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소설 나무 동산

자서전 써주는 여자

강용준 2020. 6. 7. 09:56

도드람산에서 바라본 설봉산
자서전 써주는 여자

 

 

 

존경하는 재판장님!

전 너무 억울합니다. 저는 장충삼 씨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미결수입니다만 결코 살인자가 아닙니다. 장 회장님을 죽인 것은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때로는 악마의 발톱을 드러내어 장애물을 제거한 야만적인 사람들입니다. 장충삼 회장님은 시대의 폭풍 속에서 길을 잃었고 그를 옥조인 광포한 세력들에 의해 자멸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제가 장충삼 회장님을 만나게 된 건 운명이란 말 말고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작년 가을 유난히 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뒤흔들어 밤잠까지 설치게 만든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바람이 인연의 전조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밤 내내 요란을 떨던 바람은 잔흔들만 이리저리 흩어놓은 채 사라지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잔잔히 퍼지고 있었습니다. 숲을 거쳐 온 싱그러운 향기를 길게 들이마신 후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로비에는 아침 일찍부터 환자와 보호자들로 가득 차 있었지요. 부산스러운 로비를 지나 구부러진 복도를 펴며 맨 구석의 병실 문을 열었어요. 퀴퀴한 병원 냄새, 소독약과 환자의 상처와 음식에서 내뿜는 죽어가는 냄새가 버무려진, 유쾌하지 못한 공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함께 쓰는 4인 병실의 사람들과 눈인사를 했지만, 그들도 잠을 못 잤는지 밝은 표정들은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준비해 온 밑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창가로 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부드러운 바람이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들어와 창가 턱에 앉아 수줍게 헤살대는 소국 화분을 쓰다듬더군요. 남편도 밤새 잠을 못 이루었는지 아침밥은 손대지 않은 채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젓가락으로 몇 번 끼적이다가 밥상을 물리는 남편은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살맛이 없는 게 분명했어요. 희망이 없는 건 아닌데 지레 포기해버리는 남편이 미웠습니다.

이식을 받으면 살 확률이 5050입니다. 헌데 수치 맞는 사람을 찾는 것도 문제고. 시간이 없어요. 다른 부분에 전이되면 소용도 없고.”

의사의 말에 딸과 호주에서 공부하는 아들까지 불러들여 검사했으나 혈액형과 수치가 맞지 않았어요. 장기를 구한다고 여러 군데 부탁은 해놓았지만, 막상 구한다고 해도 당장은 그 엄청난 비용을 지불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쓸데없는 짓 말라는 남편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병실 안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대꾸도 못 하고 집에 와서 펑펑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어린애처럼 투정이 많던 남편이었는데 간암으로 판정받고 나서는 짜증 쟁이가 됐습니다. 투병하게 되면 누구나 이기적으로 변한다고 하지만 장병에 효자 없다고 간병 하는 사람이 더 지친다는 것을 몰라주는 게 야속했지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병은 내가 고치겠으니 체념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물건들을 정리하다 집에서 티슈를 가져온다는 걸 깜빡 잊었어요. 병실을 나서 병원 내 마트를 찾아가는데, 안내 데스크 옆 게시판에 시선을 꽂은 젊은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앞을 지나면서 곁눈으로 슬쩍 보았는데 여러 개의 게시물 중에 간병인 구함이라는 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뭡니까. 저는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있고 간병인 경험도 있거든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다리가 굳은 듯했어요. 내가 다가가자 젊은 여자가 슬쩍 쳐다보더니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그런데 간병인의 조건이 특이했어요. ‘독서를 많이 한 여성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지만 한 번은 통화 중이었고, 재 통화를 시도했을 때는 연결음이 비교적 길게 이어졌지만 받질 않았어요. 발길을 돌려 마트에 막 들어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전화 주신 분이죠?”

.

요즘 장난 전화가 너무 많아서 확인하고자 연락드린 겁니다.”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의외로 젊었습니다.

저 쪽지 보고 전화한 건데요?”

아 그러세요. 문의 전화가 많아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준비하시고 찍어주는 주소로 내일 아침 10시까지 찾아오세요.”

몇 가지 궁금... 여보세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습니다.

