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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제주설화의 연못

정방폭포와 서불과차

강용준 2013. 12. 11. 12:00

 

불로초를 찾아온 서복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는 등 무소불위의 권세를 부리면서 향락과 영화를 누렸다. 절대 권력을 지니다보니 진시황은 어느덧 신선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점차 방사(方士 : 도사의 일종인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를 가까이 하면서 영생의 방법을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의 독선과 아집에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벌벌 떨어야 했고 바른말보다는 눈치를 보며 아첨하기에 바빴다. 진시황은 이제 불로장생만 이룬다면 자신의 꿈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진시황은 수시로 신하나 방사를 모아놓고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이 없는가를 물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서 그 해답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사람이 영원토록 죽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목숨이 달아나기 십상이니 섣불리 나설 이가 없었다.

방사 중에 서복(徐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명 서불(徐巿 - 市는 ‘사람이름 불’)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이었다. 영리한 서복은 진시황의 그러한 마음을 이용하여 진나라를 벗어나려는 계책을 세웠다. 어느 날 그는 진시황을 만난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려 아뢰었다.

“소인이 듣건대, 삼신산 중 영주산(한라산의 옛 이름)에 사람이 먹으면 무병장수 할 수 있는 불로초가 있다고 하옵니다. 소인을 보내주시면 그 약초를 캐어오겠나이다.”

진시황은 귀가 번쩍 뜨였다.

“오, 과연 너야말로 진정으로 나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신하로구나. 만약 네가 그 불로초를 캐어온다면 내 너에게 큰 벼슬과 재물을 주겠노라.”

진시황은 서복이 자신을 위해 불로초를 캐오려는 줄로 믿고 크게 기뻐하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것을 캐어오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옵니다. 하오니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을 차출하여 함께 가도록 해주시옵소서.”

“아니 그 많은 사람을 무엇에 쓰려 하는고?”

“산 속 깊이깊이 숨어 사는 불로초는 마음과 몸이 정결하고 흠이 없는 동남동녀들의 눈에만 뜨인다 하므로 이들과 함께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진시황은 바로 부하들에게 명하여 서복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여러 척의 배를 준비하여 불로초를 찾아 나선 서복은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거의 모든 사람을 잃고 돌아오고 말았다. 실패에 따른 진시황의 추궁과 질책이 두려운 서복은 거짓말을 둘러댔다.

“신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겨우 불로초가 있는 곳을 찾아냈으나 이를 지키는 신선이 보여주기만 할 뿐 내어주질 않아서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나이다.”

“정녕 네가 불로초를 보았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신선이 이르기를 불로초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정성이 부족한 데 어찌 내어줄 수 있겠는가 하며 성의를 갖춰 다시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험한 바닷길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재물을 잃어버린 터라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불로초가 있다는 말에 진시황은 앞뒤를 가릴 것도 없이 다시 떠날 것을 재촉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선물을 준비하면 되겠느냐?”

“바닷길이 워낙 험한 터라 더욱 큰 배를 만들어주시옵고, 동남동녀 삼천 명, 오곡종자와 보물, 그리고 백공(百工 : 온갖 기술자)을 두루 준비해주시면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여 돌아오겠나이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복의 말대로 준비할 것을 명하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서복은 다시 대장정에 올랐다.

오랜 항해 끝에 서복이 닿은 곳은 금당포(지금의 조천)였다.

이곳 연북정에서 하룻밤을 지낸 서복이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며 조천(朝天)이라 한 것이 지금의 지명이 되었다고도 한다.

서복은 데리고 온 사람들을 이끌고 한라산에 올라 불로초를 찾아 헤맸다.

한라산 18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만 자란다는 시로미(일명 영주초)와 영실 계곡에서 자라는 야생 영지버섯을 불로초로 여겨 이를 가져갔다는 얘기도 전한다. 서복은 한라산뿐만 아니라 제주의 곳곳을 두루 돌아보다가 정방폭포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면서 바위 위에 그가 이곳을 지나갔음을 알리는 ‘서불과차(徐市過此)’란 글귀를 새겨놓았다. 서복 일행이 이곳에서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생겨났다고 한다.

서복이 새겨놓았다는 마애각은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중 이를 탁본했다는 일설과 함께 사기(史記)에도 이들에 대한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서복 일화는 설화보다는 사실(史實)에 가깝다 할 것이다.

서복에 대한 일화는 제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상남도 남해 금산과 거제 우제봉에도 전해진다. 서복이 다녀갔음을 알리는 서불과차문이 새겨진 바위는 일명 남해 상주리 석각이라 불리고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주를 떠난 서복은 결국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나아가 일본 규슈 사가현에 닿았고 이곳에 정착하였다. 서복이 데리고 간 동남동녀들과 백공, 그리고 오곡종자 등에 의하여 전파된 문화와 기술은 일본에 수많은 서복 기념관을 만들게 하였고 서복을 의학의 신, 농경의 신으로 숭배토록 했다.

서복은 불로초를 찾으려는 명분 아래 자신의 뜻과 미래를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나선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에 기착하여 행적을 남겼다. 만약 그가 규슈 지방에 먼저 기착하였고 나중에 제주를 찾았다면 이곳이 그의 정착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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