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정원joon

예술정원을 산책하며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

시를 읽는 벤치 39

명옥헌

명옥헌 - 한 시인이 도착했을 때 나비 두 마리가 놀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여자는 눈이 멀었고 딸은 얼굴이 꽃같이 예쁘다고 했다. 석미화 하지를 훨씬 넘어서였다. 긴 눈썹 그림자를 두른 때문 일까 연못에는 꽃나무의 구불거림이 흘러넘쳤다 바람이 없으면 좋을까 꽃가지에서 빛을 뽑아내는 여자의 눈빛이 아물거렸다 낮달에서 부서지는 딸은 나비를 쫓으며 놀고 있었다 여자와 딸이 서로 간질이는지 간지럼나무는 물가로 들어눕고 있었다 물속으로 멀어지는 구름, 주름 접힌 꽃들, 실가지는 길을 자주 바꿨다, 붉은 꽃그늘이 깔리고, 여자와 딸은 싸온 도시락을 언 제쯤 먹을까, 바람이 불어오면 더 좋을까 물소리가 물소 리와 부딪쳤다 --------

십일월

2023년 11월에 출간된 김이듬 시인 시집 십일월 김이듬 차라리 저수지에 몸을 던지겠어 마음이 지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씨앗의 기억으로 자란다면 나는 떠날 수 있기만을 꿈꾸었다 뿌리를 뻗어 이동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잎을 통해 햇살을 열망했던 나무가 셀 수 없는 잎사귀들을 멀리 보낸다 추락하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활엽수 같아서 손바닥만한 마음을 가졌구나 셀 수 없이 많은 알 수 없이 좀스러운 매년 나는 환희의 나무에 관하여 쓰려고 했으나 몇 번이나 실패했다 이제 내 마음은 낙엽 되어 바스러진다 말라비틀어진 채 나무에 붙어 있기가 부담스러웠을 것 이다 처음 날아본다 나무는 낙엽의 형식으로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갈 수 있다 환희와 슬픔이 섞인 모순적인 마음으로 낙엽은 나뭇잎의 본색이다 겉보기만..

비문

비문 김명지 지금은 그 곳엔 제 몸에 불을 지르며 피어나는 꽃들로 눈길 닿는 곳마다 난리가 났을 테지 도솔암 오르는 길목 다투듯 키를 맞춘 사랑들이 무더기로 신열을 고하고 있을 테지 비문을 몸속 깊숙이 품은 마애불이 지긋한 눈빛으로 그 사랑을 독려하고 있을 터 우거에 홀로 앉아 먼 그곳 갸륵한 꽃빛을 그리워하며 빈 하늘에 붉은 꽃 한송이 그려 넣을 수 밖에 무릇, 세상 모든 사랑은 붉어라 --- --- 비문= 비밀문서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 고창 선운사 도솔암 오르는 양쪽 길가에는 상사화(꽃무릇)가 지천으로 붉게 핀다. 도솔암 암자 옆 커다란 절벽에는 누군가 조각한 마애불상이 있다. 마애불상 품안에 비밀문서가 있다고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불상 품을 파헤친 자가 있다고 한다.

돌고래 선언

돌고래 선언 최지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 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 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 져 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 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 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 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 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善)이라 부르자. 죽음이 신 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 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의 이름으로 김승립 우리가 사랑을 꿈꾸지 않더라도 비는 내리지 우리가 사랑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꽃은 피고 바람은 발걸음을 살금살금 옮겨놓지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더라도 있는 자리에서 사물들은 제 힘껏 삶을 살아나가지 그러나 친구여, 세상 쓸쓸함과 고뇌, 안개 낀 날의 방황 갯벌에 처박혀 있는 폐선과도 같이 외홀로 상처 입는 사람들 우리가 어깨 겯고 볼 부비며 허름한 사랑 한 조각 나눠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씩 추위를 벗으리 비는 아주 맛있게 내리고 꽃들은 황홀하게 비의 숨결에 취하며 바람은 크고 따뜻한 손길로 모든 것을 쓰다듬으리 친구여,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를 불러준다면

벚꽃 엔딩

벚꽃 엔딩 이송우 예술은 배고풀 수 있어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조언하고 오는 밤 벚꽃이 진다 작은 꽃잎은 봄을 하얗게 웃어주곤 덧없이 진다 덧없다는 말은 이 시절을 매년 준비한 벚꽃의 정성을 쉽게 잊은 말이다 어떤 벚나무는 내 생애보다 더 오래 피고 졌으리라 한 번도 피고 지지 못한 나의 시는 누구를 위로한 것일까 한 잎 벚꽃이 진다

개기월식

개기월식 안현미 사내의 그림자 속에 여자는 서있다 여자의 울음은 누군가의 고독을 적어놓은 파피루스에 덧쓰는 밀서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울음인지 밀서인지 고독인지 피 아졸라의 음악처럼 외로운 것인지 산사나무 꽃그늘처 럼 슬픈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 그게 다인지 여 자는 눈,코,입이 다 사라진 사내의 그림자 속에서 사과 를 베어 먹듯 사랑을 사랑이라고만 말하자,고 중얼거 리며 사내의 눈,코,입을 다 베어 먹고 마침내는 그림자 까지 알뜰하게 다 베어 먹고 유쾌하게 사과의 검은 씨 를 뱉듯 사내를 뱉는다.