 

남편이 입원한 후로 생활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보험계약자들을 만나지 못하니 수당은 점점 줄어들고, 독거노인들 관리하는 일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나마 그간 남편 이름으로 들어놓은 보험금을 타서 입원비를 물고, 딸 학비에 보태고 보험료 치르고 생활비를 충당하고는 있지만, 상상 이상의 수술비를 마련하기란 막막했습니다.

그나마, 사정을 아는 딸이 학비 걱정은 말라면서 알바를 시작했고, 가이드를 하며 유학을 하는 아들은 병원비에 보태라며 천 달러를 부쳐왔어요.

오랜만에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품 용기부터 닦았습니다. 고객을 만나려면 늘 화사하게 화장을 했었으나 남편이 입원하고 나서는 먼지가 내려앉을 정도로 팽개쳐 뒀었거든요. 정성 들여 눈 화장을 하고 장밋빛 립스틱으로 마무리하고 일어섰지요. 몇 벌의 옷을 꺼내 거울에 비춰보고 나서야 파란색 슈트 정장을 차려입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빈자리에 앉아 어제저녁 여러 시간 끙끙대며 만든 서류를 봉투 속에서 꺼내 펼쳤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문청의 꿈을 품고 수필가가 된 사연부터 간병인을 하고자 하는 이유를 두 장에 요약적으로 서술했습니다. 면접을 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더군요. 지하철에서 내려 비탈진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다 다리가 파근해 질 무렵에야 목적지에 다다랐습니다. 굳게 닫힌 철문 위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어요. 있는 사람일수록 의심이 더 많은가 봅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잘 정리된 커다란 정원이 눈에 들어왔어요.

하얀 와이셔츠, 붉은색 넥타이에 자주색 카디건을 입고 단정한 머리에 무스를 발라 멋을 낸 젊은 청년이 서류를 살피는 동안 전 그를 살폈습니다.

수필가시고, 독서지도사, 보험설계사, 요양보호사. 스펙이 상당하시네요. 좋아요. 박인옥 씨를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계약서에 근무조건, 보수까지 적어놓았으니 읽어보시고 사인하세요.”

그 청년은 서류를 사각봉투 안에 집어넣으며 모레 같은 어투로 말했습니다.

오래 근무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10시 출근, 7시 퇴근입니다. 근무 성과에 따라 봉급도 올리고 보너스도 지급됩니다.”

제시한 월급은 예상외로 많았습니다.

저는 회장님의 조카입니다.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회사 일을 관리하고 있죠. 돌보실 분은 회장님인데 아마 이름을 들으면 아실 겁니다. 국회의원까지 지내신 장 충자 삼자 님이십니다.”

장충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제 기억엔 당연히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회장님이 오케이 하시면 내일부터 출근하십시오. 책을 읽어드리고 말벗해드리는 게 주 임무입니다. 그리고 12시에 점심, 6시에 저녁을 차려 드리시고 식사 후 목욕을 시켜드리면 제가 퇴근해서 교대해 드릴 겁니다.”

회장님이 거처하는 방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 주세요.”

그의 직책은 비서였고 이름은 장인철이었습니다.

장충삼 회장님은 커다란 방, 화려한 침대 위에 등 받침을 올린 채, 수를 놓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방은 그의 취향인 듯 한쪽 벽면은 책장으로 또 한 면은 골동품 도자기와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어요. 제 인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색하게 웃었는데 둥글넓적한 얼굴에 대머리에다 두툼한 주먹코가 그리 보기 싫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 풍을 맞아 오른쪽 손발은 부기가 빠졌으나 아직도 거동은 불편한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최근에 췌장암 판정을 받았으나 연세도 있고 위험해서 수술 못 하고 외국에서 고가의 약을 구해 연명하고 있다고 장 비서가 말해 주었습니다. 같은 환자라도 남편은 비쩍 마르고 병색이 완연한데, 장 회장님은 영양을 충분히 보충한 탓에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남편에게는 보험회사에 다시 나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출근 전과 퇴근하면서 병원에 들러 남편의 상태를 살폈지요. 병상에 붙어 있는 자그만 책상 위에 노트북을 가져다 놓았으나 다른 병상의 방문객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병실에서는 책 한 줄 읽기가 힘들었지요. 정말 책을 펼쳐 본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늦은 시간 귀가해서 빨래며 청소며 집안 정리를 하다 보면 피곤이 몰려와 지인들이 보내준 각종 책의 봉투조차 뜯어 볼 여유도 없이 곯아떨어졌으니까요.

