만으로도 마음이 동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위해 내 머릿속 회로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함께 산책하는 날은 나의 명상이 늘 깨지고 조각나 버렸다. 그는 불량 체력으로 헉헉거리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나불댔다.

제 호가 약수인데 세상이 나를 야수로 만들었어요.”

약수? 상선약수의 약수?”

. 물처럼 살려고요. 헌데 친구들은 날 야수라 불러요.”

야수? 허허허. 작품 성향과 딱 어울리는 별명인걸?”

그도 실없이 소리내어 웃으며 엉너리를 부렸다. 인기척에 놀란 짐승 한 마리가 잽싸게 몸을 피하며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수는 보이지 않고 눅진한 산바람이 열기 오른 얼굴을 핥고 지나갔다. 비탈진 산길 중턱을 넘어서는 곳에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혼자 산책할 때는 그냥 지나치던 곳인데, 뒤를 따라오던 마 작가가 숨 넘어 가는 소리로 쉬어 가자고 했다. 발길을 멈추고 내려다보니 예닐곱 길은 됨직한 낭떠러지 아래 자그만 개울이 도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마 작가는 상체를 흔들며 몇 번 숨을 크게 뱉어내더니 모자를 올려 손바닥으로 땀을 훔치고는 단애의 가장자리에 서서 오줌을 갈겨댔다. 나는 의자에 앉아 들고온 자그만 물병을 따 목을 축였다. 순간 산비탈을 미끄러져 내려온 한 줄기 바람이 마 작가의 머리에 걸쳐 있던 모자를 낚아채고 낭떠러지 아래로 달아났다. 마 작가는 옷을 추스르며 아쉬운 듯 가녀린 모가지를 빼들고 두리번거리며 모자의 착륙지를 찾았다. 그러다 금세 에이 씨하며 포기하더니 거친 들판을 뛰노는 야생마의 갈기 같은 길고 뻣뻣한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며 돌아섰다.

저는 글이 안될 때면 달빛을 따라 여길 와요. 고라니를 가끔 마주치죠. 녀석은 내 마음도 모르고 늘 저만치 계곡 아래로 내빼서 숨어버려요.“

야수는 건넨 물병을 벌컥이며 비워내더니 내 옆에 바투 앉았다.

난 저 아래로 날아가고픈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한 번뿐인 인생, 시퍼런 청춘이 죽긴 왜 죽어?“

제가 할 줄 아는 게 글 쓰는 재주뿐인데, 먹고살기 힘들어요. 제길헐.“

말을 마치고는 학! 하고 가래를 돋우어내더니 길섶으로 뱉어냈다.

마 작가. 그동안 받은 상금이랑 인세는 다 어떻게 하고 집 한 칸 따로 마련 못 해 떠돌이 신센가?“

선배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 할 도리는 다했어요. 자식들 이름으로 대학 졸업 시까지 쓸 통장도 만들어 줬고. 시골 고향을 위해서도 돈 많이 썼습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데, 초중고 출신학교 장학금에, 경로당에, 마을회에서 일 있을 때마다 손 벌리더라구요. 친구들 내 술 안 먹은 놈 없어요. 술값으로도 많이 날렸지요. 흐흐흐.“

땀이 말랐는지 얼굴에 부딪는 바람이 찼다. 내리막길은 걷기가 조심스럽다. 산은 오를 때보다 하산할 때 사고가 많이 나는 법이다. 난 그가 정상에 오른 어느 소설가처럼 도박에 미쳐서 가사 탕진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젠 인세도 뚝 끊겼고 쪽팔려서 고향에도 못 가요. 그래도 의리 있는 친구들은 가끔 용돈도 주고 그러는데, 전화도 받지 않는 놈들이 많아요.“

마창석의 불만은 구불구불한 산책길을 다림질하듯 이어졌다.

세상이 더럽게 변해 가고 있어요. 아주 여자들 세상이에요. 판사가 남자였다면 난 무죄를 받았을 겁니다. 여자 판사가 내 애길 싹 무시했어요. 빌어먹을.“

그는 시간을 건너뛴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말했다. 내 뒤통수에 대고 계속해서 적개심을 쏘아댔지만, 편향된 그의 사고에 화답할 마땅한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도덕 강박증에 사로잡힌 사회가 문제에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때는 음담패설은 분위기 조성을 위한 필수요건이었잖습니까? 가벼운 터치도 친밀함의 표현으로 용인 됐었구요? 그런데 몇 년이나 지난 일을 소급해서 성추행이라니요? 날 아주 사망케 하려는 작자들이 작정하고 지랄을 떨어요.“

어렸을 적 형성된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 건가? 물정에 어두운 건지, 변화의 속도에 적응 못하는 건지, 아무튼 그는 경색된 세태 탓을 하고 있었다.