환자의 비위를 맞추며 간병 한다는 게 보통 체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에 돌보던 환자가 침상에서 떨어져 골절상을 입었어요. 환자와 보호자들로부터 당하는 갖은 욕설과 모멸감, 책임을 묻는 병원 측의 태도를 참을 수 없어 요양병원 근무를 그만두었습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보잘것없는 사설병원의 시설에 비하면 장 회장님의 병간호는 양반이었습니다. 그는 식성도 까다롭지 않아서 무슨 음식이든 맛있다고 잘 잡수셨으니까요. 식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가족도 없이 홀로 된 처지가 참 딱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책장에 비치된 책들은 외국 정치인들의 연설문, 위인전기, 중국 고전 시리즈들과 불교 서적, 한국 유명 작가들의 대하소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좋은 책이 있으면 구해 와요. 아 참. 내 옛날에 읽었던 외국소설이 기억나는데, 왜 있잖소? 고아인 주인공이 부잣집에 들어가 천대를 받다가 주인집 아가씨와 눈이 맞아서 복수하는 내용인데...”

처음에는 어떤 소설인지 언뜻 떠오르지 않았어요.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을 하며 서점을 찾아 고전 명작을 중심으로 소설을 고르는데, ‘폭풍의 언덕이라는 책 앞에서 딱 시선이 멈춰진 거였어요. 회장님이 원하던 책이었지요. 한꺼번에 일곱 권의 책을 구해와 오전, 오후로 나눠 한 시간 씩 읽어드렸습니다. 회장님은 의식이 또렷해서 한 장을 마치고 나면 주인공의 태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곤 했어요.

요즘은 기물가물 하다니까. 어제 어디까지 읽었소?”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올케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가는 장면까지요. 오늘은 13장부터 읽을 차례입니다.”

아 그랬었지. 그건 그 아가씨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복수를 하기 위한 행동이지요? 어서 읽어요.”

그는 몸을 지긋이 침상에 기대고 왼팔로 오른팔을 주무르며 듣기 모드로 들어갔어요. 저는 안경을 끼고 책상 거치대에 책을 올려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동안 도망간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답니다. 그 두 달 사이에 캐서린 아씨는 뇌막염이라는 병중에서도 가장 악성 뇌막염에 시달렸지만 결국 이겨냈어요. 하나뿐인 자식을 간호하는 어머니라도 그렇게 헌신적으로 간호하지 못할 만큼 에드거 서방님은 지성으로 아씨를 돌보았어요. 그는 밤낮으로 병자 옆에 지켜 앉아 캐서린 아씨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성가시게 굴어도 끈기 있게 참는 것이었어요..... 도대체 히스클리프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 미움을 사는 거예요. 차라리 이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여기까지 읽었을 때 콧소리가 들렸어요. 처음에는 잘 버티더니 체력이 떨어지는지 요즘은 30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어느 날은 잠든 틈을 타서 세탁물들을 마당 빨랫줄 위에 널고 나서 안락의자에 앉아 모처럼 나온 햇볕을 즐기다가 깜빡 잠이 들었지 뭡니까. 지잉 징 울리는 챠임 벨 소리를 잠결에 듣고 후다닥 달려갔습니다.

뭐 하고 있었소? 한참을 눌렀는데.”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어서 못 들었어요.”

오늘은 오랜만에 햇볕이 난 것 같군.”

회장님은 생기가 솟는 듯 기지개를 켰습니다.

. 봄날 같아요. 회장님. 과일 좀 내올까요?”

아냐, 나 마당에 데려다줘요.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지난번 풀어놓은 비단잉어와 꽃나무들은 잘 자라는지. 보고 싶구만.”

휠체어를 가져다 놓고 부축하려는데 거부를 하며 왼쪽 팔과 다리를 이용하여 옮겨 앉았습니다.

운동을 안 하니 체력이 날마다 떨어지는 것 같아. 아프기 전에는 매일 아침 일찍 뒷산 약수터까지 뛰어다니곤 했는데 말야.”