마 작가,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소설가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우린 회초리 맞으며 자랐지만, 지금은 부모도 자식을 때릴 수 없는 인권이 우선하는 시대 아닌가?“

나 같은 놈은 그냥 앉아서 죽으란 소리군요? 낙인이 찍혀 이젠 책도 팔리지 않고, 밥 굶으며 수십 편 써놓았는데 책 내줄 출판사가 없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은둔 생활이 답인가?“

소설이 없었으면 전 벌써 이 세상 하직했을 겁니다. 그나마 날 구원해 준 게 소설이에요.“

말이 끊겨서 슬며시 뒤돌아보니 그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살 방법을 찾아야지? 먹어야 글도 쓸 게 아닌가?”

전과 이력 때문에 취직도 안 돼요. 정말 밥과 용돈을 준다면 꼽추 할매 하고도 살 겁니다.”

그가 왜 집을 버리고 나왔는지는 윤 국장에게 들어서 알았다.

무릎 꿇고 마누라 곁으로 들어가지. 그래?“

내 말이 마뜩잖은지 볼멘소리를 했다.

! 숨통 막히고 갑갑해서 어찌 살아요? 아마 사흘도 못 견디고 다시 뛰쳐나올 걸요. 마치 날 제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여자예요.“

결혼이란 아름다운 구속이라지 않는가? 세상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평안한 것이지.“

여자요? 필요하죠. 배신만 때리지 않으면요.“

그의 과거를 잘 아는 윤 국장은 부인에게 배신 때린 것은 야수였다고 했다. 바람을 피워서 본가에서 쫒겨 났는데, 한 번은 실수라고 용서해 주었으나 마 작가 곁에는 항상 여자 작가나 문청들이 따라다녔다고 했다.

바람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있지만 한 번 맛본 사람은 그 달콤한 악마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가 봐요.“

 

어느 날 산책길에서 야수는 살아온 인생 내력 중에 화려하게 타올랐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면서 인생의 허무를 이야기했다.

자네. 불경에 조예가 깊던데 해탈이란 게 뭔지 알잖은가?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인간은 고해의 파도와 늘 부딪치는 게 숙명이지.“

열반... 불이 꺼짐.“

그는 혼자 뇌까리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냉랭한 기운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듯했다.

이제 자네 나이도 오십을 훌쩍 넘겼으니 욕심을 내려놓을 때도 되었네. 그만하면 좋은 작품도 많이 썼으니 잘 죽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야. 자네가 하겠다면 당장 빌딩 주자 관리원 자리라도 추천해 줄 수 있네.“

말을 해놓고는 아차 싶었다. 사람을 어찌 보고 그따위 소리냐고 버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다소곳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 생각은 고맙지만 전 굶어 죽어도 그런 일은 안 합니다.“

하긴 나부터가 머리를 쓰고 먹고살던 사람이라 몸 쓰는 일엔 젬병이다. 예의를 갖춰 공손하게 거절해 줘서 고마웠다.

인간에게는 에덴동산으로의 회귀 본능이 있어서 늘 좋은 때만 생각하지. 허나, 꼰대같은 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때론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었지요. 헌데 빌어먹을 덫에 걸렸어요.“

내 말을 흘려들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만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난 씁쓸함을 느끼며 계곡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들이 비틀어지면서도 햇볕을 받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쳐들고 기원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악마들이 많아요. 난 무녀의 피를 받아선지 악마들이 보여요. 정말 하느님이 내게 소리 안 나는 총을 주고 지구를 지키는 보안관이 되라면 난 그 악마들을 골라내 소탕할 자신이 있어요.“

야수는 마치 만화 속 정의의 사도처럼 말했다. 같은 땅을 밟고 있으나 그는 상상과 현실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자 무안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요즘 스토커 때문에 미치겠어요. 잠도 못 자고 우울증까지 걸렸어요. 정기적으로 병원 가서 약을 타 먹어요.“

그가 말하는 우울증은 스토커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병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고생하다 신데렐라가 된 연예인 중에 우울증 환자가 많은 것처럼 마창석도 어느 날 갑자기 쨍하고 떠오른 작가였다. 대중의 관심과 기대를 받는 인기인들은 늘 불안하다. 야수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다 사회 관습이 쳐놓은 윤리 도덕이라는 그물에 걸렸다. 억울함과 분노, 구겨진 자신의 이미지, 팬들의 실망,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 이런 것들이 병을 만들었을 테니까.

야수가 말하는 스토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며칠 후였다.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잠시 눈을 붙였는데 밖애서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마창석을 찾는 괄괄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주차장 한구석에 부옇게 먼지를 뒤집어 쓴 중형차 가 있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차라는 것이었다. 윤 국장이 그녀를 달래며 사무실로 데리고 간 사이, 창문을 넘어 산책길로 줄행랑치는 야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 내가 무엇을 보고 있지? 우스운 광경이지만 버림받은 영웅의 비참한 말로를 보는 것같아 한숨이 나왔다.

사기꾼 새끼. 소설 잘 쓰면 뭐 해? 인간이 되먹어야지. 감방 갔다 오고도 정신 못 차렸어. 그 자식 콩밥 더 먹여야 돼.“

그녀는 자신을 등단한 수필가라 했다. 부잣집 부인 같은 화사한 차림새였는데 목소리는 바리톤이었다. 출감 후 마창석이 찾아왔기에 안 돼 보여서 돈도 빌려주고 동정을 베풀었는데, 자가용까지 가지고 잠적했다는 것이다. 윤 국장은 마창석의 방에서 차 키를 찾아내어 돌려주고 잘 달래어 그녀를 보냈다. 젊은 작가들 틈에 끼어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김 여사는 돌아가는 수필가의 뒷모습을 눈 흘기며 바라보다 말 한마디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분노의 화살같은 수필가의 말보다 김 여사의 표정을 더 열심히 관찰하던 젊은 작가들의 노닥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 대박. 이 꼴을 보고도 마창석을 가까이 할까?“

아이구. 나라면 학을 띠고 도망가겠다.“

그들은 웃고 떠들었지만 난 안다. 나쁜 남자에게 더 끌리는 여자도 있다는 것을. 위기에 빠진 남자를 보호하려는 모성 본능이 이런 때도 작동한다는 것을. 내 예상대로 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야수는 김 여사의 차를 타고 외출이 잦아졌으며, 한밤중에 은밀히 서로의 방을 오고 가는 것을 목격한 젊은 작가들이 사무국장에게 고자질했다.

외로운 성인남녀들끼리 좋아하는데 뭘 어쩌겠어요?“

윤 국장은 김화경이 혼자 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 야수는 나와의 산책을 그만두었다.

 

그 일이 잊혀져 갈 무렵, 야수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심각한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생겼다. 밤늦게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맞게 매지구름이 너울대며 몰려들어 끄느름한 금요일 오후였다. 서울 동백출판사에 근무하는 김 부장이 관장을 만나러 왔다가 마창석과 내가 입주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마창석의 책을 출판한 적이 있어서 둘은 친한 사이라 했다. 윤 국장과 넷이 시내로 나가 고깃집에서 술판을 벌였다. 뭉근한 숯불 위에서 고기가 노르스름해지고 술잔이 한 순배 돌았을 때 야수는 자신의 회포를 드러냈다.

하 이거 분명 히트 칠 작품인데 말이야. 김 부장님, 정 안되면 가명으로 출판하면 안 되나요?“

김 부장은 이력이 난 사람이라 출판업계의 사정에 훤했다.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짐작했다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받았다.

출판사 말아먹을 일 있어? 야수의 작품은 특이해서 금방 들통날 텐데 윗선에서 허락하겠냐구?“

마창석은 몸이 달았는지 술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더니 김 부장에게 잔을 권하며 떼를 썼다.

읽어나 봐줘요. 아주 기발한 내용이라니까? 안 그렇습니까, 한 선배님?“

응원을 기대했지만 난 객쩍은 웃음을 흘리며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김 부장이 어색한 분위기를 한 마디로 수습했다.

듣기 거북하겠지만 마창석 이름은 이미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어. 그 어떤 출판사도 나서기 어려울 거야.“

워낙 소설이 안 팔리는 데다가 주요 독자층인 젊은 여성들의 눈 밖에 났으니 출판사에서 무모하게 덤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수는 김 부장에게 매달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윤 국장이 거들었다.

마 작가 재능 썩는 게 아깝긴 하지. 다른 필명으로 신춘문예 응모해 보면 어떨까?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전해 보라구.“

그러자 야수는 눈을 부릅뜨며 윤 국장을 노려봤다.