그래서인지 목욕시킬 때 본 그의 팔과 하체는 젊은이처럼 탄력이 있었어요. 두툼한 털 스웨터를 입히고 무릎 담요를 덮고서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참 날씨 좋구만.”

축구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 정원은 넓고 깨끗했습니다. 잔디를 깐 마당을 중심으로 화단이 있고 물고기들이 뛰어노는 연못과 수령이 꽤 되는 키 큰 나무들이 있는데 정원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드나들며 관리를 했습니다.

휠체어를 끌고 연못에 다다르자 회장님은 잉어 먹이를 한 손으로 들고 뿌리면서 소리쳤어요.

히야 저거 끔벅이는 거 좀 봐. 저 녀석 아주 잘 먹어서 통통해 졌구만. 허허허

잉어들도 햇볕이 좋은가 봐요.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이 귀여워요. 호호호

웃음까지 섞어서 회장님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장단을 맞추었지요. 회장님 웃는 모습은 오랜만에 봤습니다. 방 안에 있으면 웃을 일이 별로 없으니까 말입니다.

미물이나 사람이나 저렇게 서로 모여 살아야 해. 인철이한테 들었는데 남편도 입원해 있다면서?”

.”

남편은 무슨 일을 하다 그리 되었소?”

건설회사 하도급 맡아 토목공사를 했어요. 한때는 30명이 넘는 직원을 데리고 잘 나갔는데 그놈의 IMF 때문에 줄 부도를 맞게 된 거지요. 그때부터 줄곧 술로 지내다가...”

저런. 나도 건설업을 하는데 그때가 참 힘들었지. 그래도 자식들이라도 올곧게 자라주니 얼마나 좋아?”

그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 자식 농사 실패한 놈이요. 자식들 너무 믿지 말아요. 다 도둑놈들이야. 이렇게 병든 나를 내팽개치고 딸과 와이프는 미국에서 올 생각도 않고. 아들놈들은 재산 다툼하다가 칼부림을 해서 작은놈이 형을 죽이고 감방에 가 있으니. 돈은 너무 많아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지.”

그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는데 회장님이 나를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박인옥 씨.”

깜짝 놀랐습니다. 제 이름을 불러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지난번 읽어주었던 소설 있잖은가? 폭풍의 언덕. 그 남자 주인공 이름이 뭐였지?”

히스클리프예요.”

그래, 그 주인공처럼 나의 인생도 배신과 복수의 연속이었어. 잘못한 일도 많았고, 못된 놈들도 많이 만났지.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억울한 인생을 살았단 생각이 들어. 그래서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세상에 대해 반성도 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싶소. 그걸 박 여사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려야죠.”

박 여사 글솜씨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소. 우리 상부상조합시다. 인옥 씨는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니 내 자서전을 써 주면 남편 수술비는 내가 부담하리다.”

마음속에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으나 입 밖에 나온 말은 간사스러웠습니다.

아휴. 제가 경험도 없고 능력도 안 되는데요.”

걱정 말아요. 내가 구술해 주는 말을 문장으로 다듬어주면 되오.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은 남기고 싶소. 날 도와주시오.”

제 손을 잡고 쳐다보는 장 회장의 눈빛은 간절했습니다.

 

마련해 준 노트북과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다음 날 아침부터 책 읽어주는 일 대신 회장님의 기억을 더듬는 구술이 진행되었어요. 오전에 구술을 듣고 그가 낮잠을 자는 사이 타이핑 해서 오후에 보여 의견을 듣고 귀가해서 고치고 저장해 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구술을 들으면서 그의 질풍노도의 시간은 폭풍 속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올 때의 억울한 심정을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 주시오. 빨갱이들의 만행이 내 인생의 좌표를 바꿔 놓았으깨니.”

그는 열여덟 살 되던 해 북녘땅에서 해방을 맞이했지요. 3·8 이북에 공산주의 정권이 득세하자 부친은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려 처형당했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혈혈단신 빈손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건설 현장으로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공산당 빨갱이를 잡는다는 모집 공고를 보고 서북청년단 일원이 되어 제주도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경찰에 배치되어 매일 상부의 지시에 따라 빨갱이 소탕 작전에 나섰답니다. 그는 그 시절의 영웅담을 평소와는 달리 이북 사투리까지 써가며 생생하게 구술했습니다. 원수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산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그의 말엔 아직도 분통함이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제 형편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두둑하게 받은 계약금으로 장기 제공자가 생기면 당장 수술하겠다고 의사 선생님께 부탁도 했지요. 병실도 특실로 옮겼습니다. 안정을 취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서전을 다듬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쪽 구석에 노트북을 가져다 놓고 남편이 자는 틈을 타 작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업하다 잠시 밖에 다녀와 보니 남편이 침상에 일어나 앉았는데 얼굴빛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당신 장충삼일 어떻게 알아?”

노트북을 살펴봤던 모양입니다.

왜 남의 것을 훔쳐보고 그래요.”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소리부터 질러 놓고 보니 거짓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어요. 환자 앞에서 남을 간병 하고 있다는 말은 차마 얘기할 수 없었으니까요.

말 못 했는데 사실은 그 분 자서전을 써주고 있어요.”

그놈이 어떤 사람인 줄 알기나 해?”

남편이 얼굴을 붉히며 적개심을 드러냈을 때 전 영문을 몰라 얼굴만 멀뚱 하게 쳐다봤습니다.

그놈 서청으로 와서 우리 마을 사람 숱하게 죽인 살인마야. 당신 시아버지, 행방도 모르는 우리 아버지를 끌고 간 원수 놈이란 말이야.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직접 물어봐. 서하리 제삿집 사건이 뭐냐고?”

그제야 남편의 고향이 제주도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모친은 어린 딸과 핏덩이를 안고 육지로 도피해서 무진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은 생각이 났습니다. 길길이 날뛰는 남편을 진정시키고 집에 돌아와서 장충삼이란 인물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했습니다.

장충삼은 평안남도 용강 출생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기록은 없었고 학력은 oo 대 경영대학원 수료, oo당 재정위원 등 정치적 이력들이 즐비했고, 용강건설을 창립하여 레미콘, , 주택 등 건축 자회사를 여럿 두어 그룹 회장으로 있으며 14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뇌물사건 연루, 장충삼 뇌물혐의로 구속 등의 신문기사 제목이 뒤를 이었습니다.

 

남편과 직접 연관된 사람인 걸 알게 된 이후로 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전 생각했지요.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대필은 내 직업이다. 거기에 사심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이건 진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 남편의 수술을 포기하고 간병 일을 그만두어야 했으니까요.

헌데 사심을 품은 건 장충삼 회장님이었습니다.

사업 시작과 성공했던 기간의 구술내용을 검토하고 저녁을 끝낸 후 샤워를 할 때였어요. 그가 욕실에 들어오기 전 전 먼저 들어가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아놓고 물소 가죽이 깔린 침대를 씻어놓곤 하지요. 그리고 십여 분 후 그가 욕조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부축하여 침대위에 눕히는데 그날은 이상했어요. 그는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흥분하고 있었고 욕조에서 나오면서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요. 그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끼고 부축하는데 손으로 툭 하고 제 가슴을 쳤어요. 실수이겠거니 하고 모른 척했는데 그의 양물이 발기했더라고요. 전에는 보지 못하던 광경이었어요. 침대에 눕히고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덮었어요.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어요. 샤워기로 그의 몸에 물을 뿌리며 비누칠을 하는데 그가 신음처럼 숨을 내뿜더니 입을 열었어요.

구술을 시작하면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박 여사 같은 사람 만나면 다시 연애도 하고 싶고.”

그러면서 그는 왼손을 수건 속으로 넣어 수음을 시작했습니다.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제야 그간 간병인들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염치없는 뻔뻔한 늙은이하고는. 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의 성욕을 제어할 의도로 말입니다.

장충삼 회장님! 제주도 서하리 제삿집 사건 아시죠?”

그는 동작을 멈추고 멀뚱하게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그 마을 사람들을 체포하고 지서로 데리고 갔는데 그 사람들은 그 후 행방불명되었어요. 그들을 어떻게 하셨죠?”

제 의도는 적중했어요. 그는 눈을 감고 떨리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내가 구술도 안 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어?”