골 비었어요? 어느 신문 심사위원이 누군지 뻔히 아는데. 그들의 수작에 장단 맞추라고?“

한 잔만 마신다던 야수는 술잔을 주고받더니 아예 술병을 곁에 두고 자작하고 있었다. 고깃집을 나왔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했는데 술발이 당겼다. 김 부장을 보내고 윤 국장이 마트에서 마련해 온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문학관 식당에 펼쳐 놓았다. 야수의 감방 체험이 지붕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에 맞춰 운치 있게 들렸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못 이겨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에 등이 저절로 곧추섰다. 야수가 일어선 채 맥주병을 식탁에다 내리치며 깨뜨리고 있었다. 그는 술이 남은 병까지 다섯 개를 모두 부수고는 유유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말릴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왜 김 여사 얘기를 했어?“

아뇨. 난 듣기만 했죠. 저 혼자 얘기하다 뜬금없이 일어나서 이런 푸닥거리 벌린 거예요. 내가 잘못했어요. 야수는 술 먹으면 안 되는데. 감방 가기 전에도 술 마시다 맥주병으로 후배의 머리를 내리쳐 스무 바늘 이상 꿰매는 사고를 쳤어요.“

유리 조각들은 주방 쪽을 향해 흩어졌고 나무 식탁에는 여러 군데 큼직한 생채기가 남았다. 식탁을 짚고 일어나는데 손바닥이 따끔거리더니 금세 피가 솟아 나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유리창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여니 윤 국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손은 괜찮아요?“

그제야 난 손바닥에 붙여진 밴드 사이로 피가 삐져나와 검게 응고된 것을 보았다. 밴드 위를 누르니 통증도 느껴졌다.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윤 국장을 보는데 슬리퍼를 신은 그의 발에도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자네도 다쳤어?“

괜찮아요. 청소하다 살짝 피 좀 봤죠. 해장국 집에 속 풀러 가요.“

윤 국장은 자신의 동생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우울증 환자는 술이 깰 때가 더 위험하다며 일부러 야수를 깨워서 해장국을 먹여야 한다고 했다. 눈을 비비며 나온 야수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잘들 주무셨죠?“

어이없어 나를 슬쩍 바라본 윤 국장은 칭칭 동여맨 발을 야수 앞으로 쑥 내밀었다.

허 이런! 이게 안 보여?“

그는 윤 국장의 발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정색하며 물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어요?“

시치미 떼는 야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져 갔다.

기분이 나빴다면 잠도 잘 못 잤겠죠? 헌데 간밤엔 아주 달콤한 꿈까지 꾸었어요. 제가 왜 그랬죠?“

윤 국장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헛웃음을 날렸다. 해장국 집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야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안 되어선지 토요일이라 그런지 해장국 집은 한산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야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내 안에 사는 악마와 혈투를 벌였나 봐요.“

뜨악한 표정으로 윤 국장과 눈길을 주고받는데 뜬금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악마와 매번 다투는 것만도 아니에요. 악마는 늘 나를 약 올리며 분노를 유발시키지만 때로는 꽉 막힌 내 작품의 출구를 알려주기도 하죠.“

악마의 정체가 부친의 망령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 힘들게 작품 쓰는구만?“

평범해서는 먹히지 않잖아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해장국이 식탁 위에 놓이자 윤 국장이 숟갈을 들며 한마디 했다.

거 작품이 안 되면 일부러 술 마시는 거 아냐? 악마 힘 빌리려고?“

? 이거 영업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지? 함부로 발설하지 마요? 흐흐흐

마창석이 아니라 악마가 작품을 썼구만?”

얄미워서 한 마디 쏘아붙였으나 그는 야지랑스럽게 받아넘겼다.

그래서 야수 마창석 아닙니까? 으흐흐흐.”

 

퇴소를 며칠 앞둔 날, 야수가 서울에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김 여사 승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밤늦게 돌아온 야수가 차 한잔하자며 나를 휴게실로 불러냈다. 그의 신수가 훤해 보였다. 새로 양복을 사 입은 모양이었으나 나는 모른 체했다.

그는 가지고 온 캔 커피의 뚜껑을 따고 내 앞에 놓았다. 밤공기는 찼는데 두 손으로 캔을 잡자 따스한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연신 벙글거렸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지?”

선배님, 그간 말벗도 해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고 큰 힘이 됐습니다.”