제 남편이 그 유가족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장 회장은 숨을 몰아쉬더니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쇼크가 오려는 것을 직감하고, 방으로 가서 비상약을 가져다 먹이고 가슴을 천천히 마사지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장 비서가 왔고, 전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도 미리 짐작하고 미안하다는 말로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한 환자의 수치 맞는 장기가 있어서 남편은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그 정도의 돈은 평생을 괴롭힌 남편의 상처에 비하면 턱도 없이 적은 액수니까요.

그런데 슬픔은 방심하는 사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는데 남편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십여 일을 견디다가 결국 세상과 이별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살리겠다고 약속했던 제 말은 거짓이 되어 버렸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렇게 경황없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자식들이 일상에 복귀하자 저도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보험회사와 요양병원 등에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을 때에 장 비서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때서야 장례식 때 용강그룹 장충삼 회장 이름으로 보낸 조화와 장 비서가 조문을 와서 일이 끝나면 회장님이 한 번 뵙자고 한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큰일 치러서 상처가 깊을 텐데 어찌 괜찮소?”

회장님은 마치 자신 때문에 남편이 죽은 것처럼 죄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위로를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악착같이 살아야지요. 여러모로 걱정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박 여사의 근황을 들으면서 나도 많이 반성하고 있소. 오래 살아야 할 사람들은 일찍 가고 죄 많은 나 같은 사람은 안 죽으려 연명하고 있으니. 이제 나도 얼마 남지 않았소. 가기 전에 다 털어놓고 회개하고 싶소. 그것이 나로 하여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속죄하는 길이고, 사회 정화에도 일조하는 일이라 생각하오.”

그때 저를 바라보는 장 회장님의 표정은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좀 도와주시오 박 여사.”

부들부들 떨며 내민 그의 왼팔을 두 손으로 잡았을 때, 그간 기력이 많이 쇠잔해 졌음을 느꼈습니다.

자서전 쓰는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변화라면 샤워는 장 비서가 맡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서하리 사건에 대해서 털어놓았습니다.

그 당시는 미군정 시대였어. 미국이 이승만을 내세워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고 할 때인데 제주도에서 남로당 일파의 선동과 방해로 선거를 못 치르게 되었지. 빨갱이를 소탕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들은 산으로 숨어서 저항했어. 공비토벌 결과가 지지부진하자 상부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어. 그와 동시에 서청대원들 중 전공이 많은 자는 경찰로 특채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지.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준 거지. 그런데 내가 서하리 관할 지역인 애월 지서에 배치받아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폭도가 나타났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무장하고 동료 대원과 산간 마을 서하리로 가서 확인해보니 어느 집에 제사를 지내는데 폭도들이 와서 밥이랑 제물들을 모두 가져갔다는 거야. 우린 그들과 내통하고서 음식물을 제공했다고 판단했지. 거기 모인 사람들 신원을 확인하는데 남편이 행불인 젊은 여자가 있었어. 우린 그 여자와 제삿집 주인과 체포에 거세게 항의하는 사람 등 셋을 포승줄에 묶어 지서로 호송했어. 가는 도중에 갑자기 가운데 놈이 똥이 마렵다며 잠시 포승줄을 풀어 달라고 했어. 동료 대원은 안 된다고 했지만 난 순진하게 풀어줬지. 달이 밝은 밤이었지. 그놈은 길가 밭담 안으로 들어갔고, 한 놈은 밭담 앞에서 허리춤을 내리고 소변을 보았고 젊은 처자는 벌벌 떨며 서 있었어. 난 조금 떨어져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는데 똥 싸러 간 놈이 튀어하는 신호에 오줌 싸던 놈이 허리춤을 잡고 달아났어. 동료와 난 잽싸게 총을 들어 쏘았어. 두 놈이 쓰러지자 젊은 여자는 겁에 질려서 꼼짝 못 하고 있었지. 헌데 동료 정 가는 그 여자를 유채밭 안으로 끌고 가 욕정을 채웠어. 총 맞은 사람을 확인했는데 한 놈은 머리에 한 놈은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즉사했더군. 그 모습을 보자 온몸이 떨려서 담배만 빨았어. 헌데 잠시 후 다시 총소리가 났는데... 후한을 두려워한 정 가의 짓이었어.”

그는 생생하게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남편도 보지 못한 시아버님이 있었겠지만 전 덤덤하게 기록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지서로 가서 삽과 곡괭이를 가져와 아무도 몰래 그들을 묻었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평생 한을 안고 살다 갔습니다. 지금이라도 돌려주세요.”

회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했습니다.

그래 갑시다.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기억을 더듬으면 찾을 수 있을 거요. 헌데 인철이한테는 그냥 여행 가는 것으로만 해줘요.”

 

이런 사실을 시누이한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회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행하여 제주도로 갔습니다. 어머님 유골을 고향에 모시고 간 것이 십 년이 채 안 되었는데 서하리는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프기 전에는 가끔 들렀다는 회장님도 도시처럼 변해가는 모습에 놀라워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농원으로 변해 있었으나 주변의 큰 나무와 삿갓처럼 생긴 돌 바위 등을 유추하며 장 회장님은 유골이 묻힌 곳을 가리켰습니다.

농원 주인의 허락을 얻어 그날 밤 몰래 포클레인을 이용해 세 구의 유골을 발굴해냈습니다. 누님은 누가 들을까 봐 손등으로 입을 막고 울었지만 전 남편 생각에 말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회장님도 휠체어에 기댄 채 지켜보다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훔치더군요.

내가 회개한다고 용서가 될까?”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비밀은 없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유골의 감정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지역신문에 서하리 사건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특종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유족들과 시누이가 인터뷰했고 장 회장님의 이름이 이니셜로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회장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대개가 노회한 정객들과 가슴에 훈장을 달고 다니는 퇴역군인들이었고, 게 중에는 TV에서 가끔 봤던 이름 있는 정치인들도 있었습니다. 들리는 대화 내용과 상기된 표정으로 보아 그들은 문병을 온 것이 아니라 회장님을 힐난하거나 위협하는 것 같았습니다.

손님 치례를 마치고 퇴근 인사하러 회장님 방에 들어간 날이었습니다.

괜히 손님 불러들여 부산스럽게 해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괜한 일을 저질러서 회장님을 욕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러는 이유가 있어. 장 비서에게 입단속을 시켰는데 자서전 어쩌고 하는 바람에 지레 겁먹고 저러는 거야. 헌데 아까 정대찬 봤지? 대통령 후보로 유력한 인물 말이야?”

, TV에서 본 것보다 훨씬 젊은데요?”

사람은 속과 겉이 다른 거야. 그 사람과 난 애증 관계가 많거든. 같은 이북 출신이고 정치도 함께 했고 그 사람 때문에 감방에도 갔지. 헌데 그 사람이 제일 속 탈 거야. 왠지 알아?”

저는 무슨 소리가 이어질까 궁금해서 회장님 입만 쳐다봤습니다.

서하리 사건 때 그 동료가 정대찬이거든.”

전 못들을 이야길 들은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후로 회장님은 주로 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정치인들과의 인연을 구술했습니다. 당신이 뇌물사건으로 전과자가 되었으나 그것은 정치적인 야합의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서류와 녹취록 등을 보여주며 진상을 얘기했습니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날, 전 이제 일을 그만둬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회장님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 당신의 곁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어요. 회장님도 후련했는지 그날은 수고했다며 제게도 그 비싼 와인을 한 잔 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오후. 장 비서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방 출장을 가 있는데 사정이 생겨서 밤늦게나 도착하게 될 것 같으니 바쁜 일이 있으면 먼저 퇴근하라고 했습니다. 허나 딱히 할 일도 없고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요.

회장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면서 존경하게 됐고, 애련의 감정이라 할까요. 한편으론 측은하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식사 후 저는 아무 생각 없이 회장님에게 샤워할 것인가 물었고 그래 주면 고맙겠다고 했습니다. 수증기가 안개처럼 뽀얗게 거울을 덮을 즈음 회장님은 수건으로 앞을 가린 채 절뚝이며 들어오면서 말씀했습니다.

출판사에 몰래 넘겼지만, 인철이가 곧 찾아낼 거야. 지금은 나한테 충성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한패야.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지 않으면 사업이나 정치가 돌아가지 않아.”

참 제목은 생각 해보셨어요? 출판사에서 독촉 전화가 여러 번 왔어요.”

회장님은 탕 안의 따뜻한 물속에 깊숙이 담그고 있던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박 여사가 말한 폭풍의 숲에서 길을 잃다이상 좋은 걸 생각할 수 없어. 그걸로 해요.”