여느 날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찰밥처럼 윤기가 있었다.

왜 책이라도 출판하게 됐는가?”

아뇨. 부지런히 쓸 계기를 찾았습니다.”

작업실이라도 마련한 모양이지?”

역시 선배님은 쪽집게 도사시네요. 글을 쓰지 않으면 그게 어디 작갑니까? 전 죽어서도 작가로 남을 겁니다.”

이튿날 동이 트기도 전에 고라니가 예전보다 심하게 울었다. 나가보니 채마밭 울타리로 쳐놓은 그물에 걸린 고라니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자 녀석은 겁을 먹고 온몸으로 날뛰었다. 요동칠수록 그물은 더 녀석을 옭아맸다. 윤 국장이 잭나이프를 가지고 나와 다가서자 녀석은 힘이 빠졌는지, 포기를 한 건지 동작을 멈추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얽힌 그물을 끊어내는데 겁에 질린 녀석의 눈동자가 유난히 새까맣게 빛났다. 뒷발에 걸린 마지막 그물을 걷어냈을 때 녀석은 벌떡 일어서더니 절뚝거리면서 잠시 갈래다가 잽싸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젊은 작가들이 손을 맞잡고 웅숭그리는데 맨 먼저 달려 나왔을 마창석이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있어야 할 김 여사의 차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들어가 방을 확인하던 윤 국장이 혀를 차며 돌아왔다.

이럴 수가? 말도 없이 두 분이 사라졌어요.”

젊은 작가들의 뒷담화를 등 뒤로 들으며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다시 누웠으나 머리는 맑았다. 후원자를 만났으니 잘된 일이지.

간밤에 끝낸 소설집 교정지를 부치려고 시내 우체국 문이 열릴 시간에 맞춰 차를 끌고 나갔다. 조붓한 골목을 지나 큰길로 막 들어섰는데 눈앞에 끔찍한 모습이 펼쳐졌다. 로드킬로 내장이 드러난 동물의 사체가 길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고라니였다.

 

왜 몰랐지? 나만 몰랐던 건가?”

아무도 몰랐겠죠. 언론에 났어도 송 모씨가 마창석이란 사실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요?”

윤 국장은 어떻게 알았어?”

작년에 마창석과 함께 야반도주했던 그 여자분 있잖아요?”

김 여사?”

윤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분이 소설가로 등단했다고 1월 초에 여길 다녀갔어요.”

김 여사는 시로 등단하지 않았나?”

맞아요. 헌데, 문예지 중편 공모에 당선되었다고 책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음습한 예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책, 아직 있나?”

어디 있을 거예요.”

그물에 걸린 야수란 제목의 당선작은 마창석이 하도 부탁하기에 마지못해 읽었던 작품이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기법과 문체, 특히 구어체의 생략과 비격식적 표현, 구수한 방언들이 작품 속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오랜 습작 과정을 통해 인간 내면의 심층부를 꿰뚫어 보는 역량있는 신인을 발굴했다고 김화경을 칭찬하는 심사평이 실려 있었다.

밥도 굶으면서 썼으나 발표 못 한 작품이 수십 편 된다던 야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도덕적 결벽을 강요하는 사회에 시위하려는 의도였을까? 죽음만이 작품을 부활시킬 수 있는 출구라고 믿은 것일까? 아니면 악마와 타협하지 못한 우울증 때문 일까? ......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온종일 머릿속을 휘저어 놓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유리창을 뚫고 침범한 달빛이 너무 밝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나뭇잎 사이로 길을 밝히는 달빛을 따라 산책길에 나섰다. 산새도 잠들었는지 숲속이 교교해서 발아래 밟혀 부스러지는 낙엽 소리가 야단스럽게 들린다. 산책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고라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매일 오르내렸던 길인데 한참 쉬어서 그런가? 겨우 언덕을 올라왔을 뿐인데도 종아리가 당기며 숨이 턱에 걸린다. 야수와 대화를 나눴던 벤치에 앉았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으니 계곡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한 선생님, 잘 계시죠? 야수, 아직 살아있습니다.”

일어나 절벽 아래를 살피는데, 개울 옆 이운 잡풀 사이로 유난히 달빛에 빛나는 물체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작년 바람에 날아간 감귤색 모자다. 눈시울이 떨리면서 마음이 짠해진다. 돌돌돌 물 구르는 소리가 야수의 죽음을 조상하는 염불 소리처럼 들린다.

 

한국소설 264호 (2021년 7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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