.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회장님은 침상에 누워 눈을 감은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날은 정성 들여 회장님을 씻겨드리고 안방으로 모셔드렸습니다.

회장님께 간식과 와인 한 잔을 가져다가 드리고 나서 전 욕실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습니다. 거기서 샤워를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희열이 피어오름을 느꼈습니다. 해냈다는 성취감, 두둑하게 받은 원고료, 그리고 책이 출간되고 나서 나타날 반응 등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엷은 흥분까지 느꼈습니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고, 적당히 따스한 물줄기가 살갗에 부딪히는 쾌감을 즐기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샤워 꼭지를 잠그고 입구 쪽을 보니 열려있는 문 앞에 잠옷 차림의 회장님이 휠체어에 앉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회장님하고 소리쳤지요.

그런데 회장님은 피하기는커녕 애절하게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난 이승에서 할 일을 다 한 것 같소. 이제 곧 죽어도 여한이 없소.”

순간 지난번 일로 진단을 받았을 때 심근 경색 증세까지 있어서 격한 감정은 위험하다는 장비서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회장님. 이러시면 위험해요.”

인옥 씨 사랑하오.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내 마음이 떨렸소. 허나 당신은 유부녀였고 늙은이가 주책이라 할까 봐 말을 못 했소. 오늘이 아니면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소. 내 마음을 받아주시오.”

그러면서 그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밀었습니다. 심장은 떨렸고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성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지가 정말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회장님은 이미 결연한 결심을 했다고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난 지금도 그들의 압박을 견디기 힘드오. 책이 출간되고 나서 고통을 받느니 단 10분만 이라도 당신 품에서 행복을 느끼며 가고 싶소.”

그렇게 두려우시면 책 제작을 중단시키면 되잖습니까?”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그건 나의 반성문이고, 더러운 곳을 씻을 정화수요. 내 운명은 내가 잘 아오. 오래 전부터 죽음의 방법을 생각해 왔소. 제발 도와주시오.”

회장님의 진심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끌고 안방으로 가 회장님의 가운을 벗기고 자리에 눕혔습니다. 그는 미리 약까지 먹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병든 노인네의 그것이 그렇게 부풀어 오를 수가 없지요. 그의 몸을 정성껏 애무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신음소리 내며 희열을 느낄 때 그를 내 몸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몸을 움직이자 그의 호흡은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 차마 마주 바라볼 수 없어 눈을 감았으나 눈물은 하염없이 몸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어느 순간 짧은 탄성이 들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번지면서 숨이 차츰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식어가는 그의 몸을 한참 부둥켜안고 울다가 젖은 수건을 가져다 그의 몸을 깨끗하게 닦고 나서 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장인철은 생전 회장님 앞에서 보이던 모습과는 사뭇 달리 시신을 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비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 전화를 한 후 심각한 얼굴로 제게 다가와 냉갈령을 부렸습니다.

자서전은 출판되지 않을 겁니다. 회장님께 들었던 모든 말은 기억에서 지워버리세요. 그걸 발설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장례식은 우리가 알아서 치를 테니까 다신 얼씬하지 마세요.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며칠을 앓아누웠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이 스스로 택하신 운명을 생각한다면 자서전을 출판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따로 저장해 둔 원고로 다른 출판사를 찾아 제작하여 회장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세상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찾는 사람이 많았지만 전 산속의 절을 찾아 남편과 회장님의 명복을 빌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절집 생활도 속세와 완전절연할 수는 없어서, 가끔 읍내 오일장에 다녔는데 거기서 발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감시당하는 낌새를 느끼고 한밤중 거처를 옮기려 차를 몰고 나오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중상을 입고 석 달을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차를 받은 사람은 실수라고 했지만 그건 저를 죽이기 위한 어떤 세력의 치밀한 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이 돌아온 즉시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했지만, 장인철은 저를 살인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발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갇힌 몸이 되었지만 제가 한 행동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비록 짧은 인연에 제 사랑이 미진했을진 몰라도 한 인간에게 사랑받았던 건 진실입니다.

제 말을 입증하기 위하여 인옥*충삼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반지의 보관처를 따로 적어 알리오니 찾아보시고, 부디 선처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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